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98화 (98/217)

〈 98화 〉 대동력 9,994년 5월 26일 (2)

* * *

­ 오전 10시, 율도 백화 백화산 4군단 본부

새벽녘, 부대 담을 넘어 4군단 본부 안으로 침입한 자가 순찰을 돌던 무사들에 의해 붙잡혔다.

침입자는 무사들과 맞닥뜨리자 마자 칼을 빼어 들고 호기롭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단 3합 만에 칼을 빼앗기고 제압되고 말았다. 침입자가 감당하기엔, 4군단 무사들은 너무나 강한 존재들이었다.

침입자는 야간 당직 사령 앞으로 끌려갔다. 당직 사령이 부대에 침입한 이유 등에 대해 추궁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직 사령은 붙잡힌 침입자의 얼굴이 너무 앳된 것을 보고, 그냥 가끔씩 부대 주변에 나타나는 무예 실력만 믿고 객기 부리는 불청객쯤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을 제2생활관 앞에 있는 창고에 가둬 두고 생활관 정문에서 경계 근무 서는 실습생들로 하여금 창고를 감시하게 하라. 아침에 군단장님께 보고하고 군경대에 인계하겠다.”

제2생활관은 지금 이곳으로 실습 나온 경무관 학생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실습 기간동안 학생들은 야간마다 생활관 정문 앞과 각층에서 각각 경계 근무, 불침번 근무를 서고 있었다.

당직 사령은 ‘하찮은 실력을 가진’ 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해 굳이 4군단 무사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상 시간이 되고, 학생들은 연병장으로 나와 군인들과 똑같이 아침 점호를 받았다.

점호를 마치고 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학생들은 밤 사이 있었던 이상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오늘 새벽에 정문에서 경계 근무 서고 있었는데, 당직 부관이랑 무사들이 사람 하나를 끌고 와서 창고에 가둬 놓았거든? 근데 그게 누군지 알아? 황정국 황자였어, 황정국 황자!”

“황정국 황자? 얼마 전에 자기네 나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분명 황자가 틀림없었어! 걔랑 대련을 수십 번 넘게 했는데 내가 걔 얼굴 못 알아볼 리 있겠냐? 어쨌든 무사들이 황자를 창고에 가두고 이 녀석 도망 못 가게 잘 지켜 보라고, 다음 근무자들 한테도 이 사항 계속 인수인계하라고 그러더라?”

정국을 직접 본 이가 거의 없는 4군단 무사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당연했지만, 몇 년 간 경무관에서 함께 수련했던 아이들이 그를 몰라볼 리 없었다.

정국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예린 역시 이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그녀는 식당으로 가다 말고 갑자기 대열에서 빠져나와 제2생활관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 갑자기 너 어디가? 아침 안 먹을 거야?”

친구들이 그녀를 불러보았지만 그녀의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경무관 학생들의 실습은 예정된 교육 일정에 따라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과업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교육장으로 출발하기 위해 수련용 활과 검 등 개인용품을 챙겨 생활관 앞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그 때, 학생 대표 중 한 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생활관 밖으로 뛰어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실습생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관이 놀라 되물었다.

“사라진 실습생이 누구인가? 언제부터 안보였지?”

“강예린 실습생이고, 같은 방을 쓰고 있는 학생들이 말하길 조식 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예린 실습생이라면 태상국 기하의......?”

교관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4군단 본부 근무대 무사들이 제2생활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새벽에 붙잡은 침입자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었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 무사가 뒤에 있는 무사들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무사의 목소리는 학생들에게까지 모두 들리고 말았다.

이를 들은 학생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붙잡힌 사람이 황정국 황자였다며? 근데 예린이도 사라지고, 황자도 같이 사라진 거야?”

“설마 둘이 함께 달아난 거? 예린이가 황자 탈출시키고 같이 달아난 건가?”

학생들 모두 그 둘이 이 전에 함께 가출해서 누리마루까지 같이 갔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두 사람 이야기로 웅성거리는 가운데, 침입자를 데리러 온 무사들이 다급히 본부 건물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 오전 11시, 율도 백화 백화산 일대

백화산의 남쪽은 4군단 본부, 성무관, 군사 기술 연구소 등 군부대들이 들어서 있었고, 그 너머 북쪽으로는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와 수 천 마리의 말과 소, 양과 돼지들을 방목하는 거대한 국영 목장이 있었다.

