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대동력 9,994년 5월 17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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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강운예는 오후 수련 시간이 돼도 수련장에 나오지 않았다. 점심때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대원수부 무사 식당(군 간부식당)에서 참모들과 함께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고 했다.
덕분에 영록은 혼자서 쓸쓸히 점심을 먹고 오후 수련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영부인 이소영도 오전에 평연당을 찾아온 예나라는 소녀를 데리고 응접실로 들어가 장시간 대화를 나누느라 영록과 식사를 함께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예나라는 소녀는 펑펑 울었는지 응접실을 나올 때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던 것만 기억났다. 영부인도 그녀를 떠나보내며 무언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영록이 다시 별채의 수련장에 들어갔을 때 반가운 얼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영단의 무사 사승범과 최용준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마루한!”
“안녕하세요! 두 분 다 잘 지내셨어요? 오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두 사람은 강운예가 현실 세계로 돌아갔을 때도 그곳까지 따라갔던 최측근 무사들이었기에 이곳 평연당에도 자주 드나들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련장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직 일과 시간일 텐데, 그들 모두 가벼운 운동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태상국께서 금일 중요한 국사(國?)로 인해 마루한의 수련을 봐 드리기 힘들 것 같다 하시며 대신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저희와 함께 수련하시죠!”
영록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수련하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편이 훨씬 더 실력이 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미트 훈련을 했다. 미트 (Mitt, 패드 pad 라고도 불린다.)는 우리 말로 대체할 단어가 마땅치 않았는지, 대동에서도 똑같이 미트, 라고 부르고 있었다. 승범은 상체 보호구와 양팔과 양쪽 허벅지에 두꺼운 미트를 착용하고 5분 3회 동안 영록의 타격을 받아 주었다.
팡! 팡!
미트를 치는 영록의 주먹과 발에 제법 힘이 붙어 있었다. 그의 오른발 중단차기(미들킥)를 받아 주는 승범의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좋습니다, 더 세게! 그렇죠! 한 번 더!”
미트를 치는 사람이 실력이 좋을 수록 받아 주는 사람도 짜릿한 손맛에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회가 거듭될수록 더 강해지고 정교해지는 영록의 타격 솜씨에, 승범도 덩달아 신이 난 듯 했다.
강운예는 발차기 중에서도 앞축 찍어차기(팁, 프론트킥)와 하단차기(로우킥)를 상당히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실전에서의 발차기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며, 상단차기 등 발을 높게 차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 여러번 교육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록도 두꺼운 타격낭에 하단차기를 하루에만 1000번 가까이 연습하곤 했다. 수련의 효과가 있는지, 영록이 주먹기술과 연계해 승범의 허벅지에 매달린 두꺼운 미트에 하단차기를 날릴 때마다 육중한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미트 훈련에 이어 용준과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은 가벼운 힘으로 격술과 유술 모두를 사용하는 종합 격투술로 진행되었다.
태상국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용준의 실력은 역시 대단했다. 그는 영록의 주먹을 모두 가볍게 흘려내고는 그의 다리를 붙잡아 바닥에 넘어트렸다.
영록은 넘어지면서도 재빨리 몸을 돌려 두 다리로 용준의 허리를 붙들었다. 주짓수의 클로즈드 가드 (Closed guard) 와 같은 자세였다. 그는 상대의 공격은 방어해내며 팔을 잡으려 애썼다.
