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80화 (80/217)

〈 80화 〉 대동력 9,994년 5월 17일 (4)

* * *

­ 오후 11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영록은 2층으로 내려가 예린의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몇 번을 더 두드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예린이 얘가 설마......? 영부인이 걱정하시던 것처럼 또 가출한 거 아냐?’

영록은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웬만한 작은 아파트 크기는 되어 보일 정도로 넓은 방 안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예린의 방은 여느 소녀들의 방처럼 예쁘게 잘 꾸며져 있었다. 화사한 꽃무늬 가림천이 드리워진 침대 위에는 분홍빛 이부자리가 곱게 펼쳐져 있었고,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 위에는 수십여 개가 넘는 분구(화장품)와 연지(립스틱)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무관을 목표로 하는 아이답게 방 한 편에는 여러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영록은 유튜브나 히스토리 채널 같은 데에서 본 서양 무기 수집가의 작은 박물관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대월국에서 성산번 도깨비들에게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모두 빼앗겼지만, 이내 강운예가 새 무기들을 더 장만해 준 모양이었다. 벽의 진열대 위에는 얇고 예리한 도검이 여섯 자루나 놓여 있었고, 활도 큰 활과 작은 활 두 개나 있었다.

총들도 있었는데, 손잡이에 화려한 은 세공이 장식된 작은 권총이 세 자루가 있었고, 커다란 강선소총도 한 자루 놓여 있었다. 화약이나 탄은 방 안에 같이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무기 손질 기름 냄새가 났지만 화약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그 옆에는 연습용 목검과 목봉 여러 자루와 분홍색 깃이 달린 화살 수십여 발이 잘 정돈되어 놓여 있었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영록은 안쪽에 있는 의상실로 들어갔다.

전에 있던 성부 학교 기숙사 방을 두개는 합쳐 놓은 것 같은 크기의 의상실에는 벽면 가득 수백 벌의 옷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예린은 그곳에 있었다. 의상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커다란 여행용 배낭 안에 이런 저런 옷들을 정신없이 챙겨 넣는 중이었다.

“예린아......?”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린은 마치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마냥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깜짝이야! 야! 애 떨어질 뻔 했잖아!”

“뭐가 떨어져......? 니가 떨어질 애가 어딨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예의 없이 여자 방에 이렇게 불쑥 들어오면 어떡해?!”

“밖에서 문 두드려도 아무 소리가 없길래 들어왔어. 관장님이 너 지금 3층으로 올라오라고 전해달래서. 근데 그건 뭐야? 짐은 왜 싸고 있어?”

영록은 그녀가 배낭 안에 쑤셔 놓고 있던 옷가지들을 가리켰다. 예린의 동공은 지진이 난 것처럼 마구 떨리고 있었다.

“이, 이거?! 어...... 그, 그냥...... 어, 그래, 다, 다음 주에 군단 실습 갈 때 가져갈 짐들 미리 챙겨놓는 중이었어!”

“다음 주에 가져갈 짐을 벌써부터 챙기고 있었다고?”

“원래 여자들은 가져갈 물건들이 많아서 미리미리 꼼꼼히 챙겨두지 않으면 까먹고 놓고 가게 되거든? 그래서 지금부터 하나씩 하나씩 챙겨두고 있는 중이었다구!”

“어,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근데 왜 그렇게 흥분해서 말하냐......? 무슨 가출하려다 걸린 사람처럼......?”

예린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가, 가출?!?! 아, 아니거든?!?! 가출하려는 거 아니거든?!?! 출가 (出?, 시집을 가다)는 해도 가출은 안 할 거거든?!?!”

“아, 알았다고~ 관장님 기다리시겠다. 얼른 올라가 봐.”

그녀는 뭐라 뭐라 혼잣말로 씩씩거리며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예린은 잔뜩 겁을 질려 있었다. 아빠에게 심하게 혼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강운예는 그녀를 혼내거나 꾸짖지 않았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물은 후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예나가 황자랑 같이 다과 먹고 나오는 거 보고, 예린이 네가 화가 많이 났던 거구나?”

“네, 맞아요. 지금 그 계집애가, 아빠가 나랑 정국이 못 만나게 한 거 알고 접근한 거라니까요? 엄마는 자매고 가족인 애를 어떻게 때릴 수 있냐고 하셨지만, 예나 그 계집애가 저를 자매이고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면 제 미래 남편이 될 지도 모르는 정국이한데 집적거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아빠?!”

“그래서, 예나가 황자랑 헤어진 후 뒤따라가서 걔 뺨을 때리면서 뭐라고 그랬다고?”

“......한 번만 더 정국이한테 꼬리치고 다니면 말 뒤에 묶어가지고 끌고 다니면서 니 얼굴 길바닥에 다 갈아 버릴 거라고......”

