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73화 (73/217)

〈 73화 〉 대동력 9,993년 14월 4일

* * *

­ 오전 9시, 대월국 성산번 번주 직속 영지

대월국의 수도 은허에서 여러 교역품을 싣고 대동 서부로 향하는 금아 상단의 행렬이 이제 막 성산을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십 대의 마차에는 대월국의 특산품들은 물론 대동 동부에서 온 여러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주변에는 상단에 고용된 수십 명의 무사들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도깨비도 있었고, 간간이 덩치 큰 두두리들도 끼어 있었다. 그들 모두 정규군처럼 갑주와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

마차 행렬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포장마차들도 있었다. 이 중 하나의 마차에 유경패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보라색의 투박한 여행용 복장을 하고 하얀색 머릿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머릿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녀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중 여자아이는 대월국의 예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청년 셋이 앉아 있었다. 그들도 역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금아 상단의 행렬이 번화가를 벗어나 초원길로 향하는 남서쪽 도로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마차 앞으로 수백의 성산번 번군들이 도로를 막고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의 좌우에서도 창칼을 든 번군들이 행렬을 포위하고 있었다.

수십 대의 마차가 모두 멈춰 섰다. 유경패는 불안한 눈으로 밖의 상황을 내다보았다.

갑자기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상단 무사들이 행렬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군들이 정확히 유경패와 일행이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다가와 둥글게 둘러쌌다.

덩치 큰 도깨비 무사 하나가 말을 타고 포장마차 뒤로 다가왔다. 명활성 성주 목건주였다. 그의 갑주에는 아직도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 안에, 모두 다 내리시오.”

마차를 둘러싼 도깨비들 중에 쇠뇌나 칼을 들어 위협하는 자는 없었다. 다만 유경패와 그 일행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유경패가 마지못해 천천히 마차를 내려왔다. 머릿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의 일행들도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유경패는 목건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목건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남자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릿수건을 벗겨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머릿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남자아이는 그가 기대하던 마루한 영록이 아닌, 노예로 보이는 혼혈 유랑민 아이였다. 목건주는 옆에 여자아이의 머릿수건도 벗겨보았다. 역시 율도국 태상국의 영애 예린이 아닌 혼혈 유랑민 여자아이였다.

함께 있던 청년 셋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비천하게 생긴 혼혈 유랑민 노예들일 뿐이었다.

“이 자들을 모두 꿇어 앉혀라!”

목건주가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호령했다. 번군들이 달려들어 유경패와 일행들을 무릎 꿇렸다.

목건주가 장자검을 빼어 유경패의 목에 들이밀었다.

“마루한과 영애는 어디로 빼돌린 것이냐?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유경패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그저 이 상단 단주님을 따라 대동 서부로 가는 미천한 계집일 뿐입니다. 그런 제가 누구를 빼돌린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마 나으리께서 다른 사람과 저를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목건주가 고개를 돌려 행렬의 앞쪽을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금아 상단의 단주가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의심 많고 속 좁은 단주가 밀고했던 것이다.

목건주가 유경패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씩씩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들 앞으로 나아왔다.

왼팔과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구천락이었다.

“일단 이 년놈들 모두 성으로 데려가서 문초해봐야 합니다.”

“문초하면, 무어라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목건주의 물음에 구천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년은 원래 춘일관에서 일하던 년인데, 아리랑 주제에 이곳 성산까지 와서 기녀로 있는 것이 여간 이상한 게 아니어서 그동안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던 년입니다. 게다가......”

구천락은 유경패의 옆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여자아이의 옷을 잡아 흔들어 보였다.

“이 옷, 어제 성산백 각하께서 율도국 태상국 영애에게 보내신 예복이 분명합니다. 이 년놈들은 틀림없이 마루한과 영애, 7왕자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목건주가 장자검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으며 번군들에게 외쳤다.

“여기 이 년놈들을 포박해서 성산성으로 회군한다! 서둘러라!”

말에 오르는 목건주는 여전히 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다.

유경패와 일행들이 번군들에게 밧줄로 포박당하는 사이, 구천락은 금아 상단 단주에게 다가가 돈이 든 자루 하나를 건네주었다.

“대박 터뜨리고 오시오.”

