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대동력 9,994년 5월 25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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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대월국 흥원번 율도군 2군단 임시 집결지
영록과 성시우 대위가 이끄는 군경 여단 무사들은 7명의 반란군 잔당을 붙잡아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가는 중이었다. 그 중에는 영록이 잡은 두 녀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록에게 장자검을 휘두르다가 철편으로 머리를 얻어 맞은 놈은 아직 인사불성 상태였다. 숨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서 다른 포로의 등에 업혀 가고 있었다.
10리쯤 말을 몰고 이동하자 2군단 직속부대들과 지휘부가 모여 있는 집결지가 나왔다.
집결지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창을 들고 두 명의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투구에 달린 술과 갑주의 모양을 보고 집결지로 들어오는 이들이 영부인 친위 정예 군경 기마 여단 무사들과 그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마루한이라는 사실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
병사들이 군경 여단 무사들이 끌고 오는 포로들을 보고 수근거렸다.
“오는 도중 반란군 잔당들을 잡은 모양이군. 역시.”
무사들의 뒤에서 말들을 끌고 오던 군경 여단 지원병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포로들 중에 두 놈은 마루한께서 직접 잡은 놈들입니다!”
“오, 정말이오?”
이 말에 병사들이 집결지에 모여 있는 군사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루한께서 포로들을 붙잡아 복귀하신다! 영록 마루한 만세!”
“영록 마루한 만세!”
이 소리를 들은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말을 타고 들어오는 영록을 경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거수 경례를 올렸다. 아군들끼리 모여 있는 집결지였기에, 목례가 아니라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다.
“아직 스무 살도 안되었다면서 포로들을 잡아오다니...... 역시 마루한은 마루한인가 보네?”
“태상국 기하께서 직접 무예를 가르쳐 주셨다잖아?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는 것도 당연하겠지.”
영록은 쑥스럽게 웃으며 그들의 경례에 일일이 화답해 주었다.
병사들의 환호성이 집결지 일대에 가득했다. 이 소리에 지휘부 막사 안에 있던 박윤수 중장도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인지 살펴보았다.
“마루한께서 군경 여단 무사들과 함께 반란군 잔당들을 붙잡아 돌아오셨답니다.”
그의 전속부관이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와 보고했다.
박윤수 중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2군단 병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록과 군경 여단 무사들이 지휘부 막사 앞에 당도했다. 영록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군단장을 내려다보았다.
박윤수 중장이 그에게 짧게 거수 경례를 올렸다. 영록도 웃으며 경례를 받고 말에서 내렸다.
“잔당들을 손수 잡으셨다 들었습니다. 행여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박윤수 중장의 물음에 영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루한께서 직접 전장 중에 뛰어드셨다니 송구스럽습니다. 일단 막사 안으로 드시어 편히 쉬시지요.”
영록이 말을 지원병들에게 맡기고 막사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성시우 대위와 군경 여단 무사들은 잡아온 포로들을 2군단 군경 대대에 넘기고 영록을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때, 박윤수 중장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귀관의 임무가 무엇인가?”
박윤수 중장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시우 대위를 쏘아보며 물었다.
“마루한을 안전하게 호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귀관은 마루한께서 전장터에서 직접 적도들과 칼을 주고받도록 그냥 방치했단 말인가? 이는 마루한 호위에 전념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행동 아닌가?”
추상 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성시우 대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먼저 포로를 잡자고 말한 거에요. 제가 시킨 일이라구요. 저 사람은 아무 죄도 없어요.”
영록은 박윤수 중장이 성시우 대위를 다그치는 것을 보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다시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박윤수 중장은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루한, 외람된 말씀이오나 앞으로 마루한께서는 전투에 참여하는 일은 자제해 주셔야 합니다. 혹여 마루한께서 다치시거나 적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그 날로 우리 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저도 강운예 관장님 밑에서 열심히 수련했어요! 전쟁터에 나가도 쉽게 다치거나 붙잡힐 만한 실력은 아니란 말이에요! 자신이 있어서 내가 먼저 반란군 잔당들을 붙잡자고 한거고, 결국 이렇게 붙잡아 왔잖아요? 절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군단장님!”
