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대동력 9,994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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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율도 강북도 삼성시
예린과 정국 두 사람은 여전히 알몸 상태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정국이었다. 그는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예린도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조금 더 자기랑 누워 있고 싶어.”
정국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알잖아, 여기서 지체하면 안된다는 거.”
“그치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예린은 이불 밖으로 몸을 내밀고 정국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국도 못 이기는 척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매끈한 허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객잔에서 준비해주는 아침 식사도 거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다시 홍진을 향해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객잔 옆에 딸린 마구간에 맡겨 놓았던 그들이 타고 온 (국영 목장에서 훔쳐 온) 말들은 점원들이 준비해준 마초와 물을 충분히 먹고 주인들 (도둑놈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국이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번에도 태상국이나 영부인께서 우리 찾으려고 사람 보내셨을지도 몰라. 서두르자.”
“아마 저번처럼 채연 언니나 누구 하나 보내겠지. 그래도 이제 대월국이랑 전쟁 시작해서 우리 찾으려고 많은 사람들을 보내시지는 못할 거야.”
“중간에 식당 같은 게 없을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미리 여행용 식량을 사 가자. 어떤 걸로 살까?
“당연히 고기 든 거로!”
두 사람은 웃으며 말을 몰아 객잔을 나왔다.
그들은 식료품 가게를 찾아 도로를 따라 삼성의 번화가 안으로 들어갔다.
삼성은 백화나 수도 진양 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대도시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만큼 상점들도 많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이 식료품 가게를 찾아 들어가 음식들을 고르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때였다.
가게 밖에서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대동 서부식으로 머리에 상투를 틀고 흑립 (갓)을 쓰고 있는 한자손 남자들이었다.
“가서 찾았다고 전하여라.”
“그냥 여기서 우리가 잡으면 안됩니까?”
“아직 어리지만 둘 다 무예 실력이 출중하다 들었다. 공연히 일을 그르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거라.”
남자 하나가 인파 사이를 뚫고 어디론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나머지 남자들은 계속 상점 안에 있는 예린과 정국을 감시하고 있었다.
오전 13시, 대월국 우산번 일대
동금이 이끄는 천제국 육군 7방면대 11군단은 기병대장 백사의 전령이 알려오는 길을 따라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길은 곧장 대월국의 수도 은허로 향하는 길이었다.
천제국군을 따라온 대월국 국왕군 도깨비 무사들은 이제 곧 반란군들을 축출하고 수도 은허로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두억시니나 두두리들이 광폭하기는 해도 싸움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하니, 은허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 반란은 모두 끝나게 될 거야!”
백사의 기병대는 여전히 성산번군의 후미를 쫓아가고 있었다. 심운보는 성산번군들을 이끌고 다른 반란군 번주들이 있는 곳을 향해 힘껏 도주하고 있었고, 백사의 기병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성산번군의 대열을 들이치며 진군 속도를 늦추고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다.
동금이 이끄는 천제국군과 성산번군과의 거리는 약 100리 (약 40km)가량. 잘 하면 하루만에라도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북쪽을 향해 행군해 나가고 있는 천제국군 대열 위로, 동쪽 하늘로부터 영매 한 마리가 날아왔다
영매는 동금의 지휘부가 있는 곳을 향해 곧장 내려 앉았다.
영매를 다루는 전령 두억시니가 영매의 가슴에 매달린 통에서 문서를 꺼내어 동금에게 전해주었다.
동금은 6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위에서 이 문서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렸다.
그가 문서를 모두 읽었을 때였다.
“행군 중지! 각 부대 지휘관 집합!”
동금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든 군대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대열에 있던 두억시니 지휘관들이 동금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국왕군 도깨비 무사들 역시 동금이 행군을 멈춘 것에 놀라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억시니 지휘관들이 그의 전차 주변으로 모두 모여 들었다. 동금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목표를 변경한다. 우리 군은 지금부터 서쪽으로 진군해 흥원을 무단으로 점령한 율도군들과 싸운다.”