단주는 자루를 열어 보더니 그 안에 든 금액이 만족스러운 듯 낄낄거리고 웃고 있었다. 그러다 번군들에게 끌려가는 유경패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 오전 10시, 대월국 성산번 북서쪽 흰서리 산맥 북서쪽

그 시각, 주혁이 이끄는 6명의 4군단 무사들은 영록과 예린을 호위해 흰서리 산맥을 타고 누리마루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대월국 7왕자 진효명은 이미 3명의 무사와 함께 다른 길로 출발한 후였다.

처음부터 유경패와 혼혈 유랑민들은 미끼였다. 흑영단 소단주는 이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유경패를 희생시키기로 한 것이다.

유경패가 금아 상단 단주와 함께 있는 사이, 소단주는 다른 흑영단원을 통해 영록과 예린 또래의 어린 노예들과 건장한 남자 노예 셋을 준비시켰다. 그중 혼혈 유랑민 여자아이에게는 예린이 입던 예복까지 입히도록 했다. 만에 하나, 성산번 번군들이 이 미끼를 물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들의 눈에 띄도록 준비를 시킨 것이다.

금아 상단 단주의 밀고가 들어오자 목건주가 이끄는 성산번의 주력군들은 모두 흰서리 산맥의 반대쪽, 초원길로 가는 도로를 향해 몰려갔다. 그 덕분에 주혁과 아이들은 별 탈 없이 흰서리 산맥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흰서리 산맥에는 북쪽 거록의 두억시니를 감시하는 성산번의 요새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만일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번군들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탈출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무사들은 더 이상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등에 큼지막한 전투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전투 배낭에는 군도와 활, 전통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주혁은 앞뒤로 척후를 보내 전방에 위험은 없는지, 쫓아오는 병력들은 없는지 탐지하도록 했다. 그들은 되도록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찾아 움직였다. 겨울이 오자마자 흰서리 산맥에 눈과 서리로 하얗게 뒤덮인 곳이 드문드문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곳을 지나느라 발자국이나 흔적들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예린은 흑영단의 거점에서 활과 화살이 담긴 전통을 받아 등에 메고 있었다. 깍지들도 모두 도깨비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무사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 남는 암깍지를 빌려 엄지에 걸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인 남자가 쓰던 깍지여서 그런지 예린의 손가락에는 잘 맞지 않을 정도로 구멍이 넓었다. 가죽깍지를 대신해 오른손 검지와 손바닥에는 두꺼운 천을 둘둘 말고 있었다.

활도 마찬가지였다. 예린은 거점에서 활을 받아 몇 번 당겨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확실히...... 어른들이 쓰는 거라 그런지 내가 쓰던 활보다 장력이 엄청나게 세네. 40근(약 55파운드)은 넘겠어. 시위 당길 때 힘 좀 들겠는데.”

그래도 그녀는 밤새 시위를 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새 활에 빨리 적응하려 애썼다.

선두에서 가던 주혁이 주먹을 들어 보이며 자세를 낮추었다. 뒤따라오던 무사들과 예린도 이를 보고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영록의 곁에서 함께 걷던 무사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멀뚱히 서 있는 걸 보고는 그의 어깨를 잡고 자리에 함께 앉았다.

앞서 척후로 나갔던 무사가 복귀하고 있었다. 그는 주혁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새들에 주둔하고 있는 번군들이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성산성으로부터 어떤 지시가 내려온 듯합니다. 지금 계속 이동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주변에 은거할 만한 곳은 있는가?”

“앞으로 500보 (약 600m) 정도 더 가면 토굴을 파고 숨기 좋은 계곡이 있습니다. 일단 그곳에 은거해서 요새 병력들이 어찌 움직이는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으로 안내하라.”

무사가 다시 앞장서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록과 예린도 몸을 일으키고 그들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 오전 12시, 대월국 성산번 흰서리 산맥 북서쪽

일행은 척후로 나갔던 무사가 안내한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전투 배낭에 있던 야전삽을 꺼내 토굴을 파기 시작했다. 영록은 무사들이 사용하는 야전삽이 이전에 본 예비군 구형 군장에 달려 있던 야삽과 매우 흡사하게 생긴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

불과 1시간도 안 되어 두 사람이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크기의 토굴 4개가 만들어졌다. 무사들은 파낸 흙들을 먼 곳까지 옮겨 흩뿌리고 땅을 판 흔적을 제거했다. 그리고 팔뚝 굵기의 나뭇가지들을 가는 줄로 엮어 입구를 막는 덮개를 만들고, 주변의 나뭇잎을 가져와 덮개 위와 토굴 주변을 위장했다.

