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87화 (87/217)

〈 87화 〉 대동력 9,994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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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13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천제국의 지도자이자 마루한인 정선교가 대동에 나타난 것은 대동력 7,500년경, 현실 세계 시간으로는 1922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정선교는 조선의 양반 문벌가 자제였다고 한다. 그는 부유했던 집안의 후원을 받아 일본까지 유학 가서 육군 장교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고, 이후 조선 총독부 산하 일본제국군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제국군에서 마지막으로 맡았던 임무는 ‘극렬 아나키스트이자 테러리스트, 속칭 대한광복단의 수괴’ 박환성이란 인물을 쫓는 것이었다.

박환성은 대한제국군 해산 이후부터 일본제국군과 싸워온 의병장 박상원의 아들이었다. 그 아비는 비록 남한 대토벌 작전이 벌어지던 중 변절자의 밀고로 일본제국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게 되면서 통한의 생을 마감했지만, 박환성은 주변사람들과 함께 만주로 도피한 후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며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 자신도 조국 광복에 한 목숨을 바치고자 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한 박환성은 독립군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본제국군이 만주에 있는 수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키고 독립군들을 거세게 추격하는 과정에서 소속되었던 독립군 부대 떨어져 나오게 되었고, 그러던 중 홀로 조선으로 잠입해 들어와 대한광복단을 이끌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환성이 조선에 들어와 대한광복단을 이끌며 연이어 친일 인사들을 암살해 나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제국군이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조선 주둔 일본제국군 소좌 이준희와 대위 정선교가 대한광복단의 뒤를 쫓았다. 이들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 있는 1개 중대 병력의 혼성부대를 이끌고 박환성과 대한광복단이 숨어 있는 태화산 일대를 급습했고, 그들의 뒤를 뒤쫓아 고룡동굴 안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박환성과 대한광복단 일원 10여명과 더불어 이준희와 정선교, 그리고 약 30여명의 일본제국군들이 대동에 도착한다.

이후, 박환성이 대동 동부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신대한’이란 나라를 만드는 동안, 새로운 세상의 정세를 빠르게 포착한 정선교는 한때 대동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도깨비들에게 밀려 북쪽 고원지대로 쫓겨난 두억시니들을 꾀어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막강한 전투력을 빌어 대동으로 함께 넘어온 이준희 등 다른 마루한들을 제거하고 자신만의 국가를 만들기에 이른다.

이 나라가 바로 지금의 천제국이었다.

천제국의 공식 국가 명칭은 ‘신성 천제 제국’ 이었다.

하지만 대동력 9,870년경 대동의 최강국이었던 천제국과 동부의 군사국가 주신, 양국의 운명이 걸린 대회전이었던 ‘이구 전투’에서 천제국군이 대패를 당하고 천제 정선교가 주신에 포로로 잡히는 사건 이후, 대동 사람들이 천제국을 부를 때 ‘신성’이란 단어를 붙이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천제 제국’도 줄여서 ‘천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구 전투에서 대패 당하고 몇 개월동안 주신의 지하 감옥에서 포로 생활까지 해야 했던 천제 정선교는 동쪽의 기름진 옥토를 할양해주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내어주고서야 간신히 석방될 수 있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천제국의 주류이자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두억시니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다수의 두억시니 군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고 함부로 군을 움직인 것이 패전의 원인이라는 주장이었다.

여러 두억시니 군 지휘관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천제 정선교에게 반감을 갖게 된 수많은 두억시니들이 천제국을 떠나 북쪽 거록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듯 두억시니들이 크게 동요하는 가운데, 천제 정선교는 두억시니가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도깨비든 두두리든, 다모랑이든 아리랑이든 상관하지 않고 귀족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나라의 제도를 고치기에 이르렀다. 천제국을 보고 ‘두억시니들만의 나라’ 라 부르던 시절도 이젠 옛말이 되어 버렸다.

