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대동력 9,993년 14월 3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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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대월국 성산번 번주 직속 영지
유경패는 자신의 숙소에서 나와 기루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겨울바람이 유난 차가웠다.
그녀는 옷장에 보관해 두었던 모피를 꺼내 입고 있었다. 그 모피는 그녀에게 반한 어느 도깨비 졸부에게 하룻밤의 대가로 받은 선물 중 하나였다.
번화가에 들어섰을 때 즈음, 성산성으로 가는 주도로 방향으로 수백의 군마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를 본 도로 위의 많은 이들은 부리나케 길 위에서 비켜섰다. 경패도 사람들과 함께 길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들은 화려한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대월국 왕실의 친위대였다. 선두에 선 무사들은 커다란 원형 방패와 도깨비의 상징과도 같은 낭아봉 (날카로운 가시가 여러 개 박혀 있는 쇠로 만든 곤봉)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수석식 소총 (플린트락)으로 무장한 총병들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행렬의 중앙에는 눈부신 은빛 갑주에 하얀색 방풍의를 걸치고 있는 젊고 잘생긴 도깨비가 하얀색 백마를 타고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기녀 복장을 한 아리따운 아리랑 여인이 길옆에 서 있는 것을 흥미롭다는 듯 잠시 쳐다보았다.
유경패는 젊은 도깨비의 갑주에 새겨진 문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낭아봉과 장자검을 든 두 마리 호랑이, 그리고 그사이의 붉은 달...... 대월국 왕가의 사람임이 틀림없다.’
군마들이 모두 지나간 후, 그녀는 숙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흑영단 소단주에게 자신이 본 것을 먼저 보고하려 함이었다.
오후 4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예린은 영록에게 회초리처럼 얇은 나뭇가지로 검술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었다. 둘이 온종일 방 안에서 딱히 하는 것도 없이 뻘쭘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 무예라도 수련하는 게 훨씬 낫겠다 싶어 영록이 예린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예린은 도깨비들에게 방 안에서 마루한과 수련을 하고 싶으니 가검이나 목검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예린의 무예 솜씨에 대해 익히 들은 도깨비 번군들이 이 부탁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예린 정도의 실력이라면 가검이나 목검만으로도 충분히 도깨비 여럿을 때려눕히고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도깨비들은 가늘고 얇은 나뭇가지 몇 개를 잘 다듬어 두 사람에게 가져다주었다. 예린은 이런 거로 어떻게 수련을 하라는 거냐며 투덜거렸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예린이 원하는 걸 가져다줄 리 만무했다.
예린은 영록에게 칼을 쥐는 것부터 세세하고 깐깐하게 가르쳤다.
“잘 봐, 칼을 쥘 때는 오른손 중지, 약지, 새끼 이렇게 세 손가락으로 칼 손잡이를 붙잡아야 해. 엄지와 검지는 살며시 힘을 빼서 7할 정도의 힘만 주고. 모든 손가락에 힘을 주고 칼을 꽉 쥐어버리면 손목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구. 도마 위에 당근 같은 거 올려놓고 부엌칼로 썬다고 생각하고 칼을 쥐어봐. 옳지, 그렇게 말이야.”
예린은 영록의 손가락 위치까지 일일이 손으로 잡아 고쳐주었다.
“칼을 잡는 자세는 얼추 만들어진 거 같네? 자, 이제 검술을 배우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를 가르쳐 줄 테니까 꼭 기억해야 해. ‘위치’, ‘거리’, ‘시간’, ‘판단과 결정’이야. 이건 검술 뿐 아니라 다른 무예, 심지어 전쟁 전술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지.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해.”
예린은 영록과 나뭇가지를 맞대며 교육을 이어나갔다.
“자 봐, 너와 내가 같은 거리에 있더라도 네가 오른발이 앞에 있을 때와 왼발이 앞에 있을 때, 그 거리가 완전히 달라지지? 오른발이 앞에 있을 때 상대의 몸을 충분히 공격할 수 있었다면 왼발이 앞에 나오게 되니 한 뼘 정도 모자라게 되었을 거야. 칼은 항상 오른손에 들려있는데, 발의 위치가 달라지면 허리와 어깨의 위치까지 함께 달라지면서 상대와의 거리까지 달라지는 거지.”
예린은 영록의 나뭇가지 끝을 손으로 잡아 자신의 몸에 직접 대어 보이며 설명을 해주었다.
“무예의 자세를 연습할 때에는 단지 누가 보기에 멋있어 보이기 위해 자세를 연습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세에 따라 상대와 나와의 위치와 거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것을 먼저 이해하면서 연습해야만 해. 검술에서는 자세에서 나오는 단 한 뼘의 차이만으로도 생사가 갈라지는 법이거든.”