“대낮에 사람들 다니는 길에서 그랬다고? 어휴...... 큰딸, 그러면 안 되는 거, 잘못된 행동이라는 거 잘 알고 있지?”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확실히 경고해 두려고 그랬어요...... 내가 잠깐 정국이랑 못 만나고 있는 것뿐이지 헤어진 것도 아닌데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로......”

강운예는 손가락으로 이마 옆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황자가 너를 황자비로 들이려고 할 때, 주 나라 황실에서 이번 일을 알게 되면 뭐라고 생각하겠니? 황자비 되려는 애가 사람들 다 보는 길 위에서 폭력에 폭언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자기네 황실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그러지 않을까? 유교 성리학 따지는 고리타분한 서쪽 나라 양반들이 그냥 유야무야 넘어갈 거 같지는 않은데?”

“......황제나 황후께서 나중에 이 일을 크게 문제 삼으실까요......?”

“내가 겪어본 바로는 그럴 거 같은데. 대동에서는 태어난 적도 없는 공자 맹자 주자를 여기서도 몇 천 년간 받들어 모시고 있는 양반들이니. 투기하는 여자는 어쩌고저쩌고 하며 쉰 소리나 늘어놓겠지.”

강운예는 눈살을 찌푸리며 탁자 위 유리 상자 안에 든 흑당 (초콜릿과 비슷한 과자)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흑당은 전투식량에 들어가는 것을 한 입 크기로 잘라 놓은 것이었다. 그는 평소 신문을 읽거나 업무 서류를 보다가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흑당을 하나씩 꺼내 먹곤 했다.

“내일 저녁 식사 때 예나를 평연당으로 부를 테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하고 사과하거라.”

그 말에, 예린은 억울한 표정으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빠, 나 그냥 정국이랑 다시 만날 수 있게 허락해 주시면 안 돼요?”

“응?”

“정국이랑 떨어져 있으니까, 정국이가 나랑 헤어진 지 알고 예나나 다른 계집애들이 자꾸 걔한테 막 들이댄단 말이에요! 그런 거 보고 들을 때마다 제가 얼마나 화가 나고 마음이 불안해지는지 아세요? 아니면, 저 그냥 지금 당장 정국이랑 결혼할래요!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16살 이상 되면 부모 동의 없이도 결혼할 수 있잖아요?”

“예린아, 너 지금 심하게 앞서 나가는 거 같다?”

“정국이가 경무관 수료하면 그냥 주 나라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너무 두려워요. 그러니까, 그냥 결혼해서 지금부터 같이 있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아빠?”

강운예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흑당을 하나 더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전에 아빠가 말했지, ‘두 사람이 가출 중에 저지른 잘못’도 있으니 당분간 교제를 허락할 수 없다고. 그리고 너랑 황자와의 결혼은 그냥 보통 결혼이 아니야. 나랑 황제가 한번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할 문제고, 양국 간에 논의할 사항도 한두 가지가 아닌 일이야. 너희 둘만 좋다고 바로 될 수 있는 결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제가 정국이랑 못 만나고 있는 중에 예나 그 계집애가 정국이랑 사귄다고 하면 허락하실 거예요?”

순간, 강운예의 눈에서 번쩍,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황자 그 놈이 감히 내 딸들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건데, 그러면 그 놈 가만 안 놔두지!!!”

꽝!

강운예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는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쩍, 두 조각으로 부서져버렸다.

그걸 본 예린은 아빠의 기세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깨를 바짝 움츠리고 오돌오돌 떨었다.

큰 소리에 놀란 집사가 3층으로 뛰어올라왔다. 그는 거실 탁자가 부서진 걸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얼른 사람들 불러 치우고 다른 탁자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게나. 누리마루의 장인이 200년 된 나무를 한땀 한땀 대패질하고 옻칠해서 만든 명품 탁자였는데, 아깝게 됐군. 내가 잠시 흥분해서 그만.”

강운예는 바닥에 떨어진 흑당이 든 유리 상자를 집어 들어 자신의 안락의자 옆에 올려놓았다. 그는 화를 가라앉히고는 다시 예린을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내일 예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 보여주고, 4군단으로 실습 다녀온 후에 예린 너하고 황자 두 사람 다, 앞으로 어떻게 교제할 건지 계획서 짜서 아빠한테 가지고 와. 두 사람이 어떻게 썼나 읽어보고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하자.”

그 말에 예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빠, 무슨 사랑을 계획 짜서 해? 아빠는 엄마랑 계획적으로 사랑했어?”

라고 따졌다.

“황자 그 녀석이 너랑 정말 나중에 결혼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만나려는 마음이 있는지 아빠가 확인해 봐야 할 거 아니냐? 지가 아무리 주 나라 황자라도 감히 내 딸하고 가볍게 연애만 하려는 얕은 수작이라면 그 교제 절대 허락 못 하지!”