지금 장범강 북쪽을 따라 대월국 환강산성을 향해 행군해 오는 제국 육군 제7 방면군 11군단의 행렬만 보아도 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천제국 11군단 병력의 절반 가까이가 9척이 넘는 엄청난 체구의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져 있긴 했지만, 두두리들과 도깨비들, 여러 혼혈 종족들도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간간히 다모랑과 아리랑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두억시니와 두두리들은 대부분 보병이었다. 말을 타기에는 체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휘관급 두억시니들의 경우 4~6마리가 끄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회색 코뿔소 위에 올라탄 중무장 돌격병들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말을 탈 수 없는 두억시니들은 사냥과 전투에서 여러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천년 전 두억시니들이 대동 중부로 내려온 ‘거록의 남하’ 가 발생한 이유도 두억시니들의 주요 사냠감이었던 ‘흰털코끼리’ 등 커다란 동물들의 개체수가 줄어듬에 따라, 그와 함께 두억시니들의 먹이감도 함께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두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두억시니들에게 사슴이나 토끼 같은 작은 사냥감들을 사냥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거 하나 잡는다 해도 그들에게 한입꺼리도 되지 않는 양이었다.

두억시니들이 다시 북부 거록 고원으로 밀려났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두억시니들은 전투때마다 말을 타고 달리며 멀리서 활을 쏘아 대는 다른 종족들에게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일대일 단기접전이라면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두억시니 무사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지만, 다른 종족들은 그들과의 근접전투를 피하고 원거리에서 서서히 전력을 갉아먹는 전술을 구사했다.

기동력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두억시니들은 말이 끄는 전차와 회색 코뿔소를 길들여 전투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차는 말에 비해 기동성이 좋지 않았고 지형에 따라 많은 제약을 받았다. 회색 코뿔소의 경우 커다란 몸집의 두억시니들을 거뜬히 태우고 달릴 수도 있고 적진형을 돌파하는데 말보다 더 뛰어난 효율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말보다 수도 적고 키우기도 힘들고 군마처럼 길들이기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먹는 양도 상상을 초월해서 회색 코뿔소 한 마리를 먹이려면 거의 말 다섯 마리가 먹을 분량의 마초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은 도깨비들이 천제국군 기병의 주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천제국의 기병 운영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대동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율도의 경우, 기병 병과는 기본적으로 말을 가지고 있거나 말을 탈 줄 아는 사관 이상 무사들만이 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말을 가지고 있는 무사들이 기병이 되기 쉬웠다. 말이 없더라도 경무관, 국무관 평가에서 기병 소양 평가 점수가 높은 무사들 역시 기병이 될 수 있었다.

기병이 된 무사들은 항상 최소 세필 이상의 말을 보유하고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 율도 무사들은 대부분 자신이 근무하는 병영 내, 혹은 병영 인근에 있는 군 관사를 얻어 생활을 했는데, 이때문에 무사들의 말들은 대부분 병영에 있는 마구간에서 관리되었다. 물론 병영 밖에 사는 무사들의 경우 자신의 말을 타고 출퇴근하며 자신의 집에 딸린 마구간에서 개인적으로 말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 말을 가지고 있는 무사들에게는 군에서 마초 등 말을 키우고 관리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전부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개인 말이 없어 군에서 보급을 받았을 경우, 마초 등 제반 사항들에 들어가는 비용을 군에 지불해야만 했다. 이 비용이 제법 만만치 않았기에, 말이 없는 무사들을 빨리 급여를 모아 개인 말을 사거나 전쟁터에서 쓸 만한 말을 노획하기 위해 혈안이 되곤 했다.

대월국, 태진 같은 봉건제 국가들의 경우, 기병은 오직 말을 사고 키울 수 있을 만큼 돈이 많거나 지체 높은 귀족들만이 될 수 있었다. 무사단에 들어가 견습 무사가 되려고만 해도 일반 농민 수십명이 1년을 먹고 살 만큼의 돈이 필요했다.

