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대동력, 9,994년 5월 19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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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대월국 흥원번 아미산 일대
과거, 대월국이 초원길 일대를 장악하고 있을 때만 해도 지금의 율도 동해안 일부 지역과 바다는 모두 그들의 차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월국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은 흥원의 남쪽 혜연만(?)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월국의 유일한 항구가 있는 이곳 혜연만은 원래 수백 척의 수군 전선들이 모여 있는 대규모 수군 기지가 있던 곳이었다. 그들에게는 지금 율도가 ‘동해’라 부르는 바다를 ‘대월해’라 부르며 이 바다의 주인이라 자처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계몽 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월국 수군 전선들은 율도 수군에 의해 대부분 처참하게 격침당하거나 나포 당하고 말았다. 대월국이 자랑하던 1급 전함 ‘풍월호’도 이 때 혜연만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계몽 전쟁 중, 강운예는 대월국의 해상 보급로는 물론 무역 항로까지 모두 차단하기 위해 율도 수군으로 하여금 이곳 혜연만을 에워싸고 막아 버렸다. 율도 수군이 혜연만 일대를 막아버리자 인근에 있는 태진의 수군도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어졌고, 당연히 수호 동맹의 보급 수송이 제약을 받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월국 수군은 항구 일대를 봉쇄하고 있던 율도 수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그 당시 대동 최대 규모의 거함이었던 풍월호를 앞세워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풍월호가 적의 포격을 견뎌내며 포위망을 가로질러 뚫어내면, 뒤따르는 다른 전선들이 양분된 율도 수군 전선들을 둘러싸고 각개격파할 요량이었다.
풍월호가 항구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율도 수군은 이 배를 3면에서 둘러싸고 집중 포격을 퍼부었다.
그 와중에도 풍월호의 모든 수병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율도 수군이 쏘아 대는 포탄이 일반 원형 쇠구슬로 된 포탄이나 돛대를 부술 목적의 사슬탄 정도 인줄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 포탄으로는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풍월호를 결코 격침시킬 수 없다며, 날아오는 포탄을 바라보며 태연자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풍월호에 명중한 포탄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포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율도군은 이 해전부터 순발신관 (일명 착발신관 / 충격신관, 일정량의 충격을 받는 즉시 폭발하는 형태의 신관) 장치가 장착된 포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동에 오기 전 폭발물에 대한 기술을 익힌 바 있는 강운예가 마침내 흑색화약을 이용한 신관장치를 개발했던 것이다.
풍월호에 명중한 포탄들은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한꺼번에 수십여 발의 포탄을 얻어맞은 풍월호는 순식간에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칠흑 같은 폭연이 바다바람에 쓸려 나가자, 배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깨지고 부서진 풍월호의 끔찍한 몰골이 드러났다. 승조원 1,100여명과 포 130문을 싣고 있던 대월국의 자랑, 풍월호는 제대로 된 전투도 벌여보지 못한 채 그대로 혜연만 앞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풍월호의 뒤를 따라 항구를 빠져나오던 다른 전선들은 이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가 율도 수군으로부터 호되게 포격을 얻어맞고 급히 뱃머리를 틀어 항구 안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후, 혜연만 앞바다는 더 이상 ‘대월해’라 불리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율도의 ‘동해’ 라 불리게 된 것이다.
계몽 전쟁 이후 대월국 수군에 남아 있는 배라고 해야 채 10여척도 되지 않았다. 245척에 달하는 전선들을 보유하고 있는 율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미약한 전력이었다.
대월국 내에서도 수군을 다시 재건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율도에 전쟁 배상금 갚기에 급급해 육군인 무사단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운 판에, 그보다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한 수군을 양성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혜연만 앞바다를 담당하는 흥원의 번주, 흥원공 진대승에게도 수군을 키울 만한 재력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세금을 박박 긁어 들여 봤자, 국왕에게 갖다 바치고 남은 재정으로는 번의 살림을 돌보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흥원공 진대승은 전쟁이 일어나자 마자 번에 있는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국왕군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 흥원에 남아 있는 무사단은 백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진대승은 육군 무사단은 물론 수군 병력들마저 싸그리 끌고 갔다. 그로 인해 수군 기지에는 빈 배를 지키는 늙은 번군 수십 명 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 틈을 노려 반란군인 통요번 무사단이 흥원을 점령하기 위해 들어왔다. 통요번의 번주 조암천은 반란군의 수장 심운보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번군들의 수는 모두 1,200여명이었다.
