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69화 (69/217)

〈 69화 〉 대동력 9,993년 1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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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8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성산은 대월국 서북쪽 끝자락 흰서리 산맥에 맞닿아 있었다.

흰서리 산맥은 누리마루 동쪽으로 뻗어 나온 산맥으로, 대동의 중부와 북부, 문명권과 비문명권을 나누는 경계가 되는 곳이었다.

흰서리 산맥 북쪽 고원 지대에는 푸르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대로부터 두억시니들의 터전이었던 이곳을, 사람들은 거록 고원, 거대한 녹색의 고원이라 불렀다. 아주 먼 옛날 ‘두억시니의 남하’ 때부터 존재해온 두억시니의 나라 ‘거록’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따 온 것이었다.

흰서리 산맥 일대에는 성산번의 군사 요새 수십 개가 들어서서 북쪽 거록의 두억시니들을 매일 같이 감시하고 있었다.

고산기후에 겨울만 되면 눈이 많이 내리는 이곳 특성상, 성산번의 건물들 지붕은 모두 높고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붕에 눈이 잔뜩 쌓여 무너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성산번의 주성인 성산성 역시 모든 건물과 망루의 지붕이 높고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대월국은 군사요충지에 반드시 성을 쌓아 올렸다. 마을 전체를 기다란 방벽을 쌓아 두르는 모양이 아니라, 거점에 크고 높게 쌓아 올린 요새의 모양이었다. 성산성을 처음 본 영록은 마치 중세 유럽의 성과 전국 시대 일본의 성을 절묘하게 합쳐 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대동에는 화약과 화포가 존재하지만, 방어시설로서의 성의 역할은 아직도 유효한 상황이었다. 흑색화약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 포격을 쉬지 않고 연사하기 힘든 데다가, 현실 세계의 화약에 비해 폭발력도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약과 화포가 등장하면서 이에 견딜 수 있는 성벽을 짓는 건축기법도 함께 발전하게 되었다. 성벽 내부에 흙을 가득 채우고 성벽 외부를 비스듬히 경사지게 만드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어지간한 화포 공격은 아예 튕겨버릴 수 있었다. 혹여 외부의 성벽이 부서져도 내부의 흙 때문에 성벽의 틀이 크게 무너지지도 않았다.

성산성 역시 최근 가장 바깥쪽 성벽을 새로이 증축하면서 수직으로 높게 쌓아 올렸던 성벽은 비스듬하게 경사진 형태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성산성 주변에는 다른 성들과는 달리 해자가 없었다. 고지대라 물이 귀한 데다가 겨울만 되면 쉽게 얼어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성 주변에 깊고 넓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여러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자를 대신하고 있었다.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열사람 정도를 가로로 세워 놓을 수 있을 정도 너비의 길이 나왔다. 그 길의 양쪽은 모두 성벽으로 막혀 있었다. 만일 적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온다면 수비군이 양쪽의 성벽 위에서 총과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구조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미로 같은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한참을 돌아가다 보면 두 번째 방어성이 나왔다. 두 번째 방어성의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언덕과 좁은 계단이 나왔다. 마지막 세 번째 방어성인 본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본성은 지하 창고가 있는 하단의 돌벽 부분을 제외하고 총 8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2층은 경비와 방어를 위한 시설, 3, 4층은 번주의 중요 가신들이 들어와 업무를 보는 곳, 5, 6층은 번주와 번주 가족들의 공간, 7, 8층은 전시 망루와 지휘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영록과 예린은 바로 이곳 6층에 잡혀 있었다.

물론 저번처럼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거나 하지 않았다. 비록 방 안에 연금되어 수많은 도깨비 번군들의 감시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성산백 심운보는 그들이 먹고 지내는 데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도 강제로 끌려와 붙잡혀 있는 거다 보니 아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예린은 이곳 음식이 너무 입에 맞지 않아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져 있었다.

“도깨비들의 음식은 정말 최악이야! 이런 걸 나더러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예린은 성에서 일하는 여자 도깨비들이 가져온 아침상을 보더니 짜증부터 부렸다.

영록이 예린이 왜 그런지 조금 이해가 갔다. 이곳 성산에 온 이후 먹었던 음식들은 누리마루의 경월당이나 청림촌의 객잔에서 먹었던 음식들과는 감히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볼품없고 초라한 것들이었다.