강운예는 다시 화가 끓어오르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이 말을 들은 예린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아빠, 정국이가 나랑 확실히 결혼할 거라고 하면 교제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일단 내일 예나한테 사과하는 것부터 보고.”

“정말이죠? 진짜죠? 아빠 말대로 다 하면 정국이랑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예린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아빠에게 달려와 껴안고 뽀뽀하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빠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아빠, 사랑해요♥ 진짜 사랑해요♥”

“야, 아빠 입술 엄마꺼야, 이러지 마!”

“왜? 전에도 아빠가 내 입술에 뽀뽀 많이 해줬으면서!”

“그건 니가 대여섯 살 어렸을 때 얘기고, 지금은 너무 많이 컸잖아!”

강운예는 난감한 표정으로 예린의 얼굴을 밀어내기 바빴다.

­ 오후 12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예린이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집사가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3층 거실로 새 탁자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는 부서진 탁자를 보고 버리거나 땔감으로 쓰기는 아깝다며, 자신이 가져가 고쳐 쓰겠다고 했다. 강운예는 그러라 말하며 집사에게 봉투에 넣은 서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거 지금 바로 흑영단주에게 보내고, 오늘 밤 안으로 해결하라고 전해주게나.”

서찰을 건네받은 집사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사람들이 모두 내려간 후 이소영이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속옷이 살짝 비치는 얇은 속창의만 입고 있었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입 안 가득 흑당을 물고 우물거리고 있던 강운예의 어깨를 사랑스럽게 껴안아 주었다. 강운예는 그녀의 팔을 쓰다듬으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대월국, 천제국과의 전쟁 문제보다 딸들의 사랑 전쟁 문제가 더 빡셀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래도 예린이가 당신 말은 잘 들어서 다행이네요. 이제 좀 컸다고 내 말은 무서워하지도 않고 귓등으로도 안 듣는 애인데.”

“딱 질풍노도의 시기라 그런 거긴 한데...... 예성이 성격은 나랑 판박이고 예은이 성격은 당신 판박이인데, 도대체 예린이는 누구를 닮아 이러는 건지 지금도 감이 안 와. 얼굴은 분명 당신 닮았는데, 우리 가문에 저런 성격은 처음인거 같은데.”

“예린이 성격이 좀 유별나긴 하죠. 제 성격 닮은 건 분명 아니고, 당신 안에 숨겨진 성격들이랑 닮은 거 아니에요?”

“내 안에 숨겨진 성격들이라기보다...... 아마 예린이는 내 할머니, 할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게 아닐까 싶어.”

“당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사고 많이 치셨어요?”

“아니,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 그냥 그럴 거 같다고 한번 추측해본거야. 아무튼, 내일 혹시 신문에 예린이랑 예나 이야기 실리지 않게 검열 잘하라고 전해 놨어. 이제 곧 전쟁 이야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시끄러워질 판인데, 그 와중 내 자식들 얽힌 추문까지 퍼지면 곤란해질 테니까.”

“내일 저녁 식사 때 예나를 이리로 부르실 거라면서요? 그럼 예나 엄마도 같이 부르실 건가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강운예가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내일 예나만 부를 거야.”

“그래요......? 당신, 요새 예나네 집 안 가셨어요?”

“......꽤 됐어.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나네.”

“그럼 다른 소실(小?, 첩)들 집에는요?”

“그, 그것도 잘.....”

강운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눈에 보였다.

“당신이 이제 할머니가 된 나이 많은 전(?) 소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들었어요. 혹시 나도 늙으면 그렇게 되는 건가요?”

강운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 벌써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달라. 당신은 이 나라의 영부인이고, 생의 끝까지 나와 함께 있을 거야. 우리 결혼하면서도 이 약속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 맹세했잖아.”

이소영은 다인(남편)을 끌어안으며 쓸쓸하게 말했다.

“당신은 항상 이 모습 이대로 영원할 수 있죠.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조금씩 늙어가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 나이 많은 당신의 소실들처럼 저도 할머니가 될 테지요. 그럼 그 때, 아니면 그보다도 빨리 당신에게 버려질까 매일 두렵고 힘들어요.”

“절대 당신을 버리지 않아. 당신이 나이를 먹고 늙어 가더라도, 당신은 나의 유일한 정실부인으로 내 곁에 있을 거야. 그리고 당신이 눈 감는 그 날까지 나도 당신 곁에 있을 거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 건 당신의 외모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당신이 서툴기만 한 내 사랑을 받아 주고 나를 마루한이나 권력자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남자로 사랑해주었기 때문이었어.”

강운예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뺨 위로 그녀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맞춤을 마치자, 이소영이 다인의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먼 훗날 내가 죽으면 당신은 절 어떻게 추억하실 건가요?”

“지금까지 사랑해서 항상 보고 싶었던 사람, 지금도 사랑해서 항상 보고 싶은 사람, 지금 이후로도 사랑해서 항상 보고 싶을 사람.”

