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대동력 9,994년 5월 24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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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아침을 배불리 먹은 천제국 제7방면대 11군단 병력들이 일제히 병기를 챙겨 들고 북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대월국 국왕군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걸신들린 천제국 새끼들, 이제서야 기어 나가는구만.”
천제국군들은 환강산성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국왕군이 지원해주는 군량을 어마어마하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다른 종족들보다 한배 반은 더 큰 두억시니와 두두리들이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먹는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군량고를 담당하고 있는 국왕군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단 사흘 만에 국왕군이 보름 넘게 버틸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이 사라졌다 했다. 앞으로 계속 국왕군 측에서 천제국군에게 군량을 보급해 주어야 하는데, 지금 저들이 먹는 양이면 산성에 비축된 군량은 한 달도 못가 모두 바닥나게 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산성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도깨비들의 시신들을 출정하면서도 전차 앞에 꽂고 나갔다. 며칠 지나 부패가 더 심해진 시체 조각들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시체들 위로 파리 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데도 천제국 두억시니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성문 위에서 천제국군들을 지켜보는 국왕군들 가운데에는 대월국 2왕자 진효기도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성벽에 짚은 상태로 누리마루 위로 붉은 햇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든 천제국군들이 북쪽을 향해 진군하는 모습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말썽꾼들이 다 나갔으니, 한동안 성 안이 조용해지겠군요.”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진효기가 뒤를 돌아보니 흥원공 진대승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진대승은 오른쪽 팔꿈치 윗부분이 잘려져 나가 붕대로 칭칭 싸매어 놓고 있었다. 그의 얼굴과 목덜미에도 핏물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밖으로 나오신 걸 보니 공의 몸 상태가 전보다 진전되었나 보군요? 안색이 밝아 보이니 다행입니다.”
“죽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나, 이제 장자검을 휘두를 오른손이 없으니 무사로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이올시다.”
“칼은 오른손이 없으면 왼손으로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공이라도 살아서 국왕 전하 곁에 계셔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이 늙은 도깨비가 있어봐야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런지요? 지난 용림 전투에서 국왕 전하의 충직한 신하들이 너무나도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죽어야 했다면 나 같은 늙은이가 죽고 젊은이들이 살았어야 했는데...... 다행히 이번 반란이 제압되고 우리가 왕성 은허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여도, 그 다음이 더 걱정이 됩니다.”
두 사람은 성벽 위에 나란히 서서 천제국군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진효기가 물었다.
“3만의 병력으로 과연 7만에 가까운 반란군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을까요?”
“왕자님께서도 두억시니들의 전투력이 어떤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들의 지휘관이 멍청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반란군이 아무리 수가 많다 한들 천제국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문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효기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천제국군의 중군이 북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중군의 선두에는 11군단의 지휘관 동금이 6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에 올라타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여전히 목이 베인 도깨비 머리 세 개가 달려 있었다. 갑주를 벗어 놓을 때에는 소금에 절여 놓기라도 하는 듯, 다른 시체들에 비해 잘린 도깨비 머리들은 크게 부패한 모습이 아니었다.
동금은 성벽 위에 있는 진효기와 진대승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들이 이번 반란을 진압해주는 대가로 우리 서쪽과 남쪽의 번 12곳을 내어달라 하더군요. 전하께서 저자들의 지휘관이 가지고 온 천제의 국서에 국세까지 찍으셨구요.”
진효기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진대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땅들 중에는 공의 영지인 흥원도 포함되어 있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진대승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라와 왕권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그깟 땅덩어리 내어 놓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이번 동란이 끝나면 전하께서 제게 어련히 더 좋은 영지를 내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공께서 그리 생각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대승은 찬찬히 산성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산백이 개골령 일대에 진을 치고 있다는군요. 아마 그곳에서 일차적으로 천제국군의 진군을 막아볼 생각인가 봅니다.”
“성산백은 영악한 자입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거록의 두억시니들과도 싸워본 경험까지 있죠. 그는 천제국 두억시니들과 평지에서 정면으로 싸우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과연 며칠 만에 두억시니들을 막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야전진지를 축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며칠 전까지 반란군들이 진을 치고 환강산성을 올려다보던 자리에는 이제 군대가 머물렀던 흔적들만 조금 남아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이 휑한 모습이었다.
