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97화 (97/217)

〈 97화 〉 대동력 9,994년 5월 26일 (1)

* * *

­ 오전 9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병사 식당

평상시 대원수부에서 근무하는 무관, 사관들은 대부분 근무복, 정복을 입었지만, 전시 상황에 돌입한 이후부터 무사들을 물론 대원수부에서 근무하는 민간인 군무원들까지 모두 검은 전포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위병소 근무를 서는 병사들도 갑주에 완전무장을 갖춘 상태였고, 무기를 들고 대원수부 일대를 순찰하는 병력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전쟁은 백화에서 멀리 떨어진 대월국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곳 대원수부의 군사들 표정에서도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대원수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일상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들은 오늘도 정해진 기상 시간에 일어나 점호를 받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순번에 따라 병사 식당으로 이동해 아침 식사를 하고 자신의 근무지로 이동할 준비를 하는 것도 똑같았다.

대원수부 상황실에서 상황 대기하는 병력들, 전쟁 관련 보고들을 정리하느라 야근하는 인원들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다들 크게 급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돌아간 후, 취사부 근무자들은 혹시 식사를 하지 못한 병사들이나 야간 근무를 선 인원들이 있을까봐 남은 음식들을 식판에 담아 따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 전, 짬을 이용해 각자 휴식 시간을 갖고 있었다.

대원수부의 취사부는 급양관이라 불리는 사관의 지휘 아래 30여명의 취사병들과 십여 명의 군무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취사부 군무원들은 모두 요리를 잘하는 민간인 여성들로, 선발 시험을 거쳐 대원수부에 고용된 이들이었다.

이들 중 시험을 거치지 않고 들어온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누리마루에서 온 혼혈 유랑민 출신 여인, 반디였다.

영록과 예린이 대월국에서 탈출했을 때, 반디도 진채연을 따라 율도로 오게 되었다.

원래 진채연은 반디를 평연당에서 일할 수 있게끔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평연당 근무 규정상 정식 율도 국민도 아닌데다가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이 국가 원수 관저라고 할 수 있는 평연당에서 근무할 수 없었다.

이 때, 영부인 이소영이 나서서 그녀들을 도와주었다. 이소영은 반디의 율도 국적 취득을 도와주고, 다인(남편, 강운예)을 설득해 대원수부 병사 식당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거기에 대원수부 인근에 있는 자그마한 군 외부 관사도 내어주어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반디가 병사 식당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 취사부에서 근무하는 군무원들은 그녀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발 시험을 거쳐 간신히 군무원이 된 사람들이 보기에 윗사람들이 꽂아 준 덕에 아무런 시험도 없이 취사부에 들어온 반디가 곱게 보일 리 만무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디의 순수하고 착한 성격, 성실한 태도를 지켜본 그들은 점점 그녀를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언젠가 군무원들끼리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반디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솔직히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누리마루에서 대월국 도깨비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그녀 역시 몹쓸 짓을 당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녀의 아픈 과거를 알게 된 후로, 그 누구도 반디를 배척하려 들지 않게 되었다. 군무원 동료들 모두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주었고, 하나라도 더 도와주려 할 정도였다.

지금은 모두 서로를 언니, 동생이라 부르며 화목하게 잘 지내는 중이었다.

반디가 군무원 동료들과 함께 취사부 주변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반디야!”

돌아보니 진채연이 웃으며 취사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언니!”

반디는 웃는 얼굴로 뛰어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니, 아침 드셨어요?”

“응, 평연당에서 먹고 나왔어. 잠시 쉬는 시간이지?”

진채연은 품에서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거 여름옷들이야.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되는데, 율도의 여름은 누리마루보다 훨씬 더울 거야.”

선물을 받아든 반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언니......”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너도 다음은 급여 받아서 나한테 선물해주면 되잖아.”

진채연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반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 전 예린이 4군단으로 실습 간 덕에, 앞으로 당분간 진채연은 골치 덩어리 예린을 따라다녀야 하는 고충을 덜게 되었다. 그 덕분에 자유 시간도 많이 남게 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 동안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디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참, 어제 퇴근하고 취사부 언니들과 함께 잠깐 시청 부근에 갔었거든요? 근데 거기서 전에 누리마루에서 뵈었던 주 나라 황자님을 보았어요. 그 분, 여전히 멋지고 잘 생기셨더라구요.”

“응? 주 나라 황자님? 황정국 황자님 말이야?”

진채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정국 황자님이라면 이미 자기 나라로 떠났는데? 혹시 잘못 본거 아니니?”

반디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셨지만 그 잘생긴 얼굴은 가려지지 않더라구요. 틀림없이 황자님이었어요.”

“에이 설마...... 그럼 황자님이 시청 부근을 돌아다니고 계셨던거야?”

“어디론가 분주히 걸어가고 계셨어요. 한번 황자님 이름을 불러볼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바빠 보이셔서...... 또 얼굴도 뭔가 걱정이 많은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지나가시는 모습만 보고 있었어요.”

“어디론가? 혹시 황자님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기억나니?”

“음...... 시청 광장에서 시청 건물 뒤쪽 길로 가셨던 것 같아요.”

반디의 표현이 두루뭉술하긴 했지만, 아마 북쪽을 향해 갔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시청의 북쪽에는 대원수부가 있고 그 뒤로 여러 상업지역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민들의 거주 지역들이 나오고, 백화의 북쪽 끝 백화산과 맞닿은 지역이 나온다.

‘주 나라 대사관도 시청의 남쪽에 있는데, 황자가 왜 북쪽으로? 게다가 황자는 물론 주 나라 유학생들 모두 귀국길에 오른 마당에 황자가 아직 율도에 있다는 건......’

