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92화 (92/217)

〈 92화 〉 대동력 9,994년 5월 25일 (3)

* * *

­ 오전 7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본성 7층 침실에서 알몸으로 어린 소년을 끌어안고 코를 골며 자고 있던 통요자 (子, 오등작 중 네번째 작위, 자작에 해당) 조암천은 성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도깨비들의 소란스러운 외침에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밖이 왜 이리 시끄러운 게냐?”

그는 이 성의 원래 주인이 입던 비단으로 만들어진 속창의를 몸에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과 몸에서는 술 냄새, 썩은 음식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가 처음 본 것은, 침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두 명의 번군이 목이 베여진 채 죽어 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조암천은 이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악~! 아, 아니, 이 무슨~! 여,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여봐라! 여봐라~!”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래층에서 세 명의 무사들이 7층으로 뛰어올라왔다.

“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이 놈들이 왜 문 앞에 죽어 있어? 설마 흥원놈들이 여기까지 들어왔던 것이냐?”

무사들이 그 앞에 부복하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밤 사이 누군가 성으로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새벽녘에 경비를 서고 있던 번군 십여 명이 살해되었고......”

무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흥원공의 가족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마 성에 침입한 자들이 모두 데리고 나간 듯 합니다.”

“뭐, 뭐라?!?!”

조암천은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침실 옆에 있는 작은 방 문을 벌컥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그가 남색을 탐하기 위해 잡아온 어린 도깨비 소년들이 갇혀 있었다. 소년들도 밤 사이 있었던 소란에 놀랐는지 모두 깨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년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던 조암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대승의 어린 아들놈이 사라졌다...... 놈들이 그 아이도 데리고 간 게야?!”

그는 갑자기 성난 얼굴로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여러 가닥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채찍을 들고 복도에 부복해 있는 무사들에게로 다가왔다.

“네놈들은 성 안으로 침입자가 들어와 활개치고 다니는 동안 대체 뭐하고 있었던 게야? 이 쓸모 없는 버러지들아!”

그는 자신이 ‘남색의 상대로 끔찍이 아끼던’ 흥원공 진대승의 막내 아들 진기령이 없어진 것에 크게 노해 있었다.

조암천은 무사들의 몸뚱이에 마구 채찍을 휘둘렀다.

무사들 모두 갑주를 입고 있었기에 채찍질에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인의 거친 말은 그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각하. 하오나 살아 도망친 흥원의 무사들과 공녀가 아미산에 숨어 있으니, 흥원공의 가족들 모두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을 겁니다. 기병들로 쫓아가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니......”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 천한 것들의 시체들이나 치우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이 빌어먹을 머저리들!”

조암천은 무사의 얼굴에 채찍을 집어던지고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사는 입술을 깨물며 침실 앞에 쓰러져 있는 번군들의 시체를 끌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당장 아미산으로 들이칠 것이다. 북해산 요새에 가 있는 놈들 빼고 모두 정오까지 성으로 집결시켜. 조금이라도 늦는 놈들은 단단히 각오하라고 일러.”

조암천은 소년들의 도움을 받아 전포와 갑주를 입으며 화가 안 풀린 듯 씩씩거리는 말투로 전령들에게 말했다. 자신이 직접 번군들을 이끌고 아미산을 공격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조암천의 명을 받은 전령들은 즉시 흥원 각지에 퍼져 있던 통요번 번군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전령들이 방을 막 빠져나갔을 때, 7층 복도에서 한 차례 요란한 외침이 들려왔다.

“전령들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응? 뭐라고? 잠시, 잠시만 기다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아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이, 이봐! 이봐들~!”

그러더니 누군가가 헐레벌떡 조암천이 있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각하! 지금 아미산을 공격할 때가 아닙니다!”

