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83화 (83/217)

〈 83화 〉 대동력 9,994년 5월 19일 (1)

* * *

­ 오전 10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일대

용림에서 반란군에 대패를 당한 국왕군은 패잔병들을 수습해 호문의 환강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환강산성 서쪽과 남쪽은 누리마루부터 천제국까지 이어지는 장범강이 자연 해자처럼 둘러쳐져 있고, 북쪽과 동쪽은 둥그런 산등성이가 자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성산백(?) 심운보는 자신이 이끄는 성산번군이 포함된 반란군 2만 명으로 패주하는 국왕군을 뒤쫓아 환강산성의 북쪽에 진을 쳤다.

심운보를 따라온 다른 번의 번주들은 성을 포위하고 국왕군이 항복할 때까지 지구전을 펼 것을 주장했다. 패주해 간신히 도망쳐온 환강산성 안에 국왕군 전체가 장기간 버틸 만한 양의 군량이 비축되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심운보는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곧바로 공성을 시작했다.

그가 호문에서 국왕군을 포위하고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나머지 반란군 번주들이 은허를 먼저 점령해버린다면, 그들이 왕성을 차지한 후 심운보를 제쳐두고 저희들끼리 왕위를 놓고 담합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쾅! 쾅! 쾅!

반란군 포병들이 환강산성의 북쪽 성문을 향해 쉴 세 없이 포탄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사단에 소속된 번군들이 아니라 돈을 받고 고용된 용병이었다. 대월국에서 제대로 된 포병은 국욍군에 있던 왕립 포병 연대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지난 용림 전투에서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포병들은 평사포 (나폴레옹 시대 육군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게 생긴 대포, 저각 사격만이 가능하다.) 앞에 흙무덤을 만들어 포를 경사지게 배치하고 언덕 위 산성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다. 반란군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대포 뿐 아니라 지난번 전투에서 노획한 국왕군의 대포들까지 모두 동원해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며칠간 쉼없이 이어진 포격으로 북쪽 성문 주변 성벽들이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하지만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환강산성의 기본 토대는 경사진 자연 흙벽이었기에, 돌로 된 성벽이 포탄에 맞아 무너져도 흙벽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공격하는 이들이 언덕을 기어올라가야 하는 것도 변함없었다.

그나마 계속된 포격에 북쪽 성문이 완전히 부서졌다. 가파른 언덕 위의 산성인지라 정란 (공성탑)이나 운제 (사다리차) 등 공성병기를 운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성문이 깨어졌다는 것은 분명 반란군들에게 고무적인 일이었다.

“1진, 진격!”

심운보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목건주가 선두의 반란군을 이끌고 산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은 부서진 북쪽 성문에 집중되었다.

국왕군은 급히 부서진 성문 앞에 흙을 담은 가마니를 쌓아 올려 진지를 만들고, 거마창 (창을 여러 개 묶어 세워 놓은 것)과 녹각목 (날카로운 쇠붙이를 달아 놓은 나무 줄기 등을 엮어 만든 장애물)을 세웠다. 유자철선으로 만든 철조망을 얼기설기 쳐 놓기도 했다.

이 최후의 방어선 일대에서 국왕군과 반란군의 밀고 밀리는 혈전이 벌어졌다.

“와아아아아!”

두꺼운 판금 갑주를 입은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이 장애물 지대를 해치고 들어갔다. 거마창도, 녹각목도, 철조망도 모두 두꺼운 판금 갑주를 입은 무사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판금 갑주를 입은 반란군 무사들이 커다란 도끼를 휘둘러 성문 앞의 장애물들을 깨뜨리려는 순간이었다.

탕! 탕! 타당! 탕! 탕!

그 때, 성벽 위에 숨어 있던 국왕군들이 그들을 향해 수석식 소총을 쏘아 댔다. 질 좋은 판금 갑주는 수석식 소총에서 발사되는 납탄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양군 간의 거리는 불과 20보도 안 될 만큼 너무나 가까웠다. 게다가 국왕군들은 비교적 판금 두께가 얇은 팔과 허벅지 같은 부위를 노려 사격하고 있었다.

총탄에 맞은 무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러자 국왕군들이 성문 앞 진지를 뛰어 넘어와 부상당한 자들을 도끼와 낭아봉으로 내리 찍어 죽이기 시작했다.