“이 말만 잘하는 바람둥이 영감탱이. 도대체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를 이런 말로 꼬신 거야......?”

그녀의 눈물이 가시지 않은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강운예는 그런 다소니(아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난 지금 당신을 추억하기 위해 사랑하는 거 아니거든? 지금처럼 영원히 살아도 당신을 사랑할거고, 오늘 단 하루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을 사랑할거야. 당신이니까 사랑하는 거라고.”

“그 말,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도 똑같이 말하는지 꼭 지켜볼 거예요.”

“응,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꼭 내 곁에 계속 있어줘. 그럼 이제 아침에 한 약속 지키러 가야지?”

“무슨 약속이요?”

“우리 넷째 만드는 거.”

강운예는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 때,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소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녁, 대원수부에서 드시고 오신 거 아니었어요?”

“일 때문에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가, 좀 출출하긴 하네.”

강운예는 손으로 배를 비비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지금 뭐라도 좀 드시겠어요? 다시 집사를 부를게요.”

이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강운예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 집사는 지금 내가 시킨 거 때문에 대원수부로 가고 있을 테고, 평연당에 일하는 이들도 모두 숙소로 쉬러 들어갔을 테니까...... 당신, 오랜만에 나와 단둘이 외출하지 않겠어? 간만에 술 한 잔 곁들여 외식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연애할 때 기분도 내고......”

강운예는 싱긋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게 분위기 좀 내고 들어오면 더 좋을 거 같아.”

이소영도 웃으며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둘이...... 너무 좋아요. 그런데 무사들은요? 적영단이나 백영단 무사들도 안데려가실건가요?”

“그 친구들도 원래 쉬어야 할 시간인데, 이 밤중에 우리 때문에 무장하고 따라 나가려면 많이 귀찮을 거야. 그냥 우리끼리만 다녀오지.”

“나중에 백영단장이 경호 의전 규례 때문에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백영단장한테는 내가 나중 이야기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인의 말에 이소영도 안심한 듯 밝게 미소지었다.

“그래요, 우리...... 오랜만에 연애할 때처럼 길거리 음식들도 사 먹고, 함께 손잡고 산책도 해봐요. 나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나 기다리는 동안 흑당은 드시지 마시구요.”

“응, 그래. 당신 지금 이대로도 예쁘니까 화장은 하지 말고 바로 나가자구.”

“그냥 간단하게만 바르고 나올게요.”

“어, 으, 응, 그, 그래. 그럼 나도 옷이랑 모자를 준비해야겠군.”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러 의상실과 방으로 들어갔다.

­ 오후 13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집사는 초롱불 하나 들고 대원수부 본관 건물을 지나 제 3 별관을 향해 걸어갔다. 야심한 시간이었지만 건물 이곳저곳에는 아직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 아직 퇴근하지 못한 무관들이 야근에 몰두하는 모양이었다.

제 3 별관은 입구 밖은 몰론 복도 여기저기에도 칼을 휴대한 군사들이 물샐 틈 없는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이들은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사관 이상의 무사들이었다.

무사들은 평연당의 집사를 알아본 듯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집사도 무사들에게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초롱불을 들고 어둡고 긴 복도와 계단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집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복도의 끝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도 무장한 네 명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초롱불에 비친 집사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없이 벽으로 위장된 문 하나를 열어주었다. 그는 초롱불을 무사들에게 맡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환하게 등불이 밝혀진 기다란 복도가 있었고, 복도의 양옆으로는 장지문의 미닫이 문이 달린 무수히 많은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방 안에 아직도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지 장지문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집사는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그리고 한 방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가 당도한 방의 문이 저절로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집사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집사도 그녀에게 목례를 하며 품안에 있던 강운예의 서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밤 안으로 해결하라 명하셨소.”

“단주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하옵고 이것을 부디......”

여인은 노란색 봉투 두 개를 집사에게 내밀었다.

노란색 봉투는 흑영단이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 판단될 때, 그에 대한 보고서를 담는 봉투였다.

집사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란색 봉투를 품에 숨기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에서 온 것이오?”

“하나는 주 나라에 대한 것이옵고, 하나는 남쪽 파림에 대한 것입니다. 단주님께서는 이 보고를 태상국께서 내일 아침 대원수부로 나오시기 전까지는 반드시 받아 보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들어온 길을 통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오후 13시, 율도 백화 일대

강운예와 이소영은 평범하고 수수한 외출복에 가죽 모자와 너울까지 쓰고, 평연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몰래 본채를 빠져나와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마구간을 향해 뛰어갔다. 두 사람은 마치 장난끼 넘치는 어린 소년 소녀 마냥 서로 손을 맞잡고 까르르 웃고 있었다.