본성인 흥원성은 단 하루 만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끝까지 성을 사수하며 저항하던 흥원번의 무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성을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군 기지를 지키던 이들은 흥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모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혜연만은 그렇게 버려진 항구가 되어 버렸다. 전쟁 때문에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상선들의 입항이 뚝 끊긴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무도 없는 혜연만의 선착장으로 배 한 척이 들어와 있었다.
율도 수군의 쾌속함이었다.
쾌속함에서 내린 검은색 장옷 (대동의 장옷은 머리와 얼굴을 덮을 수 있는 후드가 달린 코트와 유사하며, 방풍의보다 얇은 경우가 많다. 남녀 모두 입을 수 있다.) 을 입은 여섯명의 남자들이 항구 마을을 지나 북서쪽을 향해 걸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밑으로 드러난 살색이나 얼굴 생김새로 보아 한 명만 빼고 모두 도깨비가 아닌 듯 보였다.
남자들이 항구 마을을 지나는 동안 버려진 그물에 걸려 폐사한 물고기들을 쪼아 먹으려 다투는 바닷새들의 울음소리만이 시끄럽게 들려올 뿐, 사람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주민들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듯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통요번의 반란군들이 흥원으로 들어왔을 때, 처음에 이곳 사람들은 그들에게 큰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다스리는 이가 다른 귀족으로 바뀌는 것일 뿐, 어찌되던 간에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란군들은 흥원의 백성들을 같은 나라의 같은 백성으로 대우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점령지의 수탈 대상으로 여길 뿐이었다.
흥원성이 점령되자마자 통요번 반란군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전쟁 이후 제대로 된 급여도 받지 못하고 있던 번군들은 마치 이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집이란 집은 모조리 쳐들어가 돈과 먹을 것, 값나가는 물건이라면 죄다 빼앗아갔다.
저항하는 자는 인정사정없이 죽였다. 약탈을 시작하기전 사람들이 아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마을 대표들을 붙잡아 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죽이기도 했다. 반란군들은 나무 위에 마을 대표들의 목을 밧줄에 매달고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칼로 배를 가르고 검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장을 꺼내 사람들 앞에 던졌다. 이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들은 단순히 살인과 약탈만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약탈하러 들어간 집에 어린 처녀들이 있으면 무조건 끌고 갔다. 처녀가 아닌 유부녀도 상관치 않았다. 제 마음에 든 여자가 있다면 나이가 어떻건 남편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발가벗기고 끌고 갔다.
결국 사람들은 반란군을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곳 항구 마을 역시 반란군들에게 약탈당하고 주만들도 모두 도망쳐 폐허처럼 남게 된 것이다.
남자들은 항구 마을을 빠져나온 이후, 산이나 숲길을 이용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한 시간 가까이 걸었을 때쯤, 언덕의 소로길 아래로 허름한 초가집들이 몇 채 모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맨 앞에서 걷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주먹을 쥐더니 자세를 낮추고 그 자리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뒤 따르던 다른 남자들은 이를 보고 모두 조용히 몸을 낮추고 언덕 아래를 주시했다.
마을에서는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도깨비들이 초가집 여기 저기를 오가며 집안에 있는 세간살이들을 제 마음대로 들어 내오고 있었다.
반란군의 약탈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집 안에서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아기의 찢어지는 울음소리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남자들은 언덕 뒤에 몸을 숨기고 마을의 상황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여자의 신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도깨비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언덕 위까지 들려왔다.
“이 빌어먹을 애새끼! 거 되게 시끄럽네!”
그리고 이어서 여자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되요! 내 아기에게 그러지 마세요! 아, 안돼, 안돼!!! 아아악!!!”
여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아기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언덕 위에 있던 이들 중 한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겁니까?”
질문을 받은 남자는 계속 마을을 주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 짐승만도 못한 도깨......”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들과 함께 있던 이들 중 도깨비가 한 명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려던 말을 조금 바꾸어 다시 이어 말했다.
