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89화 (89/217)

〈 89화 〉 대동력 9,994년 5월 24일 (2)

* * *

­ 오후 5시, 율도 홍진 소하북항

노를 저어 가는 작은 배 8척이 충무공함을 밧줄에 연결해 부두로 입항시키고 있었다. 충무공함과 함께 백화를 출발한 다른 전선들도 모두 무사히 소하북항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율도의 소하북항은 백화와 더불어 율도 양대 항구로 꼽히는 곳이었다. 이곳은 태진과 우루, 선비 등 대동 동부의 상인들이 초원길로 이동하기 전 바다를 건너 율도로 넘어오는 곳이었다. 대동의 동부와 서부를 오가는 상인들의 1/4정도가 이 바닷길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육로로 대월국의 국경을 지나지 않아도 되고, 그만큼 통행세, 관세 등의 세금을 대월국에 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율도 동해 수군 2함대 사령부도 이곳 소하북항에 있었다. 2함대는 전선을 총 19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3층 갑판을 가진 대형 전선인 2급 전함도 2척이나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율도로 들어오는 상선들을 보호하는 한편, 흥원번 혜연만에 남아 있는 대월국 수군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배가 부두에 닿자 충무공함의 수군들이 닻을 내리고 부두의 말뚝에 밧줄을 매달아 배를 고정시켰다. 돛대 위로 올라간 수십 명의 수군들은 일제히 배의 커다란 돛들을 모두 말아 감고 줄로 단단히 묶었다. 선실 아래에 쌓여 있던 무기들과 각종 화물들을 부두로 나르는 이들도 있었다.

수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영록은 성시우 대위와 영부인 친위 기마 군경 여단 무사들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온 말들은 며칠 간의 항해로 몹시 지쳐 보였다. 땅 위를 달리던 말들에게는 배 안에 갇혀 바다를 건너가는 경험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아직 어린 영록의 다섯 마리 말들은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토하기도 여러 번 토했다고 한다. 함께 온 군경 여단 지원병들이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말들 모두 병들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될 뻔 했다고 한다.

영록은 아직 기력을 되찾지 못한 말들의 등에 올라타기 미안했는지, 말들의 고삐를 잡고 천천히 항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영록이 말을 타지 않아 군경 여단 무사들 역시 말들을 끌고 그를 따라 걸었다.

항구에는 말을 타고 있는 수십 여명의 율도 무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 앞에 있던 중년의 무사가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술이 달린 투구를 쓴 기마 군경 여단과 함께 배에서 내리는 영록을 보고는 그가 마루한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고 곧장 말에서 내려 그에게로 다가왔다.

“율도 육군 2군단 부군단장 용마로 소장, 마루한을 뵙습니다!”

그는 영록 앞에 서서 거수 경례를 올렸다. 영록은 마찬가지로 거수경례로 그의 경례에 화답한 후, 투구를 벗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부군단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용마로 소장은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영록의 손을 잡았다.

“현재 원정군 전체가 대월국과의 국경으로 전개하는 중이라 2군단장이 직접 마루한을 영접하러 나오지 못한 점, 아무쪼록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괜찮아요. 군단장님은 당연히 저보다 군을 먼저 챙기셔야죠. 그런데 원정군이 전개하는 중이라면, 벌써 전쟁이 시작된 건가요?”

“아직 국경을 넘지 않았으니 우리의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봐야겠지요. 우리 원정군 부대들은 지금부터 각자 명 받은 지점으로 이동했다가 태상국 기하의 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지는 대로 동시에 대월국의 국경을 넘어갈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저희와 함께 이동하시지요. 군단 지휘소가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용마로가 영록에게 말을 타고 갈 것을 권했다. 영록은 자신의 말들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검은 말 랜슬롯 위에 올라탔다.

영록은 기마 군경 여단과 2군단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로를 따라 말을 몰았다.

아직 승마술이 능숙치 않아 가끔 허벅지가 쓸려 살이 벌겋게 되기도 하고, 엉덩이가 안장에 부딪히며 멍이 들 때도 있었다. 말이 빨리 달릴 때면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이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검은 말 랜슬롯은 최대한 사뿐사뿐 안전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돌로 다져진 잘 정돈된 도로는 항구를 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역사책에서 본 로마 시대 길과 닮은 이 도로들은 영록이 율도에 도착하면서부터 숱하게 보아온 것들이었다.

