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82화 (82/217)

〈 82화 〉 대동력 9,994년 5월 18일 (2)

* * *

­ 오전 11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영록이 혼자서 단봉술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을 때, 집사가 평연당 별채 수련장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짐 보따리를 한아름 들고 있었다.

“태상국 기하께서 마루한을 위해 준비한 것들입니다.”

“전포하고 갑주인가 보군요? 어제 관장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영록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집사와 함께 온 이들은 상인들로 보였다. 그들은 영록을 보고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전포와 갑주들은 물론 기하께서 준비하신 다른 선물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선 전포와 갑주부터 입어보시고 혹여 맞지 않는 곳이라도 있나 함께 살펴보시지요.”

집사가 손짓을 하자 상인 두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준비해온 보따리에서 은색 실로 수놓아진 검은색 전포를 꺼내 영록에게 입혀주었다. 전포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통풍이 잘되는 소재로 만들어진 듯 시원했다.

영록은 전포를 입고 상인들이 가지고 온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그는 이 검은색 전포가 전에 애국 청년 십자군에서 입었던 검은색 사제 테러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율도의 전포는 강운예가 현실세계 군인들의 전투복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기에 유사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옷깃과 어깨에 계급장을 달 수 있게 만든 것 하며, 양 상박과 허벅지에 주머니들이 붙어 있는 것까지 비슷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모플라주 등 위장 패턴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영록을 지켜보던 집사가 말했다.

“장관급 이상 무관들이 입을 수 있는 양식으로 지은 전포입니다. 불편하신 곳은 없는지요?”

“네, 몸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맞춘 것처럼 제 몸에 딱 맞는 거지요?”

“일전에 기하께서 마루한의 의복을 맞추어 드린 적이 있지요? 그 때 잰 신체 치수를 전포상과 갑주상에게 보내어 이것들을 미리 제작하게 하셨지요. 그럼 이제 갑주도 한번 입어 보실까요?”

이번엔 갑주 상인 네 명이 다가와 영록에게 단단하게 생긴 갑주를 입혀주기 시작했다.

“유성금으로 만든 갑주입니다. 칼이나 창, 화살은 물론, 일반 납탄도 아무 문제없이 막아줄 것입니다.”

갑주 상인이 현실세계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처럼 생긴 율도의 검은 갑옷을 입혀주며 말했다.

유성금이란 말에, 어떤 철제 무기라도 일격에 두부처럼 베어버리던 정국의 장검이 떠올랐다.

“그럼 유성금 무기랑 유성금 갑주랑 부딪히면 어느 것이 이기나요?”

영록의 호기심어린 물음에 갑주 상인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철로 된 무기와 철로 된 갑주가 부딪혔을 때와 비슷합니다. 뭐, 무기든 갑주든 훨씬 더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쪽이 이기게 되겠지만, 무기가 갑주를 쉽게 뚫어내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모두 이런 유성금 갑주를 입을 수 있다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전쟁을 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된다면 찌르고 베며 싸우는 게 아니라 치고 박고 때리며 싸우게 되겠지요. 베여죽지는 않아도 맞아 죽는 사람은 나올 겁니다. 무사라면 누구나 다 유성금으로 된 갑주나 무기를 가지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이런 갑주를 하나 가지려면 일반 무사들이 평생 벌어도 절대 모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답니다. 이 율도 안에서 유성금 갑주를 가진 사람은 100명이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율도의 갑주는 일부러 광이 나거나 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어둡게 검은색 칠을 했다. 영록은 지난번 대월국 성산번에서 본 도깨비 무사들이 이와 대조적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 갑주를 입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강운예 관장님의 갑주도 은색 보석들이 달려 있긴 했지만 대월국 도깨비들의 갑주처럼 번쩍번쩍 거리지는 않았어.’

궁금증이 생긴 영록이 집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강운예 관장님이 원래 검은색을 많이 좋아하시는 건가요? 군기의 색도 검은색이고, 전포의 색도 검은 색이고, 갑주의 색도 검은색이고, 타고 다니는 말도 검은색이고......”

“또 평상시에도 검은 옷을 자주 입으시지요. 저도 일전에 태상국 기하께 그런 부분에 대해 궁금해서 여쭤본 적이 있었죠. 그랬더니 그 분도 웃으시며 ‘검은색이 원래 때가 잘 안타잖아? 잘 변하지도 않고.’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에 집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율도의 모든 것에 검은색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율도군의 군기는 검은 바탕이지만 율도의 국기는 파랑과 흰색, 빨강이 섞여 있지요. 또 율도군에도 검은색 전포가 아닌 다른 색 전포를 입고 있는 부대들도 있습니다. 전장에서 태상국의 명을 직접 전하는 청영단은 전시에는 검은색 전포를 입어도 평상시에는 푸른색 전포를 입고 있지요. 또 101 대원수 친위 선봉 기마 엽병 여단 같은 경우 진한 녹색 전포에 검은색 곰털 가죽 모자를 쓰는 전통을 200년 넘게 지켜 오고 있구요.”