조암천이 돌아보니 흥원성 서쪽 마을로 나가 있던 맹약무사 하나가 그의 앞에 부복해 있었다. 그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갑주는 물론 전포도 제대로 차려 입지 못하고 장자검 한 자루만 손에 쥐고 있었다. 여기까지 뛰어온 것인지, 그의 옷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꼴은 또 뭐야? 쓸데없는 훈계질이나 하려는 거면 닥치고 꺼져.”

“각하, 감히 훈계질 하려고 이리 달려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아미산을 공격할 겨를이 없습니다!”

“겨를이 없어? 우리에게 남는 게 시간인데 왜 그럴 겨를이 없어?”

맹약무사는 손가락으로 서쪽 창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새벽에 율도의 대군이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지금쯤이면 흥원성 10리밖까지 당도했을 겁니다!”

율도라는 말에, 조암천의 하얀 얼굴은 한 순간에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유, 유, 율도라고? 네 놈이 뭔가 잘 못 안 것이 아니냐? 율도의 대군이 움직였다면 필경 북해산 요새에서 봉화가 올랐을 거 아니냐?”

그가 있는 침실의 창밖 너머로도 서쪽에 있는 북해산 요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봉화대는 어떤 사변이 발생하면 밤에는 불빛으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봉화대에 있는 우리 군이 이미 율도군에 당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율도군이 흥원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노란색 사자 얼굴이 그려진 검은색 깃발을 들고 있는 율도군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다!”

맹약무사의 말에도 조암천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맹약무사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각하, 그들은 모두 기병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언제 율도군이 성으로 들이닥칠지 모를 일입니다. 율도는 전쟁에 군단 단위로 나서고, 1개 군단은 3만명이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천명이 조금 넘는 우리 번군들로 몇 만이 되는지 모르는 율도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각하, 서둘러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거듭되는 맹약무사의 재촉에, 손톱만 물어뜯고 있던 조암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사단을 해체한다. 전원 통요번으로 철수하라......”

조암천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자신의 번군들을 모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성안에 쌓아 두었던 약탈품들을 마차에 싣고 황급히 흥원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백 여명의 무사들과 번군들도 자신들이 약탈한 금품들을 말에 싣거나 등에 보따리처럼 짊어지고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통요번 번군들의 행렬이 성 밖의 해자에 걸쳐 있는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누군가 저 멀리 언덕 위를 가리키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노, 노, 놈들이 왔다! 놈들이 저기 있다!”

그 소리에 조암천도 깜짝 놀라 말 위에서 번군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곳의 맞은편, 서쪽 구릉지대에 칠흑같이 검은 철갑주를 입고 손에 16자 (약 5m) 길이의 장창을 들고 있는 십여명의 기병 무사들이 말 위에 올라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암천은 자기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 오전 8시, 대월국 흥원번 서쪽숲 마을 일대

영록은 2군단장 박윤수 중장과 군단 지휘부들과 함께 동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얼마 전 비가 내렸는지 길의 군데 군데에 진창이 되거나 빗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었다. 율도에서 계속 반듯한 돌로 잘 포장된 도로 위로만 말을 타고 다니다가 이런 길을 가게 되니 뭔가 느낌이 묘하게 이상했다.

숲속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록은 혹시 적인가, 화들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있는 이들은 먼저 흥원으로 전개해 들어온 5기동사단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숲속 깊숙한 곳에 숨어 군단 지휘부가 지나는 길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 군의 산병 (?兵, 적정을 척후하거나 군부대 행렬의 측면, 또는 최전선을 엄호하는 부대) 들입니다. 이 일대는 이미 우리 군이 점령하고 수색도 끝마친 곳이니 염려 않으셔도 됩니다.”

성시우 대위가 영록의 불안한 표정을 눈치채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탕......! 탕.......!

저 멀리서 간간히 총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영록은 한 손을 옆구리에 찬 권총을 갖다대고 조심스레 말을 몰았다.

