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대동력 9,994년 5월 20일 (1)
* * *
오전 7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영록은 오늘 아침 운동을 나가지 않았다.
아침 식사 이후 곧바로 원정군에 합류하기 위해 평연당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영록이 종군하게 될 2군단이 있는 곳까지 말을 타고 가려면 족히 몇 주는 걸렸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배를 타고 가면 5일이면 2군단이 있는 곳 가까운 부두에 당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강운예가 선물한 갑주를 차려 입고 허리에 철편과 권총까지 착용하고 1층으로 내려오니, 집사가 자신의 말들 안장 위에 골고루 짐보따리를 챙겨 놓고 있었다. 그 안에는 갈아입을 옷들과 전투식량들, 그 외 소소한 간식거리들이 들어있었다.
강운예는 율도군 정복을 단정하게 입고 현관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부인 이소영과 예은도 그를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최근 들어 그가 정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거의 매일 보는 중이었다. 영록이 처음 백화에 왔을 때, 강운예는 일상복 또는 운동복 차림으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원수부에 들어가 정무를 보는 날도 3일에 한 번 정도 뿐이었는데, 지금은 아침 일찍 대원수부에 가서 밤 늦게 돌아오고 있었다. 최근 대동의 정세가 갑자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예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예린은 마치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영록이 들은 예린의 마지막 말은, 가족 모임에 초대된 배다른 자매 예나에게 했던 ‘그때 미안해, 정말로.’ 이 한 마디였다. 그 후로 예린은 그 누구와도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경무관에 가지 않았을 텐데, 지금도 그녀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사히 잘 다녀와요, 마루한. 다치지 않게 조심하구요.”
“오빠, 잘 다녀오세요. 시간 날때마다 편지 써주는 거 잊지 마세요.”
이소영과 예은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그를 보냈다. 영록도 허리 숙여 공손히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영부인. 그리고 예은이 너도. 꼭 편지 써서 보내 줄게.”
영록이 강운예와 함께 말이 있는 정원으로 나오니, 태상국을 호위하기 위해 기다리던 붉은 방풍의의 적영단 무사들과 처음보는 십수명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투구에는 하얀색과 붉은색 술이 반반씩 달려 있었고, 타고 있는 말 외에도 각자 여러 필의 말들을 더 데리고 있었다. 그들의 말위에도 무기와 짐들이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
“이번 원정에서 너와 함께 할 군경 여단 무사들이다.”
강운예가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소개해 주었다. 그러자 군경 여단 무사들이 말을 몰아 영록 앞으로 다가와 일렬로 서기 시작했다.
“제 105 영부인 친위 정예 기마 군경 여단 3대대 1중대 대위 성시우 등 17명! 마루한께 인사드립니다!”
맨 우즉에 있던 무사의 육성 지휘 아래, 군경 여단 무사들이 영록에게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영록도 기쁜 얼굴로 경례에 화답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경례를 받은 영록이 중대장 성시우 대위에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마루한이 자신의 말 아래에서 손을 뻗자, 성시우 대위는 다급히 말 아래로 뛰어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를 본 강운예가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들이 이번 원정길에서 너의 전우가 되어줄 것이다. 항상 너의 곁을 지켜줄 것이니,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이들에게 이야기 하거라.”
강운예는 영록이 타고 갈 배가 있는 백화항까지 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말을 타고 평연당을 나섰다. 강운예의 옆으로는 적영단이, 영록의 옆으로는 군경 여단 무사들이 두 사람을 삼엄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한동안 정들었던 평연당이 점점 등뒤로 멀어져 갔다. 평연당의 현관 앞에는 아직도 영부인과 예은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영록도 그녀들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백화항으로 향하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일상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황금빛 사자의 옆모습이 그려진 검은색 깃발을 보고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태상국이시다! 태상국 기하께서 오신다!”
그 소리에, 사람들 모두 잠시 길 가로 물러서서 다가오는 태상국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행렬에 강운예와는 물론 영록도 함께 있는 본 백화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거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태상국 기하, 영록 마루한. 만세무강(?世無?) 하소서!”