“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을 그냥 살려 두면 나중 더 많은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우리 백성들이 아니고, 저들을 돕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감정에 휩쓸려 맡은 임무에 차질을 빚게 해선 안된다. 조금 더 마을의 동태를 살펴보다가 이동한다.”
질문을 했던 남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두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후, 반란군 도깨비들이 집 안에서 벌거벗은 여자 하나를 끌고 나왔다. 여자는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반란군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오면서도 계속 집을 돌아보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집밖으로 끌려 나온 여자는 그녀 한 명이 아니었다. 각 집에서 아무런 옷도 입지 못한 한 두명의 여자들이 끌려 나왔다.
반란군들은 약탈을 모두 끝 마친 듯, 빼앗은 재물과 납치한 여자들을 데리고 흥원성이 있는 곳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자들의 손과 목에 밧줄을 묶어 마치 소나 말 몰고 가듯 끌고 갔다. 손으로 여자들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추잡하게 주물럭거리며 히히덕거리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즈음, 언덕 위의 남자들도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왜 마을 사람들을 구하지 않느냐 질문했던 남자는 여전히 미안함과 미련이 남아 있는지, 걸음을 옮기며 수십번도 넘게 텅 빈 마을을 뒤돌아보았다.
남자들이 마을을 지나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멀리 율도와의 국경이 내려다보이는 아미산이었다.
“이쯤일게요.”
아미산 중턱에 당도했을 때, 일행 중 도깨비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남자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가지고 온 가죽 수통에 든 물을 나눠 마시며 숨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 주변을 힐끔거리며 경계를 했다.
어디선가 수풀들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고 머리 위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공녀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오. 반란군이 아니니 쏘지 마시오.”
도깨비로 보이는 남자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말했다. 남자들 모두 가만히 손을 들고 서 있자, 잠시 후 수풀 속에서 십여 명의 도깨비 무사들이 남자들에게 쇠뇌를 겨누며 걸어 나왔다. 무사들의 갑주에는 등 위에 두 개의 달을 지고 있는 고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흥원번의 무사들이었다.
“거짓말이면 너희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무사들이 남자들에게 다가와 몸을 수색하려 했다.
“모두 칼과 활을 지니고 있소. 오해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요. 의심되면 잠시 맡아 주시구려.”
일행의 선두에 서서 걷던 남자가 말했다. 그의 말에 무사들은 남자들의 장옷 속에 있던 칼집과 전통, 활을 풀어 압수했다.
무사들이 남자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옷을 벗겨 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평범하게 생긴 도깨비 남자 한 명, 나머지는 모두 한자손과 아리랑 출신 남자들이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느냐? 공녀님을 만나러 온 연유가 무엇이냐?”
무사의 물음에 도깨비 남자가 답했다.
“우리는 율도에서 왔소. 나와 함께 온 이들 모두 율도의 무사들이고.”
‘율도’라는 말에 무사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자들을 쏘아보았다.
“어찌 도깨비가 율도의 무사들과 함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우리 공녀님이 여기 계신 것은 어찌 알고 율도에서 너를 보냈단 말이냐?”
“난 율도 국민이오. 사람 살기 더없이 좋은 율도인데, 왜 도깨비가 살지 않겠소? 그리고, 공녀께서 여기 계시다는 건 너무 공공연한 비밀 아니오? 흥원의 백성들도 공녀님이 여기 계시다는 걸 알고 반란군의 수탈을 피해 이리로 모여들고 있는 실정인데, 그 소문이 어찌 방방곡곡으로 퍼지지 않았겠소? 지금 통요번 반란군은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려 이곳을 치지 않는 것일 뿐, 그들도 이미 공녀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게요.”
무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공녀님을 만나고자 하는 연유가 무엇이더냐?”
도깨비 남자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율도의 태상국 기하께서 공녀를 돕고 싶어 하시오. 그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외다. 자세한 내용은 공녀를 만나 뵙고 하고 싶소만.”
태상국, 강운예의 호칭을 들은 무사들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흥원번 무사들은 율도에서 왔다는 도깨비 남자들과 율도 무사들을 데리고 아미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야영지로 들어갔다.
흥원성이 떨어지던 날, 위의 오빠들이나 다른 남자 형제들보다 휠씬 호방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21세의 여장부, 공녀 진미령은 무사들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 아미산으로 도망쳐왔다.
