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71화 (71/217)

〈 71화 〉 대동력 9,993년 14월 3일 (2)

* * *

­ 오후 6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심운보는 7왕자 진효명을 본성 3층의 연회실로 안내했다. 연회실에는 이미 그를 위한 탁자와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윽고 연회실 안으로 도깨비 여자들이 쟁반 위에 술과 고기, 갖가지 음식들을 푸짐하게 가지고 들어왔다. 심운보는 왕자는 물론 그를 수행하는 왕실 친위대 무사들에게도 자리를 마련해주고 술과 음식을 권했다.

무사들은 단호했다. 그들은 어깨에 낭아봉을 짊어진 채 왕자의 곁에 서서 주변을 경계할 뿐, 심운보가 권하는 자리나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음식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자, 그대가 원하는 대로 안으로 들었으니, 이제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진상을 듣고자 한다.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이곳 성산번에 남이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진효명이 재촉하자 심운보는 미리 준비되었던 물건을 들고 앞으로 나아왔다. 은쟁반 위에 붉은 비단으로 감싼 물건이었다. 왕실 친위대 무사 하나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는 심운보로부터 물건을 건네받아 왕자에게 전달해주었다.

진효명이 은쟁반 위의 붉은 비단을 풀어보자 대동에서 보지 못했던 재질과 모양의 책 다섯 권과 여러 장의 그림들이 그려진 종이들이 나왔다. 왕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찬찬히 책장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이 책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대동 어느 나라에서 만든 책이기에 이런...... 으음?”

책을 앞뒤로 훑어보던 진효명은 표지 뒤쪽에 실려 있는 강운예의 사진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운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율도 태상국이 맞사옵니다. 그 책들은 강운예가 지은 무예 비급입니다. 이 비급들 모두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께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 말에 진효명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성산백 그대는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에 대한 것도, 마루한이 율도 태상국의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두 감추려 했던 것인가?”

심운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잠시 비급 아래의 서면들을 봐주시겠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저는 이 비급에 대한 필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일에 대해 국왕 전하께 먼저 보고했다면, 이 비급도 바로 은허로 보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사로서의 욕심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비급에 관해 연구할 수 있다면 율도 태상국 무예의 정수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된다면 대월국 무사들의 실력을 지금보다 더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 때문에 이 비급을 모두 필사한 후, 국왕 전하께 보고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 심정을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책의 무예 동작들을 모사한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진효명은 그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국왕 전하의 신하된 자라면, 응당 마루한과 이 비급을 발견한 즉시 보고부터 해야 했음이 마땅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대는 이 일의 과정에 대해 어떠한 것도 왕실에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해왔다. 성산백은 지금 서쪽과 남쪽 국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것인가? 율도의 군대가 시시각각 이 나라를 향해 진군해 오고 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단 말이다!”

진효명을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하지만 심운보의 표정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진효명의 호통은 계속되었다.

“율도 대사가 이르기를, 그대는 누리마루까지 직접 번군들을 이끌고 가서 마루한과 율도 태상국의 영애를 납치했다고 했다. 그 와중 주나라 황자에게까지 해를 입히려 했다고 하고! 성산백은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이 누리마루에 계시단 것을 어찌 알았던 것이냐? 그러면서 왜 국왕 전하께 이를 알리지 않았던 것이냐? 그리고 왜! 왜 그들을 납치해 성산번으로 데리고 온 것이냐?”

심운보는 말없이 뒤에 서 있던 여자 도깨비들에게 손짓했다.

잠시 후, 여자 도깨비들이 연회실 안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영록과 예린이었다.

영록은 대동으로 올때 입었던 복장 그대로 내려왔다. 하지만 예린은 여행용 복장이 아닌 대월국 여인들의 화려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얼굴에 살짝 분칠까지 하고, 곱게 빗은 머리에도 여러 장신구로 화려하게 멋을 내고 나와 있었다.

심운보가 왕자에게 이들을 소개했다.

“우편이 있는 분이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이시고, 좌편에 계신 분이 율도 태상국의 영애입니다.”

진효명은 어린 남자아이가 마루한이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어린아이가 마루한이라고......?”

그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심운보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마루한을 모시고자 한 것은 모두가 다 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월국의 국익을 위해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이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물불 가리지 않고 이곳까지 모셔왔으나, 지금 왕자님처럼 국왕 전하께서도 저분이 마루한이란 사실을 믿지 못하시면 어쩌나, 저를 거짓말쟁이 광인으로 여기시면 어쩌나, 우려스러운 마음에 잠시 보고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마루한을 모시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율도 태상국의 영애와 주나라 황자까지 개입되면서 일이 더욱 복잡해졌기에......”

