〈 107화 〉 대동력 9,994년 5월 33일 (1)
* * *
오전 0시, 율도 청북도 일대
김사미 일당에게 붙잡힌 예린과 정국은 청북도 모처의 인적이 드믄 곳에 위치한 어느 집으로 끌려갔다.
그곳은 율도 내에 숨어있는 공물론자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다.
일당들은 두 사람을 창문도 없는 창고 같은 방에 가두었다.
“이 년놈들 도망 못 가게 홀딱 벗겨서 묶어놔!”
놈들은 거칠게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변태새끼들아!”
예린이 놀라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이 계속 총으로 위협하고 있어 함부로 저항할 수도 없었다.
정국은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이놈들! 대체 뭐하는 놈들이기에 우리에게 이리 모욕을 주는 것이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사미가 대답했다.
“우리? 수천 년간 너희 황족과 양반 권세가들에게 핍박당하고 살아온 인민들이다.”
“그럼 주나라의 백성들이었단 말이냐? 주나라 백성들이 어찌 율도까지 와서 이런 패악질을 벌인단 말이냐?”
“패악질이 아니라, 혁명을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다.”
“뭐라고? 혁명?”
“인민들을 위한 새나라 창건을 위해 네놈이 필요하다. 공연히 까불다가 아까운 목숨 잃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너라.”
“너희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 하나만 필요한 거 아닌가? 그럼 내가 순순히 따라갈 테니 예린이는 풀어줘.”
“흥, 어림없는 소리.”
두 사람의 옷이 모두 찢어진 채 벗겨졌다.
예린은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손으로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리려 할 때,
“벗겼으면 이것들 도로 묶어!”
김사미의 명을 받은 동지들이 그들의 손을 등 뒤로 잡아당겨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야, 아파, 아프다고! 살살 좀 해!”
예린은 소리를 지르며 전라의 몸을 흔들었다.
군살 없이 날씬한 허리에 수련으로 단련된 탄탄한 허벅지,
흐트러진 검은 머릿결 사이로 그녀의 젖가슴이 좌우로 흔들렸다.
공물론자 놈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탐욕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벗은 몸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전 3시, 율도 무수막 고원 남쪽 국경지대
파림의 첫 번째 공세가 있은 직후, 최기의 대대가 있는 토성으로 연대와 사단 등 상급 부대의 지원 병력들이 속속 도착했다.
적의 움직임이 멈춘 사이, 최기는 무너진 진지를 보수하고 토성 전방에 윤형철조망 등 장애물을 추가 설치했다.
기존에 1개 포대 6문의 대포만 배치되었던 포진지에는 추가로 2개의 포대가 더 배치되었다. 이제 토성 위의 평사포는 모두 18문이나 되었다.
첫 번째 공세에서 큰 희생만 치르고 철수한 후, 파림의 포각수들은 독기를 바짝 품은 듯 병력들을 더 충원했다.
최기의 대대 전방에 집결해 있는 적의 병력들은 아직 해가 있는 동안 눈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어림잡아 5천은 넘어 보였다.
밤이 되자 최기는 각 진지의 병력들을 돌아가며 경계 근무를 서게 하고 나머지는 현 위치에서 가면을 취하게 했다.
병력들을 쉬게 했지만 그는 잠들 수 없었다. 여전히 토성 여기저기를 순시하며 적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새롭게 배치된 평사포들의 위치와 사격 방향 등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연대에서 하달된 전령문입니다.”
작전 무관이 달려와 전령이 가지고 온 문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아군 정찰대에 의해 어젯밤사이 파림의 후방으로부터 중화기를 실은 것으로 보이는 마차들이 적 진영에 도착한 것이 확인됨.]
중화기라면 평사포 등 대포일 가능성이 높았다.
파림은 화약 및 총포 등 화기 제조 능력이 썩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각수들의 성정이 두억시니 만큼이나 때리고 죽이고 부수는 것에만 관심 있지, 무언가를 만들고 키우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던 탓이다.