그녀는 살아남은 무사들과 함께 이곳에 야영지 등 생활 시설을 만들고, 장기적으로 생활하고 군사를 조련할 수 있는 시설들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아울러 반란군의 수탈을 피해 달아난 흥원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끌어 모아 통요번의 반란군들에게 반격을 가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반란군을 피해 아미산으로 숨어 들어온 백성들의 수는 벌써 2천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아미산 계곡 곳곳에 퍼져 있는 그들의 야영지에는 땅을 파고 거적을 얹어 비바람만 간신히 피할 수 있는 정도의 움막들이 수백여 동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 반란군들을 피해 이리로 도망 온 흥원의 백성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힘겨운 야영 생활에 지쳐 가는지, 사람들의 얼굴은 다들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야영지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와 어린 아이, 아니면 나이 많은 이들 뿐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번군이 되어 번주를 따라 국왕군에 참여하러 떠났기 때문이다. 간혹 보이는 남자들도 대부분 나이가 많은 이들이었다. 그 수도 겨우 몇 백 명 될까 말까 해 보였다.
“율도에서 태어난 게요?”
도깨비 남자의 곁에서 함께 걷던 무사가 물어왔다.
“아니, 나도 대월국 사람이었소. 서래번에서 살았었지. 26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율도로 가게 되었소.”
“왜 떠난 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요?”
“무슨 일? .......있었지,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거든. 율도는 여기처럼 개 같은 신분 제도 같은 게 없으니까, 그래서 고향이고 뭐고 다 버리고 떠났던 거요.”
도깨비 남자는 입술을 이죽거리며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무사를 슥, 쳐다보았다.
백성들의 움막을 지나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자 통나무로 지어진 그나마 집처럼 보이는 건물 하나가 나왔다. 공녀 진미령과 무사단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율도 무사들은 밖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도깨비 남자 혼자 무사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하얀색 전포에 붉은색 갑주를 입고 있는 진미령이 늙은 노파와 서너 명의 아이들과 바닥에 둘러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노파는 공녀의 손을 붙잡고 통곡하며 하소연했다.
“부디 그 놈들 모두 복수해 주십시오...... 제 며느리에게 몹쓸 짓을 한 그 흉악한 놈들 모두...... 제 어린 손주들이나 늙어 빠져 아무 힘없는 이 늙은 몸을 대신해 그 놈들 모두, 그 죽어 마땅한 놈들 모두 반드시 복수해 주신다고 제발 약속해 주십시오......”
진미령은 울부짖는 노파의 손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약속하겠소. 반드시 내가 복수해 주겠소. 그대 뿐 아니라 반란군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긴 이들 모두, 내가 대신 복수 해줄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나를 믿고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기거하며 잠시만 기다려 주오. 내 곧 반란군 놈들을 모두 목을 베어 흥원성 성벽위에 매달아 버릴 것이니, 부디 나를 믿고 잠시만 기다려 주오.”
그녀는 노파와 아이들을 위로하고 밖으로 내보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도깨비 남자가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과연, 흥원의 여장부다운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말씀대로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진미령은 박수를 치는 이 낯선 이를 불쾌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곁에 있던 흥원번 무사에게 물었다.
“누구인가?”
“율도에서 공녀님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자입니다.”
“율도? 율도에서 나를?”
“그것이, 율도 태상국이 공녀님을 돕겠다는 전언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율도 태상국이란 말에 진미령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율도 태상국이 나를 돕겠다 했다고?”
이 때, 도깨비 남자가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래서 단어 하나만 바뀌어도 말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니까? 공녀, 방금 이 자가 한 말을 조금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태상국께서 공녀를 돕겠다고 결정하셨다’는 전언을 들고 온 것이 아니라, ‘태상국께서 공녀를 돕고자 하는 뜻이 있는데, 이에 대해 서로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해 보자’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진미령은 찬찬히 남자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특별할 거 없이 평범한 얼굴에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 도깨비가 그다지 미더워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율도의 관리인가? 어떤 직책에 있는 누구인가?”
“저는...... 이를 테면 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소속은 대원수부 정보 지원단입니다. 흔히들 ‘흑영단’이라 불리고 있는 곳이지요. 저희에겐 달리 불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공녀께서는 저를 그냥 편하게 ‘율도 도깨비’라고 불러주십시오.”
