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대동력 9,994년 5월 3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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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3시, 대월국 은허 남쪽 악뢰관
성산번군이 있는 악뢰관으로 돌아온 심운보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날밤을 지새우며 고민했다.
그래봐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 년, 그 아리랑 년을 살려두었던 것이 내 패착이다.’
심운보는 어제 자신의 발 앞에 여개의 잘린 머리를 던지던 율도의 흑영단원 유경패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와서 후회해도 너무 늦은 상태였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의자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구천락이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들을 보고 하기 위해서였다.
●흥원번이 율도군에게 점령당했다.
●흥원번을 점령하고 있던 통요번군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통요번주 조암천은 흥원 공녀 진미령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흥원성 일대에 대규모 병영 공사가 진행 중이다.
●율도군은 태진의 국경에서부터 율도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흥원번이 율도군에 점령당한 이후, 천제국군이 흥원번을 향해 이동 중이다.
●천제국에서 또 한 번 대규모 원정군이 편성되고 있다.
구천락의 보고를 하나씩 들을 때마다, 심운보의 표정은 계속 어두워지고 있었다.
“......국왕과 국왕군은 아직 호문의 환강산성에 머물러 있으며,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왕군 내에, 우리와 내통하던 귀족들과는 여전히 연락이 닿고 있는가?”
“천제국군이 당도한 이후 그들과의 모든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습니다.”
심운보는 한탄어린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 때, 구천락이 아직 보고가 다 끝나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하옵고, 각하.”
“아직 더 보고할 게 남았더냐?”
“명천백의 진영에 있는 곤마로부터 연락이 당도했습니다.”
“곤마? 그가 아직 잡히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냐?”
심운보는 지난 날 율도 4군단이 영록과 예린을 구출하던 날 팔 한쪽을 잘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기억났다.
“네, 아직 신분을 들키지 않고 숨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가 뭐라도 알아낸 것이 있다 하더냐?”
“명천백이 어제 번주들과의 회의에서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결정한 내용을 엿들었다 합니다.”
“뜸 들이지 말고 속히 말해보라. 명천백과 다른 번주 놈들이 앞으로 어찌 하겠다 했다더냐?”
“그들 모두, 앞으로 율도와 손을 잡는다 합니다.”
“뭐?”
순간, 유경패의 얼굴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오후 4시, 율도 청북도 외곽지역 일대
예린과 정국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그들을 쫓아온 김사미와 그의 동지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총을 들고 그들이 가는 길을 막아선 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일반 수석식 소총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널리 이용되는 무기였다.
“둘 다 말에서 내려, 빨리!”
두건을 쓰고 있는 괴한들이 총구를 겨누고 위협하자, 결국 두 사람은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무예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총을 들고 있는 십 수 명의 괴한들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말에서 내리자, 괴한들은 두 사람의 손을 뒤로 가게 해서 포박하기 시작했다.
정국이 소리쳤다.
“너희는 대체 누구냐?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잘 알지, 그러니까 여기까지 잡으러 쫓아 온 거지.”
김사미의 말에 정국이 더욱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런데도 감히 이런 무례를 범한다는 것이냐? 너희 모두 살고 싶지 않은 것이냐?”
“닥쳐라! 인민은 너희 황실의 노예가 아니다! 너희들이 감히 우리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도 이미 다 끝났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희는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년놈들 떠들지 못하게 입에 재갈 물려!”
예린과 정국의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
김사미와 동지들은 그들에게 장옷을 입혀 몸을 얼굴과 몸을 가리고, 말들 가운데에 세워 둘러싸고 그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예린과 정국 모두, 이들이 자신들을 찾으러 온 율도나 주나라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후 7시, 대월국 서래번 일대
천제국군들은 흥원으로부터 150리 (약 60km) 떨어진 곳을 행군하고 있었다.