완성된 토굴은 밖에서 보았을 때 그냥 계곡의 일부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전에 나무뿌리 아래 숨었을 때 이렇게 위장을 했었어야 했는데...... 역시 정예 무사들은 은거지 위장하는 것도 확실히 다르구나......”

예린은 이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주혁은 둘씩 조를 이루어 토굴에 들어가게 했다. 영록과 예린은 각각 다른 토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록이랑 같이 있으면 안되요?”

예린이 항의했지만 주혁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두 분이 저 안에서 서로 얘기라도 나누다가는 은신처 전체가 발각될 수도 있습니다.”

“전에 영록이랑 둘이 숨었을 때도 서로 아무 말 안 하고 잘 숨었었는데......”

예린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혁은 무사들을 한 명씩 돌아가며 계곡으로 접근하는 인원이 없는지 숨어서 경계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근무 시간은 지금부터 한 시간씩이다. 만일 은신처가 발각되거나 공격당할 우려가 있으면 총을 쏴서 알려라. 그 외에는 철저히 기도비닉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혁은 처음 경계근무를 서는 인원에게 장약과 탄이 장전된 작은 뇌홍식 권총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분견대장의 지시를 들은 무사들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영록은 스무 살 후반으로 보이는 무사와 함께 토굴로 들어왔다. 함께 이동하는 4군단 3분견대 무사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한자손으로 보이는 무사는 강인해 보이는 사각턱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마루한, 시장하십니까?”

무사는 전투 배낭에서 한지 같이 생긴 국방색 종이에 포장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물건 서너 개와 가죽 수통을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요?”

“무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전투식량입니다. 맛은 없을지라도 허기는 달랠 수 있을 것입니다. 얇고 평평하게 생긴 이거는 육포고, 길쭉하게 생긴 이거는 미숫가루입니다. 미숫가루는 한꺼번에 입에 다 털어 넣으면 목이 막힐 수 있으니 물하고 같이 조금씩 삼키십시오.”

영록은 무사에게 고맙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봉지를 뜯어보니 현실 세계 편의점에서 파는 것과 비슷한 넓적한 육포가 나왔다. 단, 색은 붉은색이 아니라 좀 더 거무스름했다.

육포를 쭉 찢어 입에 넣어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짠데? 오징어처럼 질기기도 하고.’

현실 세계의 육포처럼 양념이 잘된 맛은 아니었지만 씹을수록 고기의 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육포 조각은 한참을 질겅거리고 나서야 삼킬 수 있었다.

그래도 미숫가루는 자신이 기억하는 맛과 매우 비슷했다. 설탕을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단맛도 제법 많이 느껴졌다. 영록은 가루를 조금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셔 입안에서 우물거리다가 삼켰다. 뱃속에 뭐라도 들어가니 몸에 힘이 나는 것 같았다.

­ 오후 15시, 대월국 성산번 흰서리 산맥 북서쪽

저 멀리 토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영록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두리번거렸다. 곁에 있던 무사는 괜찮다는 듯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뜻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소리는 점점 은신처가 있는 계곡 방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발걸음 소리, 나뭇잎과 나뭇가지 밟는 소리, 무기와 갑주가 철컥거리는 소리였다. 그것도 여러 명이 내는 소리였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다른 소리들도 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푹, 푹, 창 자루나 무기 끝으로 땅을 찔러보는 소리였다.

흰서리 산맥 요새에 있던 백여 명의 번군들이 산에서 내려오며 주변을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록의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무사도 긴장한 표정으로 전투 배낭에 메인 군도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영록이 숨어 있는 토굴 주변으로 도깨비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푹 푹

계곡 여기저기를 창으로 찔러보는 소리가 토굴 가까이서 들려왔다. 영록은 자기도 모르게 숨소리가 커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다행히,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인원은 아직 총을 쏘지 않고 있었다. 수색하는 번군들이 은신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도깨비들의 발소리는 점점 계곡 아래로 멀어져갔다. 무사도 군도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고 한참 후, 다들 밖으로 나오라는 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록은 무사와 함께 토굴 밖으로 기어 나왔다.

“흰서리 산맥의 번군 대다수가 산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아마 성산에 있는 다른 번군들과 합류해 수색을 펼치려 듯 하다. 산맥 인근의 병력들이 줄어든 지금이 탈출의 적기일 것이다. 지금부터 누리마루 국경까지 급속행군으로 이동한다. 마루한과 영애께서 뒤처지지 않도록 곁에서 잘 도와드리도록.”