심운보는 세 치의 혀로 왕자의 마음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진효명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호통만 칠 수는 없었기에, 그도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국왕 전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그런데 마루한을 모시고 언제까지 그냥 세워둘 셈인가? 마루한과 영애에게 자리를 마련해 드려라.”

곁에 서 있던 왕실 친위대 무사들이 의자와 탁자를 들어 영록과 예린에게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은 상석의 왕자와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저는 대월국의 7왕자 진효명입니다. 마루한의 존함은 어찌 되시는지요?”

진효명의 부드러운 물음에 영록이 대답했다.

“지영록이라고 합니다.”

영록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예린이 나서서 대답했다.

“소녀, 율도 태상국의 여식 강예린이라고 합니다. 올해 나이 17살이구요, 율도 백화에 살고 있습니다.”

예린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왕자를 바라보았다. 예린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영애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태상국께서는 건강하신지요?”

“저희 아빠도 마루한이셔서 평생 늙지도 않으시고 맨날 지나치게 건강하시지요.”

예린의 해맑은 대답에 진효명도 웃으며 대답했다.

“마루한과 율도 영애 두 분과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마침 저녁때도 가까워지니 다 함께 이곳에서 식사라도 하며 담소를 나누도록 하시지요. 저와 저의 군사들도 먼 길 오느라 시장하던 차입니다.”

진효명이 심운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심운보는 웃는 얼굴로 뒤에 서 있던 여자 도깨비들에게 손짓했다. 이윽고 연회실로 새로운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오후 8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이제 왕실 친위대들도 교대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번째 방어성 일대에 마련된 임시 숙소에서 여자 도깨비들이 날라 온 밥과 술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역시, 산골짜기 오지라서 그런가? 은허의 왕실에서 먹던 음식들과 너무 비교되는군!”

“그래도 추운 곳이라 그런지 술은 더 독한 것 같지 않아? 한 사발 밖에 안 마셨는데도 어지러운 것이 취기가 확 오르는구만 그래.”

연회실에서 왕자를 경호하는 왕실 친위대 무사들도 번갈아 식사하러 가고 있었다.

진효명은 영록에게 그가 살던 곳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마루한이 사시던 곳에서는 스스로 길을 달리는 수레도 있고, 심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레도 있다구요? 그 수레에는 대체 몇 명이나 탈 수 있습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레를 비행기라고 불러요. 큰 비행기는 한 번에 3, 400명도 넘게 탈 수 있구요.”

“한꺼번에 3, 400명이나 탈 수 있다구요......? 그럼 그것은 얼마나 빠르게 날 수 있습니까?”

“일단 새보다는 빠르구요, 정말 빠른 비행기는 음속이라고 해서 소리의 속도보다 2, 3배까지 빠르게 날 수 있는 비행기도 있어요.”

진효명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하기야 마루한들의 능력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동부에 있었다는 기관차처럼 말이죠.”

“기관차? 기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아주 옛날 박환성이란 마루한이 철도를 깔고 그 위를 다닐 수 있는 기관차를 만들었지요. 증기기관이라는 장치에 나무 장작을 태워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한 건데 그리 오래 사용되지는 못했어요. 기관차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나무 양에 비해 그리 빠르지도 않고 멀리 가지도 못했거든요.”

“대동에는 나무 말고 연료로 쓸 만한 것들이 따로 없나요?”

“동물의 분뇨 외에는, 마땅히 나무를 대체할 건 없답니다.”

영록은 지난번 조폭들의 은신처에 있던 석유를 가지고 대동으로 돌아가던 강운예의 모습이 떠올랐다.

‘총 하고 화약도 그렇고, 강운예 관장님이 가져가신 물건들은 무언가 다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영록과 왕자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예린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왕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살짝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기도 하고, 왕자가 하는 말마다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영록은 그런 예린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때, 왕자의 뒤에 서 있던 왕실 친위대 무사가 잠시 휘청거렸다. 왕자는 ‘이 친구가 식사 때 술을 많이 먹고 들어온 건가?’ 하고 책망하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반대편에 서 있는 무사의 얼굴도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하얀 도깨비의 얼굴이 거의 죽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진효명이 개의치 않고 영록과 대화를 이어가려 하던 찰나, 갑자기 연회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탕! 탕!

분명 총소리였다.

진효명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밖에 무슨 일인가?”

연회실 문 앞에 서 있던 왕실 친위대 무사 하나가 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상황을 확인하고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성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무어라? 누구에게 공격받고 있단 말이냐? 성산백, 성산백은 어디 있느냐?”

언제부터인지 심운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진효명이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두 번째 방어성 근처에 있던 왕실 친위대의 임시 숙소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불길 밖으로 빠져나오는 왕실 친위대 무사들은 마치 크게 취한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그들 앞을 갑주 위에 남색 천을 두르고 있는 도깨비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성산번의 번군들이었다.

