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74화 (74/217)

〈 74화 〉 대동력 9,993년 14월 5일

* * *

­ 오전 0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늦은 밤에도 성산성의 성벽은 수많은 횃불과 화롯불들로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첫 번째 성벽 밖에는 다른 번에서 온 수많은 병력들이 천막을 치고 숙영지를 편성해 놓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도 성산으로 들어오는 군대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서서히 반란군 진영의 위용이 갖춰지고 있었다.

이 와중 목건주가 급히 편성한 백여 명의 기병들이 성문 앞에서 출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개가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흰서리 산맥을 향해 급히 달려가려 하고 있었다.

목건주를 배웅하러 나온 심운보의 표정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보였다.

“그놈들이 거짓으로 실토한 건 아닐까? 공연히 우리 병력들을 분산시키려고 하는 수작이 아니겠냐는 말이야.”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너무 개활지 방향에만 병력이 편중되어서 흰서리 산맥에 대한 감시가 소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이 병력들부터 데리고 가서 흰서리 산맥 부근 누리마루와의 국경지대를 차단하고 있을 테니, 후속 병력이 준비되는 데로 바로 지원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영매를 띄우겠습니다.”

심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산에 들어와 있는 강운예의 눈과 귀는 필시 그년 혼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 병력이 흰서리 산맥으로 이동하는 게 알려지면 도망치는 놈들의 발걸음도 함께 빨라지겠지. 하지만 후속 병력들도 모두 날랜 기병들로 준비해서 보낼 테니 염려 말게.”

“구천락의 말대로 지하 감옥에 잡혀 온 그 년과 지금 성산에 들어온 자들이 모두 태상국 강운예의 흑영단이라면, 아직 붙잡히지 않은 다른 놈들도 찾아내 반드시 박멸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 태상국 강운예가 흑영단 몇 명으로 농간을 부려 나라 하나를 고스란히 털어먹은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9,910년경, 열하 도국 (남동쪽 바다에 있는 섬나라들) 중 ‘성종국’이란 나라가 해적과 연합하여 대동 동부에 있는 해상 무역 도시 국가 연합인 ‘수로’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수로의 8개 도시 중에는 율도의 무역 기지인 ‘보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로에 대한 위협을 자국의 위협으로 인지한 율도는 그 즉시 성종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실시한다.

율도의 군사작전은 흑영단의 첩보 및 교란 작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흑영단은 성종국 휘하의 해적들을 이간질해 내분을 일으켜 버렸다. 거기에 성종국의 간자(간첩)을 포섭해 이중간첩으로 활용하여 적에게 거짓 정보까지 퍼트리게 했다.

이로 인해 성종국의 군대는 엉뚱한 곳에 진을 치고 적을 기다렸고, 율도군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이 섬에 손쉽게 상륙해 버렸다. 성종국은 단 5일 만에 멸망 당했고, 지금은 율도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심운보 역시 그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천락에게 이번에 잡은 년을 반간(이중간첩)으로 이용해 다른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명해 놨지. 흑영단을 반간으로 쓸 수 있다면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냥 죽여 버리면 그만이고.”

“간자(간첩)들도 결국 사람입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 국가와 주인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모두 잊히기 마련일 겁니다.”

목건주는 심운보에게 군례를 올리고 말 위로 뛰어올랐다.

발가락 자르는 고문을 당하던 남자 노예는 결국 피를 많이 흘리고 죽어버렸다.

유경패는 끔찍하게 죽어 있는 시체 셋과 함께 여전히 쇠사슬로 묶인 채 고문실에 남겨져 있었다.

같이 있던 남자 노예가 흰서리 산맥에 대한 말을 실토한 이후, 그와 여자아이는 여개가 고문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 후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당한 고문과 폭력에 기력이 쇠한 유경패는 점점 두 눈이 감겨왔다.

비몽사몽 간에 고문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팔다리를 묶은 쇠사슬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음문과 항문에 박혀있던 막대기들도 뽑혔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르륵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도깨비들이 그녀의 양팔을 붙들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질질 끌려가기만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지금 자신이 고문실과는 달리 환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방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부드럽고 푹신한 방석이 있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간단한 식사도 놓여 있었다.

탁자 맞은편에는 구천락이 앉아 있었다. 유심히 유경패를 바라보던 구천락은 붕대를 감지 않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겉옷을 벌거벗고 있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올려 주었다.