영록이 갑옷을 다 입자 상인들은 하얀 술과 넓은 챙이 달린 투구를 꺼내 그 안의 부유대를 조절한 후 영록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날이 많은 율도의 날씨 특성상 율도군의 투구는 모두 넓은 챙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의 옆과 뒷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깨까지 내려온 목가리개는 철갑으로 되어 있었는데, 왼쪽 부분에 여분의 철갑이 더 달려있었다. 필요시 이것을 당겨 목가리개 오른쪽에 걸면 눈을 제외한 얼굴 전부분과 목 앞부분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갑주를 모두 입어보니 어느새 어엿한 율도의 무사가 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가볍게 걷고 뛰어도 보고 팔도 이리 저리 움직여 보았다. 생각보다 무겁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처음 입어본 거라 생소해서 그렇지, 조금만 적응되면 금방 내 몸의 일부처럼 편안해질 것 같았다.

갑주 상인들이 뒤로 물러나자 세 명의 상인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무기 상인들이었다.

“태상국 기하께서 친히 주문하신 철편입니다.”

그들은 영록이 단봉술을 수련할 때 쓰던 목봉과 비슷한 크기의 철로 만든 몽둥이 두 자루를 건네주었다. 영록이 쥐어보니 확실히 목봉보다는 중량감도 있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상인은 은으로 된 사자 형상이 화려하게 세공된 뇌홍식 권총 한 자루를 내밀었다. 그것은 마치 정국이 가지고 있던 8혈소총을 권총 크기로 작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근대 시대 총 느낌이었던 정국의 총보다는 현대에 사용되는 콜트 리볼버와 더 흡사한 모양이었다.

율도의 총들은 나무와 쇠로 만들어진 뇌홍식 (퍼커션캡 방식) 총이긴 했지만, 옛날 매치락(화승총)이나 플린트락 시대의 총들보다는 현대의 총기들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었다. 율도군의 소총에는 방아쇠울 뒤에 권총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어깨에 멜 수 있도록 가죽으로 된 멜빵도 달려 있었다. 게다가 가늠쇠와 가늠자까지 달려 있어 조준 사격도 가능했다.

영록은 한참동안 자신이 받은 무기들을 만지작거리며 좋아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집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관장님이 주신 무기는 이게 다 인가요?”

“네, 기하께서 준비하신 무기류는 편곤과 권총 두 가지입니다.”

“저...... 칼 같은 건 안주셨어요? 검이나 도 같은 거.......”

“네, 제가 전해 받은 것은 이 것뿐이랍니다.”

영록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 무기의 간지는 검이나 도가 최고인데.......’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집사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데리고 별채 밖으로 향했다.

“기하께서 내리신 선물은 이게 다가 아니랍니다. 그럼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보실까요?”

영록이 집사를 따라 별채 밖으로 나가보니, 안장과 고삐 등 마구를 모두 착용한 다섯 마리의 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 마루한께서 타고 가실 말들입니다. 아직 어린 말들이지만 모두 훈련이 잘 된 놈들이라더군요.”

영록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모두 제 말이에요? 그럼 앞으로 원정 다녀와서도 제가 타고 다닐 수 있나요?”

“당연하지요. 이 말들 모두 이제 마루한의 것들입니다.”

율도의 무사라면 누구나 다 말을 탈 줄 알았고, 몇 마리씩 말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영록도 매주 한 번씩 말을 타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지만, 아직 자신의 말을 갖지 못하던 중이었다.

말들은 검은말, 갈색말, 흰말, 회색말, 노란말 이렇게 색도 가지각색이었다. 영록은 말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말들은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듯, 얌전하게 그에게 머리를 내어주고 푸르륵, 거렸다.

“이 말들, 모두 이름이 있나요?”

“말의 이름은 주인이 짓게 되어 있지요. 이제 마루한께서 이 말들의 주인이 되셨으니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잠시 골똘히 무엇인가 생각하던 영록이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이름을 정했어요! 흰말은 아더, 검은말은 랜슬롯, 갈색말은 트리스탄, 회색말은 가웨인, 노란말은 퍼시벌이라고 부를래요!”

생전 처음 듣는 단어들에, 집사는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특이한 이름들이군요.......? 무언가 뜻이 있는 이름인가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기사들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참, 이 이름은 제가 살던 곳에 있는 다른 나라 말로 된 것들인데요, 뜻은 뭐....... 별 뜻 없을 거예요.”

