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81화 (81/217)

〈 81화 〉 대동력 9,994년 5월 18일 (1)

* * *

­ 오전 6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자정이 되기 전 평연당으로 돌아온 강운예와 이소영은 새벽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긴 정사로 많이 고단했는지, 이소영은 아직도 침대에 벗은 몸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강운예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떴다. 그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다소니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후, 속창의 하나 걸치고 3층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탁자 위에는 그가 보는 신문 세 부가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그는 기분이 무척 좋은 듯 아침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실 복도 쪽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림 같은 집이 뭐 별 거겠어요~ 어느 곳이든 그대가 있다면 그게 그림이죠~♬”

강운예가 대동에 오기 전부터 흥얼거리던 노래들 중 거의 유일하게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는 노래였다.

잠시 후, 3층 거실로 집사가 올라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기하?”

“응, 좋은 아침일세. 나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 띄워서 가져다주겠나?”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하옵고, 어젯밤 흑영단에서 받아온 서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품에서 노란색 봉투 두 개를 꺼내어 강운예에게 건냈다.

봉투의 색이 노란 것을 본 강운예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는 봉투에 든 보고서들을 꺼내 죽 훑어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상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쌍화차 한잔 마시고 바로 대원수부로 들어가야겠네. 아이들 엄마는 오늘 많이 피곤한거 같으니 그냥 더 자게 놔두고, 자네가 아이들 식사하는 거랑 등교하는 거 좀 봐주게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백영단 무사들에게 오늘 예린이 학교 끝나고 딴 데로 새지 않고 바로 집으로 오게끔 잘 보라고 전달 좀 해주고.”

“네, 그것도 잘 전달하겠습니다.”

집사가 내려간 후, 강운예는 의상실로 들어가 신속한 동작으로 군 정복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 오전 9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강운예의 호출을 받은 이들이 모두 대회의실로 모였다. 태상국이 직접 이틀 연속으로 대원수부 회의를 주관하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자리에는 대원수부 고위 참모들 뿐 아니라 특별히 외교부의 전략기획관이 함께 동석하고 있었다. 율도군이 원정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외교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거나 외교적 절차를 따라 조치해야 할 사항에 대한 조언을 받기 위함이었다.

강운예는 탁자 위 커다란 대동 지도 위에 각국의 군사들을 형상화 한 조각들을 직접 하나 하나 배치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 하나씩 정리해 보자구. 나라와 나라 간에 은밀한 뒷거래가 오가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게 아무리 주 나라와 천제국이더라도 우리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 그들이 어떤 거래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하던 우리 측 정보원이 갑자기 실종됐어. 그리고 그와 함께 거록과 대치하고 있는 ‘위’와 우리 율도 초원길과 연결되는 관문인 ‘동주’의 군사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지.”

‘위’와 ‘동주’는 주 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였다.

주 나라는 대월국과 같은 봉건제 국가였다. 단, 대월국의 봉건제가 현실 세계 중세 서양과 같이 국왕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신하에게 나누어 주면서 군신관계가 형성되는 제도였다면, 주 나라의 봉건제는 그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주 나라의 황제 황치우는 자신의 후손이나 자신과 함께 대동으로 넘어온 마루한, 또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를 제후로 봉한 후,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군사력을 일으켜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이게 했다. 즉, 제후들더러 당시 대동 서부에 정착해 살고 있던 다른 종족들을 내쫓고 그 땅을 뺏어서 차지하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들이 빼앗은 땅에서 얻은 것들을 매년 일정량의 공물로 자신에게 바쳐야 한다는 조건도 함께 내걸면서 말이다.