“......통요번의 반란군들이 흥원을 점령하고 있는 중이라 들었습니다만.”
왕자의 물음에 진대승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반란군들이 포위를 풀고 물러난 덕에, 며칠 전 흥원으로 무사 하나를 보내어 번의 상황을 확인하고 오라 했습니다.”
“지난 전투에서 공의 아들들이 모두 전사했는데, 부디 그곳에 남아 있는 공의 가족 분들만이라도 모두 안전하게 잘 계셔야 할 텐데,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진대승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가 전하를 대신해 허락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공의 무사단을 이끌고 흥원으로 돌아 가셔도 좋습니다.”
진효기의 말에, 진대승은 스무 살 후반의 왕자를 마치 어린 아이 보듯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리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사려 됩니다. 그 문제는 흥원으로 보낸 제 무사가 돌아오고 나서 생각해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와 저의 무사단은 국왕 전하의 곁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진대승이 목에 난 상처가 쑤셔오는지 얼굴을 찡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올려 상처 부위를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잘려진 오른팔에는 목을 만질 수 있는 손이 달려 있지 않았다. 진대승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무안한 듯 잘려진 팔을 아래로 내렸다.
오후 2시, 대월국 호문번 개골령 일대
“1선 방어 진지 전방에 붉은 갑주를 입은 기병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개골령 정상에 위치한 심운보의 지휘소로 견습 무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붉은 갑주...... 천제국으로 넘어간 타락한 도깨비들인가보군.”
보고를 받은 심운보가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는 오른손에 투구를 들고 지휘소 막사 밖으로 나가 보았다.
밖으로 나가니, 개골령 언덕 아래 펼쳐진 반란군들의 야전 진지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심운보의 반란군은 언덕 일대에 땅을 파거나 흙벽을 쌓아 진지를 만들어 놓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지들은 총 3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선과 최종 3선은 심운보의 성산번군들이, 중앙의 2선은 다른 번의 번주들과 번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심운보가 요청한 원군은 아직 합류하지 못한 상태였다. 은허를 포위하고 있는 명천백 피호석으로부터 그가 요청한대로 2만의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전갈이 당도했지만, 막상 원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1선 방어 진지 앞에는 철조망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철조망은 강운예가 대동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를 따라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다만, 기술력이 발달한 율도에서 현실세계에서 사용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면도날형 윤형철조망이 많이 사용되는 반면, 반란군들은 아직도 철선을 꼬아 만든 가시형 유자철선을 목책에 감아 사용하고 있었다.
포병들은 지휘소가 있는 개골령 위에서 언덕 아래를 향해 포구를 겨누고 있었다. 다른 번의 번주들이 살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포를 2선으로 전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심운보는 이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언덕 중간에 포를 배치하면 후퇴할 때 포를 위로 이동시키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운보가 곁에 있는 포병 지휘관에게 망원경을 건네받아 언덕 아래를 살펴보았다.
망원경을 통해 보니 1선 방어 진지 전방으로 철조망이 있는 곳을 향해 온 몸에 핏물처럼 붉은 갑주를 입고 마찬가지로 말에도 붉은색 마갑을 씌운 천제국 기병 수십 명이 커다란 장창을 치켜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교전을 시작해도 된다는 포성이 울리지 않아서인지, 1선에 있는 무사들은 천제국 기병들이 다가오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천제국 기병들은 반란군이 설치한 철조망 앞에 가지고 온 장창을 땅에 꽂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장창 위에는 도깨비들의 시신들과 잘려진 목, 몸뚱이, 팔다리들이 끔찍하게 걸려 있었다.
천제국 기병들은 장창을 다 꽂고 난 후, 말을 돌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총과 쇠뇌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기병들이 돌아가자 이번에는 6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한 대가 반란군의 진지 가까이로 다가왔다.
천제국 11군단의 총지휘관, 동금 중장이었다.
그는 찬찬히 개골령 일대에 펼쳐진 반란군들의 진지를 스윽 훑어보고는, 천지가 진동할 것 같이 커다란 목소리로 반란군들을 향해 외쳤다.
“천제 성하의 군대가 왔다! 이제 너희 모두 이처럼 산채로 장창에 꿰어질 것이다!”
동금은 장창 위의 시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반란군 태반이 그의 목소리에 기겁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심약한 녀석들 중에서는 오줌을 지리는 자도 있었다.
