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대동력 9,994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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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대월국 왕성 은허 일대 반란군 주둔지
붉은 갑주의 천제국 기병들이 모두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심운보는 천제국군의 집요한 추격이 멈춘 것에 안도하는 한편, 구천락의 수하들을 보내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 정탐토록 했다.
성산번군은 은허의 남쪽 악뢰관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은 남쪽에서 왕성으로 들어가는 하나뿐인 관문이며, 주요 군사 요충지였다.
그는 이곳에 오랜 강행군으로 지친 군대를 주둔시키고 쉬게 하고는, 목건주와 구천락, 영주, 성주 맹약 무사 수십 명만을 대동하고 은허를 포위하고 있는 반란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명천백 피호석 등 다른 반란군 번주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천제국 기병들이 돌아가기 전, 심운보가 피호석에게 보냈던 구원 요청은 또 한 번 묵살되었다.
이번엔 심운보도 참을 수 없었다.
“모든 번주들 앞에서, 이 대업을 이끄는 수장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주어야겠다!”
그는 구천락에게, 반란군 주둔지에 잠입해 활동하고 있는 여개, 곤마 등에게 계책을 전해 주도록 하였다.
심운보가 반란군 주두지로 들어가는 날, 자신을 확실히 지지하고 있는 번주들과 함께 피호석과 그를 지지하는 번주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번군들을 자기 휘하로 집어넣겠다는 계획이었다.
심운보 일행이 반란군 주둔지 가까이 당도했을 때, 구천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개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여개가 마중 나와 현재 준비 상태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보고를 할 예정이었다.
“잠시 그를 기다려 보심이 어떠하십니까?”
목건주도 무언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지지하는 번주들이 모두 모여 있을 텐데,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다.”
결국 심운보는 일행들을 이끌고 반란군 주둔지로 다시 이동했다.
반란군의 모든 번주들은 명천번의 붉은 비단으로 지어진 거대한 지휘소 천막 안에 모여 있었다.
각 번의 번주들이 좌우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가운데, 중앙의 상석에 피호석이 앉아 있었다.
피호석은 이제 겨우 서른이 넘은 젊은 도깨비였다. 윤기 나는 검은색 긴 머리는 그의 하얀 피부와 잘생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심운보의 자리는 입구 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를 본 심운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공이 이 대업을 이끄는 수장이라도 되었는가 보구려? 나를 이리 객처럼 대하다니.”
심운보가 눈을 부릅뜨고 천막 안에 있는 번주들을 훑어보았다.
번주들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지지하던 번주들 마저도 모두.
심운보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대업의 수장이라 하면, 뜻을 함께하는 번주들을 보호하고 그들과의 신의를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상석에 앉아 있던 피호석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번주들을 상대에게 미끼로 내어주고 버리는 장기판 말처럼 여기는 자를 수장이라 부르는 게 합당할까?”
“뭐, 뭐요?”
“모르는 척 하는 거요? 개골령에서, 당신 성산번군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다른 번주들과 번군들을 모두 천제국 두억시니들에게 죽게 내버려두고 도망치지 않았소?”
“아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심운보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호석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그가 앉은 자리 뒤에 장막이 열리고 한 아리랑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성산백의 군대를 따라다닌 이 여인이 모든 것을 다 증언해주었소. 그대도 이 여인을 알거라 하는데, 알아보시겠소?”
심운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라 입이 벌어졌다.
지난 날 성산번에서 붙잡은 율도의 흑영단원, 그동안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유곽에서 번군들에게 몸을 팔게 했던 여인,
유경패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심운보와 목건주, 구천락도 모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유경패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의 발 앞에 툭 던졌다.
공같이 둥그렇게 생긴 것이 데굴데굴 굴러와 그의 가죽신에 부딪혀 멈춰 섰다.
과거, 그녀를 고문했었던 여개의 잘린 목이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죽어 있는 그의 목에서는 이직도 검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놈 말고도 수하들을 여럿 심어놓으셨더군. 그 놈들도 지금쯤 이 놈과 같은 꼴이 되었을 거요.”
피호석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심운보를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성산백, 우리는 더 이상 그대와 함께 대업을 이루려 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의 명예를 생각해 체포하지는 않겠소.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 당신의 번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시오.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과 별개로 움직이겠소.”
피호석은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섭게 심운보를 노려보았다.
오후 2시, 대월국 주완번 일대
동금이 있는 본대로 보냈던 전령이 돌아오고 있었다.
얼마 전 백사는 동금에게 기병 없이 보병들만 데리고 이동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기병들이 합류할 때까지 진군을 늦춰야 한다고 건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전령은 이에 대한 답을 받아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말을 달려온 전령이 백사에게로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고 군례를 올렸다.
“......군단장의 답은?”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본대의 진군 상태는?”
“속도의 변함없이 계속 흥원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
백사는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 역시 율도군의 흥원 점령 소식을 전해들은 상태였다.
율도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백사로서는 마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율도군 2개 군단이 와 있다면 적에게는 최소 2개의 기동사단과 2개의 기병여단이 있다. 기병 전력만 3만에 가까운 적을, 보병만으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모한 두억시니들, 백여 년 넘는 세월동안 율도 태상국의 기병들에게 짓밟히고도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놈들...... 이러니 천제 성하께서도 두억시니들을 멀리 하려 하시는 게지.’