율도의 종합 격투술은 현실세계의 MMA 거의 똑같으면서도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상대가 단검이나 무기를 들고 있다고 상정하고 반드시 상대의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단한 갑주로 무장한 무사들이 무기를 통한 승부를 내지 못하고 서로 엉커붙었게 되면 대게 상대 갑주의 빈 곳을 노려 단검 등을 찔러 박게 된다. 율도의 종합 격투술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상대 손을 제압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영록은 바닥에 등을 진 상태에서도 용준의 오른손을 잡고 여러가지 반격을 시도했다. 팔 얽어 비틀기 (기무라 락)는 물론 팔 가로 누워 꺾기 (암바) 까지, 그는 밑에 깔린 상태에서도 계속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승범과 용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영록을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어디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약해 빠진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동에 온 지 6개월 정도 흘렀을 뿐인데도 영록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단순히 힘이 세지고 무예 실력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데다가 얌전하기만 한 샌님 같은 모습들, 자신보다 덩치가 크거나 힘세 보이는 사람 앞에만 서면 주눅 들어 버리거나 겁에 질리곤 하던 나약한 모습들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사답고 당당한 한 명의 남자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는군요. 이 정도 실력이면 같은 또래 경무관 학생들 중에서도 중상위권은 될 것 같습니다.”
대련을 마친 용준이 영록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중상위권이요......? 그럼 전 아직 갈 길이 멀었나 보군요.”
영록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용준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무사가 되기 위해 몇 년간 수련한 사람과 몇 달을 수련한 사람의 격차가 어찌 단번에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마루한께서는 실력이 매우 빨리 늘고 있는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지요.”
오후 수련을 모두 마친 세 사람은 수련장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평연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음료를 마셨다.
“그런데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강운예 관장님이 하루 종일 안 보이시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인 거 같아서요.”
영록의 물음에 승범이 대답했다.
“지난번 반란이 일어난 대월국에서 어제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 국왕군이 대패를 당한 모양입니다.”
불현듯 대월국에서 만났던 심운보와 목건주, 구천락과 곤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대월국을 빠져나갈 때 함께 했던 주혁과 4군단 무사들도 생각났다.
“대월국은 아직 그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럼, 그 일이 율도에 큰 영향이라도 미치게 되는 건가요?”
“반란군이 이기든 국왕군이 이기든 율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닙니다. 근데, 천제국이 국왕군을 도와 이 전쟁에 개입했다더군요. 천제국이 반란을 진압해 주는 조건으로 대월국에게 요구한 것들이 우리 율도의 앞날에 문제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승범은 천제국과 율도의 관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럼, 강운예 관장님이 이번 전쟁에 나가실 수도 있다는 말씀이죠?”
“그건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 동원령이 선포된 것도 아니고, 동부 1군에 2개 군단에만 출진 명령이 하달된 상태라 태상국께서 친정을 가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저희 적영단이나 친위군단인 1군단과 3군단에도 출진 대기 명령이 떨어졌겠죠.”
그러면서 그는 율도의 군사 제도 등에 대해, 마치 자랑하듯 늘어놓기 시작했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용준은, 승범이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것까지 너무 자세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야! 그런 것까지 다 말하면 어떡해?”
“아 따가! 아이씨,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마루한이신데 이 정도는 아셔야지!”
“그래도 그 정도 군사기밀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너 원래 이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어?”
“어차피 마루한도 태상국께 다 들을 얘기인데, 아, 진짜 융통성 없는 시키...... 최용준, 난 네가 정말 밥맛이다.”
“내가 밥맛이면 너는 꿀맛이란 말인가? 초경량 깃털 주둥아리 시키야!”
승범과 용준이 이렇게 아옹다옹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빼꼼히 수련장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예린이었다.
“어, 예린아! 학교 잘 다녀왔어?”
그녀를 발견한 영록이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데 그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 어디 계셔? 위층에 계셔?”
“강운예 관장님 대원수부 가셔서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
“어, 그래......?”
예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본채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용준과 승범이 돌아간 후, 영록은 짐을 챙겨 본채로 돌아왔다.
그는 운동으로 흠뻑 땀을 흘린 몸을 씻기 위해 자기 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1층 화장실로 내려갔다. 2층에도 화장실이 있긴 했지만, 예린과 예은 여자아이들이 주로 쓰는 곳이라 그는 1층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밑으로 내려갔을 때, 응접실 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예린과 영부인 이소영이었다.
“예나 그 여우 같은 년이 정국이한테 먼저 꼬리를 쳤다구요! 나하고 정국이하고 사귀는 거 이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데, 걔가 맞을 짓을 한 거라구요!”
