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67화 (67/217)

〈 67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9일

* * *

­ 오전 6시, 누리마루 / 대월국 성산번 국경 인근

심운보를 호위하는 성산번 수호대 번군들의 수는 이제 고작 스무 명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밤새 이어진 율도 무사들의 추격을 막아내느라 거의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이다.

“원군은 아직인가?”

냉철하던 심운보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구천락의 영매를 통해 누리마루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의 가신들에게 지금 당장 무사들과 번군들을 이끌고 국경지대로 나오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무사들과 번군들을 소집하는 과정이 지체되는 것인지, 저 멀리 산 능선 위로 새벽 미명이 밝아오는 지금까지도 기대하던 원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10리 (약 4km)만 더 가면 대월국 성산번 무사들이 있는 국경 초소가 있었다. 심운보는 원군이 오지 않더라도 대월국 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율도국 무사들이 더는 쫓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서둘러라! 조금만 더 가면 우리 땅이다!”

심운보가 말 위에서 무사들과 번군들을 돌아보며 독려했다.

그의 뒤를 따라오는 도깨비들은 하나같이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몸이 성한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온통 여기저기 찢기고 베인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몸에 박힌 화살을 뽑지도 못하고 피를 줄줄 흘리며 비틀거리는 도깨비도 있었다.

구천락, 여개, 곤마 역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들은 이제 다른 번군들을 대신해 영록과 예린을 끌고 가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들을 끌고 가던 도깨비들 모두 이전까지의 전투에서 율도 무사들을 막다가 모조리 척살 당했기 때문이다.

영록과 예린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쇠사슬에 묶인 채로 말에 태워져 밤새 끌려다니다 보니, 피곤함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영록아, 괜찮아?”

말 위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영록을 바라보며, 예린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응, 괘, 괜찮아.”

영록은 거의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린은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터라 마음대로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아까 정말 고마웠어.”

예린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수그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록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아까, 나 도깨비들한테서 지키려고 한 거.”

예린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녀의 말에, 영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영록이 입을 열었다.

“대동에 오기 전에 난 바보같이 내 눈앞에서 여자친구가 나쁜 놈들한테...... 나쁜 짓을 당하는데도 지켜주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내 눈앞에서 그때 같은 일을 당하게 될까 봐 나도 모르게 그만......”

영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설명은 길지도 자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린은 여자의 육감으로 그의 여자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니가 그렇게...... 아무튼 고마워. 네 덕분에 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어. 우리 아빠도 네게 무척 고마워하실 거야.”

“그런데 내가 아까 도깨비들한테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늘어놓은 거 아닐까? 네가 강운예 관장님 딸이라는 사실이나 정국이가 주나라 황자라는 거 모두 말해버린 거 말이야.”

영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 지었다.

“나도 처음엔 도깨비들이 그 말에 어찌 나올지 몰라서 많이 걱정되었어. 율도나 주나라 모두 도깨비들한테는 오랜 적대국이거든. 그래서 걔네들이 나나 정국이의 정체를 알고 우리한테 복수한답시고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겁을 먹는 모습 보고 나도 많이 놀랐지 뭐야.”

예린은 영록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어쨌든, 사실대로 말한 덕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 고마워, 영록아.”

예린은 영록에게 웃어 보였다. 영록도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저만치 앞서가던 도깨비 무사 하나가 말을 돌려 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원군들이 당도했습니다!”

심운보가 바라보니 2리 (약 1km) 밖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 갑옷을 입은 수백의 군사들이 커다란 짙은 남색 깃발을 휘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심운보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록이 말했다.

“우리...... 이제 도깨비 나라로 끌려가는 걸까?”

예린이 불안한 듯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대동에 도깨비 나라는 두 곳이 있는데, 저들은 그 중 대월국이란 곳의 도깨비들이야. 태진이 주나라와 몇천 년을 이어 온 주적 관계라면, 대월국은 우리 율도국이 건국할 때부터 늘 초원길을 두고 전쟁을 벌여온 사이지.”