그가 이전에 대월국에서 백화로 가는 도중 지나온 초원길에는 마치 현실 세계의 8차선 고속도로 만한 규모의 거대한 도로도 있었다. 영록은 ‘초원길’이란 이름만 듣고 몽골 초원 같은 푸른 초원이 펼쳐진 평야지대를 상상했는데, 실제 초원길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주변에 드넓은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는 건 맞는데, 그 위에는 마차와 수레를 끌고 이동하기 편하게끔 넓은 도로가 뚫려 있었고 말과 마차, 사람들 모두 이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도로 중앙에 노란색으로 줄을 칠해져 있었는데, 마차들은 마치 현실 세계 자동차들이 다니는 것처럼 이 선을 기준으로 우측 통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 주변에는 푸른 풀밭보다는 잘 경작된 농지가 더 많았다. 예전에 사승범과 함께 말을 타고 이 곳을 지날 때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율도가 이 곳을 점령하기 전 초원길은 허허벌판 위에 혼혈 유랑민들이 천막을 짓고 말 키우고 양 키우며 유목 생활을 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누리마루에서 뻗어 나온 강들의 물줄기를 이용해 초원을 비옥한 옥토로 개간하고 농지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말과 양, 소와 여러 동물들을 방목하고 키우는 목장지대도 많이 남아 있고 말이다.

도로가 지나는 곳곳마다 거대한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대동 각지의 상인들이 여는 거대한 시장이 있었고, 늘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승범의 말에 의하면, 매일 축제와 잔치가 떠들석하게 벌어지고 술과 돈과 여자들이 넘치도록 많은 곳이 이 곳 초원길의 도시들이라 했다. 그래서 아직 어린 영록은 출입을 자제하는 것이 영육(?)의 건강에 이로울 거란 말도 덧붙이기도 했다.

율도는 어디로나 도로로 잘 연결되어 있었다. 2군단의 병력들과 병참 물자들 역시 이 도로를 통해 신속하게 대월국과의 국경 지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영록과 용마로 소장 일행은 일렬로 도로를 가득 메우고 동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수레와 마차들의 행렬을 지나 말을 몰고 있었다. 그 수레와 마차들 모두 율도군의 것이었다. 말들이 끄는 마차도 있었고, 커다란 뿔이 달린 소들이 모는 수레도 있었다. 마차와 수레 위에는 모두 단단하게 봉인된 나무 상자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중에는 일전에 영록이 보았던 율도군의 전투식량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도 있었고, ‘폭발’, ‘위험’ 이라고 쓰여진 상자도 보였다. 아마 화약이나 폭탄이 들어있는 무기 상자인 듯 했다.

수레와 마차를 몰고 있는 이들 중에 율도의 검은 전포나 갑주를 입고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인원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현실 세계의 8, 90년대 예비군들이 입었던 전투복과 매우 흡사한 쑥색의 전포를 입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갑주나 무기 같은 건 없었다. 머리 위에도 쇠로 만든 투구가 아닌 옛날 사극에서 포졸들이 쓰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게 만든 초립을 쓰고 있었다.

영록은 예전에 저런 복장을 하고 있는 이들은 몸이 불편해 군에서 정상적인 군복무를 할 수 없거나 개인적인 문제로 4년간 고향을 떠나 군 생활을 하기 힘든 이들을 따로 선별해 ‘군용역’이란 이름으로 대체 복무를 하고 있는 거라 들은 기억이 났다.

영록이 옆에 있는 용마로에게 물었다.

“옆에 물자 나르는 사람들이 군용역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지요?”

“네, 맞습니다. 마루한.”

“저들은 몇 년 동안 의무복무를 해야 하나요?”

“일반 병과 똑같습니다. 그들도 모두 4년간 군에서 복무해야 합니다.”

영록은 문득 대동에 오기 전 보았던 상근예비역이나 공익들의 모습들이 생각났다.

“그럼 혹시 저들도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군복무를 하는 건가요?”

“예, 군용역 중에는 그렇게 출퇴근을 하며 군복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마치 일반 병처럼 병영 내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혹은 부대 여건에 따라 복무 방식이 달라지곤 하지요.”

“그럼 이제 전쟁을 치러야 하니, 군용역들 모두 당분간 출퇴근은 안되겠네요?”

용마로 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그들도 모두 나라를 위해 집에 돌아가는 즐거움은 당분간 잊고 지내야겠지요.”

일행은 끝없이 도로를 타고 이어지는 율도군의 군수품 행렬을 지나 계속 동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용마로 소장이 물었다.