영록이 검은 말 랜슬롯을 타고 가는 동안, 나머지 말들은 뒤에 따라오고 있는 군경 여단 지원병들이 말 고삐를 붙잡고 데려오고 있었다. 지원병들은 다른 군경 여단 무사들의 말들도 함께 데리고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 적진에 들어선 만큼, 군경 여단 무사들 모두 무기를 꺼내 들고 영록의 옆에 바짝 붙어 말을 몰며 호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경 여단 무사들은 모두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대부분 작은 뇌홍식 권총을 가지고 있었고, 강선소총을 든 무사는 셋, 산탄총을 든 무사는 한명이었다. 군경 여단 무사들의 주된 임무는 군사 경찰 활동과 요인 경호였기 때문에 철기 무사들처럼 중무장을 하지는 않았다. 총 외에도 휘어진 군도를 패용하고 있었고, 영록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진압용 철편도 휴대하고 있었다. 중대장 성시우 대위와 전령 무사가 활과 화살을 휴대하고 있긴 했지만, 살상용 화살보다는 신호용, 혹은 제압용 화살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 실전에서는 총, 아니면 군도를 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길은 숲 안의 어느 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마을은 대동 동부에서 초원길로 향하는 무역로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 제법 번화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물론 율도 백화에서 보았던 벽돌로 지어진 아름답고 근대적인 건축물들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지붕위에 얼기설기 이엉을 얹은 허름한 초가집들이 즐비한 성산에 비하면 번듯한 기와집들이 꽤 많이 눈에 보이는 것이 확실히 더 ‘부자 동네’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객잔’, ‘여관’ 이라 쓰여진 숙박 시설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 뒤로는 붉은 등이 걸려 있는 술집 등 홍규 건물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다들 전쟁 때문에 장사를 접어 둔 상태인 듯, 문과 창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고 빗장도 걸려 있었다.

이 골목을 지나니 일반 민가 건물들의 모여 있는 곳이 나왔다. 이 마을에도 이미 율도군이 들어와 건물 사이 사이로 말을 타고 순찰을 돌거나 창칼을 들고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군사들은 군단장과 마루한의 행렬을 보고 거수 경례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어떤 나이 어린 병사는 군단장을 향해 거수 경례를 했다가 옆에 있는 선임병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기도 했다.

영록은 그들이 경례를 하면 나도 받아줘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모두 경례 대신 목례를 하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이는 우리 군의 오래된 전장 행동 지침 중 하나입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중에 이처럼 사방이 탁트인 야외에서는 무관 등 높은 계급의 상급자를 만나면 절대 경례를 하지 말고 목례만 간단히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지요. 상급자들도 모두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군사들이 전장에서도 예의 다 차리고 군단장님이나 마루한을 보고 너도 나도 경례를 하게 된다면, 총이나 활을 가지고 인근에 숨어 저격하려는 적들이 이를 보고 누가 지휘관인지, 누가 높은 계급의 사람인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시우 대위가 영록에게 다가와 계속 설명해 주었다.

“물론 실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지요. 군단장님이나 마루한을 보아도 똑바로 경례를 하지 않는다면 곧장 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영록은 문득 충무공 함을 타고 바다를 건너올 때 선실로 가는 복도에서 수군들이 그를 볼 때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깍듯이 경례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길은 마을 중앙에 있는 넓은 공터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마을의 잔치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듯 보였다.

공터 중앙에는 커다란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크기나 두께로 보아 심어진지 족히 몇 백 년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였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되려는 5월의 날씨에도 푸른 잎사귀들은 온데간데없고 앙상한 가지들만 흉물스럽게 뻗어 나와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공터로 들어서던 영록을 나무를 보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나무 가지 여기 저기에는 도깨비들의 시체 수십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도깨비 시체들의 목에는 모두 밧줄이 묶여 있었다.

밧줄에 목이 메인 도깨비들은 입을 벌리고 혀를 길게 빼물고 죽어 있었다.