마구간 건물은 본채 건물을 네 개 정도 합쳐 놓은 것만큼 거대했고, 그 안에는 백여 필이 넘는 말들이 모여 있었다. 강운예의 말뿐 아니라 백영단 등 다른 무사들의 말도 함께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수수하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모자, 신발 모두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이 값비싼 소재로 만든 명품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이소영은 어깨에 금으로 된 사슬과 가죽이 덧대어진 자그마한 검은색 외출용 가방을 매고 있었는데, 만일 현실 세계에 사는 사람 중 명품 브랜드에 대해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 그녀의 가방을 보았다면, ‘어? 저거 샤넬 빈티지 미니백 캐비어 아냐?’ 하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만큼 상당히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운예는 국가산업의 일환으로 보석과 명품 사업도 함께 하고 있었다. 명품 사업의 경우 그가 현실 세계에 있을 때 보았던 샤넬, 루이비통, 디올, 에르메스 등의 옷, 가방, 신발 및 여러 장신구들의 디자인들을 이곳 대동의 장인들에게 가르쳐주고 그와 비슷하게 구현해내도록 했는데, 놀랍게도 이들이 만들어 낸 제품들이 대동 각국의 마루한, 왕족, 귀족들과 부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손바닥만큼 작은 명품 가방 하나의 가격이 40환 (현실 세계 한국 원화 환율로 약 320만 원가량)이 넘는데도 그 수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40환이면 대동 전체 노동자들의 한 달 평균 급여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율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부유한 구매자들은 거액의 선금을 내고 제작 기간과 발송 기간까지 합쳐 거의 반년 이상의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감내하면서까지 율도의 명품들을 탐하고 집착했다.

심지어 율도와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는 천제국이나 대월국의 왕족 및 귀족들 중에서도 율도 명품 애호가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강운예는 저들이 율도에서 보석과 명품을 살 때 마다 율도의 국가 예산, 특히 군대에 들어가는 예산들이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러는 걸까 진심으로 궁금해서 흑영단을 풀어 확인해 보기도 했다. 결과는 모르고 있는 자가 반, 알고도 율도의 명품이 좋으니까 산다는 자가 반이었다.

부유한 이들은 물론 중산층 사람들도 모두 율도의 명품을 하나쯤 가지고 싶어 했다. 몇 달 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을 모아 명품 구입에 쏟아 붓는 이들도 많았다. 결혼할 때 선물이나 혼수로 율도 명품을 준비해가는 이들도 있었다.

명품에 대한 사랑은 현실 세계나 대동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강운예는 자신의 애마 비전(??)의 등위에 2인용 안장을 얹었다.

비전은 강운예가 가장 아끼는 말로, 지난번 대월국 성산으로 영록과 예린을 구하러 갈 때도 타고 있었던 말이었다. 윤기 나는 검은색 몸에 하얀색 갈기를 가진 커다란 덩치의 전마(戰馬)인 비전은 마구간에 있는 다른 말들보다 훨씬 크고 도드라진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너도 곧 잘 시간인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 미안. 간식 가지고 왔는데 먹을래?”

강운예가 비전에게 안장을 채우는 동안, 이소영은 가방 안에 넣어 가지고 온 사과와 당근을 꺼내 말에게 내밀었다. 비전은 그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연신 푸르륵, 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에 있는 사과와 당근을 맛있게 받아먹었다. 이소영은 비전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 여기며 말의 목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함께 비전을 타고 평연당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을 빠져나가던 두 사람은,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백영단 무사들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강운예는 무사들에게 금방 나갔다 돌아올거니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무사들은 즉시 백영단 숙소로 달려가 당직근무를 서고 있는 무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당직 무관은 즉시 숙소에서 대기 중이던 백영단과 적영단 무사들을 호출했고, 30여명의 무사들이 허겁지겁 무장을 한 채 말을 타고 강운예와 이소영을 쫓아왔다.

“아니, 둘이서 그냥 잠깐 데이트, 아, 아니, 산책 좀 하고 오려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따라오나? 게다가 갑주에 무장까지 다 하고 쫓아오면......”

강운예는 난감해하며 모두 다시 돌아가라 했지만 무사들은 이 명령만큼은 절대 받들 수 없다며, 자신들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며 완강히 버텼다.

결국 강운예는 자신들은 태상국과 영부인인 것을 티내고 다니지 않을 테니 무사들도 두 사람의 30보 밖으로 떨어져 호위할 것과, 자신이 지시하기 전까지 가는 곳에 있는 백화 시민들에 대해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치마를 입은 상태인지라 말 위에서 몸을 옆으로 하고 강운예의 품에 기대고 있던 이소영은 수십여 명의 무사들이 자신들의 뒤를 졸졸 쫓아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고 신경 쓰였던지, 다인 (남편, 사랑하는 남자)의 허리를 껴안고 있던 손을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강운예는 다소니 (부인, 사랑하는 여자)가 아무것도 의지하는 것 없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을 보고 고삐를 잡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말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가슴도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강운예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살짝 위로 올렸다. 어느새 자신의 가슴이 다인의 팔에 가볍게 부딪히는 것을 느낀 이소영은 빨개진 얼굴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 양반이 부끄럽게 왜 이래...... 이러다 뒤에 무사들이 보면 어쩌려구요?”