주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사들 모두 전투 배낭을 짊어지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예린이 등에 멘 전통 멜빵을 몸에 착 달라붙게 꽉 조이며 말했다.

“전 다른 분들처럼 짐이 많은 것도 아니니 절대 뒤처지는 일 없을 거예요. 전 걱정마시고 영록이나 잘 챙겨주세요.”

그러고는 영록을 향해 말했다.

“저번처럼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거니까, 중간에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걸어야 해. 너 하나 뒤처지면 여기 모든 사람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 꼭 기억하고.”

영록은 예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안 토해, 그리고 절대 안 쓰러져. 이번엔 걱정 안 해도 돼.”

“오~? 그래, 이번엔 가다가 주저앉는 일 없이 누리마루까지 가 보자. 그래도 혹시 힘들면 말해. 여기 너 도와줄 분들 많으니까. 나도 있고 말이야.”

예린은 영록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 오후 7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낮 동안 계속된 성산번 번군들의 수색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 버렸다. 어두운 밤이 오려 하자 목건주는 중요 도로와 목에 번군들을 배치한 후 경과보고를 하기 위해 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심운보는 갑주를 입은 채로 본성 아래를 서성이는 중이었다. 목건주는 그에게 다가가 수색에 실패했음을 보고했다. 심운보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제 곧 다른 번의 번주들이 모두 성산에 도착할 것이다. 그 전까지 마루한과 영애를 다시 붙잡아 와야 할 것이다. 만일 내게 마루한과 영애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군세가 모이기 시작한 이상, 이 반역에 동참한 그 누구도 자신의 결정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와서 마루한이 없다고 ‘나 이 반란에서 빠지겠소.’라고 해봤자 왕실에 등을 돌린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을 모시고 새 세상을 열겠다는 애초의 대의명분을 잃게 된다면, 반란이 성공하고 대월국 왕실을 무너뜨린다고 하더라도 그다음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 있었다.

지금 반란에 동참하기로 한 31개 번의 번주 모두가 다 심운보와 같은 ‘백’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보다 높은 ‘공’, 또는 ‘후’의 작위를 가진 소수의 번주들은 대부분 왕실의 종친들이거나 대대로 왕실을 향한 충성도가 높은 자들이었기에 애초부터 포섭하려 들지도 않았다.

동등한 지위에 있는 이들이 다 함께 힘을 합쳐 왕좌를 빼앗는다면, 당연히 ‘그 왕좌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운보가

‘나는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을 모시고 있으며, 그의 지지를 받는 자이다.’

라고 계속 주장할 수 있었다면, 그가 왕좌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이에 감히 이견을 낼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루한이 그의 손을 떠난 것을 다른 번주들이 알게 되는 날엔,

‘마루한이 당신의 곁을 떠났다면 천심도 그대를 떠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당신이 왕좌에 오를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반박하려 들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번주들 모두 무사였고, 야심이 있는 사내들이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을쏘냐?’ 하고 생각하는 건 비단 심운보 한 명 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왕실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이 전쟁은, 새로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각 번 간의 내전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모두 다 다시 잡아 와야 한다. 아니, 7왕자는 잡든 말든 상관없다. 마루한과 영애만큼은 반드시 다시 잡아 와야 한다. 알겠느냐?”

심운보의 눈에서는 차가운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마루한과 영애를 데리고 간 건 누가 봐도 율도의 소행임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태상국 강운예의 군대가 성산번 남서쪽 국경 근처에서 진을 치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마루한과 영애를 데려간 놈들은 태상국 강운예가 있는 곳을 향해 이동 중일 것입니다. 우선 그들이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그곳에 병력들을 더 증원 배치해야 합니다. 우리 병력만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번의 군사력이라도 끌어와야 할 것입니다.”

심운보가 물었다.

“그대는 강운예가 우리 성산번을 바로 공격할 거라 보는가?”