남자 도깨비의 시체도 있었고, 여자 도깨비의 시체도 있었다.

나이 많고 늙은 도깨비의 시체도 있었고, 불과 8, 9살도 안되었을 것 같은 어린 도깨비의 시체도 있었다.

시체들의 몸에는 대부분 옷이 걸쳐져 있지 않았다. 죽어 진액이 빠져나가 뼈만 앙상하거나 날짐승에 파 먹혀 군데 군데 살점이 뜯겨져 나간 시체들이 다수였다. 어떤 시체는 누가 그랬는지 불에 검게 타버린 것도 있었고, 팔 다리 등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허리 아래가 절단되어 속에 있던 내장과 창자들이 몸 밖으로 길게 빠져나온 것도 있었다.

말을 타고 나무 가까이 다가갈수록 난생 처음 맡아보는 역한 썩은 냄새가 코로 확 찔러 들어왔다. 속이 매슥거리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구역질이 올라왔다. 영록은 다급히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 막아 버렸다.

시체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나무 너머에는 율도군에 붙잡힌 스무 명 가량의 통요번 반란군 도깨비들이 포승줄로 포박된 채 공터 구석에 꿇어 앉혀져 있었다. 그들 중 싸우다 붙잡힌 자는 없는 것 같았다. 모두 갑주를 입지 않은 상태였고, 전포를 제대로 걸치고 있는 자도 몇 명 없었다. 다들 상의를 벗고 있든 하의를 벗고 있든 어디 하나 옷을 벗어 두고 있다가 끌려 나온 모습이었다.

한 무리의 율도군들이 공터로 수십 여구의 시체들을 더 가져오고 있었다. 시체들 중에는 반란군들과 같은 전포를 입은 것들도 있었고, 아닌 것들도 있었다. 여자의 시체들도 제법 많이 들려오고 있었다.

포로를 잡고 있던 무관이 군단장을 알아보고 그에게 목례를 올렸다.

박윤수 중장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곁에서 따라오던 영록 역시 말을 멈추었다.

박윤수 중장은 포로들과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마을에 있던 반란군들인가?”

“네, 맞습니다.

“뒤에 있는 시체들은?”

“포로들 가까이 있는 것들은 모두 도망치던 반란군 놈들을 우리 군이 쫓아가 사살한 것들이고, 그 우편으로 따로 놓고 있는 시체들은 이 마을 주민들의 시체입니다.”

그 말에 박윤수 중장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죽은 여자들은 대부분 어리고 젊은 여자들이었다. 시체는 모두 발가벗겨져 있었다. 몸 여기 저기에 상처가 나 있거나 피투성이가 된 시체들도 있었다.

율도군은 시체들을 보기 거북했는지 근처 집들을 뒤져 거적들을 가져와 시체를 덮어주었다. 몇몇은 사다리를 가져와 떡갈나무 위에 걸려 있던 시체들을 내리고 다른 시체들과 함께 수습해 주기도 했다.

그 때, 어느 집에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빨간 머리의 도깨비 여자가 알몸 상태로 집 밖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과 몸 여기 저기에는 누군가에 얻어 맞은 듯한 멍자국이 있었고, 하얀 다리 안쪽에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다가 말라 굳어버린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검은 갑주를 입은 낯선 군사들을 보고 겁에 질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닌 것인지 쉽게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녀의 눈길이 마을 공터 구석에 온 몸이 결박된 채 잡혀 있는 통요번 반란군 포로들이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갑자기 그녀가 이를 악물고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다.

빨간 머리의 도깨비 여자가 땅에 떨어져 있던 주먹 만한 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돌을 쥔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포로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죽어! 죽어! 죽어 이 나쁜 새끼들아! 죽어! 죽으라고!”