“죽어라, 더러운 반란군 새끼들아!”

갑주를 입은 무사들은 대게 귀족이거나 부유한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보통 도깨비들은 전쟁에서 이런 자들을 죽이기보다 포로로 잡는 것을 선호했다. 훗날 그들을 석방해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반란군도 포로 따위를 잡을 생각이 없었다. 반란군 번주들은 국왕군 번주들과 귀족들을 모두 죽이면 그 땅과 재산들이 고스란히 제 것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체 낮은 무사들 역시 자신이 죽인 자들에게서 무기와 갑주 등 값나가는 것들을 빼앗을 궁리나 하고 있었다. 지난 용림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1만여명에 가까운 국왕군들이 신분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산 채로 생매장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오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군이 굳이 힘들게 적을 생포할 필요는 없었다.

국왕군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죽였다.

그들이 휘두른 도끼질에 두꺼운 판금 갑옷도 종이짝처럼 찢겨져 나갔다. 미친 듯이 날뛰는 낭아봉의 날카로운 쇠못 가시들은 금속으로 된 투구를 뚫고 들어와 무사들의 머리를 짓뭉개 버렸다.

“비켜라!”

갑자기 반란군들 중에서 덩치 큰 도깨비 무사 한 명이 장자검을 빼어 들고 성문 앞 진지로 달려들었다.

목건주였다.

그는 총에 맞아 쓰러진 반란군 무사의 머리를 향해 낭아봉을 휘두르던 국왕군 무사의 앞으로 달려들어갔다.

슉!

날카롭게 공기를 찢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낭아봉을 들고 있던 팔이 땅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무사는 잘린 팔을 손으로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기도 잠깐, 또 한 번 목건주의 장자검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팔이 잘린 무사의 몸에서 투구를 쓴 머리가 뚝, 떨어졌다. 목건주는 목 없는 시체를 발로 차 쓰러뜨리고, 진지 앞으로 넘어온 국왕군 무사들을 하나씩 하나씩 베어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빨리 장전해, 빨리! 총도 못 쏴 보고 다 죽고 싶어?!”

목건주가 무서운 기세로 장자검을 휘두르며 국왕군들을 거침없이 베어내는 것을 본 성벽 위의 지휘관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총병들을 다그쳤다. 총병들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총구에 화약을 넣고 탄을 재거나 화약접시에 발화화약을 담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국왕군은 용림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전투원, 비전투원 가릴 것 없이 싸울 수 있는 모두가 다 성벽에 투입되어 반란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중이었다. 그들 중 몸상태가 온전해 보이는 이들은 찾기 힘들었다. 몸에 피 묻은 붕대를 감고 있지 않은 자들도 드물었다. 심지어 팔 하나 없는 자가 한 손과 발을 이용해 쇠뇌를 당기고 있었고, 다리 하나 없는 자가 성벽에 기대어 앉아 총구멍 사이로 총을 겨누기도 했다.

총병들이 재장전을 거의 다 끝마쳐 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목건주는 부상당해 쓰러진 무사 하나를 잡아 끌며 뒤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건주가 달려오자 뒤에 있던 번군들이 그를 엄호하기 위해 전호차 (방패가 달려 있는 수레)를 밀면서 달려왔다

탕! 타당! 탕! 탕! 탕!

목건주가 부상당한 무사를 데리고 전호차 뒤로 몸을 숨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국왕군의 총격이 시작되었다. 두꺼운 나무 방패 앞에 얇은 대나무 여러 개를 둥글게 말아 덧대고, 그 뒤에 흙을 담은 쌀가마니까지 쌓아 올린 전호차는 수석식 소총의 납탄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다.

총격이 끝나자, 전호차 뒤에 몸을 숨겼던 목건주가 다시 일어나 번군들을 향해 외쳤다.

“2진, 진격!”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창을 꼬나 잡고 있는 수백의 번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문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는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화약 연기가 마치 산 허리에 구름이 가득 낀 것처럼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성벽 위의 국왕군들도 성 아래로 달려드는 반란군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총병들이 재장전하는 동안 사수들이 활과 쇠뇌를 쏘아 댔다. 하지만 제대로 노리고 쏘지 않아서인지,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는 이들은 적었다.