“마루한께서는 대동에 오시기 전, 사시던 곳에서 두 차례나 전쟁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영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오랫동안 분단된 채 살아온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었고, 또 한 번은 오랫동안 원수처럼 지내온 이웃 섬나라와의 전쟁이었어요. 하지만 진짜 군인처럼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인 건 딱 한 번뿐이었어요.”

영록은 계엄군이 우성시로 들어오던 날, 성모와 마선욱이 이끄는 애국 청년 십자군들과 함께 우성 시청으로 가는 길목에서 맞닥뜨린 외국인 노동자 폭들과 식당 건물 안에 숨어 총격전을 벌였던 때가 생각났다.

그 때,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유리문 밖으로 총구를 내밀고 침착하게 한 발 한 발 총을 쏘며 폭도들과 싸우던 유민의 용감한 모습이 떠올랐다.

유민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질 뻔 했다.

용마로 소장이 말했다.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었다면 내전이었겠군요. 한 나라 사람들이 서로 칼을 겨누는 내전만큼 슬픈 일도 없지요.”

“정말 슬픈 전쟁이었어요. 그 전쟁 때문에 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제게 소중한 친구도 역시......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어버렸지요. 게다가 그와 같은 전쟁은 처음이 아니었거든요. 80여년 전에도 한번 전쟁이 일어났다가 휴전한 채로 죽 지냈는데, 갑자기 또 전쟁이 터진 거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전쟁을 2차 한국전쟁이라고 불렀지요. 여기서 한국은 제가 살았던 나라 이름이에요.”

“저도 젊었을 때 내전을 겪어 보았답니다. 계몽 전쟁 말이지요.”

“그, 왕당파의 반란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강운예 관장님의 아들 중 한 명이 일으켰다는 그?”

용마로 소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네 맞습니다. 왕당파와의 전투는 계몽 전쟁 막바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나중 태상국의 아들이자 왕당파의 수장이었던 강원이 공화정파 군대에 사로잡히고 나서야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피를 흘리야 했던 잔인한 싸움을 멈출 수 있었지요.”

영록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관장님의 아들이라는 강원이라는 사람, 아직도 살아 있나요?”

용마로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상당히 많은 걸로 아는데 아직 살아 있다고 합니다. 아마 태상국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것인지 장수하는 모양이지요. 태상국께서는 그가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반란을 일으키고 본인이 만든 자유민주주의를 뒤흔들고 외세까지 끌어들여 온 국토를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게 만든 죄를 용서하지 않고 국법에 따라 처분될 수 있도록 재판에 넘겼답니다. 그런데 재판부가 태상국의 아들에게 법정 최고형을 내리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바다 멀리 외딴 섬에 종신토록 귀향 보내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때 태상국께서는 국가적 범죄를 일으키고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죄인에게 어떻게 사형을 언도하지 않을 수 있냐며 재판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시면서도, 그들이 내린 판결을 뒤집거나 하지는 않으셨죠.”

“그럼 그 사람은 지금 섬에 갇혀 있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몇 년 전인가 딱 한 번 귀향지에서 풀려나 백화로 와서 태상국을 만나뵙고 그 분 앞에 무릎 꿇고 죄를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한데, 그러고는 다시 섬으로 돌려 보내졌다고 합니다.”

영록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이 내전 같은 슬픈 싸움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부군단장님이 보셨을 때 이번 전쟁이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자세한 전략 목표는 나중 군단장이 직접 설명해 드릴테지만, 저희 원정군은 이번 작전 기간을 최대 3개월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전에 제가 살던 곳에서 벌어진 2차 한국전쟁도 딱 3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이번 전쟁도 너무 길게 끌지 말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사람들 모두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을 것입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인력과 물자가 엄청나게 소모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 군은 전쟁을 하게 되면 가급적 단기간 내에 효과적으로 목표를 이루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율도군은 대동 최강의 무사들이 모여 있다는데, 전쟁을 반기는 무사들도 많지 않나요?”

“호승심에 불타는 젊은 무사들이 많긴 하지요. 하지만 전쟁이 오래 지속되었을 때 벌어지는 참상을 직접 겪어본 저희 같은 나이 많은 무사들에게, 전쟁이란 단지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의 연장선상일 뿐이랍니다. 군이 존재해야 하는 본래 목적은 전쟁에서 싸우기 위함도 있겠지만, 아예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큰 존재의 목적이니까요.”