흑영단이라는 말에 공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정식 외교 사절도 아닌 일개 간자였단 말인가? 그런 자가 어찌 율도 태상국을 대신해 나와 무슨 이야기를 논의하겠단 말인가?”
율도 도깨비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공녀께서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외교란 원래 국가와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녀께서 대월국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 역시 외교를 논할 만한 자리는 아닐 텐데, 우리가 외교 사절을 보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진미령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 함께 온 무사들에게도 말했는데, 통요번의 반란군들도 공녀께서 무사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아미산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 사이에 이곳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매일 매일 백성들이 도망쳐 오는데도 조심성 하나 없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으니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반란군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와 족쳐도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반란군은 곧 이리로 쳐들어올 겁니다. 그 때가 빨리 오는냐, 늦게 오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그들이 여러분들을 찾아 이 곳 아미산으로 몰려올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녀님과 무사들은 물론이고, 이곳으로 피난해 온 백성들은 몰살을 피할 수 없을 테지요. 겨우 수십 명의 무사들과 수백이 채 되지 않는 나이든 남자들만으로는 갑주로 단단히 무장한 반란군들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녀께서는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자신이 백성들을 대신해 반란군에게 복수해 주겠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약속을 남발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무슨 배짱으로 공녀와 흥원을 도울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태상국께서 보내신 나를 간자라 부르며 경시하는 겁니까?”
그의 말에, 진미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손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초면에 무례하게 군 점 사과드리겠소. 그럼 앉아서 태상국이 우릴 어찌 도우려 하시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성에서 도망쳐 나와 간신히 통나무집 하나 짓고 살고 있는 형편이라 의자나 탁자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바닥에는 꺼끌꺼끌한 짚방석이 깔려 있어서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 정도를 겨우 막아주고 있었다.
율도 도깨비는 손으로 짚방석 위에 가득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는, 양반다리를 하고 편히 앉아 진미령을 마주 보고 입을 열었다.
“곧 우리 율도군이 이곳 흥원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2개 군단, 도합 6만이 넘는 병력이지요.”
“6만...... 천여 명이 겨우 넘는 통요번 놈들은 감히 상대할 수도 없는 병력이군. 반란군 전체 병력과도 맞먹을 수 있는 수준이고. 그럼, 태상국은 무슨 이유로 그 많은 병력을 이곳 흥원으로 보낸다는 것이오? 그저 반란군들을 몰아내고 흥원을 되찾아 주기 위함은 아닐 것 같은데?”
“절반은 맞는 말씀입니다. 흥원을 공녀에게 되돌려 드리기 위한 것도 출병의 이유 중 하나이지요.”
진미령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율도 도깨비를 쳐다보았다.
“율도 태상국이 아무 이득 없이 그런 선의를 베풀 거라 생각되지 않아! 대체 그대들의 본의가 무엇이오? 날 속일 생각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보시오!”
율도 도깨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공녀께서는 이번 전쟁이 어찌 진행되어 가는지 들으신 것이 있습니까?”
“산속에 숨어 지내고 있는지라 자세한 경과는 듣지 못하고 있소.”
“역시 그러셨군요......”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찍이 대월국 성산백이 마루한과 율도의 영애를 납치해 억류하고 있던 중, 성산번을 찾아온 대월국 7왕자의 친위대를 몰살시키고 왕자마저 살해하려는 일이 있었지요. 다행히도 7왕자는 우리 군에 의해 구출되어 현재까지 율도에서 보호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진미령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집안은 왕실과 친척 관계였다. 율도에 있는 7왕자 진효명과도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태상국께서는 이번 성산백의 마루한 / 영애 납치 사건과는 상관없이 대월국과 우호 관계를 맺기를 소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사지에 빠져 있던 7왕자를 구해 율도로 안전하게 모셨던 것입니다. 7왕자는 율도에 머무는 동안 태상국과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며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지요. 이건 비밀인데, 태상국께서는 7왕자의 성품에 반해 왕자가 자신의 영애 중 한 사람과 혼인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답니다.”
율도 도깨비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 보였다.