이윽고 반란군들이 성문 앞 진지로 돌입했다. 진지 뒤에 있던 국왕군들이 몸을 일으켜 창으로 찌르고 도끼를 휘둘러 반란군들을 쓰러뜨리며 진격을 막아냈다.

마침내 성벽 위의 화약 연기가 걷히고, 수석식 소총과 쇠뇌, 활을 든 국왕군들이 반란군들에게 총탄과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성문 좌우에는 치(?)까지 있어, 성문 방향으로 들어오는 반란군들을 둘러싸고 공격할 수 있었다.

처절한 전투는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무너진 북쪽 성벽 일대는 금세 도깨비들의 검붉은 핏물들이 작은 시내를 언덕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목건주는 수차례 병력들을 축차투입하며 북쪽 성문을 공략했다. 하지만 국왕군의 필사적인 저항을 뚫지 못하고 전사자와 부상자만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언덕 아래 지휘소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심운보는 결국 군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철수시켜. 우리가 뒤로 빠지는 동안 저 놈들이 성문 못 막게 포병들은 계속 성문 향해서 포를 쏘라 하고.”

생각보다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심운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 오전 14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일대

쿵, 쿵 거리는 포 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가운데, 심운보는 지휘소 천막에서 성산번의 영주, 성주들과 더불어 차를 마시며 다음 작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번의 정찰병들이 국왕군의 방비가 허술한 곳을 찾아다니는 중이라 합니다. 조금이라도 성벽을 오르기 수월한 곳 찾으면 한번 번군들을 투입해 찔러볼 요량인 것 같습니다.”

최전선에서 성산번군들을 이끌었던 목건주가 말했다. 그의 갑주와 전포는 아직도 흙먼지는 물론 적의 핏물까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심운보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는데까지는 최선을 다 해 봐야겠지.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말이야. 저희들이 나선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나대기는, 쯧.”

이에 목건주가 말했다.

“적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합니다. 계속 북문만을 공략할 것 아니라 여러 다른 방향에서도 공성을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싸우며 보니 성벽 위에 있는 놈들 중 부상당한 채 총칼을 들고 있던 녀석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아마 놈들은 저 환강산성 성벽 전체를 둘러 쌀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은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번들처럼 새로운 공격 경로를 찾아봐야 합니다. 계속 북문 공격만 고집하다가 다른 번의 번군들이 빈 틈을 찾아 들어가 저 성을 먼저 장악하고 국왕을 사로잡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심운보는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각 번 번주들은 서둘러 병력들에게 점심밥을 먹이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라 전하라. 그리고 내 명령 없이 함부로 병력 움직이지 말라고도 이르고.”

그리고 목건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경의 무사단에서 쓸 만한 자를 골라 은밀히 성벽을 넘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보라.”

목건주는 고개를 숙여 그의 주군에게 예를 표했다.

그러던 중, 본진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맹약무사가 지휘소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구천락이 돌아와 각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심운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영주 중 한 명인 음학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아직도 구천락 그 자를 곁에 두고 계십니까?”

심운보는 메밀차가 든 찻잔을 찬찬히 기울이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주가 있는 자를 곁에 두는 것이 무어가 잘못되었는가?”

“지난번 제 얕은 꾀에 자만하다가 마루한을 우리 번으로 모시는 일에 낭패를 보게 만든 작자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구천락 그 자는 귀족도, 무사도 아닙니다. 그는 물론 그가 부리는 자들 모두 다 말입니다. 항상 어둠 속에 숨어 뒤 구린 짓이나 하고 다니는 천박한 자들입니다. 그런 놈들은 무사의 명예를 모릅니다. 도깨비의 수치란 말입니다.”