“입어라. 입기 싫으면 계속 벗고 있어도 좋고.”

유경패는 무의식 중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는, 몸을 옆으로 틀고 그가 준 겉옷으로 입기 시작했다. 남자 옷인지, 겉옷은 그녀에게는 너무 헐렁했다. 단추를 잠가도 한쪽 어깨가 드러날 정도로 몸에 잘 맞지도 않았다.

구천락은 손으로 음식이 든 쟁반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

“배고픈가? 먹어라.”

유경패는 멍한 눈으로 음식을 바라보았다.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네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이제 간자(간첩) 혐의로 사형을 면할 수 없다.”

구천락은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율도가 너를 구하러 올 것 같나? 마루한과 영애를 데리고 간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널 구하러 올 것 같냐고. 천만에. 그들은 네가 자신들의 간자라는 걸 인정하지도 않을걸?”

유경패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버려질 것이다. 우리에게 잡혔으니 율도는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하고 있을지도 몰라.”

순간, 유경패의 눈앞에 자신에게 작전 지시를 하던 흑영단 소단주의 냉철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는 이 작전을 계획하며 처음부터 유경패의 안위 따위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그냥 죽을 텐가? 넌 아직 젊고 아름다운데, 지금 죽기 너무 아깝지 않아? 살 방도가 있으면 살아야지.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야.”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경패의 표정을 살피던 구천락은 그녀가 반쯤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번 손으로 음식이 든 쟁반을 가리켰다.

“먹어라. 일단 먹고 기운부터 차려라.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유경패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탁자 위의 음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와장창!

음식들이 탁자 아래로 떨어졌다. 그릇들으 모두 깨지고, 음식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유경패가 음식이 든 쟁반을 손으로 쳐버린 것이다.

구천락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일 테면 죽여! 너희 도깨비들과 상종할 생각 없으니 더러운 수로 꾀려 하지 말고!”

유경패는 이렇게 소리치고 이를 악물었다.

“하아~ 이것 참......”

구천락은 한숨을 쉬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여개가 도깨비 넷을 이끌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이 오살할 년, 살고 싶지 않은가 보지?”

그는 들어오자 마자 의자에 앉아 있던 유경패를 발로 걷어찼다.

"꺄악!"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쓰러진 그녀의 몸 위로 도깨비들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유경패를 흠씬 두들겨 팬 도깨비들은 그녀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찢어 버렸다.

그녀는 다시 발가벗겨졌다. 양손에도 쇠사슬이 채워졌다.

도깨비들은 그녀를 지하 감옥의 어둠 속 어딘가로 끌고 갔다.

그들이 유경패를 데려간 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두껍고 튼튼한 철문이 붙어 있는 감방 앞이었다. 철문 밖으로 그르릉, 그르릉, 짐승의 울음소리가 같은 숨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도깨비 하나가 빗장을 벗기고 철문을 열 준비를 했다. 그러자 도깨비 두 사람이 철문 양쪽에서 앞으로 창을 겨누었다. 혹시 철문을 열 때 그 안에 있는 것이 튀어나올 것을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여개는 유경패의 손에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귀에 입을 바싹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형(?,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이 안에 있는 친구들과 잘 사귀어 보라구. 아, 먼저 고문실에서 나온 녀석들도 모두 이 안에 있으니 한 번 찾아봐. 아직까지 살아있으면 말이야.”

기이익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횃불을 들고 있던 도깨비가 감방 안을 비추었다.

유경패의 눈동자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다른 종족들보다 상체 하나는 더 있어 보이는 커다란 체구에 웬만한 장정들의 허벅지만큼 굵다란 팔뚝, 입술 바깥으로 뾰쪽 튀어나온 날카로운 송곳니.......

그 안에는 십수 명의 두억시니들이 들어있었다.

두억시니들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열심히 뜯고 먹고 있었다.

자세히보니, 그것은 사람의 팔과 다리였다.

그들의 발아래에는 둥그런 것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여개에게 누리마루, 흰서리 산맥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남자 노예의 머리였다.

그리고 감방 구석에서는 함께 있던 여자아이가 벽에 기대진 채 쓰려져 있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는 온통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유경패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러기 시작했다.

순간, 여개가 유경패의 등을 발로 밀어 찼다. 그녀가 감방으로 들어가자 도깨비들이 재빨리 철문을 닫아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도깨비들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빗장을 잠그고 자물쇠까지 채워 버렸다.