몇 십 년 전 이 근방 무수막 고원 지대에서 벌어진 국지전 때에도 율도군은 평사포, 야포, 뇌홍식 강선소총, 산탄총 등 각종 화기들을 사용했지만, 파림의 포각수들은 여전히 나무로 만든 투석기에 돌을 얹어 날려 보내거나 심지어 창던지는 투창병, 돌 던지는 투석병까지 운용했었다.
‘그 때 저들은 우리 군과 근접전도 벌여보지 못하고 화포에 모두 쓸려나가 버렸었지. 그 이후로 자극받아 화약 무기를 개발한건가?’
야심한 밤중이라 적진에 화포가 배치되어 있는지는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펑! 펑! 펑! 펑!
밤의 적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적의 포탄들이 토성을 향해 날아왔다.
파림군의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율도군 토성 여기저기가 포탄에 맞아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포를 쏠 때마다 포구에서 화약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대응포격 실시!”
최기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율도군 포병들은 포구의 불빛으로 확인된 적의 포진을 향해 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쏘는 포탄은 도화선이 달린 파열탄이었다.
쾅! 쾅! 쾅!
파림군 포진 머리 위로 날아간 파열탄들이 연이어 폭발했다. 지축을 뒤흔드는 파열탄의 폭발음은 율도군의 토성까지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밤인지라 포탄이 적의 포진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명확하게 알 길은 없었다.
다만 쌍방 간의 포격이 계속될수록 파림군의 진영에서는 더 이상 포를 쏘지 않고 침묵하는 포진지들이 하나 둘씩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율도군의 토성 위로도 적포탄이 날아들었다. 일부 병사들이 날아오는 포탄에 맞아 다리가 잘리고 머리가 날아갔다.
아직 적 보병의 이동은 없었다.
“최소한의 경계 병력만 남기고 모든 보병들을 토성 뒤로 대기시키도록”
최기의 명령이 하달되고, 병력들은 일사분란하게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최기는 아군 이동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대대 관측소를 나섰다.
얼마쯤 갔을 때, 토성 위에 박혀있는 적의 원형 포탄 하나가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붉은 피가 그대로 묻어있는 것이, 토성 위에 있던 병사의 몸을 뚫고 땅바닥에 처박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원형 포탄의 크기는 무언가 모르게 그의 눈에 익숙했다.
그는 즉시 병사로 하여금 대대 관측소에서 줄자를 가져오게 했다.
적의 포탄을 줄자로 크기를 재어본 최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천제국이 사용하고 있는 포와 구경이 일치하는 크기가 아닌가? 그럼, 파림의 화포가 천제국 화포를 모방해 제작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지금 파림군이 천제국의 화포를 가지고 있다는······?’
그 때, 낮에 본 파림의 포각수들과 함께 적정을 살피던 정체 모를 도깨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의혹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전 8시, 대월국 서래번 일대
기습을 받은 천제국군은 흥원이 있는 서쪽을 향해 더 빠르게 이동했다.
율도군 기병들은 계속 천제국군 행렬의 측면과 후위를 쉬지 않고 들이치며 마치 사냥하듯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동금의 의지는 확고했다. 현 위치에서 율도군과 싸우기보다는, 피해를 입더라도 전초기지를 세울 곳까지 이동해서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주력이라 할 수 없는 부대들, 두두리와 혼혈 종족들로 구성된 부락민군들을 후위에 남겨 율도군을 막게 했다.
그들을 희생시켜 시간을 벌 셈이었다.
율도군 기병들은 흥원 방향의 벌판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쉬운 먹잇감을 그냥 지나쳐 가지 않았다.
방진을 치고 있는 부락민군들을, 수천의 율도군 기병들이 포위했다.
그들은 적 진영을 둘러싸고 빠르게 말을 달리며, 총과 활로 고정된 표적에 사격 연습이라도 하듯 하나씩 하나씩 적을 쓰러뜨렸다.
율도군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쓰러지는 천제국군의 수는 늘어났고, 방진의 두께도 얇아지고 있었다.