그러다 문득 진채연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백화의 북쪽, 백화산에 4군단 본부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예린이 그곳으로 실습을 나가 있었다.

‘설마......?’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그녀를 엄습했다.

­ 오전 10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강운예는 집무실로 총참모장 한신 대장, 정보본부장 이기백 중장을 따로 불러 보고를 받고 있었다.

“현재 2군단은 흥원 일대를 점령하고 남은 반란군 잔당들을 소탕하는 중입니다. 6군단 역시 흥원과 태진과의 국경 지대를 확보하고 진지 및 요새 구축에 들어갔습니다.”

“도로 공사 작업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궤고 있던 강운예가 짧게 물었다.

“내일 27일부터 3통문에서부터 흥원, 태진 국경을 잇는 도로 공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흩어진 반란군 잔당들은 아주 극소수이기 때문에, 공사 진척에 차질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기백 중장이 또 다른 보고서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대월국 성산번으로 침투한 4군단 무사들도 ‘도구’를 안전하게 탈취해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상 도착은 열흘 후인 36일입니다.”

한신 대장이 강운예를 바라보며 물었다.

“작은 부인의 영애께서도 대월국 7왕자와 좋은 만남을 계속 갖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강운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좋아하면 잘 된 일이겠지. 예나 그 아이도 만족한다면 나 역시 기쁠 걸세.”

그가 큰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소실의 소생이라지만 예나도 엄연히 내 아이야. 내 아이를 정략에 이용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 같이 아픈데, 그 아이가 왕자를 싫어하기라도 한다면...... 어쨌든 아직까지 둘이 좋아 하는 것 같아 보이니 그저 다행일 뿐이네. 참, 천제국 놈들과 반란군의 전투가 있었다면서? 전투 결과에 대한 정보는 모두 들어왔나?”

이기백 중장은 고개를 저었다.

“천제국군이 개골령 일대에서 반란군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후 남은 병력들을 추격 중이라는 것 뿐, 자세한 사항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흑영단원들이 계속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현장 상황이 계속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강운예는 알았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백 중장은 이어서 서부의 주 나라와 남쪽 파림의 군사 활동에 대한 보고를 계속했다.

보고를 들은 강운예가 두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총참모장은 전략기획본부장한테, 통령 통해 파림으로 국서 한 장 보내라고 전달 해. 내용은 ‘귀국에게도 그럴싸한 계획이 있겠지, 우리 군에게 처맞기 전까지는. 마지막으로 당부 컨데, 처맞고 후회하기 전에 모든 군사적 움직임을 멈추고 그대들 행위의 진위에 대해 우리에게 소상히 밝혀라.’ 이 말을 딱 외교적 수사로 바꿔서 보내라고 하고.”

한신 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외교적 수사로 바꿔도 확실히 파림 놈들이 겁먹을 수 있게 글을 쓰라고 전달하겠습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에 있던 여무사가 들어와 이기백 중장에서 쪽지를 하나를 전해 주었다.

쪽지를 받아본 이기백 중장은 곧장 강운예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 나라 대사관에 잠입해 있는 우리 흑영단원이 보낸 소식입니다. 지금 주 나라 대사관이 난리가 났다는데, 귀국길에 올랐던 황정국 황자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뭐? 정국 황자가 사라져?”

“네, 지금 주 나라 대사관 사람들이 백방으로 흩어져 황자를 찾으러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항에 대해 새로운 내용이 확인되는 데로 계속 보고 드리겠습니다.”

강운예도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잠시 깍지 낀 손을 턱에 궤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강운예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밖에 있던 전속부관을 호출했다.

“지금 당장 4군단 본부에 연락해서, 실습 나와 있는 예린이 잘 있는가 확인해서 보고하고, 혹시 경무관에서 실습 받으러 온 학생들 중 예정에 없는 다른 학생이 더 들어 오지 않았는지도 같이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해.”

전속부관은 명을 받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전쟁을 논하면서도 차분하고 침착하기만 하던 강운예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한신 대장이 물었다.

“주 나라 황자가 큰 영애에게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응, 그럴 가능성이 높지. 둘이 같이 가출한 적도 있으니.”

“주 나라 황자가 4군단 본부를 찾아간들 큰 영애를 만날 수나 있겠습니까? 일반 부대도 아니고, 우리나라 최정예 무사들이 모여 있는 4군단 본부입니다. 아마 몰래 잠입하려 해도 도중에 잡히겠지요.”

“부대 무단 침입에 대한 군형법상 형량이 징역 3년이었나? 황자가 잡히면 주 나라에 안내주고 그냥 우리 법대로 처리해 버려? 아님 그냥 내 손으로 그 자식을......!”

강운예는 울그락푸르락거리는 얼굴로 손마디를 우두둑, 소리를 내며 꺾었다.

“그래도 정말 황자가 영애 때문에 자기 부친인 황제의 명도 어기고 도망쳐 나와 4군단 본부까지 간다면, 그 마음이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귀여워? 귀엽긴 뭐가 귀여워? 총참모장은 딸 없이 아들만 키워서 그래! 딸 가진 아빠 심정에 황자 그 자식이 하는 짓이 귀여워 보일 거 같애? 내 눈에는 귀여운 게 아니라 금지옥엽 같이 키운 내 딸 훔치러 오는 도둑놈 같아 보이거든?”

강운예는 갑자기 열을 내며 다시 밖에 응접실에 있는 여무사를 호출했다.

“평연당 백영단장한테 연락해서, 내가 호출했다고 당장 이리로 오라고 전해. 아, 그리고 전에 누리마루로 예린이 찾으러 갔던 그 무관, 진 대위하고 했던가? 그 친구도 함께 데리고 들어오라고 해! 얼른!”

강운예는 마치 전투 명령을 내리듯 서두르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