검술의 기본에 대해 어느 정도 가르쳐 준 예린은 칼을 잡고 움직이는 법과 몇 가지 기본적인 자세들에 대해 연습을 시켰다. 검술이라면 찌르고 베고 공격하는 것을 배울 줄 알았던 영록은 슬슬 힘에 겨워지고 있었다.
“공격은 언제 가르쳐 주니?”
“자세도 안 되고 보법 (foot work, 발 움직임), 신법 (body moving, 몸 움직임)도 아직 제대로 안 된 애가 무슨 공격이야? 공격은 기본 다 때고 이야기하자.”
예린은 영록의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움직임이 어설퍼진다 싶으면 나뭇가지로 영록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리며 다그쳤다.
“그게 아니지! 좀 더 몸에 힘을 빼고 가볍게!”
불과 몇 십 분 만에 영록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나뭇가지를 든 손도 마치 무거운 아령을 들고 있는 것처럼 뻐근하고 쑤셔왔다.
도깨비들은 혹시 아이들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싶어, 방문을 열어놓고 그 안을 들여다보며 감시하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무예를 제대로 배운 도깨비들이라면 예린이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 게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 좋은 가르침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감탄한 표정으로 말없이 아이들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그들 중에는 처음 보는 덩치 큰 도깨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석이 세공된 장자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높은 직책의 무사인 듯 보였다.
아이들의 수련이 끝나갈 때 즈음, 덩치 큰 도깨비 무사가 시원한 물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아이들에게 물을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영록은 심하게 목이 말랐는지, 그가 가져다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이더군요, 곁에서 지켜보며 저도 한 수 배웠습니다.”
도깨비 무사가 예린에게도 물을 건네며 말했다. 예린은 까칠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어 이를 거절했다. 도깨비 무사는 머쓱한 표정으로 물을 뒤에 내려놓았다.
“영애께서는 율도 태상국께 직접 무예를 배우셨는지요?”
“아빠한테도 배웠지만 학당, 경당, 경무당에서 다른 스승들에게 배운 시간이 더 많아요.”
예린은 상대가 도깨비라 그런지, 다소 무례하게 대충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율도에서는 모든 이들이 어린 나이부터 무예를 배우기에 언제든 나라 백성 전체를 군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었나 봅니다. 무사로서 부럽기 그지없군요.”
“부러우시면 우리 율도로 오세요. 율도는 큰 문제만 없다면 귀순하는 누구나 다 받아주고 있으니까요.”
예린의 날카로운 말투에, 도깨비 무사는 점잖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무리 그래도 무사 된 몸으로 나라와 주인을 배신할 순 없지요. 내가 지금까지 성산백 각하께 받은 은덕이 얼마인데. 게다가 성주의 직위에까지 오른 제가 무엇이 아쉬워 율도에 귀순하리이까?”
성주라는 말에, 예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성주...... 세요?”
“네, 성산번 명활성의 성주, 목건주라 합니다. 성산백 각하의 명을 받아 금일 제 번군들과 함께 입성했는데, 마침 마루한과 영애가 여기 계신다 하여 잠시 들려 보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잘 보고 갑니다.”
목건주는 영록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존귀하신 마루한을 뵐 수 있어 광영이었사옵니다. 후일 다시 한번 뵐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그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영록이 예린에게 물었다.
“성주면, 높은 사람이야?”
“대월국에서 성주라고 하면 보통 그 번의 중요한 군사 지휘관들이야. 그런데 왜 성주가 번군들을 이끌고 성산성으로 들어왔다는 거지?”
예린은 의심 어린 눈으로 목건주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오후 5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목건주가 떠난 후, 두 사람은 좀 더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본성 밖이 시끄러워졌다.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 철컥철컥 갑옷 흔들리는 소리, 여러 사람이 본성으로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6층까지 들려왔다.
“웬 소란이지?”
예린이 호기심에 방 밖으로 나가려 하자 도깨비 번군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분께서는 방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알아요, 근데 잠깐 밖에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서 그래요. 무슨 일인데 저리 시끄러운 거죠?”
예린의 물음에 도깨비 번군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금일 수도 은허에서 왕실 친위대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왕실 친위대? 왕실 친위대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죠? 설마 나랑 영록이 때문에?”
도깨비 번군은 땀을 뻘뻘 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것은,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뭐, 얘기 안 해줘도 뻔하죠. 나랑 마루한 아니면 은허에서 여기까지 사람들이 올 이유가 없을 건데 뭐. 그럼 왕실에서 보낸 사람이면 누가 온 거죠? 왕자 같은 사람이라도 온 건가요?”
“그것이...... 7왕자님이 직접 오신 거로 알고 있습......”