이윽고, 천제국의 군사들이 개골령을 마주보고 전개하기 시작했다.
동금은 양익에 도깨비 기병들과 더불어 포병들을 배치했다.
천제국군이 가지고 온 포는 산포라 불리는 소형 대포였다. 수천 년간 강력한 화약 무기를 통해 대동을 호령했던 천제국은 파괴력이 좋은 대형 거포들을 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강운예, 그리고 주신과의 오랜 전투에서 운반이 쉽지 않고 발 빠른 기병들에 의해 공략당하기 쉬운 대형 거포보다는 사거리가 다소 짧고 파괴력이 떨어질지라도 연사력이 좋고 기동성이 있는 작은 대포들이 전투에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산포를 포병들의 주력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천제국의 산포들이 일제히 포격을 시작하면서, 양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천체국의 도깨비 포병들은 해전에서 주로 사용하는 사슬탄을 쏘아 대고 있었다. 사슬탄이 날아올 때마다 반란군 진지 앞에 설치된 철조망들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관측하기 위해 진지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어느 재수 없는 번군의 머리 앞으로 철조망과 부딪히며 급격하게 방향이 꺾인 사슬탄 하나가 날아들었다. 쫘악,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사방에 튀었다. 머리가 찢겨져 나간 번군의 몸뚱이가 진지의 흙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천제국군이 포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심운보의 반란군은 아직 반격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 개골령 언덕 위에 배치된 그들의 대포는 천제국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까지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적들이 철조망지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포격이 멈추고, 두두리들과 혼혈 종족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이 앞으로 나왔다.
이들은 ‘부락민군’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많은 두억시니들이 천제국을 떠나 거록으로 돌아가게 되자 군의 전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천제 정선교는 두두리와 혼혈 종족들의 어린 아이들을 강제로 징집해서 단체 생활을 시키고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두두리와 혼혈 종족은 대동 어디에서나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천제국에서도 최하층민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나마 군대라도 가면 조금이라도 더 사람 대접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또 식구 중에 입 하나만 줄여도 자신들이 먹고 사는데 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로 어린 아이들은 기꺼이 나라에 바치기 시작했다.
천제국에서는 두두리와 혼혈 종족 같은 최하층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부르며 차별했는데, 그래서 이곳 출신 아이들로 구성된 군대 역시 ‘부락민군’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들의 갑주는 두억시니나 도깨비들의 것에 비해 볼품없고 너절해 보였다. 대부분 가슴 정면에 네모난 동판을 덧대어 놓은 말린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턱끈이 달린 원뿔형 투구를 쓰고 있었다. 간혹 개인이 따로 구입한 것 같은 사슬 갑옷을 덧입고 있는 자들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매우 적었다.
이들의 무기는 넓은 날이 달린 외날도와 커다란 둥근 방패였다. 방패도 안쪽만 약간 금속을 덧입힌 나무로 된 것에 것이었다.
“도륙을 시작하라!”
동금이 지시가 떨어지고, 수천 명의 부락민군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반란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방패로 몸을 가리고 손에 든 외날도를 휘두르며 무너진 철조망들을 뛰어넘으려 했다.
“쏴라!”
천제국이 대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마침내 심운보가 포병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펑! 펑! 펑! 펑! 펑!
언덕에서 발사된 쇠구슬탄이 땅바닥을 몇 차례 튕기더니 철조망 지대로 달려오던 천제국 부락민들을 향해 날아갔다. 앞서 달려오던 두두리의 몸이 쇠구슬탄에 맞아 산산이 찢겨져버렸다. 쇠구슬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몸을 찢고 나와 뒤따르던 다른 부락민군들을 휩쓸며 멀리 날아갔다.
반란군들이 쏘는 포탄 중에는 폭발하는 형태의 유탄도 포함되어 있었다.
쾅~!
유탄이 폭발할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고 땅이 깊게 패였다. 부락민군들의 시체 조각들은 핏물들과 함께 사방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부락민군들은 반란군의 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너진 철조망 지대를 통해 진지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선두의 혼혈 종족 병사가 철조망을 뛰어 넘어오는 것을 본 1선 방어 진지 지휘관 목건주가 장자검을 휘두르며 번군들을 독려했다.
“지금이다, 쇠뇌를 쏘아라!”