여기 저기서 사람들의 환호성도 들려왔다. 강운예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영록은 문득 지난 날 누리마루에서 내려오던 날이 생각났다. 누리마루의 다모랑들이 그를 향해 환호하고 꽃잎을 뿌려주는 등 그를 환대해주던 그 때 기억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지금 길가에는 참으로 많은 종족들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리마루에서 본 것과 같은 다모랑도 있었고 동양인과 똑같이 생긴 한자손도 있었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아름답게 생긴 아리랑도 있었다. 하얀 피부의 서양인을 닮은 도깨비와 머리에 뿔이 달린 포각수들도 눈에 띄었다.
‘이렇게 다들 평화로워 보이는데, 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걸까? 대동에 오기 전에는 2차 한국 전쟁에 한일 전쟁, 대동에 오고 나서도 또 전쟁......’
길가에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던 강운예는 영록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게냐?”
그의 목소리에, 영록은 짐짓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잠시 전쟁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전쟁에 대해,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느냐?”
“여기 오기 전에도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는데, 여기 대동에 와서도 또 전쟁을 보게 되니......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서 여러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강운예가 물었다.
“너는 전쟁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느냐?”
영록은 잠시 머리속으로 대답할 말들을 정리했다.
“저는 사람의 욕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욕심?”
“네, 2차 한국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거든요. 어떻게든 한 번 더 대통령을 하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제 부모님도 돌아가셨죠. 결국 그 사람의 욕심만 아니었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제 부모님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고, 저도 전쟁고아들 모아 놓은 성부 학교 같은데 안가도 되었을 거고, 그랬으면 유민이도...... 흠, 흠! 어쨌든 저는 전쟁은 사람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영록은 일전에 책에서 읽은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평화는 힘에 의해 유지될 수는 없고, 오직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자의 욕심을 앞세우기 보다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 말을 200여년 만에 들으니 감회가 새롭구나.”
강운예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평화는 힘에 의해 잠시 유지될 수 있지만, 결코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지. 힘이란 균형추가 무너지면 평화도 덩달아 깨질 수밖에 없으니. 그러면 영원한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는데...... 너는 그럼 평화를 위해서, 네 여자친구를 빼앗아간 그 놈들도 이해할 수 있느냐?”
순간, 그의 눈 앞에 우성시 일월촌 조폭들의 은신처에서 마선욱과 박광, 전도한 등 조폭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윤간당하던 유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그 때 당시 자신의 모습도 똑똑히 기억났다
영록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200여년 넘게 살며 깨달은 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엔 필연적으로 다툼이 생기고, 그 다툼이 커지면 결국 전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해결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힘에 의해 강제되는 법이었고, 나라와 나라 간에 일어나는 다툼을 해결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힘으로 상대를 강제할 수 있는 국력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말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그건 지극히 높은 이상일뿐이었고,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말랑말랑한 것이 절대 아니었지.”
강운예는 그들을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길가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이 곳 율도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두억시니, 도깨비, 포각수, 그리고 그저 시공은 넘어온 덕에 영원히 늙지 않는 축복을 받은 주제에, 제가 정말 신이 된 줄 알고 구역질나는 짓들이나 일삼고 있는 정선교 같은 저급한 마루한들이 넘쳐나는 이 곳 대동에서, 나와 우리 무사들이 저 바다를 가득 채울만큼의 피와 땀을 흘린 후에야 간신히 얻어낸 것들이다. 평화란 결국,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강한 힘이 있어야만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그 힘을 가졌다면 그것을 가려 쓸 수 있는 법도 알아야겠지. 기억해라.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힘이 있되 정의로운 것.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상태인지 깨닫는 것이 이번 원정에서 네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번 원정이 끝나고 나와 다시 만나는 날, 그 숙제에 대한 답을 내게 말해 다오.”
영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 말씀, 최배달, 아니, 극진 가라데 최영의가 한 말이죠?”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가물가물하다만, 그 양반이 먼저 한 말은 아닐 거다. 팡세를 쓴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파스칼 시아캄? 아, 아니, 블레즈 파스칼이었나?”
강운예는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백화항에는 여러 척의 전선들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영록은 강운예의 배웅을 받으며 부두에 기다리고 있던 1기동 전단 소속의 기함 ‘충무공 함’에 승선했다. 충무공 함은 율도에 단 한 척 뿐인 1급 전함으로, 1,000명 이상의 승조원이 탑승할 수 있는 거대 전선이었다.