밥과 국, 반찬 모두 양은 엄청나게 많이 주었지만, 가짓수는 매우 적었다. 밥은 모두 거친 잡곡으로만 되어 있었고, 국은 싱겁고 밍밍했다. 귀한 손님이라고 매번 밥상에 고기를 올려주기는 했는데 별다른 양념도 하지 않고 그냥 끓이거나 쪄서 요리했는지 누린내나 잡내가 많이 났다. 다른 반찬으로는 시큼한 채소 절임이나 메밀묵 같은 것만 나왔다.

얼마 전에는 개고기국이 나온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도깨비들은 돼지고기와 함께 개고기를 엄청나게 좋아해서 자주 먹는다고 했다. 당시 영록은 그게 개고기인지 무슨 고기인지 알지 못하고 그냥 주는 대로 먹었다.

하지만 예린은 고기에서 나는 냄새와 국에서 나온 털도 제대로 제거 안 된 고기 껍질을 보고 그것이 개고기란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예린은 그 즉시 밥상을 뒤엎어 버렸다.

“아니! 이 도깨비들은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마루한하고 일국의 영애를 모셔놓고 개고기를 내와? 도깨비 니들 지금 제정신이니?!”

그 후, 아이들의 밥상에 개고기가 오르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무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흰서리 산맥까지 사냥 나가 꿩이나 멧돼지도 잡아 오고, 음식 만드는 사람들이 신경 써서 별미가 될 만한 것도 만들어 내오곤 했지만, 여전히 도깨비들의 요리 솜씨는 예린의 입맛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었다.

밥상을 받을 때면 예린은 자신이 율도국에 있을 때 먹었던 음식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리워했다.

“우리 율도에서는 보통 하루 다섯 번 식사를 해. 아, 물론 잘 사는 집에 한해서 말이야.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식사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 우선 아침은 간단하게 죽을 먹거나, 소압곡이라고 곡식을 눌러서 구운 걸 과일이랑 같이 우유나 발효유에 타 먹기도 해. 아니면 빵 위에 계란이나 과일, 야채, 염장육 (햄, 소시지, 베이컨 등 가공육), 새우, 연어, 건락(치즈) 뭐 이런 걸 올려서 과일 냉차나 발효유와 함께 먹기도 하고.”

“빵? 대동에서도 빵이 있어? 떡이 아니라?”

빵이 외국어라는 걸 알고 있던 영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밀에 효모 넣어서 부풀린 떡은 빵이라고 불러. 옛날에는 그냥 밀떡이라고도 불렀는데, 박환성이란 마루한이 ‘대동어문사전’ 이란 걸 만들어서 말과 글을 정비하면서부터 밀떡을 빵으로 부르기 시작했데. 뭐, 빵이란 말이 더 부르기 쉽고 편해서, 그때부터 대동 사람들 모두 빵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구.”

영록은 신기하다는 듯 예린을 쳐다보았다. 예린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점심은 밥과 여러 가지 요리들과 함께 든든히 먹는 편이야. 나 같은 경우 경무관에 다니는 중이니까 점심은 항상 학식을 먹었지.”

“학식? 급식이 아니라?”

“급식은 또 뭐라니......? 우리는 학생 식당에서 주는 식사라고 해서 학식이라고 불러. 율도에서 학식은 모두 자조찬이야.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싶은 만큼 가지고 와서 먹을 수 있지.”

“자조찬......? 뷔페식이란 말인가?”

“뷔페? 아! 예전에 우리 아빠도 자조찬을 보고 뷔페라고 부른 적이 있었던 거 같아. 하여튼 내가 다니는 경무관 같은 경우는 율도국에서 학식이 제일 잘 나오는 곳이기도 하지. 밥도 그냥 쌀밥이나 잡곡밥, 볶음밥, 국수 종류, 빵 이렇게 다양한 것 중에 선택할 수 있고, 요리도 소고기나 돼지고기 요리 중 하나, 생선이나 해산물 요리 중 하나는 반드시 매일 나오게 되어 있어. 아, 닭고기 요리는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고. 야채 요리도 매일 6가지 이상 중에 골라 먹을 수 있고, 후식으로 과일이나 냉차, 발효유도 꼭 나오고 있지.”

“우와...... 그 학식 공짜니?”