­ 오전 1시, 대월국 성산번 흰서리 산맥 북서쪽

주혁은 아이들을 데리고 밤새 쉬지 않고 흰서리 산맥을 주파했다. 다행히 예린은 물론 영록도 지치지 않고 잘 따라와 주었다.

새벽 미명이 떠오르려 하자, 주혁과 4군단 무사들은 다시 숨을만한 곳을 찾아 토굴을 파고 쉬어가기로 했다. 온종일 걸었지만, 그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열심히 땅을 파 토굴을 만들었다.

“어제처럼 한 시간씩 돌아가며 경계를 취할 것이다. 다섯 시간 정도 자고 바로 출발할 테니 그사이 푹 쉴 수 있도록.”

일행은 다시 둘씩 짝을 지어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무사들도 분명 많이 피곤했을 텐데, 토굴 입구와 주변의 위장까지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나서야 토굴 안으로 쉬러 들어갔다.

영록이 토굴 안으로 들어오자 무사가 그에게 먹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영록은 무얼 먹고 싶은 마음보다 자고 싶은 마음이 더 굴뚝같았다.

흙벽에 등을 기대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마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오전 10시, 대월국 성산번 흰서리 산맥 북서쪽

입구를 가리고 있는 덮개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 들어오긴 했지만, 토굴 안은 그리 춥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록은 정말 깊이 잠들어 있었다.

10시 어간이 되자 다시 주혁이 토굴 밖에서 무사들을 불렀다. 그 소리에 영록은 무사와 함께 토굴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이제 다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예린도 퉁퉁 부은 얼굴에 떡진 머리로 하품을 하며 토굴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흙벽에 눌려 까치집을 지은 영록의 머리를 보고는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너도 지금 만만치 않거든? 니 얼굴도 벌에 쏘인 멍멍이 같이 보이거든?”

영록은 어이없어하며 함께 따라 웃었다.

다시 누리마루를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산맥의 7, 8부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중이었다.

오래 걷다 보니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듯 따끔거리고 아프기는 했지만, 영록은 이제 행군하는 게 별로 힘들지 않다고 느껴졌다.

사실 다른 무사들처럼 전투 배낭이나 무기를 짊어지지 않고 하는 행군하는 거라 힘들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다.

“나 이제 행군하는 거에 적응이 좀 된 거 같아. 어제보다 별로 힘들지도 않고. 이번엔 정말 누리마루까지 퍼지지 않고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야, 너처럼 맨몸으로 걷는 게 무슨 행군이니? 그냥 산보지.”

영록의 말에 예린은 그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며 대꾸했다. 영록은 삐진 얼굴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오늘따라 영록의 몸 상태가 좋은지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앞만 보고 걷던 그는 어느새 선두에 있는 주혁의 옆까지 가게 되었다.

한참을 주혁의 곁에서 따라 걷던 영록이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네, 말씀하시지요.”

주혁은 앞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그의 말에 대답했다. 영록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저번에 성산성에서요, 갑자기 연회실 불이 다 꺼지고 무사님들이 도깨비들 모두 쓰러뜨리셨잖아요? 그때, 어떻게 순식간에 모든 불이 다 꺼질 수 있었던 거죠?”

이에 주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등불 심지를 활로 쏘아 꺼뜨린 겁니다.”

“네?????? 그 양초 위에 불붙는 그 가느다란 실 같은 걸, 활로 쏘아 꺼뜨린 거라구요??????”

영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이 쩍 벌어졌다. 주혁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네, 심지만 떨어뜨리면 불은 쉽게 끌 수 있지요. 그때 연회실 천정 위에서 활을 쏜 거라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습니다. 명사수라면 등불 심지 정도의 표적은 100보 밖에서도 맞출 수 있어야겠지요.”

“저...... 제가 대동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절 놀리시려는 건 아니죠?”

“제가 어찌 마루한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 제 대원들 모두 그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록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주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록은 주혁에게 율도국 무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무사가 되면 어떤 수련을 받는지, 그럼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에 관해 물었다. 주혁은 이 질문에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성실히 답변을 해주었다.

“예린이 말로는 무사님들이 4군단이라고, 상당히 특수한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라고 들었어요. 4군단 무사가 되려면 많이 어려운가요?”