율도처럼 나라에서 말 관리하는 것을 지원해주는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마구간을 짓는 일부터 마초를 모으는 일, 말을 먹이고 키우는 일 모두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당연히 지체 높은 귀족들의 경우 그런 일들을 손수 할리 없었다. 그들은 ‘종자’라는 시종들을 고용해 그런 잡다한 허드렛일을 시켰는데, 주로 견습 기사가 되고자 하는 어린 소년들이 무사들 밑에서 종자가 되었다. 그래서 전투가 있을 때면 대월국 기병 한 사람당 보통 서너 명의 종자들이 함께 움직이곤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강운예의 황금사자단이나 주신과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기병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던 천제 정선교는 이구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이후부터 대규모 기병 육성을 국가적 과업으로 삼게 되었다.

천제국은 귀족 이외의 계급에 있는 사람이 무기를 개인적으로 사거나 소유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특히 화약 무기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귀족 이하 계급의 사람은 이를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도 즉결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 때 말 또한 무기와 더불어 개인 소유를 크게 규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구 전투 이후부터는 귀족 두억시니가 아니더라도 말을 사거나 가지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법과 제도가 수정되었다.

또한, 실력이 뛰어난 기병 무사들은 천제국의 귀족으로 삼겠다는 공약까지 내걸었다.

기병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을 탈 수 있는 자들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한자손이나 ‘미한의 백성’ 다모랑, 미호랑, 아리랑들 보다는 두억시니에게서 나온 도깨비들이 천제국 기병이 되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월국과 태진, 양국에서 수천년간 이어져 온 숨막히는 신분제의 높은 벽으로 인해 좌절하고 있던 수많은 도깨비들이 신분 상승의 꿈을 가지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말 한 필을 구해가지고 천제국으로 달려갔다.

그 옛날 거록의 두억시니들을 다시 북쪽으로 내쫓았던 도깨비들이, 이제는 그들을 위해 싸우기로 맹세하려 천제국을 몰려오게 되었다.

천제 정선교는 이들을 크게 우대하며 천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기와 갑주를 무상으로 내어주었고, 세 달에 한 번씩 일정한 급여도 지급해 주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도깨비들은 이 급여로 자신의 말을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천제 정선교는 기병 지휘관으로써 탁월한 능력이 있는 자들을 뽑아 자신이 공약한대로 수많은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그들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새로이 귀족으로 승격되었음을 선포해 주기도 했다.

금목걸이는 천제국과 거록에서 귀족의 지위에 있는 자만이 착용할 수 있는 징표 같은 것으로, 두억시니들의 오랜 풍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는 도깨비들이 천제국에서 두억시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지배계층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더 많은 도깨비들이 천제국으로 유입되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도깨비들이 천제 정선교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대월국과 태진의 도깨비들은 천제국으로 넘어간 도깨비들을 가리켜 ‘타깨비’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타락한 도깨비’의 준말이었다

천제국의 도깨비 기병들은 지난 계몽 전쟁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당시 천제 정선교는 계몽 전쟁에 참전한 군사들에게 율도군의 목을 벤 수급 100개를 모으는 자는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이들은 율도군의 수급을 미친 듯이 베러 다녔다. 율도군이 없을 때에는 민간인들의 목을 베어가지고 와서는 율도군의 것이라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도깨비 기병들은 천제 정선교의 최측근 세력으로써, 혹시라도 일어날 지 모르는 두억시니들의 반란을 억누를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이 되어주었다. 이후 이들은 기병뿐 아니라 총과 포를 다루는 병종들도 모두 담당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천제국군 내 도깨비들의 비율은 전체의 3할을 넘고 있었다.

천제국의 국기이자 군기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누리마루 위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태양은 사방으로 강렬한 붉은 햇살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현실 세계 일본제국의 전범기와 유사한 모양이었다.

천제 정선교가 대동에 오기 전 일본제국군에서 근무한 영향으로, 천제국의 깃발 역시 이와 유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천제국의 구원군들이 당도했다! 성문을 열어 맞이하라!”

환강산성 동문 성루 위의 대월국 국왕군들은 다가오는 병력들이 천제국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질렀다.

심운보의 반란군들은 천제국 병력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이미 며칠 전 진을 물리고 철수한 후였다.

천제국군의 행렬이 환강산성 동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국왕군은 ‘이제 살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성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 국왕군 무사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니, 저것들...... 저기 저 전차들에 꽂혀 있는 게 다 뭔가?!”