“예나는 자매이자 가족이잖니? 그런 아이를 사람들 다 보는 길에서 때리는 게 말이 되니? 너희들 다 이 나라 태상국이신 네 아버지의 자식들인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니?”
“그럼, 자매이자 가족의 남자 친구를 빼앗으려는 건 말이 되나요? 내가 정국이 하고 못 만나고 있으니까, 이 년이 이때다, 싶어서 막 들이대더라구요. 그 정도면 충분히 맞을 짓을 한 거잖아요? 마음 같았으면 아주 박살을 내버렸을 텐데, 아빠 때문에 간신히 참은 거라구요!”
아까 예나라는 아이가 왜 영부인 앞에서 울면서 하소연을 늘어놓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영록은 예린이가 마음만 먹었으면 정말 예나라는 그 여자아이를 문자 그대로 박살 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누리마루와 대월국에서 어른 도깨비들을 마구 잡아내던 그녀의 무예 솜씨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거실 쪽으로 나왔다. 영록은 계속 엿듣고 서 있기 민망해서 쪼르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응접실에 예린은 보이지 않고 이소영과 낯익은 한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영단 무사 진채연이었다.
“......이따가 애들 아빠 들어오시면 혼날 게 뻔한데, 그럼 또 예린이가 저번처럼 집을 뛰쳐나갈까 봐 걱정이에요. 혹시 모르니 이번에도 진 대위가 그 애 옆에 좀 있어 주세요.”
“영애도 저번 일로 느낀 게 많아서 쉽사리 가출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엉뚱한 짓 하지 않도록 제가 계속 곁에서 살피겠습니다.”
그때 진채연이 화장실에서 나온 영록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영록에게 인사했다. 영록도 진채연에게 목례로 인사하고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오후 10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대원수부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지, 영록은 사람을 보내 가족들에게 먼저 저녁 식사를 하라고 전해왔다.
저녁 식사로는 예은이 좋아하는 ‘다홍감 양념 국수’가 나왔다. 예은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에게 오늘 고쟁 연주 실기를 잘해서 기분이 좋다고 말하자, 영부인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저녁에 예은이 좋아하는 다홍감 양념 국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다홍감 양념 국수는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와 맛과 모양이 거의 똑같았다. 베이컨과 비슷한 염장육, 대동의 치즈인 건락이 들어가는 것도 비슷했다. 면을 포크로 들어 수저 위에서 돌려서 먹는 방법까지 동일했다.
대동에서 포크는 ‘지가락’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찍는 가락’, 또는 ‘찍가락’ 이라고도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며 지가락으로 변했다고 한다.
예은은 학교에서 있던 일을 재잘거리며 즐겁게 밥을 먹었다.
하지만 예린은 식사 내내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
곧 아빠한테 혼날 것 때문에 영 불안하기만 한 것이었다.
10시가 넘어 평연당 밖에 말발굽 소리들이 들려왔다. 강운예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다소 피곤한 표정으로, 십여 명의 적영단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집으로 귀가했다.
이소영은 물론 예린과 예은, 영록도 모두 현관으로 나와 그를 마중했다.
“다녀오셨어요?”
강운예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그는 예린의 얼굴이 굳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큰딸, 오늘 무슨 일 있었니? 표정이 안 좋은데?”
아빠의 물음에 예린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네?!?! 제 표정이요?!?! 아, 아뇨. 무슨 일은...... 그럴 리가요......?”
강운예가 예린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을 때, 예은이 아빠의 팔을 안으며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은 저한테 있었어요! 오늘 고쟁 연주 실기 있던 날이었잖아요? 며칠 전부터 연습 진짜 열심히 하고 오늘 아침에도 2시간이나 일찍 경학관 가서 실기 준비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연습했더니 정말 한 번도 실수 안 하고 연주 실기를 볼 수 있었어요! 진짜 이렇게 완벽하게 연주한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아빠한테도 이번에 연습한 곡 들려 드릴게요!”