“그런 편입니다. 지금은 각 군단에서 지원자들을 받아 일정 기간 교육과 평가를 거쳐 최종적으로 아주 소수의 인원만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4군단이 처음 만들어지는 초창기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과정은 거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 무사님은 어떻게 4군단에 들어오셨어요? 아니, 처음에 어떻게 군에 들어오시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집안 사정도 그리 좋지 못했죠. 어떻게든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어서 빨리 돈을 벌고 싶었는데,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공사판의 막일을 하거나 군인이 되는 것, 둘 중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군인이 되면 안정적으로 급여를 받을 수 있으니까 더 좋아 보이더군요. 그래서 17살 나이에 군에 들어갔죠.”

“딱 지금 제 나이 때 군에 들어가신 거군요.”

“네. 그런데 하필이면 제가 군에 들어오고 얼마 후, 계몽전쟁이 일어나 버렸죠. 저는 당시 공화정파를 지지하는 부대에 병사로 있었는데,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부대가 크게 패하고 철수하게 되었지요. 그때 저는 공화정파의 주요 인사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도망가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반란군의 추격을 막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주혁은 당시 기억에 괴로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와 함께 퇴로를 지키던 동료 병사들과 무관들은 하루도 안 되어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 후론 저 혼자 진지를 지켜야 했죠. 그때 정말...... 미친 듯이 싸웠습니다. 제 얼굴과 몸에 난 흉터 대부분이 그때 얻은 것들이지요.”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에 가득한 흉터들을 가리켰다.

“임무도 임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제가 죽으면 홀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악착같이 싸우고 있을 때, 그분이 저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이요?”

“네, 태상국께서 친히 저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군의 철수로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오셨던 거지요. 그분이 오지 않으셨다면, 전 아마 거기서 죽었을 겁니다.”

“정말 중요한 싸움터였나 보군요.”

“네, 만일 태상국이 오시지 않아 반란군이 그대로 아군을 뒤쫓아 왔더라면 공화정파 사람들의 목숨도 위태로웠을 겁니다. 그렇게 태상국께 구출된 후, 전 며칠간 야전 병원에 누워 부상을 치료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태상국께서 직접 야전 병원까지 저를 찾아와 주셨지요. 그때의 감격을 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고 있는지, 그의 눈이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영록이 옆을 보니, 예린이 어느 틈에 왔는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나누는지 궁금해서 달려온 온 모양이었다.

주혁이 말을 이었다.

“태상국께서 제게 소원이 있냐고 물으셨지요. 그래서 전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수 있도록 진급도 빨리 하고 싶고 급여도 많이 받고 싶고, 집이나 관사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태상국께서는 ‘솔직해서 마음에 드는군.’ 하고 웃으셨지요. 얼마 안 가 전 정말 진급을 했고, 급여도 더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관사까지 받아 그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게 되었지요. 계몽전쟁이 끝난 후에는 태상국께서 친히 저를 4군단으로 부르셨습니다.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만, 4군단 무사들은 다른 무사들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예린은 영록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이들이 다른 무사들보다 급여를 두 배 이상 더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 모든 것이 태상국의 은혜였습니다. 태상국 덕분에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어머니가 다른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될 만큼 편하게 모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태상국에게 감사드린다고, 그분께 꼭 보은해야 한다고 당부하곤 하셨습니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시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태상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주혁의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아빠도 무사님께 무척 감사해하실 거에요.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쓰고 계시니까요.”

예린의 말에 주혁은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께 감사를 받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 오후 8시, 대월국 성산번 흰서리 산맥 북서쪽

이제 누리마루와의 국경까지는 대략 40리 (약 15km) 정도 남은 상태였다.

주혁은 전방 지역을 정찰하러 간 무사가 돌아올 때까지 일행들에게 휴식을 부여했다. 쉬는 동안 무사들은 잠시 전투 배낭을 내려놓고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무사 한 명이 곁에 있는 예린에게 육포를 내밀었다. 예린은 손을 저으며 무사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육포 말고 혹시 신형 전투식량은 없어요?”

무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투 배낭 안에 손을 집어넣고 뒤적뒤적했다. 그러다 두툼하게 생긴 국방색 포장지를 하나 꺼내어 예린에게 건넸다. 예린은 그걸 받아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포장지를 뜯었다.

“그게 뭐야?”

영록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예린이 손에 든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포장지를 뜯으니 그 안에 또 여러 개의 작은 포장지들이 들어 있었다.