영록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 오후 3시, 율도 백화 경무관

경무관의 수업이 모두 끝났지만, 예린은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경무관이 끝나는 즉시 귀가 하셔야된다고, 태상국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영단 무사들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잠깐만요...... 잠깐이면 되요......”

예린은 이 말만을 되풀이하며 고개를 떨구고 경무관 도검 수련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도검 수련장에 들어간 예린은 목검 하나를 집어 들고 나무로 된 타격대를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퍽!!!!

바닥에 잘 고정되어 있던 타격대는 그녀가 한번 목검을 휘두를 때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검 수련장 입구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진채연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오늘 처음 예린의 경호 임무를 나온 백영단 무사가 다시 진채연에게 질문했다.

“태상국께서 경무관 끝나자마자 영애를 바로 평연당으로 데리고 오라 하셨잖습니까? ......저러고 있는 거 제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채연은 쉬지 않고 타격대에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예린을 계속 주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이따 저녁 때 가족모임 때문에 영애가 늦지 않게 하려는 거 같은데, 아직 시간은 많이 있어. 좀 더 저렇게 놔둬도 돼.”

“그런데, 영애...... 원래 이렇게 혼자 남아 수련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까?”

“아니, 경무관 끝나면 친구들과 다과 먹으러 가거나 어디 딴 데 놀러나가지, 이렇게 혼자 수련장에 오는 일은 거의 없어. 오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물어봐도 말 안할 거 같으니까 일단 더 지켜보자.”

진채연은 옆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백영단 무사들은 입구 문에 기대어 예린을 계속 관찰했다.

콰직!!!

예린이 휘두르는 목검에 두꺼운 나무로 된 타격대가 부셔져 버렸다. 목검을 쥔 그녀의 오른손에서도 물집이 터지고 진물과 피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목검을 내려놓고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을 감쌌다. 연분홍 손수건은 금세 붉은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누르며 지혈하던 예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왼손으로 주머니에서 아까 서주가 가져다 준 정국의 편지를 꺼내 보았다. 그녀는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편지의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되짚어 읽어 보았다.

[황제께서 소환령을 내리셨어. 나 곧 우리나라로 돌아가야 해. 미안해.]

편지는 이렇게 짧은 글만이 쓰여 있다.

한참동안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예린은 편지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미안하다는 말은 있는데, 사랑한다는 말은 왜 없어......? 난 사랑한다고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도 없이 그냥 가......? ......이 나쁜 새끼!!!”

그녀는 다시 목검을 집어 들고 새 타격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타격대를 부셔버릴 기세로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오후 4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대원수부 위병소 면회실에 앉아 있던 예나에게 위병조장이 다가와 말했다.

“영애를 모시러 온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예나는 아무 말 없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면회실 밖으로 나갔다.

그 앞에는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위병조장이 마차 문을 열어주자 예나는 무릎 위까지 길이를 줄인 경학관 교복 치마 뒤편을 손으로 살짝 가리고 계단을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예나를 태운 마차는 길을 따라 대원수부 건물들이 있는 곳을 향해 한참을 들어갔다.

본관 앞에 도착하자 본관 건물 앞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저는 태상국 기하의 전속부관 도일규 중령입니다. 대원수부에 오신 것은 처음이시지요?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예나가 마차에서 내리자 중앙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복을 입은 전속부관이 그녀를 안내해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전속부관은 본관 건물 5층으로 그녀를 안내되었다. 예나는 여기까지 계단으로 통해 걸어 올라오는 것이 힘들었는지, 얼굴을 찡그린 채 헉헉거리고 있었다.

5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앞에는 무장한 무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전속부관의 안내를 받아 입구로 들어가자, 간소한 의자와 탁자들이 놓인 응접실이 나왔다. 이곳은 강운예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대기하는 장소였다.

응접실 한켠에는 전포나 정복이 아닌 율도의 일상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음료와 다과 등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 있었다. 대원수부에 처음 와본 예나는 그들이 사실 빼어난 무예 실력을 가진 무사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전속부관이 그곳에서 도자기 잔에 시원한 물을 받아와 예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태상국 기하께서 먼저 온 손님들과 함께 계신답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지요.”

예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을 꼼지락거리며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태상국의 집무실에서 정복을 입은 무관 네명이 밖으로 나왔다. 이를 본 예나는 전속부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태상국의 집무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아빠!”

예나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큰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던 강운예는 그녀를 보고 표정을 풀고 웃어 보였다.

“예나 왔니? 밖에서 많이 기다렸지?”

예나는 말없이 아빠에게로 달려와 와락 품에 안겨왔다. 강운예는 그녀의 머리를 다정스럽게 쓰다듬었다.