“뒤에 멀리 떨어져 있는 애들이 어떻게 이걸 봐?”

“그래도, 앞에 누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이 주책맞은 영감탱이야.”

“영감탱이는 무슨, 나 아직도 30살 정도로 밖에 안보이거든? 열가마에서 땀 쫙 빼고 뽀송뽀송한 얼굴로 나오면 가끔 스무 살 정도로도 보인다던데, 영감탱이 소리 들을 얼굴은 아니잖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6, 70살 먹은 진짜 영감탱이들이 나한테 반말할 때도 있다니까?”

“그래요, 자기보다 240살쯤 어린 영감탱이들한테 반말 들을 정도로 동안이셔서 참 좋으시겠어요.”

이소영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다인의 손에 손깍지를 끼었다. 강운예도 웃으며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적영단과 백영단의 무사들이 멀찌감치서 따라오고 있는 가운데, 이제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자유의 광장 일대를 걷기 시작했다. 강운예는 광장에서 비전을 끌고 돌아다니는 게 조금 귀찮았던지, 뒤에서 따라오던 무사를 불러 잠시 말을 맡기고는 이소영의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걸었다.

백화 시청 주변 광장 일대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한자손과 아리랑, 다모랑과 도깨비, 포각수와 자그니들까지 거의 모든 종족들로 이루어진 율도의 국민들과 율도를 찾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율도 사람들은 마치 현실 세계의 한국 사람처럼 매일 밤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음주가무를 즐기기를 좋아했다. 율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온난다습하고 낮의 길이도 긴 편이라,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기온이 선선해지는 늦은 밤에 밤마실을 다니게 된 것이다.

아직도 많은 상점들과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었고, 술집 등 홍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율도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상점의 영업시간 제한이나 사람들의 통행 시간제한 등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 치안이 잘 갖춰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물론 밤늦게까지 과하게 술을 마시는 이들 때문에 종종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범죄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매우 적은 편이었다. 이는 강운예가 정한 율도의 법 때문이었는데, 율도에서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모든 범죄는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같은 형태의 범죄들보다 최대 5배 이상의 형량을 받게 되었다. 만일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폭행을 저지른 사람의 형량이 징역 1년이라면, 술에 취한 상태에서 폭행을 저지른 사람의 형량은 최대 징역 5년에 달하는 것이다.

이러니 사람들은 술을 마셔도 최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통제하기 힘든 이들은 술을 적게 마시거나 아예 마시지 않게 되었다.

율도에서는 술 역시 국가의 통제 하에 주조되고 유통되었다. 역시, 모두 세금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술을 만들어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았지만, 허가 없이 대량으로 술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술을 만들어 팔고 싶다면 반드시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에 대한 세금도 내야했다.

강운예는 머리에 쓰고 있는 넓은 챙이 달린 가죽 모자를 살짝 앞으로 기울여 얼굴이 잘 안보이도록 했다. 밤이지만 여러 상점들이 불을 훤히 밝히고 있는 터라 그의 얼굴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소영 역시 너울에 달린 자주색 비단 망사를 앞으로 내려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광장 주변을 천천히 걷고 있던 두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한 곳에 모아졌다. 광장의 한 구석에 부부로 보이는 나이 든 노인과 노파가 수레 위에 앉아 화롯불 위에서 닭고기와 야채를 꿴 꼬치를 열심히 돌려가며 굽고 있었다.

“저 분들, 아직도 여기서 장사하고 계셨네요......?”

“맞아, 20여 년 전에도 이 부근에서 장사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오랜만에 저기서 닭꼬치나 먹어볼까?”

“좋아요, 가요.”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노부부가 있는 수레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수레 앞에 놓인 작은 탁자 앞에 나란히 앉자, 그들을 따라오던 적영단과 백영단 무사들 모두 말에서 내려 30보 정도 간격을 둔 상태에서 그 주변을 둘러싸고 경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모두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보았지만, 수십여 명의 무사들이 갑자기 말을 끌고 광장에 나타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오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드시고 가실건가요, 아님 싸가실 건가요?”

노파가 탁자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운예가 탁자 위 주전자에 담긴 물을 잔에 따라 이소영에게 건네주며 답했다.

“먹고 가려구요. 저희가 여기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데, 무슨 무슨 꼬치가 있었죠?”

“닭고기에 파 끼운 거랑, 버섯 끼운 거랑, 떡 끼운 거랑, 호박 끼운거 이렇게 있구요, 그 위에 소금 양념, 간장 양념, 산초 양념 중에 어떤 거 발라 구울 건지 고를 수 있어요.”