그녀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영록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가볍게 농담을 던지려 했다.

“내가 살던 곳에 도깨비 나라에 대한 노래가 있었어.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이런 노래야.”

분위기 못 맞추는 갑작스러운 노래에, 예린은 도리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방망이로 두드리면 뭐가 되긴, 피떡이 되겠지. 그 방망이 나한테 좀 빌려줬으면 좋겠네. 이 도깨비 자식들 죄다 피떡으로 만들어버리게.”

영록은 자신의 유머가 통하지 않자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앉았다.

‘아, 괜한 짓 했다. 예린이가 이 동요를 알 리가 없는데.’

구원 나온 도깨비 군사 무리에서 십여 명의 도깨비들이 심운보가 있는 쪽으로 말을 달려왔다. 그들은 심운보가 데리고 간 수백의 번군들은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된 인원 스무 명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각하!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심운보 만큼 화려한 은빛 갑주를 입은 영주 하나가 급히 말 아래로 뛰어내려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러자 뒤따라온 다른 영주, 성주, 맹약 무사 등 성산번의 가신들이 그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심운보는 안심한 표정으로 말 위에서 그들을 찬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대들을 보니 비로소 마음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구나.”

심운보는 뒤따르고 있던 영록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분은...... 이 땅에 새로 오신 마루한이시다. 그대들 모두 정중히 예를 올리어라.”

그의 지시에, 성산번의 가신들이 영록이 탄 말 앞으로 다가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지존하신 마루한을 뵙습니다!”

“마루한을 뵈오니 평생의 광영이옵니다!”

그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영록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영록은 그들의 예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예린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근데 이 사람들, 날 쇠사슬로 묶어 놓고는 인사는 정말 깍듯이 하는구나. 이 분위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도깨비들 따위 인사는 무시해 버려!”

예린은 앞에 꿇어앉은 도깨비들을 쏘아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예린의 말을 들은 심운보는 가소롭다는 듯 호탕하게 웃고는 손가락으로 예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루한 옆에 있는 이는 율도 태상국의 영애이다. 두 사람 모두 성산까지 예를 다해 모셔라.”

가신들은 다시 한번 심운보에게 예를 올렸다.

“예를 다해 모시라면서! 이놈의 쇠사슬은 언제까지 묶고 있을 건가요? 이거 마루한과 한 국가의 영애에게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예린이 앙칼진 목소리로 심운보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에, 그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들으니, 영애가 잡히기 전까지 그대의 손에 목숨을 잃은 내 수하가 하나둘이 아니라던데? 역시 율도 태상국의 영애답게 어린 나이임에도 출중한 무예를 갖추고 계시는가 보구려. 내 성산에 도착하면 당장 그 쇠사슬을 풀어드리리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 수하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풀어드릴 수 없으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구랴.”

이제 가신들이 이끌고 온 수백여 명의 번군들이 심운보 일행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가신들과 함께 온 맹약 무사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수호대 무사 하나를 부축해 말에 태우며 물었다.

“진호대와 비호대는 다 어디로 갔는가?”

그의 말에 수호대 무사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 말에, 맹약 무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두 저 세상으로 갔다니? 그럼 모두 전사했단 말인가?”

수호대 무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약 무사가 계속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엇에 당했단 말인가? 누리마루의 다모랑들에게 당한 건가?”

“아닙니다. 율도의 무사들이었습니다.”

“율도 무사? 누리마루에 율도 무사들이 얼마나 있었기에 모두 돌아오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알기론 누리마루에 주둔하고 있는 율도 부대는 없는 거로 아는데?”

“......우릴 공격한 건 모두 서른 명이었습니다.”

“서른 명?”

그 말에 맹약 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성산백 각하의 직속 번군이라는 놈들이 고작 서른 명에게 이리 호되게 당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갑자기 하늘 높은 곳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이이이익!

율도군의 명적 소리였다.

이 소리를 들은 피투성이의 수호대 번군들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부들부들 떨며 놀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놈들이다! 그놈들이 또 왔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구나. 이 지옥 야차 같은 검은 괴물들!”