그의 물음에 목건주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자기 딸을 납치했었으니...... 그가 가만있어 주길 바라는 건 무리일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다른 번에서 합류한 병력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 다 합치면 7만이나 됩니다. 게다가 태상국 강운예가 끌고 온 병력들은 대부분 기병들이라고 했습니다. 율도에서 여기까지 최대한 빨리 이동하기 위해 그가 자랑하는 포병들은 많이 데려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동 최강이라는 율도군 포병의 화력 지원을 받지 못하는 기병들이라면, 우리가 가진 병력으로도 충분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경 일대 주요 목에 참호와 기병 장애물을 설치하고 틀어막아 버린다면, 그들이 성산 안으로 들어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월국 왕실과의 싸움이다. 아무리 왕실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 하더라도, 왕실과 왕실을 지지하는 번주들이 모을 수 있는 병력은 아직도 5만에 가까울 것이다. 이를 위해 율도와의 전투로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 영애를 다시 인질로 잡을 수만 있다면, 강운예가 쉽사리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야.”

“제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국경으로 달려가서 개미 새끼 하나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독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토루번의 병력부터 그곳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그대가 병력 배치에 온 힘을 다하여 주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하옵고, 낮에 제가 잡아 온 년놈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도주로 등을 실토하지는 않았답니까?”

심운보는 손가락으로 두 번째 방어성 지하를 가리켰다.

“구천락의 수하 여개가 그들을 고문 중이네. 여개의 솜씨라면 곧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야.”

“여개의 실력이라면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내 무어라도 소식이 있겠군요.”

심운보는 차가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성산성 두 번째 방어성 아래에는 본성처럼 지하 공간이 존재했다.

창고 용도로 쓰이는 공간도 있었지만, 이곳의 주 용도는 지하 감옥이었다.

대월국은 여전히 번주, 혹은 영주와 성주까지도 자신의 영지 내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마음대로 감옥에 가둘 수 있었고, 사형도 집행할 수 있었다.

대월국 거의 모든 성에는 일정 공간 이상의 감옥들이 꼭 갖추고 있었다.

성산성의 지하 감옥은 다른 번에 비해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수십 명을 동시에 가둘 수 있는 커다란 감방부터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크기의 독방까지, 간수장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총 86개의 감방이 있다고 했다.

그중에는 다른 곳보다 천장 높이가 높고 철문이나 쇠창살이 두께도 다른 곳보다 훨씬 두꺼운 감방들도 있었다. 이곳은 덩치가 큰 북쪽 거록 두억시니들을 가둘 때 쓰는 감방들이었다.

감방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지하 감옥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다. 미로같이 얽혀 있는 복도는 횃불이 없다면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어둠 속 한켠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처절한 비명 소리였다.

그리고 습하고 탁한 지하 감옥의 공기 속으로 비릿한 피 냄새도 진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큰 대(大)자의 형틀에 매달린 혼혈 유랑민 남자는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의 몸은 채찍에 얻어맞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왼쪽 발에는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이 잘려나가 있었다. 발가락이 잘려나간 자리에서는 아직도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여개는 형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낫에 묻은 피와 살점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그는 날이 제대로 서 있는지 한 번 훑어보고는 뒤에서 숫돌을 가져와 낫을 갈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숫돌에 낫이 벼려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다음은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자를 거야. 그다음은 오른쪽 검지 발가락을 자를 거고. 그래도 아직 발가락이 6개나 더 남아있지? 네가 살 기회도 6번 남았다는 뜻이야. 발가락 다 자르면 내가 이번엔 손가락 자를 줄 알았지? 발가락 다 잘라도 말 안 할 놈은 손가락 다 잘라도 말 안 할 텐데, 뭐 하러 살려주겠어?”

여개는 날카롭게 벼려진 낫에 물을 뿌리고는 마른 천으로 물기를 여유롭게 닦으며 형틀 쪽으로 다가왔다.

“나으리, 제발 살려주십쇼! 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갑자기 다른 데로 팔려간다고 해서 따라간 것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제 남은 발가락을 자르지 말아주십시오! 나으리, 제발!”

남자의 절규에도 여개는 그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낫을 갖다 대고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멍청한 노예 놈아. 너를 산 놈, 너를 금아 상단 마차로 데려간 놈, 그놈이 대체 누구냐고 몇 번을 물어? 묻는 말에 똑바로 말 안 하면 발가락 또 하나 날아간다?”

남자의 발가락 사이로 날카로운 낫이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고문실 안의 횃불에 비친 낫은 섬뜩한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 정말 모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듣지도 못했고 얼굴도 제대로 못 봤습니다! 그냥 따라가라고 해서 따라 간, 으,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남자는 형틀에 묶인 사지를 뒤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있던 곳에서는 선지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무식한 새끼가 끝까지 내 말을 못 알아듣네?”