영록의 날카로운 말에도, 박윤수 중장은 여전히 냉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태상국 기하께서도, 마루한께서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 명하신 것으로 압니다. 부디 제가 하는 말에 노여워하지 마시고, 태상국 기하의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영록도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불쾌해하는지 표정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지원병들이 점심을 먹지 못한 무사들을 위해 군단 취사부에서 전투식량을 받아왔다. 다른 무사들과는 달리, 영록의 식사는 같은 전투식량이긴 했지만 쟁반에 올려진 그릇들에 정갈하게 나눠 담아 가지고 왔다.
영록은 가져다 준 전투 식량을 조금 떠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밥이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직도 박윤수 중장의 말 때문에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뭐 이제 사사건건시비 거는 거 같은데?’
영록은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집결지 내였기에 무기도 모두 막사 안에 내려놓았고 투구도 벗어 놓은 상태였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율도군의 검은 전포를 입은 도깨비 하나가 그의 앞을 걸어 지나가고 있었다. 율도에서도 도깨비들을 자주 보긴 했지만, 영록은 그가 반란군 잔당인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깨비는 이를 보고 우습다는 듯이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영록의 얼굴과 그가 입고 있는 유성금 갑주를 보고는 허리를 숙여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혹시 영록 마루한이 아니신지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영록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네...... 같은 편인지도 모르고, 제가 실례를 저지를 뻔 했네요.”
“실례라니요? 뭐 제게는 자주 있는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영록은 잠시 그의 전포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전포에 계급이나 이름표가 안 붙어 있죠?”
그러면서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여차하면 막사 안에 있는 군경 여단 무사들을 부르려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챈 도깨비가 손을 들어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어이쿠, 이래서 제가 아군한테 의심받는 일이 다반사라니까요? 전 사실 흑영단원입니다. 다들 저를 흑영단원 율도 도깨비라 부르지요. 우리 흑영단원들은 4군단 무사들처럼 전포에 계급이나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 군표 역시 휴대하지 않는답니다. 이래도 마루한께서 의심을 지우실 수 없으시다면, 절 군단장에게 데려가 보시지요. 어차피 군단장에게 보고하러 오는 길이었는데, 그럼 그들이 제 신분을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그 말에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영단원 중에도 도깨비들이 근무하고 있는 줄 몰랐어요.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흑영단에는 저 같은 도깨비는 물론 포각수, 두두리, 두억시니까지 모든 종족 출신 단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동 천지 모든 나라에 흑영단원이 없는 곳도 없지요. 마루한께서도 나중 우리 흑영단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네, 앞으로 더 많은 관심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흑영단 분들께 빚을 진 적이 있지요. 제가 성산번에 납치되어 있을 때, 4군단 무사님들과 더불어 흑영단 분들의 도움 덕분에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거든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4군단 무사들과 우리 흑영단원들의 영웅적인 희생이 있었다지요?”
그 말에 영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4군단 무사님들이 저와 예린이를 지키다가 돌아가신 건 맞는데, 흑영단원들도 희생되셨다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율도 도깨비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 성산번에 있던 여성 흑영단원 한 명이 마루한과 영예를 탈출시키기 위해 미끼 역할을 하다가 성산번군들에게 붙들렸습니다. 그 후 성산에 있던 모든 흑영단들이 반란군들의 추격을 피해 다른 곳으로 철수하면서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아마 살아 있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 말에 영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말도 안돼, 그럼 그 때 그 여자분도......?”
영록은 자신을 위해 희생된 이가 더 있다는 말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오후 5시, 대월국 우산번 세천벌 일대
음학수가 생포되면서, 성산번군의 후위를 지키던 그의 무사단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백사가 이끄는 천제국 기병들은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사냥하는 한편, 일부 병력들이 계속 심운보의 본대의 뒤를 따라 추격하고 있었다.
전투용 망치에 머리를 맞아 기절했던 음학수가 정신을 차린 것 전투가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의 갑주와 투구는 모두 벗겨졌고, 전포만을 입은 채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천제국 기병 대장 백사가 붉은색 마갑을 두른 자신의 말에 물을 먹이고 있었다. 투구를 벗은 백사의 얼굴은 마치 여인처럼 희고 고왔다.
아니,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피부보다 더 하얀 백발의 긴 머릿결을 옆으로 넘기며 말을 쓰다듬고 있었다.