충무공 함의 원래 이름은 ‘소영 함’ 이었다고 한다. 강운예가 율도 수군을 대표하는 자신의 기함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 이름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짓궂은 수군들 사이에서 이 배에 승선할 때마다 영부인 이소영 위에 올라타는 거라고 음담패설 섞인 농담들이 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강운예는 얼마 못가 배의 이름을 충무공 함으로 바꾸어 버렸다. 물론, 강운예는 기함의 이름을 바꾼 것 때문에 수군들의 장난을 탓하지는 않았다. 배의 이름을 바꾼 이유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내가 살던 곳의 전설적인 수군 장수 이름이 이 배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 이라 짧게 설명할 뿐이었다.
영록이 탄 충무공 함 외에도 함께 항해하는 호위함과 초계함들, 그리고 수많은 군수품들을 수송하는 지원전단의 지원함들이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선들이 일제히 닻을 걷어 올리고 돛대에서는 커다란 돛들이 바람에 활짝 펴졌다.
영록에게 있어 바다로 나가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산이나 인천 같은 바닷가에 놀러간 적은 있어도, 이렇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의 장관 앞에 탄복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이 곳 대동의 전쟁을 보게 되는구나. 총 쏘고 포 쏘고, 전차와 전투기들이 싸우는 현실 세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겠지? 칼과 창에 머리 떨어지고 몸이 두 동강나고...... 지난 번 대월국에서 본 것들 그 이상의 끔찍한 것들을 보게 될지도 몰라. 그런 전쟁에서,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그는 갑주 안에서 작은 서책 하나를 꺼내 보았다.
그 안에는 영록이 철편으로 싸울 때, 혹은 맨손으로 싸울 때 사용할 여러 비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관장님 말씀대로 이번 전쟁에서 내가 나서서 싸울 일이 얼마나 있겠냐만, 전쟁 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틈틈이 이 기술들을 계속 연습해야겠어. 그래도, 웬만한 무기로는 뚫을 수도 없다는 유성금 갑주에다가 관장님이 주신 총도 있으니, 위험한 일은 별로 없을 거야.’
그는 서책을 도로 갑주 안에 집어넣고는, 손바닥으로 갑주를 툭툭 두드려 보았다. 왠지 일반 갑주보다는 얇고 가벼운 느낌이어서, 이게 정말 칼과 창, 화살은 물론 총알도 모두 막아줄까, 하는 의문이 갑자기 들기도 했다.
영록은 불안한 생각을 떨치려 충무공 함 안을 돌아다녀 보았다.
배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었다. 가장 아래층에는 무기와 포탄, 식량 등 여러 화물들이 실려 있었고, 각 층의 측면에는 대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를 세어보니 100여개가 훨씬 넘어 보였다.
배의 전면과 갑판 상층에도 대포가 있었는데, 이 대포들은 배의 측면에 실린 대포와 모양이 조금 달랐다. 영록은 호기심이 발동해, 뒤에서 그를 수행하던 수군 무관에게 두 대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었다.
“배의 측면에 있는 대포들은 주로 구형 포탄을 사용하는 대포들이고, 갑판 위에 있는 대포들은 모두 신형 포탄을 사용하는 대포들입니다. 구형 포탄은 폭발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신형 포탄은 신관 장치가 있어서 스스로 폭발하는 포탄을 말합니다.”
“화력이 훨씬 좋은 신형 포탄이 있는데, 아직도 대포를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구형 포탄을 사용할 필요가 있나요?”
“그것이, 우리가 신형 포탄만 사용하면 상대 배가 그대로 격침되어 버려서, 배를 노획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적의 배를 가라앉히는 것 보다 빼앗아 쓰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배를 나포할 때에는 돛대를 부셔버리거나 적 수군들을 쓸어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때는 구형 포탄이 신형 포탄보다 훨씬 유용한 셈이죠.”
수군 무관의 말에,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충무공 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에게 궁금한 것을 계속 질문했다.
백화항에서 출항한 배들은 어느덧 바다 한가운데로 나와 있었다. 1급 전함이 생각보다 큰 덕택에 우려했던 뱃멀미는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다.
영록이 뱃전에 서서 짭조롬한 바닷내음을 맡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즈음, 그와 함께 충무공 함에 승선한 성시우 대위가 그의 곁에 다가왔다.
“바다는 앞으로 5일간 질리도록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함내에 준비된 선실에 들어가셔서 쉬시지요.”