강운예는 이소영과 함께 어떤 꼬치를 먹을지 고른 후 노파에게 주문을 했다.

“꼬치만 드세요? 맥주도 있는데 드릴까?”

“여기서는 어떤 맥주 파세요?”

“우리는 우리가 직접 만든 맥주 파는데, 조금 맛 좀 보시게 드려볼까요?”

노파는 수레에서 진한 갈색의 맥주를 사기잔에 담아 가지고 왔다. 마치 인디언 페일에일처럼 생긴 맥주에서는 홉의 냄새는 물론 상큼한 과일 향까지 진하게 느껴졌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강운예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이거로 두 잔, 큰 잔으로 부탁 드릴께요.”

노파는 웃으며 수레로 돌아가며 말했다.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이 정도 맛이면 나라에서 파는 맥주보다 훨씬 맛있는 거 같은데요? 예전에도 이 맥주를 파셨던가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노파는 손가락으로 옆에서 꼬치를 굽고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집 영감이 10여 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죠. 처음엔 맥주 맛이 밍숭맹숭했는데, 계속 만들다보니 손님들도 즐겨 찾게 될 정도는 된 것 같아요.”

“이렇게 맛있는 맥주는 저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맥주만 파셔도 장사 잘되시겠어요.”

강운예의 말에 노파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나라에 허가 안 받고 파는 거라 많이 팔 지를 못해요.”

그 말에, 강운예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에서 허가를 안 내준 건가요?”

“주류업을 허가 받으려면 반드시 자기 소유의 상점이 있어야 하는데 저희들한테 있는 건 이 수레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시청에서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꼬치 드시는 분들이 맥주 많이 찾으시고, 저희 집 영감도 자기가 만드는 맥주에 자부심을 갖다 보니 이렇게 조금씩 몰래 몰래 팔고 있답니다.”

노파는 커다란 잔에 맥주를 가득 담아 두 사람 앞에 내려놓다 말고 갑자기 주변을 살피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갑자기 이 주변에 이리도 많은 무사들이 서있는지 모르겠네요. 불법 영업 단속 다니는 사람들이 저렇게 단단히 무장하고 말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이렇게 나라 법 어겨가며 몰래 술 만들어 팔다 보니 무사들만 봐도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되네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노파는 맥주와 함께 그들이 주문한 꼬치까지 탁자 위로 날라주고 수레로 돌아갔다.

노파가 돌아간 후, 강운예는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소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운예를 바라보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거 불법 밀주라서 그러신 거에요? 오늘 기분 좋게 나온 거니까 너무 화내면 안되요.”

누가 되었든, 어떤 상황이건 간에 율도의 법을 어기는 이들이 있으면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법이 정한대로 단호히 처리하는 강운예였다. 그런 다인의 성격을 잘 아는 다소니는 그가 금방이라도 무사들을 시켜 이 노부부를 체포하라 할까봐 덜컥 겁이 났다.

한동안 맥주와 꼬치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강운예가 고개를 들어 이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시장 불러서 저 사람들 주류업 허가 내주라고 하지 뭐. 그럼 같이 짠, 하고 먹을까?”

강운예는 환하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이소영도 얼굴을 가리고 있던 너울을 위로 들어 올리고 안심한 듯 미소 지으며 잔을 들어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우리가 처음 같이 먹었던 음식이 여기 이 집 닭꼬치였잖아?”

강운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젓가락을 들어 꼬치에 꿰인 닭고기와 떡, 야채 등을 빼 다소니의 접시에 덜어주며 말했다.

“맞아요. 난 그때 무슨 남자가 양가집 규수하고 둘이 처음 같이 식사하는데 품위도 없고 낭만도 없이 길바닥에서 꼬치를 손으로 들고 먹으라는 걸까, 하고 실망했다가 당신이 이렇게 다정하게 고기 빼 주는 거 보고......”

“그 때 나한테 반했다고?”

“아뇨, 역시 이 남자, 마루한이라 그런지 여자 많이 만나본 솜씨구나, 이렇게 생각했었죠.”

이소영은 깔깔 웃으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다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나를 사람으로 안 보고, 내가 가진 돈과 권력만을 보고 접근하는 여자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여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른 상황이 나오면 표정에서부터 금방 티가 나게 되어 있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 같은 거였지.”

“그럼 그 때 나도 당신에게 시험당한 거였나요? 난 그 때 몇 점이었죠?”

“무조건 합격점. 사실,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합격점을 주었을 거였지만.”

“흥, 왜요?”

“몰라, 당신이니까. 그거 외에는 이유가 없어.”

강운예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만지며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이 하하호호 웃으며 주문한 꼬치와 맥주를 다 먹어갈 때쯤, 강운예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노파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꼬치 60개 정도 더 있나요?”

노파는 수레에 남아 있는 꼬치들을 한참 손가락으로 세어본 후 대답했다.

