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76화 (76/217)

〈 76화 〉 대동력 9,993년 14월 6일 (2)

* * *

­ 오전 8시, 대월국 성산번 흰서리 산맥 누리마루 접경지대

영록은 강운예를 따라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언덕 아래에는 말에게까지 검은색 철갑을 씌워 탱크처럼 중무장한 수백 명의 무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있었다.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에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한눈에 봐도 정예병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록은 이들의 위용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를 본 사승범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율도 대원수부 직속 철기 여단 무사들입니다. 그중 저처럼 붉은 방풍의를 두르고 있는 무사들은 적영단이라고 합니다. ‘태상국의 붉은 그림자들’이라 불리는 이들로 율도군 최강의 무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승범의 말에 영록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예린에게서 들었는데, 적영단 말고도 흑영단, 백영단도 있다고 하던데, 이렇게 중간에 ‘그림자 영’자가 붙는 부대들은 다 무엇인가요? 전부 다른 부대인가요?”

“네, 적영단은 평상시 태상국을 최측근에서 호위하고 전쟁 때에도 늘 함께하는 친위대이고, 백영단은 대원수부 내에 있는 태상국의 자택을 경비하고 가족분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입니다. 흑영단은 각종 첩보 수집과 공작에 특화된 정보 부대이고, 또 하나 청영단이라고 있는데, 이들은 태상국의 명을 전하는 전령 부대입니다. 흑, 백, 적, 청 이렇게 네 가지 색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이들 모두 태상국의 그림자처럼 항상 가까이에 있는 부대들이랍니다.”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 아래로 내려온 강운예는 예린을 안고 자신의 말에게 다가갔다. 강운예가 타고 온 흑마는 자신의 주인이 딸을 안고 다가오자 제 스스로 다리를 굽혀 몸을 낮추었다. 강운예가 예린을 안장 앞에 태우고 자신도 말에 올라타니, 흑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든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며 푸르륵, 울음소리를 내었다.

예린은 여전히 아빠 품에 안겨 울먹이는 중이었다. 정국은 그 옆에 자신의 말 위에서 예린을 안타깝게 바라았다.

영록도 사승범의 말 뒤에 함께 올라탔다.

“이동한다!”

강운예가 손을 들어 명하자, 모든 철기 무사들이 서쪽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강운예와 예린, 영록의 좌우에는 붉은색 방풍의를 입은 적영단 무사들이 그들을 호위하며 말을 달리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 대월국과 누리마루와의 국경에 다다랐을 때, 영록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국경 이곳저곳에는 수백 구의 도깨비 시체들이 땅바닥 위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마루한과 영애를 구하러 오기 전, 이곳 국경을 지키는 놈들부터 먼저 부숴버리고 들어왔었지요.”

사승범이 땅바닥에 있는 시체들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계속 앞을 향해 말을 달렸다. 몇몇 도깨비 시체들은 무거운 철갑으로 무장한 육중한 말발굽에 밟혀 배가 터지고 내장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영록은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리마루 국경 내로 들어오자, 그곳에는 또 다른 율도군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간 무사들이 남기고 말들을 맡아서 관리하고 있던 군사들이었다. 무사들은 저마다 3~5마리의 말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들을 찾아 고삐를 하나로 묶어 잡고 다시 남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운예가 곁에 있던 무사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무사는 자신의 왼쪽 팔뚝 위에 있던 영매 가슴의 가방에 어떤 종이 하나를 집어넣고는, 영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고 하늘로 날려 보냈다. 영매는 힘찬 날갯짓을 하며 남쪽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1군단과의 합류 지점까지 쉬지 않고 계속 이동한다! 모두 뒤처지지 않게 재량껏 말을 바꿔 타면서 이동할 수 있도록!”

강운예의 지시에, 모든 무사들이 네!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 오전 14시, 누리마루 남동쪽 숲 일대

강운예의 철기 무사들이 말을 달려온 곳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율도군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율도군 1군단의 야전 군영이었다.

야전 군영은 영록이 우성시에서도 본 적 있는 둥그런 윤형 철조망들로 경계가 둘러쳐져 있었고, 그 사이 사이마다 흙벽으로 쌓은 진지와 참호들로 보호되고 있었다. 각 진지에는 활과 총, 창과 칼을 든 검은 갑주의 율도군들이 물샐틈없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군영 안에는 녹색의 5각형 군용 천막 수백여 동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강운예가 말을 타고 군영 안으로 들어오자 수천 명의 군사들은 모두 정자세로 바르게 서서 그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강운예 역시 그들의 경례를 받아주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군영의 중앙에 위치한 야전 지휘소 막사 앞에는 율도군 1군단장 을불군과 사단장, 여단장 등 각 제대 지휘관 수십 명들이 도열해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흰 수염의 노장 을불군이 강운예에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나 없는 사이 특이 사항은 없었나?”