“이거? 신형 전투식량. 한번 볼래?”

예린은 작은 포장지들을 하나하나 까면서 설명해주었다.

“이건 흑당 (초콜릿과 비슷한 과자), 이건 건락(치즈), 이건 염장육(햄), 이건 건빵...... 자, 이거 한번 먹어봐봐. 아~ 해봐.”

예린은 흑당을 조금 떼어 영록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흑당은 생각보다 훨씬 달았다. 게다가 쓴맛도 상당했다. 영록 얼굴을 찡그렸다. 예린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렸다.

“맛이 상당히 강하지? 이게 다 부피는 줄이고 열량은 높게 만들려고 음식을 막 압축하다 보니까 그런 맛이 나는 거야. 그래도 이게 도깨비들이 주던 밥보다는 100배는 더 맛있을 거야.”

예린은 한입 크기의 건빵 위에 건락 한 덩이와 염장육 조금일 떼어 올리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건빵이 제법 딱딱했던지 씹을 때마다 바사삭거리는 소리가 영록에게까지 다 들렸다.

“전투식량 자주 먹어 봤니? 혹시 집에서도 먹는 건 아니지?”

예린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아빠가 집에 많이 가지고 와서...... 많이 있기는 해.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 간식 삼아 먹곤 했지. 나 이거 먹을 때마다 아빠가 그거 열량 높아서 많이 먹으면 살찐다고 그러셨는데. 뭐, 이거 많이 먹어도 경무관에서 무예 수련 열심히 하니까 생각보다 살이 많이 찌지는 않더라. 근데 네가 있던 곳에서도 이런 전투식량이 있니?”

영록은 애국 청년 십자군에 있을 때 아주 가끔 경찰서 식당에서 나온 전투식량들이 생각났다.

“응, 내가 먹어본 건 포장지 째로 끓는 물에 넣고 데워 먹는 거랑, 건조한 쌀이랑 야채 같은 거에 뜨거운 물 부어 먹는 거랑, 또...... 무슨 하얀색 손잡이 같은 거 잡아당기면 저절로 김이 나고 뜨거워져서 그 안에 밥이랑 반찬들을 데워 주는 거, 이렇게 먹어 봤어.”

그 말에 예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저절로 김이 나고 뜨거워져서 음식을 데워 줘? 거짓말!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이 대동 세상에 그런 게 없어도, 내가 살던 세상에는 그런 게 분명히 있어. 못 믿겠으면 너네 아빠한테 물어봐봐. 내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너 만약에 아빠한테 물어봐서 아니면 너 진짜 내 손에 죽는다~?! 아무리 네가 마루한이라도 되도 않는 말을 막 하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럼, 네가 있던 세상에는 불도 없이 물도 끓여주고 음식도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물건도 있겠네? 아니야?”

“응, 그런 거 다 있는데? 물 끓이는 전기포트랑 음식 데워 주는 전자레인지. 그거 다 불 없이도 다 되는데?”

“야~!!! 진짜 나중에 우리 아빠한테 다 물어본다~?! 나 놀리려고 거짓말한 거기만 해봐~! 너 진짜 가만 안 둬~!!!”

예린의 언성이 높아지자 주혁은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잠시 후 정찰을 나간 무사가 복귀했다. 그의 얼굴은 다소 어두워 보였다.

“누리마루와의 국경에 대월국 병력들이 추가로 도착했습니다. 새로 도착한 이들의 수는 대략 백 명 정도였고, 모두 기병이었습니다.”

“서쪽 외에 다른 방향에서 확인한 사항은 없는가?”

“남쪽으로부터 병력들이 계속 우리가 있는 흰서리 산맥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밤이라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의 수로 미루어 보아 족히 천여 명은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보고를 들은 주혁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리의 도주로를 파악하고 급히 따라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대월국 병력들이 우리를 둘러싸기 전에 최대한 빨리 국경지대 가까이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

주혁이 대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부터 사주경계를 한 상태에서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필요 없는 잡담은 모두 삼가도록. 그럼 다시 이동한다.”

무사들은 활을 꺼내 들고 전투 배낭을 다시 짊어졌다. 무사들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예린도 무사들처럼 왼손에 활을 잡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혁을 선두로, 다시 일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쯤 갔을 때, 앞장서 걷던 주혁이 주먹을 쥔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며 자세를 낮추었다. 이를 신호로 모든 무사들이 그 자리에 앉았다. 영록도 재빨리 자세를 낮추었다.