주 나라 초창기까지 이 대동 서부식 봉건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원래 대동 서부에 살던 다모랑과 자그니, 포각수들은 주 나라 제후국들로 인해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앞으로 율도가 자리 잡게 될 대동 중부와 남부 지방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서부의 모든 땅들은 마루한의 자손, 한자손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한때 도깨비들에게 심한 핍박을 받기도 했던 한자손들은 어느새 대동에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커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제후들 중 점차 불만을 품는 자들이 생겨났다. 황제에 의해 제후로 봉해질 때에는 평생 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 맹세했던 자들이었지만,

‘나와 내 부하들이 피 흘려 얻은 내 땅에서, 언제까지 신하 된 몸으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이 땅을 얻는 동안 황제가 도와준 것이 무엇인가? 그럼에도 왜 매년 황제에게 공물을 바쳐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결국 주 나라 곳곳에서 황제에 반기를 든 제후들이 스스로 독립국을 자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대동 서부는 오랜 기간 황제와 제후국들간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강운예가 황금사자단을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대동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백년에 가까운 혼란을 겪고 나서야 내전이 종식되었다. 황치우는 반란을 일으킨 제후들은 물론 그 가문 일족들을 모조리 처형해 버렸다.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은 몇몇 제후들은 향후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며 없는 죄까지 뒤집어 씌어 죽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현재 주 나라 제후들은 대부분 황치우 자신의 후손이거나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동에 오기 전 조선에 있을 때부터 황치우와 뜻을 함께 하는 동지였던 대동 서부의 마루한들은 스스로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겠다고 약속을 하고서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강운예는 지도의 위 지역에 있던 주 나라 군사 조각 하나를 거록으로 이동시켰다.

“어젯밤 위의 군세가 누리마루 북쪽 거록 땅으로 들어갔어. 지금 저들이 거록과 전쟁을 하겠다는 걸까? 거록의 두억시니들이 위나 주 나라에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고 산지 수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전쟁을 하겠다는 건 너무 뜬금없는 소리 아닌가? 게다가 거록으로 향한 병력은 1만이 채 안 되는 걸로 파악되고 있어.”

그의 옆에 있던 총참모장 한신 대장이 거록의 두억시니 조각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1만도 안 되는 병력만으로는 그들이 거록 두억시니들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거록에 자신들의 전초기지를 세우려 하거나 다른 군사적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나도 같은 생각일세. 주 나라 군사 1만 가지고는 단 하나의 두억시니 부족도 이겨내기 힘들 거야.”

강운예는 천제국 두억시니 조각들을 들어 누리마루와 율도와의 국경지역을 막아버리듯 올려놓으며 말했다.

“지금 천제국은 반란군을 물리쳐 주는 대가로 대월국으로부터 우리와 누리마루의 국경지대 땅들을 할양 받으려 하고 있지. 만일 이렇게 되면 초원길에서 대동 동부로 가는 육상 무역로를 언제든 틀어막을 수 있게 돼.”

그는 거록의 두억시니 조각과 천제국의 두억시니 조각, 주나라 군사 조각 이렇게 세 개를 거록 땅에 함께 붙여 놓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지. 만일 주 나라와 천제국은 물론 거록의 여러 두억시니 부족들까지 모두 우리 몰래 연합한 상황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관할하는 초원길을 막아버리고, 북방 거록의 초원 통해 새로운 무역로를 만들려는 수작이라면? 위의 1만 군세가 거록으로 향한 것도 이 새로운 무역로를 관할할 자신들의 전초기지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전략기획본부장 장의태 중장이 말했다.

“아무리 천제국과 거록이 같은 뿌리에서 나와 서로 통하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거록의 두억시니들은 수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목과 약탈, 식인으로 살아온 야만인들입니다. 천제국이 그런 거록의 야만 부족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게다가 약탈로 먹고 사는 두억시니 부족들이 득실거리는 거록의 땅을 무역로를 삼으려는 상인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군사지원본부장 조현민도 이에 동의하는 듯 했다.