이 말에 놀란 국왕군 도깨비 무사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동금에게 물었다.
“아니, 율도군이라니? 율도군들이 왜 흥원을 점령했단 말입니까?”
이에 동금이 언짢아 하는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그 ‘왜’ 라는 물음은 내게 묻지 말고, 할 수 있다면 그대가 강운예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라.”
다른 도깨비 무사가 말했다.
“이제 수도 은허가 바로 코 앞에 있습니다. 귀국의 군대는 반란군들을 무너뜨리고 우리 수도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우리 땅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목표를 흥원으로 바꾸다니요? 부디,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재고할 필요 없다. 이는 천제 성하의 명이시다!”
동금이 시뻘건 핏줄이 선명한 고리눈을 부릅뜨고 국왕군 도깨비 무사들을 무섭게 쳐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반란군 놈들 모두 고기로 만들 것이고, 은허도 되찾아 준다. 하지만, 그걸 언제 할 지는 우리가 정한다! 일의 순서도 우리가 정한다!”
동금의 일갈에, 도깨비들은 주눅이 들어 쭈뼛거리며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두억시니들은 그런 도깨비들을 보고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두억시니 지휘관들이 각자 자신들의 부대로 돌아가려고 할 때, 동금이 이곽을 불러 남게 했다.
“너는 본대를 따라오지 말고 네 부대를 이끌고 환강산성으로 돌아가라.”
이에 이곽이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며 따졌다.
“내게 불명예를 안겨줄 셈이오? 전투가 목전인데 후방으로 내려 가라니!”
“나도 너와 네 용맹한 부하들을 전투에서 제외하고 싶지 않다, 이곽. 하지만, 천제 성하를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 군 최고의 전사가 가야 한다.”
“천제 성하를 영접하기 위해서라니......? 설마 천제 성하께서 이 곳 대월국으로 오고 계시단 말이오?”
동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에 율도군이 개입한 것을 아시고 천제 성하께서 친정을 선언하셨다. 그동안 대동의 패자인 양 오만하게 굴어오던 율도와 강운예를 직접 벌하시겠다 하신다.”
그 말에 이곽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천제 성하께서 오시면, 그 부대도 같이 오는 것이오?”
동금도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2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진미령과의 만남 이후, 영록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유성모, 마선욱, 박광, 전도한...... 그 놈들 모두 때려잡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놈들에게 어떻게 복수할 지, 복수가 끝난 뒤에 유민이의 상처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한 문제였어.’
박윤수 군단장 등 2군단 지휘부와 함께 흥원 주민들이 반란군 포로들을 재판하고 즉결 처형하는 곳을 찾은 후, 그에 대한 생각은 확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흥원번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높다란 단상 위로 반란군 포로를 끌고 가 사람들 앞에 세웠다. 그러면 단상 위에 있던 주민 대표가 사람들을 향해,
“이 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있소?”
“이 자에게 해를 당한 사람 있소?”
“이 자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아는 사람 있소?”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격앙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저 자가 내 집에 들어와 재물들을 모조리 약탈해 갔소!”
“저 놈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손녀딸을......! 결국 내 손녀딸이 저 놈 때문에 스스로 목을 메었소!”
“저 사람이 우리 엄마를 죽였어요! 우리 엄마 옷을 벗기고 위로 올라타서 짓누르고 마구 때리다가 칼로 찔러 죽였어요! 저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면 주민 대표가 피해를 당한 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저 자를 어떻게 하길 원하오?”
피해자들은 열에 아홉, 이렇게 소리쳤다.
“저 놈을 죽여야 하오!”
사형은 이렇게 언도되고 있었다.
영록은 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완전 인민재판이잖아? 이런걸 지금 제대로 된 재판이라 할 수 있어?’
영록은 옆에 있는 박윤수 중장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흥원 주민들의 재판을 제재하거나 중단시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와 같은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모습이었다.
사형이 언도된 포로는 곧장 단상 아래로 내려가 나무 등걸이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러면 대표들이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다가와 물었다.