땅을 파고 진지 안에 숨어 있던 반란군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고 일어나 쇠뇌를 쏘아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군을 직접 겨냥해 직사로 사격하고 있었다.
슉! 슉!
반란군이 날린 쇠뇌 화살들은 부락민군이 입은 가죽 갑옷과 동판을 손쉽게 꿰뚫어 버렸다. 손에 든 나무 방패를 관통해 갑옷까지 꿰뚫어 버리기도 했다.
1선 방어 진지의 번군들이 쇠뇌를 다시 장전하는 사이, 2선 방어 진지에 있는 번군들이 일어나 쇠뇌를 쏘아댔다. 연이어 날아오는 화살들에 의해, 순식간에 수백의 천제국 병사들이 철조망 지대를 넘지 못하고 화살밥이 되어 쓰러졌다.
진지 안에 있는 반란군 머리 위로도 천제국 노병들이 쏘아 대는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발에 쇠뇌 앞코를 걸고 두 손으로 시위를 당기던 반란군의 어깨와 가슴팍에 화살비가 내려와 꽂혔다. 처참한 비명 소리가 진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천제국의 화살비가 그치자 외날도를 든 두두리 등 부락민군들이 진지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도륙해 버려라!”
“죽여라! 모두 죽여 버려라!”
부락민군들은 진지 안의 반란군들을 무참히 살육하기 시작했다.
두두리 부락민군이 어느 번군의 머리를 향해 외날도를 휘둘렀다. 번군이 깜작 놀라 가지고 있던 쇠뇌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막아보려 했다.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나무로 된 쇠뇌가 두 쪽으로 갈라져 나갔다. 쇠뇌를 들고 있던 번군의 머리도 대각선으로 베어져 갈라졌다. 베여 갈라진 머리 사이에서 검붉은 피와 허연 뇌수가 뿜어지듯 흘러나왔다.
별다른 부무장이 없는 쇠뇌병들은 외날도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부락민군들에 대항할 생각도 못하고 진지 밖으로 뛰쳐나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목건주가 주위에 있던 자신의 무사단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대들의 충성심을 증명하라! 더러운 잡종들을 모조리 죽여라!”
목건주 휘하의 무사단 백여 명이 장자검과 낭아봉을 뽑아 들고 1선 방어진지의 부락민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건주는 무사단의 선두에 서서 부락민군들을 마구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장자검은 유성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가 장자검을 휘두를 때마다 천제국 부락민군들의 몸뚱이는 깨끗하게 반으로 베어져 땅바닥에 처박혔다. 부락민군들이 나무방패로 몸을 가리고 그를 막아보려 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들의 방패는 칼질 한 번에 깨끗하게 두 조각나 버렸고, 방패를 들고 있던 팔과 갑주를 입은 몸까지 동시에 베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목건주는 진지의 좁은 통로 사이를 뛰어다니며 마치 춤을 추듯 유려하게 적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부락민군들이 그의 손에 베어졌고, 그들의 피가 진지의 흙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무사단들 모두 무서운 기세로 부락민군들을 몰아붙였다. 두억시니만큼은 아니어도 일반 도깨비보다 머리 하나 두개는 더 큰 두두리들과 혼혈 종족들을 상대하는데도 그들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갑주를 착용하지 않은 부락민군들의 허리 아래를 장자검으로 찌르고 베어 땅바닥에 무릎 꿇렸다. 그러면 뒤따라 달려오던 무사들이 낭아봉을 휘둘러 적들의 머리를 투구째 으깨어 버렸다.
목건주와 그의 무사단들의 분전으로 천제국의 전진이 1선 방어 진지에서 간신히 저지되고 있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동금이 손을 들어 누군가를 불렀다.
10척은 넘어 보이는 엄청난 거구의 두억시니가 동금 앞으로 나왔다. 그는 몸에 두꺼운 철판으로 된 갑주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양쪽에 커다란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일반 도깨비나 한자손들은 도저히 들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고 육중한 쇠망치를 들고 있었다.
“가서 모두 죽여라. 그리고 저 고개를 넘는 길을 열어라, 이곽.”
이곽이라 불린 두억시니는 쇠망치를 든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쳐보이고는 자신의 부대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자신처럼 두터운 철갑주를 입은 천여 명의 두억시니들 앞으로 걸어갔다.
이곽이 그들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 첫 번째가 무엇인가?”
“적의 피!!!”