“당연하지! 율도국에서 경문관, 경무관, 경학관 이렇게 중등 교육기관까지는 학비와 학식비 모두 무료야. 이게 다 우리 아빠가 나라에서 세금으로 다 알아서 처리하도록 만든 덕택이지! 정국이도 율도국 와서 이걸 보고는 도대체 율도국이 얼마나 부유하길래 모든 학생들에게 이걸 모두 나라에서 해주는 거냐며 놀라워하더라.”

예린은 아빠 이야기를 하며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무튼 점심은 그렇게 학식으로 먹고, 학교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밖에서 다과 시간을 갖거나 집에 들어와 다과를 먹어. 니가 좋아하는 상박하차는 율도에서 여름철 가장 인기 있는 차 중 하나지. 차를 마실 때는 니가 누리마루 다모랑들에게 받았던 거랑 비슷한 떡이나 빵, 유밀과, 화과자 등 여러 간식들과 함께 먹어.”

그 말에 영록은 누리마루에서 은대명에게 받은 상박하차가 떠올랐다. 그때 받은 차를 아직 다 마시지 못했는데, 곤마에게 붙잡히는 과정에서 차가 담긴 도자기 병이 깨져 버리는 바람에 남아 있던 상박하차가 땅바닥에 다 쏟아져 버렸다. 그 생각을 하니 여간 아까운 게 아니었다.

예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율도에서 저녁 식사는 되도록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푸짐하게 먹는 풍습이 있어. 보통 커다란 냄비에 끓인 전골이나 찌개를 함께 먹곤 하지. 아니면 고기나 생선, 해산물들을 구워 먹는 때도 있고. 우리 집은 ‘뭉텅이 구이’라고, 두툼한 소고기 안심을 소금하고 후추, 수유(버터)만 넣고 육즙이 남아 있을 정도로 반쯤 익혀서 먹는 고기 요리를 자주 먹었어. 이게 우리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거든. 아, 원래 우리 아빠는 매운 음식을 무척 좋아하시는 편이야. 산초양념(고추장)에 돼지고기랑 감자, 호박, 양파 같은 야채 가득 넣고 맵게 끓인 산초찌개(고추장찌개)를 정말 좋아하시지. 근데 내가 매운 거 못 먹거든? 언젠가 우리 아빠가 내가 매운 거 못 먹는 거 아신 후부터는 저녁때 매운 음식들은 일절 안 드신다고 밥상에 올리지 말라고 하셨지. 우리 아빠 정말 멋지지 않아? 그 후로 우리 집 저녁 식사 때에는 뭉텅이 구이처럼 맵지 않은 요리들이 주로 나오게 되었어.”

그 이야기에 영록은 갑자기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영록은 크게 편식을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생선 요리는 비린내 난다며 먹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걸 알게 된 부모님은 그 후로 영록이를 위해 구이든 조림이든 생선으로 된 음식을 일절 밥상에 올리지 않으셨다.

그 때는 그저 부모님도 나처럼 생선을 싫어하시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중학교 수학여행을 다녀온 날 부모님 두분이 고등어구이를 해 드신 흔적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두 분 다 생선 요리 좋아하셨는데 자기 때문에 참고 안 드셨다는 사실을.

영록을 가슴이 먹먹해져 옴을 느꼈다.

‘지금 엄마 아빠 두 분 다 하늘에서 내가 대동이란 곳에 와 있단 사실을 알고 계시겠지? 엄마, 아빠, 여기서 별의별 일을 다 겪고 있긴 하지만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꼭 강해져서 돌아갈게요. 그리고...... 그때 저 때문에 마음껏 생선 못 드셨던 거 죄송해요....... 이곳에서 반드시 다른 사람 마음을 좀 더 헤아릴 수 있는 큰 사람이 돼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영록은 목이 메 밥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 오전 9시, 대월국 성산번 성산성

아침부터 성산성 본성 6층 성산백의 집무실에는 마루한 영록이 가지고 온 비급 ‘모두를 위한 격투 무예’를 필사하는 임무를 받은 도깨비들이 작업 과정에 대해 중간보고를 하기 위해 심운보 앞에 불려 나와 있었다.