강운예가 예린을 안고 말 아래로 내려오며 물었다.

“대월국 7왕자를 호송하던 4군단 무사들도 3군단이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성산번 내 흑영단으로부터의 보고는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을불군이 강운예에게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처럼 태상국께서 직접 다른 나라 국경을 넘어갔다 오는 무모한 작전은 이제 그만 하실 때도 됐지 않습니까? 저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태상국께서 이러실 때마다 조마조마해서 제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입니다.”

강운예는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나 혼자 국경 넘어간 것도 아니고 율도군 최강 정예들과 함께 갔는데 무어가 그리 걱정된다는 건가? 게다가 내 딸 구하러 가는 일에 내가 직접 가야지, 남들만 보내서야 되겠는가?”

강운예는 예린과 영록, 정국을 데리고 야전 지휘소 뒤에 있는 지휘관 막사로 들어갔다.

제법 넓고 아늑한 지휘관 막사에는 푹신한 융단 위에 검소한 나무 탁자와 의자들, 침상과 갑주와 무구를 올려놓는 선반들이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강운예는 아이들과 함께 탁자에 앉은 후 당번병을 호출했다.

“나하고 아이들이 먹을 거니, 네 명 점심 식사 준비해서 안으로 들이도록.”

“상차림은 지난번과 같은 음식을 올리라 할까요?”

“아니, 매운 음식은 모두 빼고, 소고기랑 따뜻한 국물 있는 거로 준비해주게.”

당번병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강운예가 아이들을 스윽 둘러보더니 옆에 앉은 예린이를 무겁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자하고 백영단 대위(진채연)에게 지금까지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그럼, 점심밥 나오기 전까지 이번엔 예린이한테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을 들어볼까?”

예린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게요, 그러니까요...... 정국이랑 누리마루까지 왔었는데 거기서 영록이가 멧돼지한테 당할 뻔 한 걸 저희가 구해줬는데요.......”

강운예가 살짝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것부터 말고. 예린이 너 집에서 가출할 때부터의 상황부터 설명해야지. 너 가출할 때 어떻게 하고 집에서 나갔어? 그리고 누리마루까지 가면서 황자랑 둘이서 뭐 했어?”

그의 질문에, 예린의 눈에서는 동공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강운예의 맞은편에서 영록과 나란히 앉아 있던 정국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자한테 다 들었어. 아빠한테 거짓말할 생각 말고.”

강운예는 엄한 목소리로 딸을 채근했다.

한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예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아빠를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그를 끌어안고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앙~! 나 그동안 도깨비들한테 붙잡혀가서 너무너무 무서웠단 말야~! 그래서 그 전에 무슨 일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 정말이야~!”

“도깨비가 무섭기는, 도깨비들이 널 무서워했겠지.”

“몰라앙~! 나 정말 무서웠단 말이야~! 몰라, 아빠~!”

예린은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계속 우는 소리를 냈다. 강운예도 이러는 딸을 이길 수 없어 보였다.

잠시 후, 당번병이 밥과 따뜻한 국물, 소고기 불고기와 정갈한 반찬들이 담긴 쟁반들을 가져왔다. 영록과 예린은 그동안의 고생으로 배가 매우 고팠던지, 주변 사람들 눈치도 보지 않고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 체할라. 국물도 같이 떠먹고.”

강운예는 예린과 영록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도깨비들이 거기서 가둬놓고 밥도 안 줬니? 누가 보면 열흘쯤 굶은 애들인 줄 알겠다.”

예린이 밥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밥을 주긴 했는데요, 진짜 맛 더럽게 없었어요. 정말 도깨비들 먹는 건 사람 먹을 게 아닌 듯. 세상에 털이 숭숭 박혀있는 개고기를 내오질 않나, 기름만 둥둥 떠 있는 걸 국이라고 내오지 않나. 차라리 우리나라 전투식량이 그거보다 100배는 맛있었다니까요. 아, 맞다. 아빠 물어볼 게 있어요.”

“응, 뭐?”

“아빠, 아빠 살던 곳에 무슨 줄만 당기면 저절로 열나고 김 나면서 그 안에 든 밥이랑 반찬 데워주는 그런 전투식량이 있었어요? 불 없이도 물이랑 음식 데워주는 기계도 있고?”

“응?”

“아니, 영록이가 자기 살던 곳에 그런 거 다 있었다고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잖아요? 아빠, 그거 다 거짓말이죠? 그쵸?”