“육상 수송보다 해상 수송이 여러 모로 장점이 많은데도 지금도 수많은 상인들이 해상 무역로보다 초원길의 육상 무역로를 이용하는 것은 무엇보다 '안전' 때문일 것입니다. 열하군도 일대는 물론이고 바다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해적들 때문에 우리 대양 수군 작전 사령부 파견 함대의 호위를 받지 않고서는 안전한 항해를 보장받을 수 없는 실정 아니겠습니까? 만일 천제국과 주 나라가 자기 나라 상인들에게 대동 동부와 서부를 오갈 때 야만 두억시니들로 가득한 거록의 초원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한다면, 아무리 천제 정선교나 주 나라 황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하더라도 자국 상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강운예는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면도를 하지 않아 살짝 까끌까끌해진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신 대장이 손가락으로 초원길의 율도 도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이 모든 상인들의 왕래를 막을 수 없을지라도, 만일 태상국께서 우려하시는 대로 된다면 초원길에 있는 우리나라 여러 무역 도시들과 상인들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라의 경제도 흔들리게 되겠지요.”

강운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을 탄 율도 무사 조각을 대월국 흥원 가까이 밀어 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거록에 새로운 무역로를 만들던지 말던지 간에, 우리로써는 이곳 흥원을 점령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곳만 틀어쥐게 되면 태진, 우루 등 다른 대동 동부 나라들과의 교역로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 테니. 다른 곳은 천제국이 모두 막아버린다 하더라도, 태진을 통한 무역로까지 막기는 힘들겠지.”

대동 최초의 도깨비 나라인 태진은 계몽 전쟁 이후 율도와 활발한 교역을 하는 등, 주요 우방국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가진 군사력은 천제국도 쉽게 넘볼만한 전력이 아니었기에, 율도가 흥원만 접수하게 된다면 태진을 통한 육상 무역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강운예는 서쪽 주 나라의 군사 조각과 남쪽 무수막 고원지대 파림의 포각수 조각을 집어 율도 방향으로 전진시켰다.

“그런데 정말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이 두 곳이야. 동주 하고 무수막에 있는 포각수들. 어제부터 이 두 곳에서 본격적인 징집이 이루어지고 있어. 그들 후방에 있던 병력들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고 하고.”

한신 대장이 율도 2군과 4군을 뜻하는 무사 조각들을 각기 주나라 군사 조각과 포각수 조각 앞에 갖다 놓으며 말했다.

“저들이 국경지대에서 활발히 군을 움직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를 향한 적대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저들이 우리 율도를 침공한다 하더라도 현재 서부 육군 2군과 남부 육군 4군의 병력만으로도 저 둘을 모두 손쉽게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만일 불안하시다면 동원령을 내려 3군의 각 사단들을 완충시켜 대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강운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지금부터 예비 자원들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들이 몹시 거슬리는군.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들을 개박살 낼 수 있다는 걸 잘 알 텐데, 갑자기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를 향해 군사 도발을 하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게 말이야. 대체 천제국이 저들과 어떤 뒷거래를 한 것이길레 저들이 이런 정신 나간 도박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울도 2군 무사 조각을 들어 주나라 군사 조각을 툭, 쳐서 넘어뜨렸다.

“특히 주 나라 하는 짓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지난 계몽 전쟁 때에 수호 동맹에 붙어 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마자 부랴부랴 우리에게 달려와 화친을 요청하던 놈들이, 이제 와서는 천제국과 다시 손을 잡고 우리를 위협하려 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원한 우방이 되자며 별의 별 사탕발림을 다 하던 놈들이? 주자의 성리학은 국가 간의 의리 따위는 가르치지도 않는 건가?”

정보본부장 이기백 중장이 말했다.

“최근 주 나라 내부 동향도 이번 일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사려됩니다.”

그는 손으로 동주 주변에 있는 제후국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한, 오, 남주 등의 지역에서 신분 / 계급 제도 철폐, 모든 백성들에 대한 의무 교육 실시, 세제(세금 제도) 개혁 등을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과거 계몽 전쟁 전후로도 이와 비슷한 시위들이 있었지만, 지금 벌어진 시위는 그 때와 비교해 훨씬 더 큰 규모였습니다. 주나라 관군들이 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유혈사태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신분 / 계급 철폐에 대한 주장이 황제와 지도층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야. 유교 성리학을 받들어 모시는 그 치들에게 신분 / 계급 철폐란 말은 곧 역성혁명, 국가 전복과 동의어 들릴 테니까.”