왕자라는 말에, 예린은 도깨비 번군들을 밀치고 본성 아래가 내다보이는 복도의 창가로 번개같이 달려갔다. 번군 대여섯 명이 깜짝 놀라 그녀를 뒤따라갔다.
예린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본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 아래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은빛 갑주를 입은 대월국 왕실 친위대가 대오를 정렬해 서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마치 이곳을 포위하려는 듯, 천천히 본성 주변을 둘러서고 있었다.
창문에 기대어 서서 밖을 보고 있는 예린을 보고, 도깨비 번군들은 감히 그녀에게 손도 못 대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정하듯 말하고 있었다.
“영애께서 방 밖으로 나오시면 저희 모두 큰일 납니다. 여기 계시지 말고 어서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시지요.”
“아~ 거 참, 쫌 봅시다! 밖에 도깨비 왕자가 왔다며? 왕자 얼굴만 보고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예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니, 도깨비들도 어쩌지 못하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뭔데? 밖에 뭐 볼거리라도 있니?”
영록도 예린을 따라 방 밖을 나와 복도로 걸어 나왔다. 그걸 본 도깨비들은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밖에 도깨비 왕자가 왕실 친위대를 끌고 왔데. 근데 모습이...... 놀러 온 게 아니라 딱 이 성을 치러 온 분위기인데?”
“에이, 같은 도깨비들끼리 전쟁이라도 할라고? 근데 넌 저거 보려고 그렇게 달려온 거야?”
“그것도 그렇고, 대월국 왕자가 왔다잖아. 얼마나 잘 생겼는지 보려고.”
창밖을 바라보는 예린의 눈이 반짝반짝 생기가 넘쳐흘렀다. 영록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 왕자 보려고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온 거야? 하여간 여자들이란...... 나중에 정국이한테 이른다, 너?”
순간, 예린이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영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그러면...... 우리 아빠 만나 보기 전에 죽는 수가 있다? 정국이한테는 평생 비밀로 해라....... 알았니?”
영록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 친위대가 본성 주변에서 도열을 모두 마쳤을 때, 마침내 성산백 심운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홀로 천천히 본성의 돌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심운보가 나타나자 왕실 친위대 사이에 있던 대월국 7왕자, 진효명이 앞으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온 심운보는 진효명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성산백 심운보, 대월국 7왕자님을 뵙사옵니다.”
진효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위에서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성산백은 국왕 전하께서 보낸 왕명을 받고도 왜 아직 이곳을 떠나 은허로 향하지 않은 것인가? 이는 필시 전하께 숨기는 것이 있는 터, 내 오늘 전하의 명을 받아 그대를 은허로 압송하기 위해 왔으니 그대는 저항할 생각 말고 순순히 나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위엄있는 왕자의 호령에, 심운보는 마치 겁먹은 순한 양처럼 그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제가 어찌 이 나라의 주인 되시는 국왕 전하의 명을 받들지 않으려 했겠나이까? 다만, 마루한과 더불어 대월국의 국운에 관계된 크나큰 일로 인해 잠시 지체하고 있었을 뿐이옵니다. 마침 왕자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저를 찾아오셨으니, 제가 무엇 때문에 지체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두 소상히 밝혀드리겠사옵니다. 다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사오니, 왕자님께서 부디 저와 함께 성으로 들어오셔서 이 사태의 진실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심운보는 허리를 숙인 채 두 손으로 공손히 본성 계단을 가리켰다.
진효명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챈 심운보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걱정되신다면 먼저 무사들을 본성 안으로 들이시어 이 안에 제 번군과 무사들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보게 하시옵소서. 미리 말씀드리지만, 지금 이 안에는 평상시 성을 경비하는 인원들과 마루한과 영애를 보호하고 있는 인원들을 합쳐 스무 명의 병력만이 있는 상황입니다.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먼저 살펴보셔도 무방합니다.”
진효명은 곁의 무사들에게 턱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십여 명의 왕실 친위대 무사들이 본성으로 뛰어 올라갔다.
잠시 후, 왕실 친위대 무사들이 계단을 내려와 진효명에게 보고했다.
“성산백의 말대로 스무 명의 번군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에 심운보다 다시 한번 진효명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어찌 왕실에 역심을 품으리까? 왕자님께서는 안심하시고 저와 함께 성안으로 드시지요.”
왕자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함께 온 왕실 친위대 지휘관에게 성산성 전체에 주둔하고 있는 성산번의 번군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내고 그가 데려온 왕실 친위대로 하여금 성 전체를 접수하게 했다. 심운보도 이에 동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산성의 모든 번군들이 무장이 해제된 상태로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성벽 위에는 왕실 친위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제서야 진효명은 말에서 내려 낭아봉과 수석식 소총을 든 삼십여 명의 무사들과 함께 성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심운보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왕자의 한 발 뒤에서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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