음학수의 말에, 심운보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그대들이 지고(?高)한 귀족 신분과 무사의 명예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가 할 수 있기에, 내가 지금도 구천락을 곁에 두고 쓰는 것이다. 그대들 중 나를 위해 무사로서의 명예를 버리고 그의 일을 대신할 자가 나온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그를 내칠 것이다. 누가 나를 위해 그 명예를 버리겠는가?”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마루한을 모시는 과정에서 큰 실책이 있는 것은 맞으나, 이미 다 지난 일이다. 이제 마루한 없어도 우리의 대업이 이루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보아라, 국왕은 용림에서 우리에게 크게 패해 저 환강산성에 갇혀 있고, 그의 왕성 역시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번주들에게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지 않느냐? 결과적으로 구천락에게 책임을 물을 이유는 없어진 것이다. 명예? 수치?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너희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수모를 감당하면서도 나를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구천락과, 무사의 명예를 잘도 운운하면서도 전쟁터는 물론 일상 중에도 약탈과 강간을 서슴지 않는 너희들 중 누가 더 바르다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때, 구천락이 지휘소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까지 급히 말을 달려온 듯 온몸이 흙먼지 투성이였다.

그는 자신을 아니꼽게 쳐다보는 영주, 성주들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운보 앞으로 나아가 무릎 꿇고 예를 올렸다. 정국의 총에 맞아 다친 팔도 이제 다 나았는지 더 이상 붕대를 감고 있지 않았다.

“각하, 천제국의 군사들이 대월국의 국경 안으로 진군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지난번 국왕이 보낸 구원 요청을 천제국이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대월국 안으로 들어온 천제국 군사의 수는 약 3만이며, 그 절반 이상이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천락의 말에, 지휘소 전체가 술렁였다.

“이런 제길, 조금만 더 있었으면 국왕을 잡을 수 있었는데......”

심운보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아쉬워했다.

목건주가 옆에 내려놓은 투구를 집어 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2만여 명에 불과한 우리 병력만으로 이곳에서 그만한 수의 천제국 두억시니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우선 방어가 용이한 지역으로 군을 물려야 합니다.”

심운보가 구천락에게 물었다.

“천제국 군사들의 이동 경로는?”

“장범강 북쪽을 따라 이동 중입니다. 사흘 후면 환강산성 동쪽에 도달할 것입니다.”

심운보는 앞에 놓인 지도를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놈들이 이곳에서 국왕군과 합류하게 되면, 가장 먼저 수도 은허로 진군하려 할 것이다. 왕성과 국왕의 직속 영지가 우리에게 털리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리 없겠지.”

심운보는 호문과 은허의 중간에 위치한 개골령 고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각 번 무사단에게 오후의 공성을 취소하고 지금 당장 개골령으로 이동해 방어진지를 편성할 것이라 알려라. 그리고 명천백(?)에게 전령을 보내어 천제국이 이 전쟁에 개입했으니 지금 바로 2만 이상 병력을 개골령으로 보내어 우리를 지원해 달라 전하라.”

명천백 피호석은 대월국 수도 은허를 공략하는 반란군들의 임시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는 자였다. 그는 7천에 달하는 번군들을 이끌고 이번 반란에 참여했다. 7천이라면 심운보가 이끌고 온 1만의 성산번군 다음으로 많은 수였다. 그 덕분에 그는 심운보가 국왕을 쫓아 호문으로 내려간 사이 나머지 반란군들을 모두 이끌고 수도 은허 공략을 맡게 된 것이다.

명을 받은 목건주가 병력들을 이동시킬 준비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 영주와 성주들도 자신의 번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와장창!

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을 때, 지휘소 천막 안에서 무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운보가 국왕을 독 안에 든 쥐처럼 몰아 놓고도 군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미 전투를 치른 후라 주둔지 이곳 저곳에서 부상병들의 고통어린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부상병들은 일단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부상병 대부분이 투구와 상체 일부만을 보호하는 갑주를 입고 있던 번군들이었다. 갑주로 보호되는 면적이 좁은 탓에 목과 팔, 다리에 총탄이나 화살을 맞거나, 창칼에 찔리고 베인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급하게 병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 탓에 군의관은 물론 약과 붕대 등 준비된 의료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후송된 부상병들을 눕힐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부상병들은 자신이 입고 있던 전포 등 천을 찢어 환부를 누른 채 더러운 풀밭 위에 누워 군의관에게 치료받을 때까지 한참동안 기다려야 했다. 치료를 기다리는 중간에도 지혈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몇몇은 과다출혈로 죽어가기도 했다.

다행히 부상당하지 않은 도깨비 번군들은 공성을 앞두고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무기의 날을 세우며 다음 전투를 대비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땅바닥에 놀이판을 그려 놓고 고누 (오목, 장기와 유사한 민속놀이의 하나)를 즐기거나 투전 (화투와 유사한 놀음) 판에 벌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썩을, 장귀로 갑오 떠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일장통곡이 떠버리네. 이런 제길!”