강운예가 이기백 중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기백 중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기하. 백성들은 신분 / 계급 제도가 철폐되면 이어서 민주화와 참정권을 요구하려 했을 것입니다. 주 나라가 정말로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시위가 발생한 지역 모두 주 나라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지역들이고, 우리 율도 상인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주 나라 황제나 지도층들이 느끼기에 그 시위가 우리 율도의 영향 때문에 일어난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우리와의 외교 관계를 다시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 무지한 유교 선비 놈들이, 외교 관계 정리를 전쟁으로 하자는 건가?”

강운예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장의태 중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그저 단순히 군사 훈련을 벌이는 걸 보고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때, 동석해 있던 외교부 전략기획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주 나라가 군사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단순히 훈련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기하.”

“그런 생각에 대한 근거는?”

강운예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전략기획관은 그의 눈빛에 기가 질린 듯,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그 근거는, 현재 주 나라 대사관에서 우리 율도에 유학 온 주 나라 양반가 자제들과 황족들을 모두 자국으로 귀국시켜려는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 강운예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사실인가? 확인된 내용이야?”

“어제 주 나라 외교 공관의 동향을 파악하러 갔던 우리 외교부 관리들이 그곳 사람들에게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 얼마 후 우리 외교부는 물론 국문관 등 각 교육기관으로도 주 나라 외교 공관에서 정식으로 관련 공문을 보낼 예정이라 했답니다.”

지금 그들이 율도에서 유학생 등 자국민을 귀국 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양국이 전쟁이 벌어졌을 때 포로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을 미리 본국으로 안전하게 탈출시키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주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모두 귀국시키려 한다면, 당연히 황자인 정국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뻔했다.

갑자기 큰 딸 예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 줘야 하나?’

정국과 다시 사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한창 들떠 있던 딸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강운예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대월국 흥원에 대한 원정은 지체 없이 계속 진행하되, 지금부터 주 나라와 파림에 대한 감시태세를 2단계까지 격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신 대장의 말에 강운예는 다시 탁자 위의 지도로 눈을 돌렸다.

“차질 없게 준비해서 예정대로 다음 주 원정군을 출발시킬 수 있도록. 그리고.”

강운예는 말을 탄 율도 무사 조각을 지도의 흥원 지역 위에 올려놓고는, 칼을 든 율도 무사 조각을 들어 호문 지역 위에 있는 대월국 도깨비 군사 조각을 툭, 쳐서 쓰러트렸다.

“우리 군이 흥원 일대를 접수하고 대월국으로 침투한 4군단이 ‘표적’을 제거하는 데로, 진효명 왕자를 대월국으로 보낼 것이다. 오늘부터 진효명 왕자에 대한 호위를 더욱 강화할 수 있도록.”

그는 쓰러진 대월국 도깨비 군사 조각을 집어 지도 밖으로 치워 버리고, 대월국 수도 은허 지역 위에 새로운 조각 하나를 올려놓았다.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도깨비 모양의 조각이었다.

­ 오전 10시, 율도 백화 경무관

백화의 서쪽에 ‘학원로’라는 큰 길이 있었다.

이 길의 중심에는 대동 최대 규모라는 ‘국립 백화 대도서관’이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좌편에는 율도 전 지역 행정구역마다 하나씩 설치되어 있는 중등 교육기관인 경문관과 경무관, 경학관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우편에는 율도 유일의 고등 교육 기관이자 현실 세계의 대학에 해당하는 국문관과 국학관이 들어서 있었다.

