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대동력 9,994년 5월 26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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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도깨비들에게 마루한이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자,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도깨비들은 ‘미한’ 윤예진에게서 태어난 종족이다. 그래서 지금도 윤예진을 ‘위대한 어머니 신’이라 부르며 경배한다. 미한이 스스로 도깨비들의 곁을 떠나 신시로 들어간 후에도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살아 생전 한 번쯤은 ‘순례’라는 이름으로 신시를 향해 여행을 떠날 정도로 그녀에 대한 신앙을 수천년 동안 지켜오고 있다.
흔히들 ‘두 번째 마루한’이라 불리는 황치우와 그 일행들이 대동에 나타났을 때, 도깨비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모질게 핍박했다. 심지어 황치우의 가족들을 살해해 두억시니들에게서 배운 대로 그 시신을 토막내 전시하는 만행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도깨비들은 그들이 결코 미한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했고, 이 일은 훗날 한자손과 도깨비들이 수천년 넘게 번목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황치우의 세력이 대동 서부에 자리 잡은 이후, 도깨비들은 황치우와 그 후손들인 한자손들과의 싸움에서 거듭 밀리게 되었다. 그 때부터 도깨비들은 황치우는 물론 그와 함께 대동으로 넘어온 이들 역시 미한과 다를 바 없는 신과 같은 존재인 마루한이며, 그들의 전능한 능력 때문에 자신들이 계속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 후 세월이 흘러 박환성, 정선교 등 또다른 마루한들이 대동에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여러 혁신적인 문명을 건설됨에 따라, 마루한을 신처럼 추앙하는 도깨비들의 믿음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도깨비들이 무조건 마루한이라고 해서 떠받들고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치우와 같은 대동 서부의 마루한들과 율도 태상국 강운예 같은 경우, 도깨비들은 그들도 미한 윤예진과 같은 존재로 인정하긴 하지만 선한 신이 아니라 악신, 이를테면 ‘염왕 (지옥의 왕, 염라대왕)’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도깨비들이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강운예의 경우, 아예 ‘전쟁의 신’이라 부를 정도로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박환성 등 많은 마루한들이 전쟁 중 사망하거나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면서, 또 강운예가 ‘마루한은 영원히 늙지 않지만 그렇다고 죽지 않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포함한 모든 마루한을 신으로 대하지 말라.’고 천명하면서, 도깨비들을 포함한 대동 모든 사람들의 마루한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인식의 변화도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신에서 조금 모자란 정도’로 하향되었을 뿐, 아직도 많은 이들은 ‘마루한의 손길만 닿아도 축복과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말을 믿을 정도로 마루한을 열렬히 숭배하고 있었다.
이는 대월국의 귀족, 흥원 공녀 진미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영록이 2군단 지휘부와 함께 흥원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성문 앞까지 나와 기다렸다.
그와 만나자 마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진미령은 영록을 흥원성 본성의 대연회실로 안내했다. 그녀는 그를 상석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 꿇은 후 자신의 가족들이 당한 참혹한 이야기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리고, 어젯밤 가족들의 원수를 붙잡아 어떻게 복수했는지도 소상히 설명했다.
영록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사람이 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복수할까? 유성모와 마선욱, 박광과 전도한의 자지를 잘라 입에 처넣어 버리고, 그렇게 그들이 유민에게 한 짓에 대해 복수해 버릴까?’
그런데, 진미령의 이어진 이야기를 듣고 그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자를 그렇게 죽여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원수를 죽여 복수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 어미가 앞으로 죽을 때까지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고, 저를 향해 웃으며 걸어오실 수도, 그토록 좋아하시던 꽃들을 매만질 수도 없게 된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 동생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 역시 씻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가족들은 반란군들에게 당한 치욕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복수가 끝난 후에도 가족들은 변하지 않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괴롭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영록의 가슴에 커다란 돌 하나가 턱, 얹혀버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수련해서 무예의 고수가 되어 현실 세계로 돌아가 그 나쁜 놈들에게 복수한다 해도,
유민이 받은 상처가 모두 아물어질까?
내가 유성모를 죽이고, 마선욱을 죽이고, 박광을 죽이고, 전도한을 죽여 없앤다 해도,
유민이를 다시 웃게 할 수 있을까?
그 나쁜 놈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그들에게서 유민이를 구해낸다 해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과 같이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단지 내 원수를 죽여 없애 버리는 것 만으로 모든 복수가 완성되고,
나와 유민이가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 진미령이 말하는 것처럼,
복수를 끝마쳤음에도 나와 유민이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는 결과만 생기는 건 아닐까?
지난 날 조폭들의 은신처에 벌어진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선욱의 핸드폰에 담겨 있던 유민의 사진과 동영상들,
박광이 손에 들고 흔들던 두개의 빨간 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던 유민의 임신테스트기,
자신의 눈 앞에서 조폭들에게 윤간당하던 유민의 모습까지......
‘단순히 그 놈들을 모두 죽이고 유민을 구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어!’
그제서야 영록은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어리숙했음을 깨달았다.
왜 강운예가 자신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집착하지 못하게 했는지,
왜 죽여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 짓는 법을 배우라는 건지,
힘이 있되 정의로운 것,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깨달으라 했던 건지,
이제서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놈들을 모두 죽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어! 강운예 관장님은 지금까지 내게, 성급하게 복수만 하려다가는 오히려 그 뒤에 몰려올 여러 일들과 괴로움들을 감당하기 힘들거라 말씀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관장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셨지?’