부락민군들은 자신들의 진영을 빙빙 돌고 있는 검은 갑주의 기병들을 보고 미칠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무리의 기병들이 방진을 향해 달려왔다.
그들은 총이나 활도, 창이나 칼도 들고 있지 않았다.
기병들이 방진으로부터 30보까지 다가왔을 때,
“모두 박살내라!”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주먹만 한 검은색 물체를 방진을 향해 집어 던졌다.
동그란 공 같은 물체가 부락민군 사이로 떨어져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도화선이나 불타는 심지 같은 건 없었다. 부락민군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모양의 폭발물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 때였다.
쾅! 쾅! 쾅!
율도군 기병들이 던진 물체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이 던진 것은 신관장치가 달린 신형 수류탄이었다.
수류탄 폭발에 휘말린 부락민들의 갈가리 찢겨진 몸뚱이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방진은 일순간에 모두 무너졌고, 사방은 비명과 신음소리, 시커먼 화약 폭발 연기로 가득했다.
“모두 박살내라!”
“모두 박살내라!”
살아있는 부락민군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폭발 연기 너머로 그보다 더 시커먼 검은 갑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는 물론, 말에까지 입힌 율도의 철기병들이 자신들을 향해 장창을 겨누고 무서운 속도로 말을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에게 있어 삶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살아있는 자도, 도망친 자도 없었다.
방진을 이루고 있던 모든 천제국군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이들을 전멸시킨 부대는 2군단 예하 5기동사단의 기병들이었다.
율도군 기병 무사들은 적의 몸에 박힌 화살들 중에서 아직 쓸 수 있는 성한 것들을 골라 수거했다.
적의 병기나 갑주들은 물론 소지품들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을 거두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율도군은 민간인에 대한 약탈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적의 물건을 노획해 전리품으로 삼는 일에는 관대했다. 전시에 그 정도쯤의 일은 사기 진작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전멸시킨 적들 대부분은 부락민군들이었다. 천제국에서도 하층민들을 징집해 만든 부대이니만큼 값나가는 물건을 지닌 자는 많지 않았다.
전장 정리가 진행되는 동안, 군단 지휘부와 잠시 떨어져 5기동사단과 함께 이동하고 있던 영록은 말에서 내려 전투가 끝난 벌판을 둘러보고 있었다.
피 냄새와 화약 냄새, 죽은 자에게서 나는 역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그 많던 적들을 모두 죽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구나! 사람 목숨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연약한 거였나? 참으로 허무한거 같구나......’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강운예 관장님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닫고 오라고 하신 걸까? 아...... 나중 돌아가게 되면, 전쟁 시뮬 게임 같은 건 두 번 다시 못 할 거 같아......’
전쟁의 실상은 게임과 너무나 다르다는 말이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그 때였다.
“와아아아악!!!”
가까운 곳에서 짐승의 포효와 같은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영록이 놀라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거대한 몸집에 두꺼운 갑주를 입고 있는 두억시니 하나가 적들의 시체에 박힌 화살들을 수거하던 율도군 기병의 몸에 커다란 도끼를 박아 넣고 있었다.
두억시니의 갑주 여기저기에도 화살이 박혀 있었다. 부락민군들의 시체 사이에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다가 율도군 기병이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뽑으려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기습했던 것이다.
“컥, 컥!”
도끼는 갑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사의 오른쪽 어깨뼈를 박살내어 버렸다.
두억시니는 그를 발로 걷어차 쓰러트린 후, 곁에 있는 또 다른 기병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무사는 급히 군도를 뽑아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군도를 칼집에서 다 뽑기도 전 도끼가 날아왔다. 가까스로 막아내기는 했지만 그 충격에 저만치 날아가고야 말았다.
“크와악!”
도망칠 방향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두억시니가 옆에 있던 영록과 눈이 딱 마주쳤다.
다른 무사들에 비해 체구가 작은 영록을 본 두억시니 놈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영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기 싫으면 비켜라, 율도 애송이놈!”
두억시가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영록의 두 손이 양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철편을 잡아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