경문관이 현실 세계의 일반계(인문계) 고등학교라면 경학관은 공업, 농업, 상업 등에 대한 특성화 고등학교와 예체능계 특수목적 고등학교가 합쳐진 형태였다. 국문관과 국학관 역시 경문관, 경학관에서 가르치는 학문들에 대한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이라 보면 된다.

이들과는 달리 경무관과 국무관은 순수하게 엘리트 군 간부 육성을 목표를 만들어진 교육 기관이었다.

현실 세계의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국무관은 이 곳 학원로가 아닌 백화의 북쪽 백화산에 위치해 있었다. 국무관의 학생들은 4년의 교육 기간 동안 병영 생활과 비슷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물론 국무관의 기숙사도 백화산에 있었다.

백화산에는 국무관 말고도 여러 군사 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는데, 사관 / 무관들의 각 병과 교육, 보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성무관, 각종 무기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군사 기술 연구소 (흔히 줄여서 ‘군기소’ 라고 부른다), 아직도 많은 것이 베일에 쌓여 있는 태상국 직속 부대 중 하나인 4군단 본부도 이곳에 있었다.

율도에도 현실 세계에 있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와 비슷한 사립 교육기관이 있었다. 이는 자신의 자녀들이 일반 평민들이나 과거 노예 등 하찮은 신분이었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과거 귀족 출신, 부유층 인사들이 국회를 통해 얻어낸 성과였다.

강운예는 자신의 교육관과도 배치되는 사립 교육기관의 존재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차별을 없애려고 신분 / 계급 제도를 철폐한 건데, 어느 학교를 다니는가로 또 다른 차별을 만들려 함인가?’

그래도 ‘하나를 받으려면 하나를 주어야 하는’ 정치적 관계 때문에, 그도 결국 제한된 수의 사립 교육기관 설치를 허용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강운예는 부유층이 많이 사는 대도시 인근에는 사립 교육기관이 설치될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막아 버렸고, 덕분에 이런 학교들은 모두 한적한 교외에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현재 율도의 사립 교육기관 대부분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숙식을 해야 하는 기숙사형 학교였다.

경무관은 이 학원로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경무관은 이곳에서 다른 중등교육기관들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500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여러 무예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훈련 공간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경무관에서도 다른 교육기관처럼 국어, 역사, 수학, 과학 등 기본적인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역시 주된 교육은 군과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학생들은 무예 뿐 아니라 기초적인 군사학, 전술학, 경영학을 배웠고, 앞으로 군 지휘관이 될 것에 대비해 지휘 통솔 교육도 받았다. 군대 제식이나 군인들이 부르는 군가를 배우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경무관은 이 곳 백화 뿐 아니라 율도 각지에 모두 50여개소가 있었다. 율도 각지의 경무관에서 수련한 학생들 중 한 해에 국무관으로 진학할 수 있는 이들은 고작 400여명에 불과했다. 4년간의 교육 성적에 따라 각 경무관에서 3, 4명의 학생들이 우선 선발되었고, 나머지는 ‘국시’ 라 불리는 시험과 평가를 통해 선발되었다.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만 하는 것이다.

경무관을 수료한 자들 중 국무관에 들어가지 못한 세 번까지 더 국시에 응시할 수 있었고, 결국 진학하지 못한 이들은 군에 입대해 사관으로 복무해야 했다. 애초부터 사관을 목표로 경무관에 들어오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무관과 사관은 급여 등 여러 처우 면에서 분명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무관이 되고자 하는 높은 목표를 가지고 경무관에 들어오곤 했다.

오늘도 백화의 경무관에서는 율도군의 무관이 되고자 하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열심히 땀 흘리며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 정국은 주 나라에서 함께 유학 온 양반가 자제들과 함께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무관 학생들은 경문관 / 경학관과 같은 다른 중등 교육 기관의 학생들처럼 교복을 입고 있었다. 경무관 교복은 기온이 높은 율도의 기후 특성상 율도군 전포 (전투복)와 매우 비슷한 모양의 군청색 반팔과 반바지였다. 이곳으로 유학 온 주 나라 유학생들도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따라 정국의 표정은 무척 어두워 보였다. 이는 그와 함께 있는 양반가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황자님? 아, 안녕하세요?”