영록이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산 아래에서 횃불을 든 도깨비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주혁이 가까이에 있던 무사 둘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주혁은 주변에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무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혁과 손을 맞잡았다.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무사들은 전투 배낭에 들어 있던 식량과 물자들을 다른 무사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땅에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 활과 화살, 군도만을 가지고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영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예린과 다른 무사들도 모두 몸을 낮추고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소리를 죽이며 은밀하게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도깨비들과 90보 (대략 100m) 가량 떨어진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이 좀 더 산 위로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도깨비들이 40보 (대략 50m) 거리까지 다가왔다.

두 무사는 동시에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슉! 슉!

횃불을 들고 있던 성산번의 번군 둘이 목에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적이다! 앞에 적이다!”

“마루한이나 영애가 같이 있을 수도 있다! 절대 쇠뇌를 쏘지 마라! 쫓아가서 잡아라!”

도깨비들은 고함을 지르며 산 위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사들은 밤인데도 귀신같이 정확한 궁술로 도깨비들을 하나씩 하나씩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산 위를 향해 달려오던 도깨비들은 무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산 아래로 다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저 위다! 바위 뒤에 있다!”

“쫓아라! 가서 잡아라!”

도깨비들은 무사들이 숨어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바위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부우~!

그때 도깨비 하나가 커다란 뿔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다른 곳을 수색하고 있는 번군들에게 이곳에서 무언가 찾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입은 갑주로 보아 지휘관급 무사인 듯 했다.

슉!

탁!

어둠 속에서 화살 한 대가 날아와 도깨비 무사의 투구 끈을 맞추어 끊어버렸다. 도깨비의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그의 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바위 뒤에 있던 4군단 무사들이 동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일행이 가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도깨비 무사는 성난 얼굴로 손으로 턱의 피를 스윽 닦았다. 그는 땅에 떨어진 투구를 집어 들며 번군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놈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놓치면 모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그는 다시 머리에 투구를 쓰고 뿔나팔을 불며 무사들을 쫓아 동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예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안 죽인 거야.”

영록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린이 말을 이었다.

“지휘관을 죽이면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거나 겁에 질려 자신들을 따라오지 않을 테니까, 일부러 투구 끈을 쏘아 화를 돋운 거야. 저분들, 지금 스스로 미끼가 돼서 도깨비들을 유인하고 있는 거라고.”

그녀의 말에, 영록은 낮에 주혁이 자신의 대원들 모두 100보 밖에서 활로 등불 심지도 맞힐 수 있다고 한 것이 기억났다.

예린의 말대로 도깨비들은 더 이상 산 위로 올라오지 않고 두 무사를 쫓아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사들은 전력으로 달려가다가도 도깨비들을 향해 뒤돌아 활을 쏘았다. 그때마다 무사들의 화살은 여지없이 도깨비들의 몸을 꿰뚫었다.

산 아래 도깨비들이 점점 동쪽을 향해 멀어지자, 주혁이 무사들에게 손짓했다. 다시 이동한다는 신호였다. 일행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누리마루가 있는 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 언젠가부터 밤의 고요 속으로 쉭, 쉭,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려오고 있었다. 성산번의 번군들은 자신들이 쫓고 있는 자들이 마루한이나 영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제 그들을 향해 쇠뇌를 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록이 뒤돌아보니 동쪽 산 아래에서 하늘 위로 여러 대의 불화살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불화살은 4군단 무사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고, 불화살의 불빛에 무사들의 위치를 확인한 다른 병사들이 그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쇠뇌를 쏘고 있었다.

무사 한 명이 등과 다리에 여러 대의 화살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무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리에 화살을 맞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던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다가오는 도깨비들을 향해 활을 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무사의 주변으로 세 대의 불화살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수십 발의 화살이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제 그의 가슴팍에도 십여 대의 화살이 박혀버렸다.

그런데도 무사는 마지막 남은 화살까지 모두 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도깨비들은 그의 10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사는 활을 버리고 군도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일어나 싸울 수 없어 보였다.

십여 명의 도깨비들이 무서운 고함 소리를 지르며 무사를 에워싸고 창칼을 휘둘렀다.

영록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예린이 영록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앞에 잘 보고 걸어. 밤이라 넘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예린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무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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