예은은 아빠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강운예도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집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예은의 고쟁 연주를 다 듣고 3층 방으로 올라온 강운예는 옷을 갈아입으며 이소영에게 오늘 예나가 평연당에 찾아온 일에 대해 전해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강운예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예나 걔는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 어디 부러지거나 터지거나 한건......?”
“다행히 제 딸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은 모양이더군요. 뺨 몇 대 밖에 안 때렸데요.”
“뺨 몇 대......? 예린이가 맨손으로 도깨비도 때려잡는 애인데...... 혹시 예나 목이 돌아가거나 턱이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지? 턱관절 한 번 빠지면 그거 평생 가는데......”
“그 애 걱정은 예나 엄마 앞에 가서 하시구요, 지금은 제 딸 걱정만 해주시겠어요?”
이소영은 정색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운예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주었다.
“간만에 나랏일로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잠시 생각하는 게 짧았네.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몰라요. 그렇게 걱정되면 지금이라도 예나 보러 다녀오시던가요.”
이소영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운예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자신에게 돌리고 입을 맞추었다.
긴 입맞춤 후, 그는 그녀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달래듯 말했다.
“예나 보다 예린이하고 이야기해 보는 게 먼저겠지. 바로 예린이 불러서 이야기할 테니 걱정 마.”
“그래도, 아까 당신이 예린이보다 예나를 더 생각하는 거 같이 말씀하셔서 제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요?”
“내가 어떻게 예린이보다 예나를 더 생각하겠어? 그저 예린이 때린 애고 예나가 맞은 애니까, 맞은 애가 더 걱정되었던 것 뿐이지. 전쟁 이야기 때문에 하루 종일 피곤해 있다가 온 거니까 오늘은 당신이 이해 좀 해줘.”
“혹시 대월국 때문에 우리 나라도 전쟁을 하게 되는 건가요?”
“대월국 때문이라기보다, 천체국 때문에 전쟁을 하게 되었어.”
그녀의 눈에 근심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럼...... 당신 또 전쟁터로 나가셔야 하는 건가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아냐. 지금은 계속 여기 당신과 함께 머물러 있을 거야.”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떼자 이소영이 남편의 가슴에 안기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나라 군은 대동 최강이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까 굳이 당신이 가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잘 할 거에요. 그러니 어디 가지 말고 계속 제 곁에 있어줘요.”
“응,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할게. 그럼 영록이부터 불러서 이야기 좀 하고, 다음에 예린이하고 얘기해야겠군.”
“네? 마루한은 왜요?”
“이번 전쟁이 어쩌면 영록이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그 녀석하고 먼저 이야기하고 예린이를 부르는 게 좋을 거 같아. 예린이하고는 오래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듯 싶으니.”
강운예는 침실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당겨 집사를 호출했다.
영록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3층 거실로 올라갔다. 늦은 밤인데도 강운예는 단정하게 옷을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록은 그가 집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반적인 가정의 아버지라면 퇴근해서 집에서 쉴 때 헐렁한 트렁크에 티셔츠 하나만 입고 편하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그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서 품위를 지키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 때문인지,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강운예는 웃는 얼굴로 최근 그의 근황에 대해, 그리고 수련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렇게 짧은 인사말이 오간 후, 그는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다음 주에 우리 군이 대월국 일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원정을 출발할 것이다. 그때, 너도 우리 군을 따라 다녀오거라.”
“네? 제가 전쟁에 나가게 되는 건가요?”
그 말에, 영록은 긴장한 듯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겨우 몇 개월 수련했을 뿐인데, 내 실력으로 전쟁에 나가 적과 싸울 수 있을까,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는 있을까 오만 가지 걱정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서 직접 실전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다. 너는 군단 지휘부 무관들과 함께 다니며 전장을 둘러보고 오면 된다.”
“그냥 둘러보고 오는 거라구요? 그냥 보고 오는 게 수련에 도움이 될까요? 차라리 그 시간에 여기서 대련을 더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기 위해 그곳으로 가 보는 거다.”
“그곳에서 제가 어떤 것을 배워야 하는 거지요?”