천제국군의 선두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들이 앞장서서 동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억시니들이 타는 전차이다 보니 일반적인 수레나 마차보다 크기가 훨씬 컸다.

전차 위에는 말을 모는 기수와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전투원이 함께 타고 있었다.

전차 앞에 높다란 장창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위에는 도깨비의 잘려진 머리와 몸뚱이, 팔 다리들이 꽂혀 있었다.

어떤 전차에는 사지를 자르지 않은 채 발가벗겨진 도깨비 여자의 시신이 항문에서부터 입까지 창으로 꿰여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국왕군들의 표정은 모두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천제국군의 총지휘관은 두억시니 동금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목이 베인 도깨비들의 머리 세 개를 마치 장식처럼 매달아 놓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가 하나, 여자의 머리가 두 개였다. 아직 심하게 부패하지 않을걸로 보아 목을 벤지 채 하루가 되어 보이지 않았다.

“신성 천제 제국 육군 제 7 방면군 11군단장 동금 중장이다! 그대들의 국왕은 어디 있나?”

동금은 어깨 위에 커다란 양날 도끼를 짊어지고 전차에서 내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국왕군 도깨비들 모두 오금이 저릴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위협적이었다.

국왕의 친위대가 동금을 환강산성의 내성으로 안내했다. 동금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완전 무장한 커다란 덩치의 두억시니 무사 백여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톱처럼 생긴 칼과 커다란 월도, 무시무시하게 생긴 도끼와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었다.

내성의 안쪽 작은 집에 초라하게나마 국왕의 처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동금은 따라온 두억시니들을 잠시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홀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안에는 대월국의 국왕 진위선은 흰옷을 단정하게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옷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왼쪽 다리는 붕대로 꽁꽁 싸여 있었다. 지난 용림 전투에서 갑주로 보호되지 않은 무릎 부위에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았던 것이다.

환부는 심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왕의 주치의가 여러 해독제를 처방해 보았지만 별 차도는 없었다.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간신히 막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국왕 곁에는 그를 지키는 친위대 맹약 무사 한 명과 2왕자 진효기가 서 있었다.

그들의 갑주에는 창칼에 긁히고 화살과 탄환에 찌그러진 자국들이 수십 군데나 박혀 있었다. 그들 모두 용림 전투에서 혈전을 벌이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지난 용림 전투에서 많은 왕자들이 죽고 다쳤다. 태자를 비롯한 세명의 왕자들이 전사했고, 2왕자 진효기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왕자들은 중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있는 중이었다.

현재로서는 진효기가 국왕 부재시 최우선 왕위 계승자였다.

국왕의 처소로 들어온 동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초라한 몰골의 진위선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양날 도끼를 바닥에 쿵, 하고 내려놓고는 갑주 안에 손을 집어넣고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 뒤적거렸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허리춤에 매달린 도깨비의 잘린 머리들이 끔찍하게 흔들렸다.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2왕자 진효기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것이 우리 천제 성하('폐하' 유사한 경칭, 대동에서 미한 윤예진과 더불어 정선교가 이 경칭을 사용하고 있다.)께서 내리신 국서요. 이에 동의하신다고 국세만 찍어주면, 국왕의 왕권과 이 나라는 앞으로도 계속 존속하게 될 것이오.”

동금이 갑주 안에서 비단으로 된 두루마리 서한을 국왕 진위선에게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국왕의 곁에 있던 친위대 맹약무사가 대신 서한을 받아 진위선에게 건네 주었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두루마리를 펴 내용을 읽어보니,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대월국의 서부와 남부를 ‘ㄴ’ 자 형태로 잇는 12개 번을 천제국에 영구히 할양하는데 동의한다는 계약서 형태의 국서가 들어있었다.

잠시 국서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국왕 진위선이 힘없이 입을 땠다.

“......가서 국세를 가져오라.”

친위대 맹약 무사가 침대 뒤편의 서랍에서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두 개의 달을 보고 울부짖는 호랑이가 조각된 옥으로 된 대월국의 국세가 들어 있었다.

국왕은 동금이 가지고 온 국서에 힘없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국세를 찍었다.