영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배 안으로 향했다.
“참,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아까 소속 부대가 ‘영부인 친위 기마 군경 여단’이라고 하셨죠? 영부인 친위, 면 영부인을 호위하는 부대인가요? 백영단이 있는데, 호위부대가 또 있는 거예요?”
성시우 대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다면 저희 부대가 영부인을 직접 호위하기도 합니다만, 저희가 영부인의 친위대란 이름이 붙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답니다.”
선실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로 들어서자, 그가 영록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말을 이었다.
“계몽 전쟁 당시, 저희 부대는 전 영부인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다 수호 동맹군의 수천 병력과 조우하면서 영부인이 그들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요. 그때 기마 군경 1개 대대가 목숨을 내놓고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마침내 저희 부대는 수호 동맹군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영부인과 가족들을 안전한 곳까지 대피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대대원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맙니다. 이 때, 무사들의 희생에 감동하신 전 영부인이 저희 부대에 그때의 진 신세를 앞으로 영원히 갚겠다며 자비로 후원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그 이후부터 대대로 영부인들이 계속 저희 부대의 후원자가 되어 주시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영부인 친위 기마 군경 여단’으로 불리게 되었던 겁니다.”
배안 좁은 통로에는 수많은 수군들이 제 일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모두 마루한을 알아보는 듯, 영록을 보는 이들마다 그에게 깍듯이 경례를 하고 지나갔다.
영록은 그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군경이면, 원래 군사 경찰 부대였던 건가요?”
“맞습니다. 지금도 평시에는 대원수부에서 군사 경찰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지요. 마루한처럼 중요한 분들을 경호하는 일도 하고 있구요.”
“중요한 분들이라면, 또 누구를 경호하고 계신가요?”
“현재 다른 중대들이 대원수부 별관에 있는 대월국 7왕자를 경호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7왕자에 대한 호위가 강화되어서 몇 개 중대가 더 파견을 나갔다고 하더군요.”
영록은 대월국 성산번을 탈출할 때 보았던 대월국 7왕자 진효명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율도에 온 후 그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번 만난 것뿐이긴 했지만, 도깨비치고는 상당히 친절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왕자답게 교양도 있었던 것 같고.’
영록은 갑자기 그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오전 8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영록을 배웅한 후, 강운예는 곧장 대원수부 본관으로 들어왔다.
그가 5층 집무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올려진 여러 서류철들을 확인하려 할 때,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여무사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머그컵처럼 투박하게 생긴 찻잔에 가득 든 것은 인스턴트 커피였다. 지난 번 강운예가 현실 세계로 갔을 때 조폭들의 은신처에서 잔뜩 가져온 것이었다.
“고맙네.”
강운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여무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부인의 영애(예나)께서는, 어제 대월국 7왕자와 만남을 가지시고 댁으로 안전하게 귀가하셨습니다.”
그 말에, 강운예가 힐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왕자가 예나에게 호감을 보이던가?”
“도깨비치고는 밝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영애에게도 무척 다정하게 대해주고,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답니다.”
강운예는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경학관으로 사람 보내서, 예나 수업 끝나면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기하.”
“참, 그리고 정보본부장한테, 주 나라 황자하고 유학생들 귀국 조치 관련해서 들어온 정보 있으면 바로 보고하라고 전해주겠나?”
여무사는 손으로 책상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대해선 이미 정보본부장이 쪽지를 남기고 갔습니다.”
여무사가 가리킨 곳을 보니 그녀의 말대로 작은 쪽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말을 마친 여무사는 강운예에게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 그는 쪽지를 들어 읽어 보았다.
[금일 황자가 주나라 공관에서 본국으로 출발한다고 합니다. 다른 유학생들도 역시 곧 귀국할 것으로 보입니다.]
강운예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문득, 그의 눈길이 책상 위에 있는 가족 초상화로 향했다.
자신과 이소영, 예성, 예린, 예은 이렇게 다섯 명이 마치 가족사진 찍는 것처럼 모여 앉아 그린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 활짝 웃고 있는 예린의 얼굴을 바라보니,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300년 가까이 살아도,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 같군...... 얼마나 더 살아야 알 수 있으려나? 얼마나 더 살아야......?’
그는 손에 쥔 쪽지를 북북 찢어 버리고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