“죽는 것, 죽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에 대해 배우고 느끼고 오거라.”
순간, 영록은 지난 날 조폭들의 은거지 판잣집에서 두 명의 조폭을 총으로 쏘아 죽였을 때가 다시 생각났다.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에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있던 바로 그때 그 순간 말이다.
“사람을 한 번 두 번 죽이기 시작하면 마치 자신이 엄청난 힘과 권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 그러면서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보기도 한다. 언제든 내가 죽일 수 있는 작은 개미 한 마리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 뒤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거에 조금 무뎌진 게 사실이었다. 처음 총으로 조폭들을 쏘았을 때와는 달리, 대월국을 탈출하며 도깨비를 쏘았을 때는 별다른 감정조차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때 상황이 워낙 급박하기도 했고 도깨비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었지만, 처음 사람을 죽일 때와 같은 감정은 분명 아니었다.
“넌 네 여자친구를 구하고 싶어 하지. 하지만 동시에 네 여자친구를 빼앗아 간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도 분명 있을 거다. 그 복수라는 방법 중에는, 녀석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 포함되어 있겠지.”
강운예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영록은 가슴이 뜨끔했다.
“나도 네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으니, 여자친구를 구하는 과정이 평화롭게 진행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더구나.”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강서구에서 체육관을 할 때 어떤 중학생 아이가 칼리 아르니스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칼리 아르니스는 지금 내게 가르쳐주는 단봉술은 물론 맨손 격투, 그리고 나이프 파이팅이라 부르는 단검술까지 가르치는 무예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유독 나이프 파이팅, 단검술만을 배우려고 했어. 그러면서 자꾸 이상한 질문을 하곤 했지. ‘어디를 칼로 어떻게 찔러야 사람이 한 번에 죽죠?’, ‘목에 어디를 어떻게 베야 사람이 소리를 못지르게 되죠?’ 일반적인 중학생이 할 만한 질문들이 아니었어. 그 녀석을 가르치며 계속 뭔가 찜찜했었는데, 그 애 엄마가 월 관비를 내기 위해 찾아왔길래 그 녀석이 내 체육관을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지. 그랬더니 그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영록은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의 아버지는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어. 매일 아버지한테 맞고 살다 보니 그 분노가 마음에 가득 쌓여서, 언젠가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한다며 어머니가 하소연하더라. 즉, 그 녀석은 자기 아버지를 죽일 생각으로 내게 칼리 아르니스를 배웠던 거지.”
자기 친아버지를 죽이려고 칼 쓰는 법을 배운다고? 영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그 녀석 어머니에게 관비를 받지 않았고 오늘부터 그 녀석을 내 체육관에 보내지 말라고 했다. 몇 주 후 그 녀석이 어떻게 돈을 마련했는지 관비를 들고 재등록하겠다고 찾아왔지만 난 그대로 화를 내며 돌려보냈다. 그런 녀석은 절대 가르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영록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친아버지 죽이려고 벼르는 사람에게 사람 죽이는 법을 가르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는 자신과 상관없는 비유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복수하려는 건 아버지나 가족도 아니었고,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난 너 역시 그렇게 가르치고 싶다. 스스로 네 여자친구를 구해낼 수 있게 하려 널 가르치는 거지, 복수 때문에 스스럼도 없고 거칠 것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만들려고 널 가르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전 절대 아무나 마음대로 죽이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자들을 만났을 때만 싸우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너를 이번 전쟁에 보내 직접 보게 하려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삶과 죽음들이 허무하게 교차되는 그곳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것인지 깨닫고, 어떻게 해야 죽여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지 배우고 오라는 거다.”
영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내일 대원수부에서 너를 위해 제작한 전포와 갑주를 보내올 것이다. 한번 입어보고 불편한 곳이 있으면 집사에게 말하도록 하거라. 그럼 들어가서 쉬어라. 아, 가면서 예린이 좀 이리로 오라고 불러주겠니?”
“네, 알겠습니다.”
영록은 공손히 인사하고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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