국영 목장의 말들은 모두 군마로 쓰이는 것들이었고, 다른 가축들은 군사들을 먹일 식재료로 이용되고 있었다. 덕분에 대원수부, 1군단, 3군단, 4군단 등 백화 일대의 군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매 끼니 고기 반찬을 먹을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이곳 국영 목장의 푸른 초원 위를 달려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예린과 정국이었다.

한동안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던 예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국을 와락 끌어안았다.

“네가 올 줄 알았어! 네가 올 줄 알았다구!”

그녀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마음 속 가득 담아두고 있던 간절한 감정들이 여과없이 북받쳐 올라왔다.

“미안해, 그렇게 그냥 도망치듯 떠나서 미안해.”

“멍청아,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고.”

예린은 두 팔로 정국의 목을 끌어안았다.

“앞으로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라구.”

정국이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진심으로.”

예린의 뺨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목장에 있던 말들 가까이 다가갔다.

“너 안장이랑 고삐 없이 말 타 본 적 있어?”

예린의 물음에 정국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단 한 번도.”

“그래도 걸어가는 거 보다는 말을 타는 게 나을 거야. 여기 있는 말들 모두 훈련된 말들이라서 조금만 호흡을 맞춰보면 그닥 까탈스럽게 굴지도 않을 거구.”

예린이 갈색털의 암말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암말은 그녀의 손길이 싫지 않은 듯 순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여보야, 이제 우리 어디로 갈 거야?”

“대동 동부로 가자. 아랑이나 주신으로 말이야.”

“하지만 우리 아빠한테 안 걸리고 그곳까지 갈 수 있을까? 대동 동부로 가는 바닷길은 모두 우리 수군이 관할하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 아버지 황제 폐하나 너희 아버지 태상국의 눈을 피해 살 수 있는 곳은 어차피 대동 동부 밖에 없어.”

“그치만...... 대동 동부에도 우리 율도의 식민지들이 있잖아? 사비도 그렇고 보문도 그렇고. 식민지에 있는 군사들이 우리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해?”

“주신이나 아랑은 율도의 속국이나 신하국이 아니라 주권국들이야. 아무리 율도군이라도라도 그 나라들에 쉽게 들어올 수는 없어. 주신이나 아랑 모두 율도군이 우리 찾겠다고 자기 나라에 들어와 활개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부터 나, 우리 여보가 하자는 데로 따라 갈게.”

그녀가 다시 정국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우리 여보. 이제 모두 잊고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자.”

정국도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내 과거도 잊고, 네 과거도 잊고, 이제 모두 잊고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아가자.”

두 사람은 서로를 꼬옥 끌어안았다.

­ 오전 13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꽝!

강운예의 집무실 안에서 벼락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백영단장과 진채연을 호출해 금일부터 4군단에 실습 중인 예린에게 백영단 무사들을 붙여 잘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리던 중, 4군단 본부로부터 예린이 오늘 새벽 부대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자와 함께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보고서에는, 실습 나온 경무관 학생들이 그 침입자의 용모가 주 나라 황정국 황자와 매우 닮았다고 증언했다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리자 강운예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쳐 버렸다.

튼튼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정갈한 모양의 탁자는 그대로 반으로 쩍, 갈라지고 말았다.

“지시 사항 정정한다! 진 대위는 지금부터 추격대 구성해서 예린이하고 황자 그 새끼 당장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 인원이나 장비, 예산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모두 지원해 주겠다!”

강운예의 온 몸에서 서늘하다 못해 뼛속까지 시릴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진채연도 매우 놀란 상태였다. 어제 시청 부근에서 황자를 보았다는 반디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태상국이 누군가를 향해 ‘새끼’라고 육두문자 써가며 화를 내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여러 차례 실전을 경험해 본 그녀였지만, 태상국이 뿜어내는 엄청난 살기에 눌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 아빠는 지금 전쟁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예린이 이 녀석은 도대체가......!”

강운예는 한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책상 위 유리 상자에 담긴 흑당 하나를 꺼내 우적우적 씹어 대고 있었다.

진채연은 평연당 경비를 위한 필수 인원을 제외하고 백영단 무사 10명을 추격대로 차출했다. 강운예는 10명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사승범, 최용준을 포함한 적영단 무사 10명과 범죄 수사 및 탈영병 / 죄수 추적 경험이 많은 군경 여단 무사 10명을 추가로 지원해 주었다.