강운예는 난감한 표정으로 영록을 쳐다보았다. 영록도 밥을 삼키다 말고 입을 가리고 콜록거리며 강운예를 보고 웃었다.

­ 오후 1시, 누리마루 남동쪽 숲 일대

율도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도 하늘 향해 높게 솟아 있는 누리마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지휘관 막사 밖으로 나온 영록은 자신이 내려온 누리마루를 바라보며 만감에 젖어 있었다.

그때, 강운예가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야전 지휘소 밖으로 나왔다. 그는 누리마루를 바라보고 있는 영록을 보고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밖에서 무얼 하고 있니? 추운데 안에 들어가서 쉬지 않고.”

영록은 강운예를 보고 살짝 웃어 보였다.

“강운예 관장님 찾아서 저기 저 누리마루에서 내려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여러 경험을 하게 된 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언제쯤이면 다시 저 누리마루로 가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구요. 저, 관장님?”

“응, 말해 보거라.”

“제가 관장님과 얼마나 수련해야 유민이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요? 3개월이면 될까요?”

그 말에, 강운예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3개월? 그거로는 어림도 없다.”

영록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저 그럼, 관장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수련해야 제가 강해질 거 같으신데요?”

강운예는 냉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소 10년.”

영록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절망하며 소리쳤다.

“10년이라니, 안 돼요! 지금 유민이가 그놈들한테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10년씩이나 있어야 한다니요! 그렇게 오랫동안 유민이를 고생시킬 수 없어요! 저는 더 빨리 유민이를 구하러 가고 싶다구요!”

강운예는 안타깝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체육관을 하면서 느낀 건데, 체육관에 등록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 빨리 기술 배우고 싶다, 빨리 진도 나가고 싶다, 빨리 강해지고 싶다 하고 조급하게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니?”

영록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다 한 달도 안되 체육관 다니는 거, 운동 배우는 거 접는다는 거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사람일수록 포기도 빠르더라구. 네가 나에게 무예를 배우기 위해 이곳 대동까지 온 이유가 그저 남들보다 빠르게 배우고 싶어서였니, 아니면 정말 강해질 수 있도록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였니?”

“당연히 정말 강해질 수 있도록 배우고 싶어서 대동까지 관장님을 따라 온거지만...... 10년이란 세월은 너무 길어요. 그 10년 동안 유민이한테 무슨 일이 더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리고 또......”

조폭들이 빨간색 두 줄이 그어진 임신테스트기 흔들며 소리치는 모습과 발가벗겨진 채로 화장실에 주저앉아 울던 유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록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강운예는 영록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말 네가 바라는 것처럼 네 힘만으로 네 여자 친구를 구할 정도로 강해지기까지 10년이란 세월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네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내 이거 하나만은 장담하마. 네가 이곳 대동에서 나와 함께 10년 넘게 수련한다 하더라도, 네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을 때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이미 10년이 지났을 텐데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거라니요......?”

“내가 대동에 도착한 대동력 9,729년이었지. 지금이 대동력 9,993년이니까 이곳에 산지도 벌써 260여 년이나 지났구나. 그때가 지구의 시간으로는 2017년이었지. 그런데 네가 이곳에 대동에 왔을 때 그곳은 몇 년도였지?”

“......2028년이었어요. 잠깐만요. 여기서 260여 년을 사시는 동안 지구는 11년밖에 안 지난 거라구요?”

“그래. 난 대동에서 260여 년이나 살았지만, 지구 시간으로는 1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거야. 그럼 네가 여기서 10년간 있는다면? 지구에서는 대략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겠지.”

영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어떻게 여기서 10년이 흐르는 동안 지구는 6개월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게 되는 거죠?”

“그건 내가 물리학자가 아니라서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긴 힘들지만, 시간이란 모든 공간에서 동일하게 흐르는 게 아닌 건 확실할 게다. 여기서 260년간 살아온 나라는 존재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충분히 입증하고 있지 않을까? 어쨌든 여기 대동에서 10년 정도, 그에 비례해서 지구에서 6개월 정도의 시간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네 여자 친구를 구할 만큼 강해지기 위해 충분히 투자할 만할 거 같은데, 넌 어떠니?”

영록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강운예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 이해했습니다. 저,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배우겠습니다. 부디 제가 유민이를 제 힘으로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게만 만들어 주세요.”

강운예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련은 백화에 도착하면 바로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따듯한 막사 안으로 들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쉬고 있거라. 추운 데 있다가 감기라도 들면 수련 시작하는 게 더 늦어질지도 모르니.”

영록은 고개를 끄덕이고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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