포로들을 지키고 있던 율도군 두 사람이 순식간에 빨간 머리의 도깨비 여자를 가로막고 양 팔을 잡아 바닥에 넘어뜨렸다. 여자는 율도군에게 제압된 상태에서도 손에 쥔 돌을 놓치지 않고 반란군 포로들을 노려보며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놔! 놔, 이 새끼들아! 나 저 새끼들 죽여야 해! 너희들 저 새끼들이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모르면 이거 놓으라고! 놔! 안 놔?! 니들도 저 새끼들이랑 같은 편이지?! 너희들도 나쁜 새끼들이랑 같은 편인 거지?! 나 저 새끼들 죽여야 한다고! 놔! 이거 놓으라고 새끼들아!!!”

빨간 머리의 도깨비 여자는 두 명의 율도군에게 눌린 채로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반란군들에게 욕된 일을 당한 여자인 모양입니다.”

박윤수 중장 뒤에 있던 부군단장 용마로 소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란군이 흥원을 점령한 기간이 몇 개월이 넘는다고 했지? 이곳 사람들 모두 그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겠군.”

“시체들이 부패한 정도로 보아 놈들이 이 곳으로 들어온 건 최소 3개월은 넘었을 것 같습니다. 도깨비들이나 두억시니들이나, 저런 것들을 정말 같은 사람이라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 아직도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 사이 다른 군사 하나가 시체를 덮으려 가져왔던 거적을 들고 와 빨간 머리 도깨비 여자의 몸을 덮어주었다. 군사들은 거적으로 그녀의 몸을 가리고 포로들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는 군사들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반란군 포로들을 향해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영록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영록은 율도군에게 끌려가는 빨간 머리 도깨비 여자와, 그녀의 외침을 들으며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포로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의 눈에 빨간 머리 도깨비 여자에게서 유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외침은 마치 유민의 외침처럼 들렸고,

그녀가 울부짖는 모습은 마치 유민의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또 운용 엄마의 모습도, 9호 조사실 여대생 누나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율도군에게 붙잡힌 반란군 포로들은 모두 애국 청년 십자군에 있던 놈들인 것만 같았다.

유성모, 마선욱, 박광, 전도한, 온 몸에 울긋불긋 문신을 하고 있던 다른 조폭들 모두......

그는 이를 악 문 채, 분노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영록이 말을 몰아 군단장 옆으로 나아왔다.

“저 포로들...... 바로 처형시킬 거죠?”

영록의 물음에 박윤수 중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흥원 점령입니다. 지금 당장 포로들을 처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루한.”

“그럼, 흥원 점령이 끝나면 저들 모두 처형시킬 거죠?”

그 물음이 꼭 그리 해야 한다는 요구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은 박윤수 중장은 한동안 영록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포로들을 군단 군경대대에 인계하고 태상국이 정한 포로 취급 규정에 따라 처리토록 할 것입니다.”

“그 규정대로라면, 저 포로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저들은 지금 우리 군을 향해 직접적인 적대행위를 하다가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닙니다. 또 이 곳은 아직 우리의 영토도 아니고, 저들에게 해를 입은 이들 모두 우리의 국민들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이 곳 흥원의 지도자나 흥원 주민들이 그들의 법에 따라 알아서 포로들에게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저는 그들이 포로들에게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내어 달라 요구할 때까지 우리 군경대대에 구금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영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군단장님도 모두 보고 들으셨잖아요? 저들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이곳 여자들에게 그......”

영록은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 얼마나 나쁜 짓을 벌였는지 말이에요. 그럼 우리가 힘없는 이곳 주민들을 대신해 저들에게 벌을 내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영록의 말에, 박윤수 중장은 한동안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 그가 뒤에 있는 무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뒤로 물러 있어라.”