30명으로 구성된 추격대는 곧장 예린과 정국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화산의 국영 목장에서 말 두 마리가 사라졌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백화산 북쪽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오후 3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영록은 2군단 지휘부와 함께 흥원성을 향해 이동했다.

흥원성 주변에는 어제 먼저 당도한 공병대들이 병영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병영터 한 켠에는 가마에서 구워서 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벽돌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흥원성 외곽 성벽 주변으로, 포로로 잡힌 통요번 반란군 잔당들이 팔을 등 뒤로 포박당한 채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병영이 모두 지어지는 동안 율도군이 흥원성의 일부를 사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포로들을 구금할 장소가 마련될 때까지 밖에서 대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해자 너머에는 흥원의 도깨비 주민 수십 명이 모여 성벽 아래 줄지어 앉아 있는 포로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돌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 반란군들에 의해 재산을 약탈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었다.

“야, 이 나쁜 놈들아! 너희들이 불태운 내 집 돌려내라!”

“이 뱀 같은 새끼들아! 내 며느리 어디로 데려갔느냐, 응? 내 며느리 어디 있어? 내 며느리를 돌려보내라, 이 뱀 새끼들아!”

율도군들이 해자를 건너오는 다리 앞을 지키고 막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들 모두 당장이라도 포로들에게 달려들어 죽여버릴 듯한 기세였다.

멀리서 2군단 지휘부가 흥원성을 향해 들어오는 것을 본 다리 앞의 병사들이 주민들을 길가로 밀어내고 길을 트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율도군들이 창과 방패로 자신들을 밀어내자 더욱 흥분해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른 본 어느 병사가 갑자기 소리 높여 외쳤다.

“길을 비켜 주시오! 마루한께서 입성하십니다!”

‘마루한’ 이라는 말에 순간 주민들 모두 잠잠해졌다.

“마루한? 마루한이 오신다고?”

“마루한은 어디 계시오? 어디 오고 계시단 말이오?”’

율도군들은 흥원성을 향해 들어오는 2군단 지휘부 행렬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기, 지금 들어오는 이들 가운데 마루한이 계시오. 이번에 새로이 대동에 오신 영록 마루한께서 함께 오고 계신다오.”

이 말을 들은 흥원 주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리기 시작했다.

도깨비들도 그 태생은 미한 윤예진에게서 나온 후손들이었다. 그렇기에 ‘미한의 백성’이라 불리는 다모랑, 미호랑, 아리랑 만큼이나 미한을 적극적으로 숭배했고, 마루한에 대한 경외심 또한 남달랐다.

2군단 지휘부 행렬이 해자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영록이 흥원 주민들 가까이 말을 타고 다가오자, 다리 앞에 서 있던 병사들이 성문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마루한께서 입성하십니다! 영록 마루한, 영세무강하소서!”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를 맞이했다. 영록은 갑작스러운 환대에 잠시 놀랐다가, 빙그레 웃으며 투구를 벗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루한! 마루한!”

길가의 주민들이 갑자기 마루한을 부르며 무릎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영록이 타고 있던 회색말 가웨인은 도깨비들이 자신의 주인을 향해 다가오자 위협을 느낀 듯 앞발을 높이 들고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워! 워! 괜찮아, 가웨인! 가만 있어!”

영록도 도깨비들이 자신에게 기어오는 걸 보고 몹시 놀란 눈치였다. 성시우 대위와 군경 여단 무사들이 재빠르게 그들을 가로 막고 영록에게 다가오는 것을 차단했다.

“마루한, 불쌍한 당신의 백성들을 굽어살피소서!”

“부디 단 한 번만이라도 제 손을 잡아주소서! 가련한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소서!”

모두들 간절한 눈빛으로 영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영록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모두들 잠시 비켜 주세요.”

그는 성시우 대위와 군경 여단 무사들을 물리고 도깨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 마루한......”

도깨비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록은 그에게 몰려온 수십 명의 도깨비들의 손을 모두 잡아준 뒤, 다시 가웨인에 올라 성을 향해 들어갔다. 주민들은 계속 무릎 꿇고 엎드린 채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흥원성의 남문으로 들어갔을 때, 흰색 전포에 붉은 갑주를 입고 있는 도깨비 여인이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영록을 보자 그의 앞으로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 마루한. 저와 제 가족들을 굽어살피소서......”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록은 말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앞에 있는 이는 흥원 공녀 진미령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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