순간, 대동에 오기 전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강운예가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나도 예전에 너랑 비슷한 아픔을 겪은 적이 있었다는 그 말.
평연당에서 함께 수련하던 도중, 영록이 강운예에게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관장님, 체육관을 하시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어요?]
[군에 있었단다. 직업 군인.]
[얼마나 오래 군에 계셨어요?]
[음, 한 10년 정도?]
[와~! 정말 오래 계셨네요! 일반 병으로 군대 가면 1년 반 밖에 안 있는다던데. 지금은 전쟁 중이라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직업 군인이 되신 거예요? 원래 어렸을 때 꿈이 군인이셨던 거예요?]
[난 어려서 태국으로 건너가 살았는데, 그 때 내 주변에 군인들이 많긴 했지. 정확히는 군인 출신 용병들과 내 십대 시절을 함께 보냈단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그 용병들과 함께 일할 생각은 있었지만 한국 군인이 되겠다는 목표는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꼭 하기로 맹세했던 일을 위해 태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단다. 그래서 끝내 맹세했던 대로 하고 말았는데, 그 일은 법을 어기는 일이었지. 결국 난 경찰에 붙들렸단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감옥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더라구.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면 이 감옥에서 빼주겠다고 말야. 그래서 하겠다고 했지. 감옥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야.]
[무슨 일을 하셨기에 감옥에 들어가셨던 거예요?]
[어머니의 인생을 망가뜨린 놈들을 찾아내 벌을 내리는 일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좀 더 현명하게 벌을 내릴 수도 있었는데, 그 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분노에 가득 차 있었어...... 명심하거라. 감정에 치우친 행동과 결정은 훗날 더 큰 후회로 돌아올 수 있단다. 복수를 하되, 명석하게 해야겠지. 마치 '몽테크리스토 백작’처럼 말이야.]
진미령은 영록을 본성 7층으로 안내했다.
아미산에서 데리고 온 자신의 가족들과 만나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부디 마루한, 마루한께서 제 가족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살아가려는 의지마저 스스로 놓지 않도록, 부디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7층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영록은 마음 속으로 여러가지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당신들에게 일어난 일은 절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과,
과거 속에 머물지 말고 미래를 보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말과,
앞으로 살아가며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들이 많이 남아있을 거란 말까지.
‘이런 말들....... 나중에 내가 유민이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도,
유민에게도,
아무런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진미령이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영록은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침대 위에는 팔 다리 없이 머리와 몸만 붙어 있는 중년의 여인이 입가에 잔뜩 침을 흘린 채로 거친 숨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고, 그 옆으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아이가 모여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여자 아이의 배는 둥그렇게 불러 있었다. 진미령의 여동생 효령이었다. 영록은 진미령에게 그간의 모든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녀가 어떻게 배가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효령은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울먹이는 눈으로 영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효령에게서 유민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유민이도 지금쯤 저 아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있는 건 아닐까?’
와락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영록은 아이들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올라오며 한참동안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모든 말들은 눈물과 함께 잊혀져 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마루한이 자신들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리자, 아이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붙잡고 함께 울었다.
곁에 서 있던 진미령도, 이를 지켜보며 함께 눈물 흘리고 있었다.
오후 5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2군단 지휘부가 흥원성으로 들어온 후, 흥원의 주민들의 대표 몇 명이 율도군을 찾아왔다.
“포로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시오. 어차피 당신들도 지금 당장 포로들을 가둬 둘 데도 없지 않소? 우리가 저들을 데려다가 우리의 법대로 처리하겠소.”
흥원 주민 대표들의 요청은 곧 2군단장 박윤수에게까지 전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단장의 허가가 떨어졌다.
군단 군경대대 무관이 나와서 포로들의 숫자와 이름, 소속 등이 적힌 명부를 주민 대표들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지금까지 붙잡힌 포로들의 수는 300여명이 넘소. 이 포로들을 주민들만의 힘으로 모두 데려갈 수 있겠소? 군단장님께서 그대들이 원한다면 포로들을 호송하는데 우리 병력을 지원해 주라 하셨소. 어찌 하시겠소?”
주민 대표들은 율도군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잠시 후, 군단 군경 대대 병력 100여 명이 나와 성벽 앞에 앉혀 놓았던 포로들을 끌고 흥원 주민들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율도군이 자신들의 신병을 흥원 주민들에게 넘겼다는 소문이 퍼지자, 포로들의 낯빛이 시커멓게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흥원 주민들에게 한 짓이 있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던 것이다.
포로들 중 통요번의 지체 높은 가문의 무사 하나가 자신의 옆에 있는 말 탄 군경 무사에게 다가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보시오. 난 통요번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부호의 아들이오. 수도 은허에도 우리 가문보다 돈이 많은 집은 흔치 않을 거요. 날 이 곳 주민들에게 넘기지 말고 당신 포로로 잡아 주시오. 우리 가문이 나를 위해 당신 10년치 급여 보다 많은 돈을 몸값으로 보내줄 것이오. 우리 집에 편지 한 장만 보낼 수 있게 해주면, 당장 군인 때려치고 편히 살 수 있게 해주겠소!”
이 말에 군경 무사는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대꾸했다.
“네가 통요번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부호의 아들이면, 난 율도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꽃미남이겠다. 쳐 맞기 전에 아가리 닥치고 조용히 앞 사람 보면서 따라가라.”
율도군 군경들은 흥원 주민 대표들을 따라 포로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높은 나무 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 성난 표정을 짓고 있는 도깨비들이 포로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상 아래에는 커다란 나무 등걸이 있었고, 그 위에는 커다란 도끼 한 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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