“낄낄낄, 이제 판돈 다 꼴아 박았지? 걸만 한 거 다 떨어졌으면 다음 판부터 빠져.”

“나한테 걸게 왜 없어? 자!”

가진 돈을 모두 잃은 도깨비 하나가 전포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투전판 위에 올려놓았다.

“황표 10장이야! 이정도면 다음 판에 껴도 되지?”

황표는 전시 군영에 설치된 유곽을 드나들 수 있는 입장권이었다. 노란색 종이로 만들어져 있어 흔히들 황표라 부르는 것이다.

각 번의 무사단은 전시에도 군영 내에서 유곽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게 번군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황표를 나눠주곤 했는데, 전공이 있는 자에게는 몇 장을 더 나누어 주곤 했다.

현재 반란군에 가담한 번주들은 자신의 무사단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다. 당연히 매월 자신의 무사들과 번군들에게 급여도 나눠주어야 했는데, 당장 돈이 부족한 번주들 중에는 번군들에게 돈 대신 황표를 나눠주는 이들도 있었다.

전시 군영의 유곽에서 번군들을 받는 유녀들은 보통 자신의 번에서 데리고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필요에 따라 모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면 돈 냄새를 맡은 대월국 각지의 들병이 여인들이 멀리서도 달려오곤 했다.

하지만 들병이 여인들에게 내줄 돈조차 아까워하는 번주들은 점령한 땅의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와 윤간하고 유녀로 삼기도 했다. 그녀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같은 나라 같은 백성이었다는 인식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자신과 다른 번이고 자신과 다른 편에 서 있었다면 누구라도 공격해 짓밟고 빼앗고 약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도깨비들이 말하는 정의,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였다.

투전판을 벌이던 도깨비들이 다음 패를 돌리려 할 때, 그들을 지휘하는 맹약 무사가 번군들에게 다가오며 큰 소리로 명했다.

“성산백 각하의 명이시다! 전군 지금 즉시 철군 준비를 시작하라! 빨리 가서 천막 걷고 여길 뜰 준비를 하란 말이다!

투전판에 앉아 있던 도깨비들이 투덜거리며 판돈과 투전 패들을 챙겨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따 밥 먹고 공성 다시 시작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철군한다는 겁니까?”

“왜, 불만 있어? 불만 있으면 네가 직접 성산백 각하께 가서 그렇게 따져 물어봐! 못 할 거면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가서 천막이나 걷어!”

무사는 번군들을 일갈하며 서두르라 독촉했다.

“이런 제길, 니 놈 황표 따서 오늘 밤 아주 죽여주려 했는데, 날 샜네.”

“죽여? 네 다리 사이에 달린 애기 손가락만 한 좆으로 누구를 죽이게?”

“이런 오살할 도깨비 새끼. 니가 내꺼 봤어? 내꺼가 애기 손가락 만한지 발가락만 한지 니가 봤냐고?”

“왜? 아까도 나랑 같이 저쪽 밭고랑에 오줌 누러 갔다 왔잖아? 크크큭. 이렇게 된 거, 이 황표 내가 계속 갖고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써야겠다. 히히히.”

“야...... 나한테 한 장만 줘봐. 나 진짜 꼭 박고 싶은 년이 있단 말이야.”

“응? 누구? 아~ 그년? 그 아리랑 년?”

“너도 아는구나? 여자는 역시 아리랑이 최고지! 게다가 그년 젖통이 아주 그냥....... 생각만 해도 아랫도리가 빨딱 서네. 크크크. 너 어차피 10장이나 있으니까, 나 한 장만 줘봐봐~ 얼른~!”

“미친놈~ 너 같으면 꽁으로 그걸 주겠냐? 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장에 3환! (현실 세계 환율로 약 24만 원가량) 이정도면 완전 합리적인 가격 아니냐?”

“3환? 이런 제길~! 생쥐한테서 가서 웅담을 찾아라. 전쟁 중이라고 급여도 제 때 안 나오는 판에 나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3환이나 받냐?”

그들은 계속 한 장만 달라, 돈이나 달라 아옹다옹 거리며 자기네 천막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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