“당신이 직접 저 자의 목을 치겠소?”
절반가량의 사람들이 그러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도끼를 집어 들고 포로들의 목을 내려 찍었다. 대부분 목을 치는 일 따위를 해 봤을 리 없는지라, 단번에 목을 베어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모두 두 번, 세 번, 목이 떨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도끼질을 해대곤 했다. 목이 아니라 뒤통수나 등에 도끼를 찍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그렇게 포로들을 죽여 복수를 했다. 하지만 포로의 목을 베어낸 후 밝은 표정을 지으며 웃는 이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표정에 절망과 분노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깊은 허무와 괴로움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반란군들에게 강간당한 도깨비 여인이 자신을 강간했던 반란군을 직접 사형시키겠다고 나섰을 때였다. 그녀는 도끼를 드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가녀린 팔을 휘둘러 포로의 목을 수 차례 내려 찍었다. 포로의 목이 떨어지기까지, 그녀는 18번이나 도끼를 휘둘러야 했다.
자신을 강간했던 자의 피가 자신의 온 몸에 튀고 그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마치 미친 사람처럼 괴기하게 웃기 시작했다.
‘단지 원수를 죽이는 것은, 피해자를 위한 가장 좋은 복수가 아니다.’
영록은 두려웠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 복수를 했을 때, 행여 유민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저 여인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도깨비 여인은 온 몸에 피를 묻힌 채로 미친 듯이 웃으며 사람들을 지나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끔찍한 재판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 도깨비 하나가 단상 위로 끌려왔다. 마을 주민들 중 누군가가, 저 어린 도깨비가 마을 여인들을 윤간하는데 같이 참여하는 걸 보았다고 소리쳤다.
그 때, 어린 도깨비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같이 전쟁에 끌려온 동네 형, 아저씨들이 시켜서 그랬어요! 그 여자들을 다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잘못 했습니다! 정말 잘못 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정하고 있었다.
순간, 영록은 그 어린 도깨비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나 역시 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 그 여대생 누나한테...... 비록 마선욱이 시켜서 한 짓이었지만 나도 분명 그 때 죄를 지은 건 사실이었어......’
그제서야 영록은 자신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조폭들의 은신처에서 조폭들을 쏴 죽인 후, 그에게는 분명 경찰들에게 신고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살인죄는 물론, 여대생을 집단 성폭행하는데 가담했던 죄까지 드러나서 처벌받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강해져서 자신만의 힘으로 유민을 구해내겠다는 어리숙한 목표도 모두 여기서 기인한 것이었다.
‘난 정말...... 형편없는 새끼였어......’
단상 위에 올랐던 어린 도깨비에게도 사형이 언도되었다. 겁에 질린 어린 도깨비가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쳐 봤지만, 그 역시 결국 나무 등걸이 있는 곳으로 끌려 내려갔다.
살려달라는 어린 도깨비의 울부짖음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턱, 하고 나무 등걸 위로 도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더 이상 그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어린 도깨비의 죽음은, 마치 자신에게 내려져야 할 형벌을 대신 받고 죽은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재판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2군단 지휘부는 그곳에 계속 머물지 않고 흥원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영록 역시 박윤수 중장과 함께 흥원성으로 향했다.
그들이 흥원성에 거의 다 와갈 때쯤, 흑영단원 율도 도깨비가 그들을 향해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마침 돌아오고 계시던 중이었군요? 율도로부터 급한 전문이 와서 군단장님을 찾아 뵈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율도 도깨비가 박윤수 중장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 주었다.
쪽지에 적힌 글을 읽은 박윤수 중장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쪽지를 갑주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과 예상하지 못한 일이 동시에 일어났군. 전장에서 늘상 있는 일이지.”
그는 옆에 있는 영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전쟁 규모가 더 커지고 전쟁을 벌여야 할 기간도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마루한.”
“무슨 일이 있나요?”
“천제국의 정선교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합니다.”
동쪽으로부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영록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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