여개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다시 낫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형틀 아래로 남자의 발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주룩주룩 떨어지고 있었다. 여개는 다른 발가락을 더 자르기 전에 남자가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옆에 있던 천으로 대충 그의 발을 감싸고 작은 막대기를 지혈대 삼아 빙빙 돌려 지혈을 했다.

지혈하고 남은 천은 남자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그가 계속 비명을 지르는 게 시끄러웠던 것이다.

고문실 안에는 낮에 금아 상단 마차에서 끌려온 자들이 모두 잡혀 있었다.

그중 둘은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여개가 낫으로 배가 가르고 내장이 밖으로 끄집어내어, 눈과 입, 코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남자 하나와,

머리부터 상체 절반까지 피부가죽이 벗겨진 채 죽은 남자아이였다.

살아남은 이들도 모두 발가벗겨진 상태로 쇠사슬에 묶여 이 시체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유경패와 여자아이, 그리고 혼혈 유랑민 남자였다.

모두 채찍질과 몽둥이세례를 당한 후였다. 그들의 온몸은 찢기고 터진 상처로 가득했다.

하루 종일 이들의 고문 장면과 죽음의 과정을 지켜본 남자와 여자아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곧 자신의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는 극한 두려움에, 울부짖고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그 와중 유경패만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비록 상처투성이가 된 몸은 쇠사슬에 붙들려 축 늘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매를 맞고 더 심한 고문을 당한 상태였다. 심지어 지녀의 음문과 항문에는 두껍고 길다란 막대기들이 박혀 있었다. 막대기 아래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여개는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다른 이들을 하나 하나 끔찍하게 고문하고 죽여가며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개가 다시 유경패에게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오늘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들 입에서 내가 원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국 둘 중 하나겠지. 네 놈들이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실토하던가, 아니면 죄다 뒈지던가.”

여개는 유경패의 커다란 젖가슴 아래에 낫을 들이대고 그녀를 희롱하였다. 섬뜩하고 날카로운 날이 그녀의 유방을 스윽 스윽 스치고 지나갔다.

여개는 재미있다는 듯, 이번엔 그녀의 음문에 박혀 있는 막대기를 거칠게 잡았다.

“아, 아아아아악!”

그녀가 고통에 발버둥 쳤다. 하지만 쇠사슬에 묶인 몸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유경패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여개는 옆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예린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는 이제 막 가슴이 봉긋해지고 다리 사이에도 솜털 같은 음모가 거무스름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여개는 한 손으로 여자아이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낫을 거꾸로 잡고 그녀의 다리 사이 여근에 갖다 대었다.

두 손에 쇠사슬이 묶여 매달려 있던 여자아이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오줌까지 찔끔거리고 있었다.

“왜, 살고 싶어? 살고 싶으면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응?”

여개는 여자아이를 윽박질렀다. 그녀는 간신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우리를, 샀는지랑...... 마루한이랑, 영애란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바른대로 말하라고......”

“응,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그럼 이제 네가 한번 말해 볼래? 사실대로 말하면 이 아저씨가 여기서 당장 나가게 해주고 좋은 대로 데려가 줄 거야. 하지만 너도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저 앞에 저 시체들 보이지? 너도 이제 저렇게 된다. 알았니?”

여개는 손가락으로 피부가 벗겨진 채 죽어 있는 남자아이의 시체를 가리켰다.

여자아이의 머릿속에 아까 남자아이가 산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지르던 비명 소리도 귓가에 맴돌았다.

여자아이의 허벅지 안쪽으로 누런 오줌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한참을 울먹이던 여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 근데,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여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도 그렇게 하겠다 이거지......? 그럼 너는? 너는 알아?”

여개가 옆에 있는 남자의 성기에 낫을 들이대며 물었다. 남자는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응, 그래, 너도 말 안 하겠다 이거지? 이것들이 진짜...... 그래, 오늘 밤새 피 보면 되지!”

여개가 남자의 성기를 틀어잡고 낫을 쥔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때,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누리마루! 흰서리 산맥! 제가 들은 건 그게 다입니다! 저희를 산 게 누구인지는 정말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를 산 사람과 저 여자가 누리마루하고 흰서리 산맥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게 다입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남자는 턱으로 구석에 묶여 쓰러져 있는 유경패를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흰서리 산맥이라고.......?”

여개의 왼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미소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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