누군가 뒤에서 정국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낯익은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예린의 친구 서주였다.

“아, 안녕.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니?”

“저...... 이거 예린이가 황자님한테 좀 전해달라고 부탁해서요.”

서주는 부끄러운 듯 쭈뼛거리며 그에게 곱게 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정국은 함께 있던 양반가 자제들과 떨어져 혼자 멀찍이 복도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볼세라 조심스레 쪽지를 펴 보았다.

[아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거 허락하실 거 같아! 우리 군단 실습 다녀오면 아빠가 앞으로 우리 어떻게 교제할 건지 써서 가지고 오랬어! 그 때 정국이 니가 거기다가 나랑 진지하게 결혼할 생각으로 사귄다고만 하면, 아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거 허락하실 거야! 정국아, 정말 보고 싶어 죽겠어! 어제도 너한테 달려가려고 짐까지 쌌었단 말야. 이제 아빠 기분도 많이 풀어지신 거 같으니까, 우리 군단 실습만 다녀오면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꺼야. 나 힘들어도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릴께. 그 때까지 너도 다른 여자애들 쳐다보지 말고 나만 생각하고 있어! 특히 같이 실습가는 계집애들 조심하구! 사랑해, 우리 여보♡]

정국은 콧잔등이 시큰해져왔다.

한동안 말없이 예린의 쪽지만을 들여다보고 있던 정국이 다시 서주에게로 다가왔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줄래?”

정국은 교실로 들어가 자신도 쪽지에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먹물이 마른 뒤, 그는 쪽지를 4등분으로 접어 서주에게 가져다주었다.

“이거...... 예린에게 부탁할께.”

서주는 정국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쪼르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예린은 경무관 뒤편 정원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다음 수업이 시작할 시간인데, 아직 서주가 돌아오지 않아 몹시 초조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진채연과 백영단 여무사 둘이 멀찍이 서서 그녀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여무사 한 명이 물었다. 오늘 처음 예린의 경호 임무를 맡은 인원이었다.

“혹시 영애가 수업에 들어가지 않으면, 제재해야 합니까?”

진채연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이제 수업 들어가야 한다고 한 마디만 해줘. 경무관까지 와서 수업 빠지고 그럴 정도로 막나가는 아이는 아니니까.”

“그럼 혹시 갑자기 도망치면 무력을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까?”

“응, 그럼 일단 그렇게 해야겠지. 하지만 당연히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물론 쟤가 쉽사리 다칠 애는 아니지만.”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서주가 예린이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린은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정국이 만났니? 내 편지는 전해 줬어? 정국이가 뭐래? 그거 읽으면서 표정은 어땠어?”

예린은 서주의 손을 붙들고 보채듯이 물었다.

서주는 숨을 헐떡이다가 크게 한 숨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당연히 잘 전해 줬지. 별말은 없었구, 대신 이걸 너한테 전해주랬어.”

서주는 주머니에서 정국이 준 쪽지를 꺼내 예린에게 전해주었다. 예린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서주의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폴짝폴짝 뛰었다.

“고마워! 오늘 다과는 내가 살게! 이따가 수업 끝나고 경무관 앞에 다과점에서 만나자!”

예린은 서주를 보내고 싱글 싱글 웃는 얼굴로 교실로 향했다. 그녀가 이동하자 뒤에 있던 진채연과 백영단 무사들도 함께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쪽지 내용이 궁금했는지 걷는 도중 쪽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던 예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 섰다.

쪽지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업 시작 종소리가 울리는데도 예린이 쪽지를 들고 멍허니 서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백영단 무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애, 이제 수업 들어갈 시간입니다.”

하지만 예린은 그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대로 두 다리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서 쪽지의 글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 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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