음학수의 인기척을 느낀 백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깨었는가?”
음학수는 묶여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황망하듯 말했다.
“......전투는? 내 무사들과 번군들은 어떻게 되었나?”
백사가 조용한 말투로 대답했다.
“전투는 보다시피. 네 부하들 1/3은 죽었고, 1/3은 잡혔고, 1/3은 도망갔다.”
“하하, 더러운 타깨비들에게 내가 지다니......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음학수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백사는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베일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의 본대가 곧 도착할 것이다. 너와 살아 있는 포로들 모두 두억시니의 먹잇감이 된다.”
백사는 그를 향해 할 걸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나 역시 도깨비다. 동족을 두억시니의 먹이로 던져주는 역겨운 짓을 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허리를 기울이며 음학수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투항하라. 나를 도와 대월국 반란군 놈들 잡는 일에 협조한다면, 넌 살 수 있다.”
그녀의 말에 음학수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한동안 아무 말없이 심한 갈등으로 괴로워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무사다. 죽으면 죽었지 적에게 굴종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단,”
그는 애절한 눈빛으로 백사를 바라보았다.
“산채로 두억시니들에게 뜯어 먹히는 치욕 또한 당하고 싶지 않다. 그대도 무사라면, 정말로 우리를 동포라 여기고 있다면......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날 깨끗하게 보내다오.”
그의 말에, 백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서라.”
음학수는 길게 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쉭!
부지불식간에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백사의 손에는 예리하게 휜 얇은 외날도가 들려 있었다. 칼끝으로 도깨비의 검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음학수의 몸이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그와 함께 예리하게 잘린 그의 머리가 땅바닥을 떼굴떼굴 굴러갔다.
“......치워라.”
백사는 천조각으로 칼에 묻은 핏물들을 닦아 내며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부하들이 음학수의 시신을 내어가는 동안, 부관이 다가와 보고했다.
“포로들을 모두 포박해 놓았습니다. 몸이 성한 놈은 121명, 다친 곳 있는 놈이 67명입니다. 그들 중 반란군들이 끌고 다니던 유녀들도 있습니다.”
“한 데 모아 놨다가 본대에게 인계하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라.”
백사는 머리를 끌어 올려 하나로 묶고는, 다시 붉은색 투구를 쓰고 얼굴을 가렸다.
백사가 이끄는 천제국 기병들의 기습으로 음학수의 무사단들이 궤멸 당하는 중, 행군에 지쳐 후위까지 내려와 있던 유녀들은 오도가도 못하고 모두 천제국 기병들에게 붙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천제국 기병들은 반란군 무사들과 번군들의 무기와 갑주를 모두 빼앗기고 꽁꽁 묶어 놓았다. 하지만 유녀들은 묶지 않고 한 구석에 앉혀 두기만 했다. 어차피 포로들을 모아 놓은 곳 주변을 천제국 기병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니 도망치지도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유녀들은 겁에 오돌오돌 떨며 서로 소근거리고 있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우리 다리 사이로 올라타는 새끼들이 달라지는 거지, 우리 신세가 달라지지는 않을 거야.”
“두억시니들은 다른 종족들을 막 잡아먹는 다던데, 설마 우리도 잡아 먹히는 거 아니겠지?”
“설마......”
“아, 이럴 거면 아까 그 아리랑 년처럼 도망가는건데, 그 때 겁먹어서 도저히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야.”
“그년 도망갔어? 어떻게?”
“아까 말 탄 사람들끼리 어울려 싸울 때, 갑자기 저쪽 숲으로 달려가더라구. 번군들도 다들 싸우느라 정신없어서 그년 도망가는 거 아무도 잡으려 하지도 않고...... 나도 그때 도망갔었어야 하는건데 진짜......”
그 때 말을 탄 천제국 기병 하나가 다가와 그녀들에게 소리쳤다.
“이년들 조용히 못 해? 한 번만 더 떠들면 두억시니들 오는 대로 모두 그 놈들 먹잇감으로 넘겨줄 테니 그리 알아! 자, 이래도 떠들고 싶어? 떠들고 싶으면 한 번 떠들어 봐!”
천제국 기병의 일갈에, 유녀들 모두 눈물을 찔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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