“그런데 이번 전쟁을 하는 이유가 지난번 대월국 성산백이 저와 예린이를 납치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라는 말도 있는데, 그 이야기가 맞나요?”

용마로 소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런 목적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란 늘 복합적인 문제로 인해 일어나는 법이지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 드리겠지만, 단순히 하나의 이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는 결코 없는 법입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강운예 관장님 성격 상 전에 저와 예린이가 납치된 일 때문에 보복하겠다고 이렇게 전쟁을 일으키실 분은 아닐 것 같았거든요. 단 몇 개월 뿐이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바로는 말이에요.”

그의 말에, 용마로 소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태상국께서는 신상필벌이 아주 확실하신 분입니다. 원한에 대한 보복 역시 철저하신 분이구요. 계몽 전쟁 때 율도에서 전쟁 범죄를 일으킨 자들 때문에 4군단을 만들어 끝까지 그들을 추적하고 처단해 오신 분 아니십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라 말씀드리는 거지만, 그 때 마루한과 영애께서 무사히 구출되셨기에 망정이지 만약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다치셨거나 몸이 상하셨더라면...... 지금쯤 대월국은 지도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지도에서 사라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영록이 깜짝 놀라 용마로 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때 태상국 기하와 대원수부에서 세웠던 여러 계획들 중에는, 만일 마루한과 영애 중 단 한 분만이라도 해를 당했다면, 그 길로 대원수부의 군단들은 물론 동부 육군 1군의 군단들까지 모두 동원해서 대월국을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할 계획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대월국에서 도깨비들을 모두 말살하려는 계획도 있었구요. 어쨌든 두 분이 무사히 구출되어 모두 없는 일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만약 우려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태상국께서는 가차 없이 그 계획을 진행시키셨을 수도 있습니다.”

용마로 소장은 턱의 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한 사람으로서 태상국을 보면 매우 밝고 친근한 이웃집 가장 같아 보이지만, 정치인으로서의 태상국은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복잡함과 상상을 초월하는 치밀함을 가진 분이며, 군 지휘관으로서의 태상국은 소름 끼치는 냉정함과 무서울 정도의 단호함을 갖추신 분입니다. 30년 넘게 군에서 태상국을 모셔온 제가 보아온 바로는, 그 분은 그런 분입니다.”

만약 자신이나 예린이 죽거나 다쳤다면 강운예가 대월국 도깨비들을 모두 몰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부군단장의 말에, 영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오후 7시, 대월국 호문번 개골령 일대

“끄아아아악~! 사, 살려, 살려줘~! 죽이지 마, 제발, 제발~! 끄아아아아아악~!”

두억시니들은 아직 살아 있는 도깨비들을 찾아내 몸을 발로 짓누르고 도끼로 목을 쳐 숨통을 끊어 놓고 있었다.

언덕 정상에 있던 포병들의 포 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부터 그들은 심운보의 배신을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와 후회해 봐야 너무 늦은 일이었다.

3선으로 물러난 심운보의 성산번군이 개골령을 넘어 퇴각하는 것도 모르고 2선에서 천제국군을 힘겹게 막아내던 다른 번의 반란군들은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앞뒤로 포위당하고 말았다.

1선과 3선을 지키던 심운보의 병력들이 모두 사라지자 언덕 양 옆에 공간이 생겨 버렸다. 천제국의 기병들이 그 공간을 돌아 2선을 지키고 있던 반란군을 뒤에서 포위해 버린 것이다.

겁에 질린 번주들은 급히 백기를 만들어 언덕 위에 내걸고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천제국의 두억시니들은 적의 항복 따위는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항복? 칫! 먹을 수 있는 놈들은 모두 도살해 고기로 만들어라. 포탄에 맞았거나 독이 든 화살에 맞았거나 먹기 힘들 정도 상한 놈들은 모두 창에 꽂아 언덕 위에 박아 두어라. 항복한 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대우는 그런 것뿐이다.”