두억시니들의 소름끼치는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럼 너희들이 원하는 것 두 번째가 무엇인가?!”
“적의 고기(인육)!!!”
“너희들이 원하는 것 세 번째는 무엇인가?!”
“적의 재물, 여자!!!”
이곽이 쇠망치를 머리 위로 들어 보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 지금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러 가자!!! 적들을 모두 죽여 그 피를 보고, 그들의 살을 베어 배불리 먹어라!!! 적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제 모두 너희들의 것이고, 그들의 여자들은 이제 우리들의 강한 씨를 받아내는 노예가 될 것이다!! 가자!!! 원하는 것을 가지러 가자!!!”
이곽이 이끄는 두억시니들이 대동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 소리를 내지르며 1선 방어진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쿵 거리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마치 수천의 군마들이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진지의 흙벽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모두 진지 밖으로 나와라! 창병 전진! 무사단과 교대한다!”
두억시니들이 돌격해 들어오는 것을 본 목건주가 다급히 무사단을 진지 밖으로 철수시켰다. 그와 함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창병들이 기다란 장창을 앞세우고 1선 방어 진지를 향해 뛰어왔다.
순식간에 철조망지대를 지난 이곽과 두억시니들은 깊게 파 놓은 방어진지까지 훌쩍 뛰어넘어와 버렸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하고 이제서야 진지에서 빠져나오던 일부 목건주 휘하 무사들이 그들과 마주쳐 버렸다.
“뒈져라, 병신 도깨비들아!!!”
이곽이 들고 있던 쇠망치로 앞에 있던 무사의 머리를 내리 찍어버렸다. 커다란 쇠망치에 맞은 무사의 머리는 투구는 물론 두개골까지 완전히 부서져 납작하게 찌그러져 버렸고, 눈과, 코, 입이 있던 곳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마음껏 피를 보아라! 너희가 쓰러뜨린 놈들을 마음껏 먹어라! 놈들이 가진 것들 모두 너희들이 가져라!”
이곽이 부하 두억시니들을 독려하며 마구 쇠망치를 휘둘렀다. 또 다른 도깨비 무사가 그가 휘두른 쇠망치에 얻어맞았다. 콰자작,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갑주가 움푹 찌그러지며 그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10여보 이상 날아가 땅에 떨어진 무사의 몸은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갑주 안의 몸이 망치에 눌려 완전히 부서진 모양이었다.
다른 두억시니들이 1선 방어 진지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창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도깨비들이 휘두르는 창을 발로 밟아 부러뜨려 버리고는 그들의 진형을 부수고 들어가 휩쓸기 시작했다. 두억시니들이 칼과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반란군 도깨비들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땅바닥으로 떨어질 때쯤 몸이 두 동강으로 갈라지며 사방에 검붉은 피를 비처럼 흩뿌렸다.
1선 방어 진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심운보가 곁에 있는 무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2선 전투 준비! 1선 병력들에게는 퇴각 신호를 보내라!”
그의 곁에 있던 무사가 거대한 뿔나팔을 입에 물었다.
부우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전장에 가득 울러 퍼졌다.
무너지는 번군들을 수습하고 있던 목건주도 이 소리를 들었다. 그는 두억시니의 가슴에 찔러 넣은 장자검을 뽑아내며 주변에 있는 무사단과 번군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1선 병력들은 3선까지 철수한다! 2선 방어 진지의 번군들은 철수하는 아군을 엄호하라!”
그는 쫓아오는 두억시니들을 차례로 베어버리며 부하 무사들과 번군들을 언덕 위로 철수시켰다. 그의 갑주는 온통 두두리와 두억시니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목건주와 1선 병력들이 언덕 위로 철수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심운보가 자신의 가신들을 불러 모았다.
“2선에 있는 다른 번주들이 천제국군들을 상대하는 동안...... 우리 성산번군은 개골령 북쪽으로 철수할 것이다. 다른 번군들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철수를 시작하라.”
그의 곁에 있는 영주 한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일 이 일로 다른 번주들에게 원한을 사게 되면 어찌 하려 하십니까?”
심운보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원한도 저들이 살아 있을 때나 걱정할 일이지...... 천제국 놈들 상대로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심운보는 빨리 철수준비나 하라는 듯, 가신들에게 다시 한 번 턱짓을 하고는 지휘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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