군단 지휘부 무사들이 말을 몰아 군단장과 마루한이 있는 곳에서 멀찌감치 뒤로 물러섰다. 성시우 대위와 군경 여단 무사들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곁에 있던 무관들이 그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자, 그제서야 박윤수 중장은 영록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지,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려 판결을 내리고 벌을 주는 법관이 아닙니다, 마루한. 군인이 사람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생명을 취하려는 건 국가가 내린 대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옳고 그름에 따라 정죄 당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건 처형장의 망나니들이 할 일이지, 명예를 아는 군인, 무사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박윤수 중장은 주변에 있는 율도군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디 마루한, 다시는 제 부하 무사들에게 처형장 망나니 같은 일을 시키라고 제게 말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 다시 마루한께 당부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박윤수 중장이 천천히 말을 몰아 포로들을 잡고 있던 무관에게 다가와 당당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포로들은 모두 군단 군경대대에 인계하고 귀관의 제대 지휘관 명에 따라 계속 임무를 수행하라!”

그리고 군단 지휘부를 데리고 흥원성이 있는 동쪽을 향해 계속 말을 타고 나아갔다.

영록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마을 공터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터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집 앞에서, 아까 그 빨간 머리 도깨비 여자가 거적을 걸치고 바닥에 주저 앉아 울부짖는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에, 영록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군단 지휘부가 모두 이동합니다. 이제 이동하시지요.”

성시우 대위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영록은 긴 한숨을 토해내며 여전히 집 앞에 주저 앉아 있는 빨간 머리의 도깨비 여자와 군단 군경대대 무사들에 의해 끌려가는 반란군 포로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 오전 11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진미령은 흥원번의 무사 삼십여명과 함께 흥원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들의 앞에는 율도 도깨비와 율도군의 중기병 대대 무사 200여명이 성을 향해 말을 달려 나가고 있었다.

흥원성에 가까이 다가가니, 먼저 성을 접수하고 내부 수색까지 모두 마친 율도군 경기병 대대 무사들이 성루에 꽂혀 있던 통요번의 깃발을 내리고 있었다. 조암천과 통요번 무사들은 급히 도망치느라 자신들의 군기마저 챙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비어 있는 깃대에 율도군의 깃발을 게양하지 않고 그대로 비워 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미령은 율도군이 정말 이 흥원을 무력으로 점령하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율도군 중기병 대대 무사들과 함께 해자에 걸친 다리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온 진미령은 가장 먼저 성을 점령한 경기병 대대 대대장을 찾아 갔다.

“이 성을 장악하고 있던 반란군들은 지금 다 어디 있소? 그 반란군 통요번 번주놈, 조암천의 소재에 대해 아는 것이 있소?”

처음 보는 도깨비 여자가 자신을 붙들고 이것저것 캐묻듯이 물어오자, 율도군 경기병 대대 대대장은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분은 이 곳 흥원의 공녀 되시는 분입니다. 현재 흥원공이 부재중이시라 실질적인 번주 역할을 하고 계시니, 성심껏 답변 부탁드립니다.”

이제 율도군 전포로 갈아입은 율도 도깨비가 나서서 대대장에게 진미령을 소개해주었다. 그제서야 대대장은 불쾌한 표정을 거두고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반란군들은 자신들의 번이 있는 북쪽으로 도주 중입니다. 현재 우리 대대에서 3개 중대 병력들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역시, 자신들이 살던 고향을 향해 곧장 도망가고 있는 모양이군.”

진미령은 뒤따라온 흥원의 무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 번 더러운 통요번 놈들에게 진 빚을 이번 기회에 톡톡히 갚아줘야겠지? 지금 당장 놈들을 쫓아 간다!”

진미령과 흥원의 도깨비 무사들이 급히 말에 오르려 할 때, 경기병 대대 대대장이 율도군 기병 세명을 그녀 앞으로 데리고 오며 말했다.

“우리 기병들이 어디로 반란군들을 뒤쫓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무사들입니다. 이들의 안내를 따라가십시오.”

진미령은 머리에 쓴 투구를 벗어 대대장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그녀는 짧게 예를 표하고는 다시 머리에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내달렸다. 흥원의 도깨비 무사들도 모두 말에 박차를 가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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