천제국 11군단 총지휘관 동금은 전장에 널린 무수한 도깨비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동금의 명을 받은 두억시니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 반란군 도깨비들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수천여명의 도깨비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기까지,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두두리와 혼혈 종족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부락민군들은 두억시니들의 지시를 받아 독화살에 맞아 죽었거나 포탄에 맞아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을 들고 와 도깨비들의 창에 꽂아 언덕 위에 세우고 있었다. 붉은 갑주를 입은 천제국 도깨비 기병들은 멀찌감치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시체들을 전시하는 행위는 원래 두억시니들의 풍습이었다. 이것을 두억시니에게서 나온 도깨비들과 두두리들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 옛날부터 그들은 자신이 잡은 먹이감의 머리나 가죽들을 다른 이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달아 놓았다. ‘내가 이걸 잡았다.’, ‘이런 걸 잡을 정도로 난 대단한 사냥꾼이이다.’ 라고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그런 것들을 전시하며 그 시체 위에, 혹은 시체를 올려 놓은 물건에 자신의 이름이나 자신만의 문양을 새겼다. ‘내가 잡았다’, 하고 표시를 하는 것이다.

이는 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두억시니들은 자신이 죽인 적의 시체에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했다. 시체의 허벅지를 세로로 벤다던지, 갑주나 투구를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찌그러뜨린다더니 하는 방법을 쓰곤 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자신이 죽인 시체를 찾아내어 ‘가졌다.’ 그들의 고기는 먹고 머리 등 먹지 못하는 부위와 뼈, 입고 있던 옷 같은 것을 창이나 장대에 꽂아 전시했다. 때로는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직접 들고 다니기도 했다. 자신의 강함을 과시함과 동시에, 다른 이들이 그걸 보고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두억시니들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자기가 죽인 시체들을 찾아 커다란 식칼처럼 생긴 칼을 집어 들고 능숙한 솜씨로 뼈와 살을 발라냈다. 그 중에 몇몇 놈들은 전투를 치르느라 배가 많이 고팠는지 그 자리에서 바로 불을 피우고 도깨비의 살을 구워 먹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도깨비의 잘린 머리를 자신의 발 옆에 내려놓고 대충 익혀 아직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도깨비의 살을 거친 송곳니로 우적우적 씹어 댔다.

전투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천제국군들을 따라온 국왕군 무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져 버렸다. 어떤 무사는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가 진지 안에서 토악질을 하기도 했다.

다른 종족들의 무기와 갑주는 천제국 두억시니들에게 고철덩어리일 뿐이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작은 도깨비나 한자손들의 갑주가 두억시니들의 몸에 맞을 리 없었다. 간혹 나이 어리고 몸이 덜 자란 두억시니들이 다른 종족들의 갑주를 입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얇고 섬세한 다른 종족들의 갑주는 두억시니들이 보았을 때 ‘계집애들이나 입을 법한 철로 만든 겉옷’ 일 뿐이었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장검도 두억시니가 들면 단검처럼 보였다. 손에 쥐는 것도 아니고 두 손가락으로 집어야 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두억시니들은 전투가 끝난 후 적의 갑주와 무기들을 모두 알뜰하게 모아서 가져갔다. 본국으로 보내 모두 녹여 자신들에게 맞는 무기와 갑주를 만드는데 보태려는 것이다.

두억시니들만의 잔혹한 전장 정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곽이 동금에게 다가와 말했다.

“수천을 잡았지만 수만을 놓쳤소. 이놈들이 우리와 싸우고 있는 동안 놈의 주력은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모두 달아났소. 멀리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정리되는 대로 놈들을 쫓아가야 하오.”

그의 말에 동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살육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그저 바라보고만 있던 천제국 기병들이 있는 곳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백사!”

개골령 일대에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그의 부름에, 기병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무사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동금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다른 기병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색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갑주의 모양이나 세공된 장식들은 다른 것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말을 감싸고 있는 마갑과 마구들도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었다.

백사는 도깨비 기병들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얇고 예리하게 휘어진 칼을 쥔 오른손을 가볍게 가슴에 갖다 대며 군례를 올렸다.

“너희 기병들이 가서 이 언덕에서 도망친 비겁한 반란군 놈들의 뒤꽁무니를 물어라. 놈들을 찾으면 즉시 나에게 연통하라. 만일 놈들을 죽이고 싶으면 마음대로 죽여도 좋다.”

백사는 아무 말없이 다시 한번 칼을 쥔 손을 가슴에 갖다 대고는 기병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붉은 갑주를 입은 수천의 천제국 도깨비 기병들이 개골령 언덕길을 뛰어올라 북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병들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동금은 휘하의 두억시니들이 다 들을 수 있는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한 시간! 딱 한 시간 주겠다! 고기와 전리품을 챙길 자는 한 시간 내에 모두 챙겨라! 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또 다른 먹이를 찾아 북으로 이동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억시니들의 거친 함성이 대동 천지를 울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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