강운예는 오늘 저녁 평연당에서 예린이 예나에게 사과하는 자리를 갖기 전, 먼저 예나를 만나 이야기 할 것이 있다며 대원수부로 불렀다.

그는 딸과 함께 집무실 안락의자 앉아 경학관 생활은 어떤지, 친구들과는 잘 지내고 있는지 등, 일상적인 질문들은 건넨 뒤 본론을 꺼내놓으려 했다.

그러기 전, 예나가 먼저 강운예에게 말했다.

“아빠, 나 오늘 평연당 안가면 안 되요? 이렇게 아빠 만난 것만으로도 난 된 거 같은데.......”

“그래도 예린이가 사과한다는데, 받아줘야지?”

“그게 진심으로 사과하는건지 아빠가 시켜서 사과하는건지 잘 모르겠고...... 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왠지 가만있어도 나 또 때릴 것 같고...... 걔랑 같이 있을 거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

예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예린이 잘못했다고 했는데 왜 또 널 때리겠니? 게다가 아빠도 같이 있는데 그럴 리 없잖아? 그런데 아빠가 예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강운예는 예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너 황자가 예린이랑 전부터 사귀고 있던 거 알고 있었지?”

아빠의 질문에, 예나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네? 네, 뭐, 그...... 예린이가 황자님이랑 경무관 밖에서 자주 같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요.”

“너 그럼, 예린이가 지금 황자랑 사귀고 있는 거 알면서도, 황자한테 만나자고 한거였니?”

예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주 나라 황자, 참 괜찮은 녀석이지. 얼굴도 무척 잘 생겼고, 성격도 그만하면 주 나라 황족치고 무난한 거 같고. 게다가 그 아비가 마루한이니 황제는 될 수 없더라도 나중에 제후국을 다스리는 제후는 충분히 될 수 있어 보이고....... 그러니 누구라도 끌릴 수밖에. 예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빠의 물음에 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빠가 예나한테 몇 가지 물어보자. 아빠가 주 나라 황제 보다 못한 마루한이니?”

그의 말에 예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이 율도가 주 나라보다 훨씬 못한 나라라고 생각해?”

그 질문에도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예나 너도 동의한 것처럼 아빠는 주 나라 황제에 비해 절대 모자란 마루한이 아니야. 아빠가 세운 이 나라 율도도 황치우가 세운 주 나라 따위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강하고 부유한 강대국이고.”

강운예는 손깍지를 끼고 예나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 딸들이, 다른 나라 같았으면 황녀, 공주 대접 받았을 율도의 영애들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한 나라의 황자 하나 때문에 길거리에서 다투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아빠 마음이 편치 않구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조용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예나는 아빠의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그리고 내 딸이 뭐가 아쉽다고, 이미 사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아빠가 듣기에 너무 자존심 상하는 소리인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나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그녀가 그렇게 떨고만 있자, 강운예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예나의 손을 따스히 잡아주었다.

“아빠......”

예나는 아빠의 손길이 닿자 갑자기 와락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강운예는 예나의 옆으로 옮겨 앉아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멋지고 잘생긴 녀석한테 눈길 가고 마음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아빠가 너 혼내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네가 아직 어려서 실수한 거 알려주는 거니 너무 마음 상하지 말고.”

“네......”

예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주 나라 황자, 그런 녀석은 이제 그만 잊어버리려무나. 예린이 때문에 포기하란 얘기가 아니라...... 어차피 그 녀석, 곧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고 하더구나.”

“황자님이....... 주 나라로 돌아간데요......? 왜요.......?”

딸의 물음에, 아빠는 설명하기가 무척 난감해졌다.

“뭐...... 우리나라와 주 나라간의 사정이 생겨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아빠가 말해서 황자님 안 가게 하면 안 돼요? 아니, 제가 황자님하고 사귀려고 그러는 건 아니구요, 막상 가신다니까 아쉬워서.......”

강운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간다는 녀석 잡아서 뭘 하겠니? 너도 이제 그런 녀석은 잊어버리거라. 대신 아빠가 예나 너에게 좋은 왕자 소개시켜 줄 테니.”

“좋은 남자도 아니고, 좋은...... 왕자를 소개시켜 주신다구요?”

예나는 손등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좋은 왕자. 얼굴도 잘 생겼고, 성격은...... 내가 그 친구하고 대화를 많이 안 해봐서 아직 뭐라 장담할 순 없지만, 앞으로 한 나라의 왕이 될게 확실한 왕자가 있는데 이번 기회에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구나. 만일 이 친구와 네가 결혼하게 된다면, 넌 나중 그 나라의 왕비가 되겠지.”

왕비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에 예나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왕자님이...... 누구신데요? 조만간 만날 수 있어요?”

강운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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