그녀가 부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최대 행군 속도로 이동.”
백사가 이끄는 붉은 갑주의 천제국 도깨비 기병들이 속력을 내어 서쪽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부디, 우리가 너무 늦지 않기를.’
그녀는 마음 속으로 빌고 있었다.
오후 4시, 대월국 왕성 은허 일대 반란군 주둔지
심운보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수하들을 이끌고 악뢰관으로 돌아간 후, 남은 반란군 번주들은 다음 행보에 대해 논의를 벌였다.
이미 한번 반란을 시작했으니 되돌릴 수 없다며 왕성을 점령하고 호문에 있는 국왕도 마저 처리하자는 쪽과,
국왕을 돕기 위해 천제국군이 들어왔으니 이제 반란의 성공은 요원해졌다며, 반란의 모든 책임을 심운보에게 전가하고 국왕에게 용서를 구하자는 쪽이 대립하고 있었다.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암묵적인 분위기에서 새로운 수장으로 선출된 명천백 피호석도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쉬면서 각자 더 생각해보고, 이따 저녁 시간에 다시 모여 의논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번주들이 자리를 파하고 자신들의 천막으로 되돌아갔다.
피호석은 오랜 회의의 피로 때문에 답답한 듯, 목을 여민 단추를 모두 풀고 기지개를 펴면서 자신의 침실이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의 천막 안에는 유경패가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반란군 주둔지 인근에 사는 주민에게서 받아온 옷을 입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 입고 있던 옷은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만큼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넝마와 다를 바 없던 옷을 입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었지만 아리랑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는 도깨비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여자를 밝히는 피호석이 그녀의 미색을 몰라볼 리도 없었다.
“오늘 네 공이 크구나. 어찌 상을 내리면 좋을까?”
피호석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람처럼 살지 못한 인생, 지금부터라도 사람처럼 살고 싶사옵니다.”
“사람처럼 살고 싶다? 그럼 내가 어찌 해주면 좋으랴?”
“유녀의 굴레를 벗고 자유롭게 살고 싶사옵니다. 그리고,”
유경패가 피호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천하나마, 각하를 옆에서 보필하며 살고 싶나이다.”
피호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보필하며 살고 싶다? 어떻게, 네 몸으로 나를 보필하려느냐?”
“제 몸과 마음을 다해, 제 가진 능력을 다해 각하를 보필하겠사옵니다.”
“네 얼굴과 몸뚱이만으로도 내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다만......”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지나 옷섶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네 가진 재능이 더 있단 말이냐? 혹, 침대 위에서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냐?”
피호석의 손이 그녀의 가슴과 젖꼭지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저는 각하께서 지금 근심하시는 일에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내가 근심하는 일이라? 너 따위가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각하께서는, 이 난을 계속할지, 여기서 멈출지 근심하고 계시지 않으시나이까?”
순간,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던 피호석의 손이 멈췄다.
“네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성산백의 수하들을 잡아내었다고, 이제 내 앞에서 대업에 대해 운운하며 오만하게 구는 것이냐?”
그녀가 그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 다만 제가 가진 능력이면 각하가 근심하는 일에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는 것 뿐이옵니다.”
“네가 가진 능력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허튼 소리 지껄이기만 하면 당장 밖으로 끌어내 발가 벗겨 쇠사슬에 매달아 놓고, 내 모든 번군들의 노리개로 만들어 버리겠다!”
피호석의 호통에도, 유경패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켜 피호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율도가, 각하를 보호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사옵니다.”
오후 10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전군, 진군하라.”
군단장 박윤수 중장의 명이 각 부대로 하달되고, 흥원성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율도군 5기동사단, 9기동사단, 115기병 여단 등 모든 기병 전력들이 일시에 동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 어두웠지만 그들 모두 횃불을 들고 있지 않았다.
해가 질 때부터 어둠속에 적응하며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밤중에도 수월하게 말을 몰아 이동하고 있었다.
기병들 대부분 3~5필 가량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 있지 않은 말 안장 위에는 활과 화살 등 무기와 개인 전투 식량 등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전장에서 특별한 보급 없이도 충분히 오랜 시간동안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였다.
말이 지치면 언제든지 다른 말로 갈아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식사도 이동하는 중에 말 안장 위에서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율도군이 다른 나라의 군대들에 비해 상상할 수도 없는 이동 속도를 낼 수 있는 비결이었다.
영록 역시 송시우 대위와 군경 여단 무사들과 함께 박윤수 중장의 군단 지휘부 속해 이동하고 있었다.
박윤수 중장이 전투 중 자신의 곁에 꼭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참전을 허락한 것이었다.
흥원의 경계에 도착한 율도군 기병들은 더 이상 다 함께 움직이지 않고 각 부대별로 산개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박윤수 중장은 이번 전투에서 3만의 기병들과 10만마리가 넘는 군마들을 이용해 율도군이 가장 잘하는 전술로 천제국군을 상대할 계획이었다.
바로 분진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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