동금이 받은 명령은 흥원으로부터 100리 (약 40km) 떨어진 지점에 전초기지를 마련하고 천제 정선교가 이끌고 오는 지원군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천제가 대월국에 당도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일은 6월 초. 목표지점에 당도해 천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완료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백사의 건의에도 기병들을 기다리지 않고 진군을 서두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행군열의 좌우측에 많은 산병들을 내보내어 주변을 척후하고 본대를 엄호하도록 하고 있었다.
좌측 숲속에 산병으로 나가 있는 부대는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진 정예 보병들이었다. 칼과 도끼 등 근접 무기들을 주로 가지고 있었지만 원거리 사격과 본대에 위험을 알릴 목적으로 수석식 소총을 가진 병사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이들은 10여명 단위로 활동하고 있었다.
기나긴 행군과 정찰에 지쳤는지, 몇몇 두억시니들이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행군만 하다 다 끝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맞다. 너무 바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나 하니, 약탈할 시간도, 여자들을 붙잡아 와 재미 볼 시간도 없다. 너무 재미없고 따분하다.”
“이 도깨비 나라 처음 들어올 때 그 때 한번 마을 약탈해 본 게 전부였다.”
“그 때, 그 마을에 있는 모녀 붙잡아 와서 발가벗기고 우리끼리 돌려 먹었을 때가 참 좋았는데. 그 남편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맞다. 도깨비 촌년들 치고는 먹어줄만 했다. 지금도 그년들, 전사들의 전차에 꽂혀있을 거다.”
“아마 너무 썩어서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럼 또 다른 여자들을 찾아야 할 거다. 전사들은 꾸미기 좋아하니까.”
“도깨비 여자들도 이쁘긴 하지만, 주신의 아리랑들이 훨씬 더 이쁘다고 한다. 아랑에 사는 아리랑들은 더 이쁘고.”
“나도 들었다. 이번 전쟁 끝나면 동쪽 국경으로 보내달라고 할 거다. 주신 약탈할 때 아리랑 년들 맛 좀 보려고, 클클클.”
슉!
그 때 어디선가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턱!
산병 중 수석식 소총을 들고 있는 두억시니의 목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화살에 맞은 두억시니는 아무런 소리도 못지르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니, 어디서...... 윽!”
슉! 슉! 슉!
어디선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화살들이 날아와 두억시니들을 맞추었다. 10여명의 두억시니 산병들은 아무런 소리도 못 내고 모두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숲 속 깊숙한 곳에서 검은색 갑주를 입고 활을 들고 있는 말 탄 무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었다.
율도군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쓰러진 두억시니 산병들에게 다가와 살아있는 자들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큭, 쿨럭...... 이, 더러운 새끼들, 어떻게 네 놈들이......”
그 중 가슴팍의 갑주에 화살이 얕게 박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두억시니가 하나 있었다. 그는 손으로 화살을 부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갑자기 그의 뒤로 율도군 기병 하나가 말을 달려왔다.
휙!
칼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두억시니의 몸이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와 함께, 그의 목에 붙어있던 험상궂게 생긴 머리가 떨어져 나가며 붉은 피를 뿜어내었다.
산병들이 있는 숲속 여기저기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기병들이 측면에 있는 산병들을 모두 처리하고 있을 때 쯤, 숲속에서 또 다른 말 탄 무사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말에게도 검은 철갑으로 된 마구를 씌우고, 얼굴까지 철갑으로 가려 보호하고 있는 율도의 철기병들이 장창을 들고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목표지점에 도착한다.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이동해야 한다.”
예하 부대 지휘관들이 동금의 전차로 찾아와 잠시 휴식하고 가자고 건의했지만 동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사들을 나약하게 키우지 말라며 지휘관들을 다그치기도 했다.
어느 종족보다 강맹하기로 소문난 두억시니들이었지만, 오랜 강행군에 다들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대오는 흐트러져 있었고, 대열에서 뒤처지는 자들도 여럿 보였다.
두두리와 혼혈 종족으로 이루어진 부락민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행군이 많이 버거운 듯, 창자루를 땅에 질질 끌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땅거미가 서서히 질 무렵이었다.
휘이이이이익~!