“네, 딱 그 정도 남아 있는 거 같네요.”

“그럼, 그거 지금 다 구워 주시겠어요?”

“60개를 두 분이서 다 드시려구요?”

노파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 좀 주려구요. 준비되면 말씀해주시겠어요? 바로 계산해 드릴게요.”

“아이구, 고마워라...... 덕분에 오늘 장사 일찍 마치고 집에 들어가 푹 쉴 수 있게 되었네요.”

“뭐, 이런 날도 가끔 있어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아무튼, 여기 20년 만에 다시 왔는데 여전히 너무 맛있네요. 맥주 맛도 기가 막히고.”

“20년 전에요? 되게 젊었을 때 오셨던 모양이네. 여기 백화 사시는 분 아니셨어요?”

“백화에 사는 거 맞는데, 너무 바쁘게만 살아오다 보니까 이 시간에 광장에 자주 나오지도 못해봤네요.”

두 사람이 남은 맥주와 꼬치를 거의 다 먹었을 때 즈음, 노파가 60개의 꼬치가 다 준비되었다며, 한꺼번에 포장할지, 각각 따로 포장할지를 물어봤다. 그러자 강운예는 수레로 다가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노파에게 먼저 건네주고는 뒤를 돌아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이쪽으로 집합!”

그 소리에, 주변에서 말고삐를 잡고 서 있던 30명의 적영단, 백영단 무사들이 강운예 앞으로 신속하게 뛰어와 도열했다.

노부부는 갑자기 중무장한 무사들이 자신들의 수레 앞으로 몰려들자 놀란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강운예와 무사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계산 다 했으니까, 1인당 꼬치 두개씩 집어가. 나 때문에 이 시간에 여기까지 나왔는데 뭐라도 먹으면서 해야지. 지금은 이동 중에 음식물 취식해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내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먹어.”

강운예는 수레 위에 준비된 꼬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사들은 기쁜 얼굴로 일제히 외쳤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무사들은 일렬로 서서 수레 위에 있는 꼬치들을 두개씩 들고 갔다.

이들의 출현에 너무 놀라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던 노인이 강운예에게 말을 걸어왔다.

“군대에 있는 분이시오? 얼굴로 봐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데...... 요즘에는 서른에 소령 달기도 힘들지 않나......? 혹시 계급이 어떻게 되시오? 나도 소싯적에 율도군에 있어봐서 좀 아는데 이렇게 많은 무사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면......”

강운예는 이소영의 손을 잡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계급이요? 그냥...... 조금 높아요. 어쨌든 오늘 잘 먹고 갑니다. 다음에 기회 되는 데로 또 올게요.”

이소영도 마지막 하나 남은 닭꼬치를 손에 든 채 노부부에게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하고 다인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맥주를 마셔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 뒤로 손에 닭꼬치를 든 30명의 무사들이 그들과 30보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어갔을 때, 강운예가 웃으며 이소영에게 말했다.

“들었지? 저 노인도 나보고 서른 살도 안된 것 같다고 그러잖아?”

“아, 됐다구요, 이 영감탱이야~! 동안이라서 참 좋으시겠다구요~!”

이소영은 술에 취해 살짝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다인의 팔짱을 꼭 끼고 옆으로 몸을 기댔다.

펑! 펑! 펑!

두 사람이 자유의 광장에서 동해 쪽을 향해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밤하늘 위에 연달아 폭죽의 불꽃이 터져 올랐다.

이소영은 여전히 강운예의 팔짱을 낀 채 밤하늘을 울긋불긋하게 수놓고 있는 불꽃놀이의 잔형을 손으로 가리키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 저기 불꽃놀이를 하고 있나 봐요!”

해변가 어딘가에서 부유한 이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기로 쓰이는 화약만큼 불꽃놀이에 들어가는 화약도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기 때문에 대동제처럼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나 부자들의 연회에서나 사용되고 있었다.

불꽃놀이를 보며 소녀처럼 좋아하는 이소영과 달리, 강운예는 싸늘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운예는 폭죽 터지는 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강운예 뿐 아니라 전쟁을 겪어본 무사들에게 공통적인 부분이었다.

폭죽 터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전쟁터에서 들은 포탄 터지는 소리가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자신이 전쟁터에서 겪었던 여러 괴로운 기억들과 감정들도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제, 들어갈까?”

강운예는 이소영의 허리를 껴안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술에 취해 다인이 폭죽 터지는 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던 이소영은 그제서야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의 품에 안겼다.

“네,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강운예는 다소니와 입을 맞추고는 뒤 따라오던 무사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무사 하나가 그들 앞으로 비전을 끌고 다가왔다.

강운예는 이소영을 번쩍 안아 말 위에 태우고는 자신도 안장 위에 뛰어 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서...... 넷째 만들어야지?”

그 말에 이소영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손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때려 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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