“이번 원정 역시 7왕자의 청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태상국은 먼저 우리 율도와 육로는 물론 바닷길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이 곳 흥원을 확보한 후, 이곳을 거점으로 반란군들을 모두 섬멸하실 계획입니다. 즉, 우리는 이 곳 흥원의 반란군을 모두 내쫓아 공녀께 돌려 드릴 것이고, 앞으로 이번 반란이 모두 종결될 때까지 이곳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녀의 동의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순간, 진미령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와 같은 중차대한 일은...... 이곳의 번주이신 내 부친께서 먼저 듣고 결정을 내리셔야 할 일일 것 같은데......”
“예를 따져야 한다면 응당 흥원공을 먼저 찾아뵙고 말씀을 드려야 함이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며칠 전 용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국왕군이 반란군에 대패하고 호문으로 철수한 이후, 흥원공은 물론 현 국왕과의 모든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성산백이 이끄는 반란군이 국왕군이 들어간 환강산성 일대를 포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덕분에 그분들의 정확한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공녀께서는 용림 전투의 경과에 대해 아직 듣지 못하신 게로군요?”
율도 도깨비는 조심스럽게 공녀의 눈치를 살폈다. 용림 전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진미령의 얼굴엔 놀라움과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현재로서는, 공녀께서 흥원공의 역할을 대신해 주셔야 합니다. 공녀께서 동의만 해주신다면, 우리 율도군이 단숨에 이곳 흥원에서 반란군들을 모조리 몰아내 버릴 것입니다. 행여나 우리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공녀를 속이고 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공녀께서도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율도군은 흥원을, 아니 대월국 전체라도 언제든 손쉽게 정복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흥원을 침략할 생각이었다면 그냥 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면 그만인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공녀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 우리 율도가 귀국과 공녀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려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진미령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쉽게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공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냥 동의만 하면 되는 것이오? 귀국이 나나 우리 번에 요구하는 사항 같은 것은 하나도 없소?”
“요구 사항이라면, 우리 군이 흥원으로 들어왔을 때 향도가 되어 줄 사람들과 흥원의 자세한 지도를 내어 주십시오. 이후 병량이나 군수품 지원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흥원을 되찾아 드린 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귀국의 군대는 언제쯤 흥원에 도착할 예정이오?”
“7일. 7일 내에 모두 도착할 것입니다.”
공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실, 우리는 살아서 흥원성을 빠져 나온 무사들과 여기 있는 이들 중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아 흥원성을 기습하려고 했소. 성을 되찾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구해낼 생각이었지. 또, 내 어머니와 동생들도 구해올 생각이었고......”
흥원성이 함락되던 날, 성의 탑 꼭대기에 숨어 있던 그녀의 어머니와 17살, 15살 된 여동생들, 12살 어린 나이라 전쟁에 따라가지 않은 남동생은 꼼짝없이 반란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성을 빠져나오며 함께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강인해 보이던 여장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아버지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혼란스럽구려. 아무튼, 나는 귀국의 요청에 무조건 동의하는 바이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귀국의 군대가 우리 번으로 들어오게 되면, 통요번 반란군 놈들이 내 가족과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달아날 때 그들 모두 끌고 가버리지 않을까, 그 점이 우려되는 바이오.”
율도 도깨비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공녀께서 얼마나 근심이 클지 짐작이 갑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점에 대해서도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진미령이 간절한 눈빛으로 율도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오?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다는 말이오?”
“반란군들이 무슨 짓을 하기 전에 그 분들을 구해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소?”
“쉬운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율도 도깨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녀께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만큼, 우리 역시 공녀를 적극 도와 드릴 것입니다. 이번 일로 공녀께서 우리 율도를 완전히 신뢰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는 공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통나무집을 나가려 했다.
그때, 공녀가 율도 도깨비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잠깐! 하나 더 물어볼 것이 있소. 율도 태상국은 원래 우리 도깨비들을, 특히 대월국을 몹시 싫어하고 있다 들었소.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와 우호를 맺고 싶어 하신다는 거요? 내가 아직 귀국을 의심하는 게 바로 그 때문이오. 내 질문에 답해줄 수 있겠소?”
율도 도깨비는 걸음을 멈추고 공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태상국 기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국제 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어제의 적이 오늘은 우방이 될 수도 있고, 국익에 해가 된다면 오늘의 우방이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국제 정치라고 말입니다.”
율도 도깨비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통나무집 밖으로 성큼 성큼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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