어디선가 피리 소리 같이 날카로운 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저녁 해를 구름이 와서 가린 듯, 천제국군의 머리 위로 갑자기 어둠이 드리워졌다.
두억시니 하나가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화, 화살이 떨어진다~!!!”
마치 폭우라도 쏟아지듯, 천제국군 머리 위로 셀 수 없이 무수한 양의 화살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숲 속에서 율도군 기병들이 활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왼쪽이다! 방패, 방패 들어!”
화살비가 떨어진 곳에 있던 병력들의 절반은 방패를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두억시니들이 정신을 차리고 진을 이루고 방어를 하려고 할 때, 숲속에서 우레와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박살내라!”
“모두 박살내라!”
이윽고 왼쪽 숲에서 검은 갑주를 입은 율도군들이 말을 타로 달려나왔다.
가장 먼저 공격해 온 이들은 뇌홍식 소총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탕! 탕! 타당! 탕! 탕! 탕! 타다당!
그들은 말 위에서 천제국 두억시니들을 하나 하나 조준 사격해 쓰러뜨리고는, 곧장 말을 달려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들이 달아나면 또다시 하늘 위에서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살 또 온다! 방패, 방패 위로 들어!”
두억시니들 모두 두터운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모든 화살을 막아낼 수 없었다. 잘 제련된 철로 만들어지고 날카롭게 벼려진 율도군들의 화살은 두억시니들의 두터운 갑주를 꿰뚫고 그들의 살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총기병들과 활을 쏘는 경기병들 계속 번갈아 사격을 한지 얼마 후, 뇌홍식 소총보다 구경이 큰 총을 가진 기병들이 숲속에서 달려 나왔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산탄총이었다.
텅! 텅! 텅! 텅!
산탄총이 한번 발사될 때마다 수십 여발의 총탄이 날아왔다. 방패를 들고 있던 놈들도, 두꺼운 갑주를 입고 있는 놈들도 모두 산탄총에 맞아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철기병 돌격! 모두 박살내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어서 몸부터 말까지 모두 육중한 철갑으로 무장한 율도군의 철기병들이 16자 (약 5m) 길이의 장창을 꼬나 잡고 대열이 흐트러진 두억시니들을 향해 돌진했다.
두억시니의 평균적인 크기는 말을 타고 있는 율도군과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자신보다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도, 철기병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모두 박살내라!”
철기병들의 장창이 거대한 두억시니들의 몸을 단 한방에 꿰뚫었다.
철기병들은 적을 찌르는 순간 그 충격에 낙마하지 않도록 창이 적의 몸에 박히는 순간 손에서 창을 놓았다.
그리고 군도나 철퇴, 편곤, 도끼 등 부무장을 꺼내 들고 적들을 매섭게 몰아치고는 다시 숲속으로 돌아가 새 창을 받아들고 다음 돌격을 준비했다.
철기병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천제국군의 머리 위로 화살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총기병들이 다시 사격을 퍼부었다.
율도군 기병들의 공격은 마치 정밀한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박윤수 중장과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영록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략 시뮬 게임을 해도 이렇게 까지 컨트롤 할 수는 없을 거 같아! 정말 대단하다!’
율도군의 거듭된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던 천제국군들이 갑자기 서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로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진행 방향대로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었다.
“적 지휘관이 현명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천제국군이 오던 길로 퇴각할 줄 알고 동쪽 길에 아군을 매복시켜 놓았던 박윤수 중장은 적이 뜻밖의 기동을 보이자 끌끌 혀를 찼다.
“적이 흥원이 있는 서쪽으로 이동한다. 전군 공격 중지하고 집결지 ‘3’에서 다시 모인다. 이동시 제대별로 소산해서 적의 추격을 피할 수 있도록.”
군단장의 명을 받은 전령부대들이 각 제대가 있는 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얼마 후, 율도군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수한 천제국군 두억시니들과 두두리들의 시체들만 남겨 놓고 그들이 있던 길가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율도군이 모두 철수했는데도 천제국군들은 언제 다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흥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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