“성산번 최고의 화공들이 비급 속 동작들을 일일이 모사하고 있지만, 원본만큼 정교한 그림(사진)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대체 비급의 원본을 그린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화공들 모두 실제 사람을 그대로 옮겨다 놓는 신의 경지가 아닌 이상 그와 같이 그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심운보는 집무실 책상에 못마땅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아 그들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작업 책임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비급 내용 중 우리가 모르는 단어들과 문자들도 너무 많아 이를 해석하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일단 레프트(left), 라이트(right), 리드(lead), 리어(rear) 는 왼쪽, 오른쪽, 앞쪽, 뒤쪽이라는 방향을 뜻한다는 것과, 펀치는 주먹치기, 킥은 발차기, 니킥은 무릎치기, 엘보우는 팔꿈치치기 등, 기술을 뜻하는 몇몇 단어들은 해석할 수 있는데,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 하이킥, 클린치, 암바, 컴비네이션 등....... 그림을 보면 어떤 기술인지는 이해는 가지만 글의 뜻을 모르니 기술의 정수까지 정확히 알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마루한께서 직접 번역을 도와주시지 않는 이상, 비급에 실린 심오한 부분까지 옮겨 적기는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심운보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럼 일단 그림 모사를 하는 것부터 서둘러라. 나중 인쇄할 수 있도록 금속 주물에 쓸 밑그림 그리는 것도 잊지 말라 하고.”

심운보는 그들더러 모두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작업 책임자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황급히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 집무실 옆 벽에서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심운보가 말하자 벽으로 위장된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곳을 통해 구천락과 여개가 조용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구천락은 여전히 온몸을 붕대로 감싸고 있는 중이었다. 남들 같았으면 벌써 앓아누웠을 텐데, 그는 부상을 꾹 참고 여전히 심운보가 지시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루한과 영애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심운보의 물음에 구천락이 대답했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소일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애는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자기네 나라에서 먹던 음식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천하 진미가 넘치는 율도에서 살다 왔으니 음식이 입에 안 맞을 수도 있지. 마루한은 특별한 이야기 같은 건 하지 않던가?”

“네, 마루한은 영애의 이야기를 주로 듣기만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렇군...... 그건 그렇고, 왕실 전령은 어찌하고 있다던가?”

영록과 예린이 누리마루에서 대월국 도깨비들에게 납치되고 얼마 후, 율도는 대월국 주재 대사를 대월국 국왕에게 보내 이 일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였다.

당장 마루한과 영애를 납치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안전하게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율도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율도 대사가 왕궁에 입궁해 국왕을 알현하는 사이, 국경지대 각 번에서 보낸 급한 파발과 영매들이 수도 은허에 속속 도착했다.

율도의 병력들이 누리마루, 초원길 등을 통해 대월국으로 접근해 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대월국 국왕은 대경실색할 노릇이었다.

국왕은 율도 대사를 통해 대월국 성산백이 마루한과 영애를 납치해 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고, 황급히 왕실 전령을 성산번으로 파견하였다.

[근자에 짐이 듣기로 너는 누리마루에서 대동에 새로 오신 마루한과 율도국 태상국의 영애를 무력으로 납치해 너의 번으로 데려갔다고 하더구나. 나는 이 일이 어찌 된 영문인지 그대의 해명을 듣고자 한다. 성산백은 왕명을 전해 받는 즉시 은허의 왕궁으로 말을 달려오라. 이는 너의 주인, 대월국 국왕의 명이니라.]

왕명을 전한 전령은 심운보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하지만 심운보는 전령에게 본성 밖에 숙소를 내어주고 쉬도록 할 뿐,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그들 모두 숙소에서 휴식 중입니다. 그들의 말을 엿들어 보니, 각하께서 왕명을 받으시고도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시니 분명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결국 각하께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심운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내 명 없이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라 이르라. 만일 허락 없이 은허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그들 모두 죽여 버려라.”

“곤마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왕실에서도 슬슬 이번 일을 눈치챘을 텐데...... 아직 다른 번에서는 기별이 없는가?”

심운보는 이미 다른 번의 번주들에게 비밀리에 자신이 대동에 새로 온 마루한을 보호하고 있으며 율도 태상국이 지은 무예 비급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면서 현재 대월국 왕실은 힘을 잃었으니 천명(??)이 있는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열자며, 자신의 뜻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아직 단 한 곳에서도 답변은 오지 않았습니다.”

구천락이 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심운보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단지 시일이 걸리는 것일 뿐, 그들은 분명 답을 보낼 것이다. 답이 오는 대로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내게 보고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둘 다 나가보라.”

심운보는 냉정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들어온 미닫이문으로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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