국서는 다시 친위대 맹약무사를 통해 동금에게 전해졌다.

동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국서를 갑주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척후를 보내 반란군들의 동향을 파악할 것이오. 그동안 우리 군은 먼 길 오느라 많이 지쳤으니 성 안에서 좀 쉬겠소. 약속한 대로 이따 점심부터 우리 군이 먹을 식량을 내어 주시오. 놈들의 상황이 확인되는 대로 군을 이끌고 나가 토벌을 시작할 것이오. 국왕은 이제 우리만 믿으시고 부상 치료에 전념하시오.”

옷으로 가리고 있었음에도, 동금은 국왕이 다쳤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했다. 그는 국왕에게 아무런 예의도 표하지 않고 땅바닥에 내려 놓은 양날 도끼를 다시 집어 들고 쿵쿵 거리는 발걸음으로 처소를 나가 버렸다.

“일개 장수 따위가 전하 앞에서 저리 무례할 수가......!”

국왕 곁에 있던 2왕자 진효기가 분을 삭히지 못하고 허리춤의 장자검에 손을 갖다 대며 으르렁거렸다.

국왕이 그를 향해 손을 들고 진정시키며 말했다.

“두어라. 우리를 도우려 온 손님들에게 역정을 내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니라.”

진효기는 내성 밖으로 나가는 동금과 두억시니들의 등뒤에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우리를 도우러 온 손님들이라 하셨지만, 아까 저들의 허릿춤에 달린 것이 무엇인지 보셨습니까? 그건 우리 백성들의 머리였습니다! 천제국에서 이곳 호문에 이르는 모든 곳은 모두 우리 국왕군 번주들의 땅입니다. 반란군의 땅도 아니고, 우리 국왕군들의 땅을 약탈하면서 왔다는 뜻입니다!”

국왕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이에 항의할 수 없었다.

“우선 저들이 반란군들을 어찌 물리쳐 주는지 지켜보자꾸나. 작은 일 때문에 눈앞의 대사를 그르치는 것은 군주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정치와 도덕을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지 마라.”

국왕은 다리의 통증이 도져오는지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진효기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부축해 침대에 편히 눕히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천제국이 아니라 율도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옳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율도라는 말에 진위선이 눈을 부릅떴다.

“그 놈, 강운예가 나를 위해 군대를 보낼 성 싶으냐? 그 놈은 이미 수십년이나 지난 계몽 전쟁 때의 일로, 나를 아직도 ‘전쟁 범죄자’라 부르며 모욕하고 있다! 심지어 나를 죽이려 암살자를 보내기도 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의례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전쟁 범죄라니? 아무리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마루한이라지만 제 기준대로 대동의 모든 것들을 재단하는 모습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구나! 그런 놈의 도움은 기대하지도 말거라. 이 나라가 난리를 겪고 있는 마당에 우리의 뒤를 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곁에 있던 맹약 무사가 국왕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왕자에게 말했다.

“대동에 새로 온 마루한과 율도의 영애가 성산백에게 납치되었을 때에도 단숨에 우리 대월국을 멸망시키려는 듯 대군을 이끌고 국경까지 쳐들어왔지 않습니까? 그런 자에게 구원 요청이라니,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게다가 그는 지난 번 성산번에서 데려간 7왕자님을 아직도 송환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속을 알 수 없는 율도 태상국보다는 차라리 무식하고 잔인한 천제국 두억시니들이 우리들에게 더 나은 구원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왕 진위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다. 왕자 진효기가 급히 국왕의 손을 두 손을 잡았다.

“이 사람의 말 그대로다. 강운예 그 자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네가 이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강운예 그 자를 믿어서는 안된다. 율도에 어떤 도움도 바라서는 안되고. 저들이 말하는 정의란 오로지 제 나라의 국익에 우선이 되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제 나라 국익에 우선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지. 그들의 세치 혀에 절대 놀아나지 마라. 그들은 웃는 얼굴 뒤에 시퍼런 칼을 숨기고 있는 놈들이다. 그들이 너를 보고 웃을 때 곧 크나큰 위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진효기는 아비의 손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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