왕실 친위대가 성산성에 있던 모든 번군들을 밖으로 내보냈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하 창고에 목건주가 데리고 온 수백여 명의 번군들이 몰래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여자 도깨비들이 왕실 친위대에게 가져다준 밥과 술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이전에 구천락이 진채연에게 쓴 것과 같은 독이었다.

아무리 대월국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왕실 친위대 무사들일지라도 중독된 상태에서는 무기를 들고 서 있기도 힘들었다.

목건주가 이끄는 번군들과 무사들은 왕실 친위대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는 왕실 친위대 무사들을 양쪽에서 붙들고 갑옷의 빈틈으로 창과 칼을 쑤셔 넣어 죽였다. 그들이 들고 있던 낭아봉을 빼앗아 투구 째 머리를 깨뜨려 버리기도 했다.

목건주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된 장자검을 귀신같은 솜씨로 휘두르며 왕실 친위대 무사들을 토막 내고 있었다. 그의 장자검이 번쩍 빛을 발할 때마다 왕실 친위대 무사들의 몸은 반으로 갈라져 나갔다. 목건주의 갑주는 온통 도깨비의 피로 검붉게 젖어 있었다.

“포로는 필요 없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은허에서 온 놈들을 모두 다 잡아 죽여라!”

목건주는 15번째 무사의 몸을 두 동강 내며 번군들에게 소리쳤다.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왕실 친위대 몇 명이 총을 쏘며 대항해 보았지만, 그들 모두 번군들이 쏜 쇠뇌에 맞아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성벽 주변에는 검붉은 핏물이 고이고 낙상의 충격으로 머리가 깨지고 사지가 비틀어진 시신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성문 주변을 지키던 왕실 친위대 무사들까지 모두 제압한 목건주가 성문을 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번군들을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이다. 성문을 통해 수백의 번군들이 질서정연하게 입성하기 시작했다. 성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목건주의 번군들이 왕실 친위대가 압수했던 무기들을 이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무기를 받아든 번군들은 성안 곳곳을 뒤지며 왕실 친위대를 찾아내 죽이기 시작했다. 중독된 몸을 간신히 이끌고 살길을 찾아 탈출하려던 왕실 친위대 무사들 대부분은 이내 번군들에게 발각되어 잔인하게 난도질당해 죽었다.

연회실 안에서 왕자의 곁에 서 있던 무사들도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도 중독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산백, 이 반역자!”

진효명은 자신의 부하들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분노로 치를 떨었다. 밖에서 영문 모를 살육전이 벌어지자 영록과 예린도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운보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여자 도깨비들의 도움을 받아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때, 집무실 안으로 구천락이 들어왔다.

“곤마와 번군들이 연회실을 포위하고 다음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활성 성주는 살아남은 잔적들을 모조리 소탕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보고를 받은 심운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내게 답신을 보낸 31개 번 번주들의 군대는 지금 각각 어디쯤이라 하더냐?”

구천락이 대답했다.

“6개 번의 군대는 이미 우리 번의 영내로 들어와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각 번의 거리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머지 번주들도 모두 머지않아 이리로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31개 번이라면 대월국 전체 46개 번 중 절반 이상이었다. 그들 모두 심운보가 마루한을 모시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대월국 왕실에 등을 돌리고 그의 편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들도 이미 오래전부터 크게 약해진 대월국 왕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어쩌면 심운보와 같이 왕실을 뒤집으려는 누군가가 나서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월국 국왕과 번주의 군신 관계는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계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번주에게 하사된 영토에서 나오는 경제력이다. 계몽 전쟁 이후, 왕실은 율도에 갚아야 할 전쟁배상금 때문에 각 번에 혹독하리만큼 많은 양의 세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번주들의 불만은 하늘 높이 치솟는 중이었다.

심운보는 이 부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만일 내가 왕이 될 수 있다면, 영애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율도에 보내야 할 전쟁배상금에 대해 다시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각 번의 사정은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겠는가?]

실현 가능성이 있고 없고를 심도 있게 따지기 전에, 몇십 년 동안 무거운 세금에 짓눌려 있던 번주들은 심운보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심운보 휘하에 모여든 반란군의 수는 31개 번 7만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갑주를 다 입은 심운보가 구천락에게 명하였다.

“곤마에게 연회실 안을 정리하고 마루한과 영애는 다시 6층으로 안전하게 모시라 전하거라.”

“7왕자는 어찌하라 이를까요?”

구천락의 물음에 심운보는 차가운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왕자의 몸뚱이는 그 아비에게 보낼 것이고, 그 목은 우리가 수도 은허로 진군할 때 창에 매달아 앞세울 것이다. 그러니 곤마에게 되도록 시신이 심하게 상하지 않게 처리하라 전하라.”

구천락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명을 받았다.

심운보의 명을 전해 받은 곤마는 번군들을 이끌고 연회실을 들이쳤다. 왕실 친위대가 정신력으로 버티며 끝까지 그들을 막아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곤마와 번군들은 사방에서 연회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쇠뇌를 날렸다.

“영록아, 엎드려!”

예린이 영록을 붙잡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도 날카로운 화살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왕실 친위대 무사들은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자리에 쓰러졌다. 번군들은 숨이 아직 붙어있는 자들을 찾아내 그 목에 칼을 꽂아 넣으며 마지막 숨통까지 끊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왕실 친위대를 제거한 곤마가 수십여 명의 번군들을 이끌고 상석에 있던 왕자에게로 다가왔다. 진효명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장자검을 빼어 곤마에게 겨누었다.

“물러가라! 난 이 나라의 왕자다!”

그의 말에 곤마는 차갑게 대꾸했다.

“알고 있소. 그래서 내 주인이 당신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라더군. 죽을 때 시신이 상하지 않게 곱게 죽이라고 말이야.”

곤마는 손에든 유성추의 쇠사슬을 가볍게 당겨 보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니 이해하시오.”

곤마는 서서히 왕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진효명을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예린과 영록은 땅바닥에 엎드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예린은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뭐, 뭐지 이건?’

이는 절대 곤마와 도깨비들에게서 나오는 살기가 아니었다.

예린이 영록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영록아, 지금부터 절대 일어나지 말고 고개도 들지 마. 뭔가 이상해......”

그때였다.

휙! 휙! 휙!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와 함께 연회실 안 촛불과 호롱불들이 모조리 꺼졌다. 연회실과 연회실 주변은 금세 시커먼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쇳소리, 뼈와 살이 베이는 소리, 도깨비들의 비명 소리가 어둠 속에 가득 퍼졌다.

“으악!”

“뭐, 뭐야, 으악!”

“어디냐? 도대체 어디서 공격하는 거...... 아아악!”

일말의 소란이 사그라지기까지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연회실은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영록은 예린이 말한 대로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예린도 바닥에 바짝 엎드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예린의 머리맡에서 낮고 건조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예린 아씨와 마루한 맞으십니까?”

예린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보니 눈만 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두르고 있는 무사의 신형이 어슴푸레 보였다.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태상국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녀의 곁으로 또 다른 검은 옷의 무사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무사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손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여자였다.

영록도 다른 무사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실 전체가 피바다입니다. 보시기 힘드실 수도 있으니 양해하십시오.”

무사의 말에 예린이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나도 무사에요. 피나 시체 같은 거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사방에서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예린의 눈이 점점 어둠 속에 적응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둘러보니 검은 옷의 무사 십여 명과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도깨비들이 보였다.

그리고 대월국의 왕자 진효명도 어느 틈에 무사들에게 두 팔이 포박되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무릎 꿇려져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마루한, 비급이 모두 다섯 권입니까?”

검은 옷의 무사 중 한 명이 어느 틈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비급들을 챙겨 영록에게 다가와 물었다. 영록은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이 빠진 듯, 그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루한, 태상국의 비급이 모두 다섯 권이 맞습니까?”

이에 예린이 대신 대답을 했다.

“네, 거기 있는 다섯 권 맞아요.”

무사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예린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비급 말고도 반드시 가져가야 할 건 더 없습니까?”

“아빠한테 선물 받은 칼이랑 활을 빼앗겼는데, 도깨비들이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아쉽지만 그건 포기하시지요. 안전하게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우선입니다.”

“그럼, 왕자님은 어떻게 할 건가요?”

예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효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 대월국 왕자도 데리고 나갈 것입니다. 여기 두고 갔다가는 죽을 게 뻔하니까요. 그러니 왕자님, 살아서 여기를 나가고 싶으시면 최대한 우리에게 협조해 주기 바랍니다. 아시겠소?”

무사들의 지휘관이 왕자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진효명은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옷의 무사들은 영록과 예린, 진효명을 데리고 연회실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예린이 곁에 있던 여 무사에게 물었다.

“혹시 여러분들이 흑영단인가요? 예전에 아빠에게 흑영단에 대해 들은 게 있어서요.”

이 물음에 여 무사는 복면 사이로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린은 여자의 육감으로 그녀의 웃음 속에 기녀들이나 예인처럼 사람을 홀리는 끼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적국의 왕자가 곁에 있으니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답니다. 나중 태상국의 뵙고 물어보시면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여기서 나가실까요?”

검은 옷의 무사들이 앞장서서 연회장 문을 열고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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