심운보도 이 소리에 놀라 말에 박차를 가하며 소리쳤다.

“모두들 서둘러라! 율도 놈들이 가까이 왔다! 빨리 국경을 넘어야 한다! 모두 뛰어라!”

가신들이 데리고 온 번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심운보의 지시에 따라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누리마루의 숲속에서 살기 어린 함성 소리와 함께 율도 무사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검은색 갑주는 물론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까지 모두 도깨비들의 피로 검붉게 변해 있었다.

“마루한과 영애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박살 낼 것이다!”

무사들의 선두에 선 최기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도깨비들은 오금이 저렸다.

“성산백 각하를 지켜라! 진형을 갖춰라!”

후미에 있던 도깨비 무사들이 황급히 보병 번군들로 진영을 만들어 율도 무사들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들은 황급히 백여 명의 번군들을 4열씩 길게 옆으로 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후미에서 창을 앞으로 길게 뻗고 진영을 이루고 있던 도깨비들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율도 무사들의 위용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소름 끼치는 함성 소리에 저도 모르게 진영에서 빠져나와 살금살금 뒷걸음질 치는 도깨비도 있었다.

탕! 탕! 타당! 탕!

앞서 말을 달리던 총을 든 기병들이 도깨비들의 진영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단 한 번의 총격으로 두세 명의 도깨비가 한꺼번에 관통되어 자리에 쓰러졌다. 진영은 금세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총을 든 기병에 이어 16자 (약 5m) 길이의 장창을 꼬나 든 중무장한 기병들이 도깨비들의 진영을 향해 무섭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들이 탄 말은 다른 무사들이 탄 말들과 달리 말의 전신도 철갑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모두 박살 내라!”

10여명의 창기병들은 전투 구호를 외치며 도깨비들의 진영을 부수고 들어갔다. 후미를 지키던 성산번 도깨비들의 진영은 그들의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우르르 무너져 버렸다.

8자 (약 2m 40cm) 정도 되는 도깨비들의 창이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두 배는 더 긴 율도 무사들의 장창이 도깨비들을 인정사정없이 꿰뚫어버렸다.

도깨비들의 몸에 창이 너무 깊이 박혀 빼기 힘들거나 창이 부러진 무사들은 곧장 허리춤에서 완만하게 휘어진 군도를 빼어 말 아래 좌우의 도깨비들을 썰어버렸다. 이미 수많은 전투를 치른 탓인지, 율도 무사들의 군도는 칼집에서 나올 때부터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칼날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뒤이어 최기와 편곤을 든 무사들이 도깨비들의 진영을 크게 돌아 좌우의 적들을 후려쳐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활을 든 기병들은 빠르게 진영을 지나쳐 심운보와 영록, 예린을 둘러싸고 국경을 향해 달려가는 도깨비 군사들의 등 뒤에 화살을 날리며 마치 사냥하듯 하나씩 하나씩 그들을 쓰러뜨렸다.

율도 무사들에 이어 정국과 진채연도 말을 몰아 싸움터에 뛰어들었다. 진채연은 뒤에 태우고 다니던 반디를 숲속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전장에서 마음껏 창을 휘두르며 도깨비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정국 역시 되찾은 유성금 장검으로 도깨비들의 무기들은 물론 은색 갑주까지 단숨에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예린아! 조금만 기다려!”

정국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맹수처럼 무섭게 날뛰었다. 그의 무용 앞에 도깨비들은 점점 물러서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국은 율도 무사들보다 훨씬 앞서서 도깨비들의 진영을 부수며 전진했다.

“성산백 각하와 마루한을 지켜야 한다! 무사들은 나를 따르라!”

성산번의 맹약 무사 하나가 말을 탄 50여명의 기병들을 휘몰아 율도 무사들을 향해 기수를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후미의 보병 진형을 깨부수고 영록과 예린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던 율도 무사들은 이들 기병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들은 성산번의 군사들 중 가장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이들로, 북쪽 거록의 두억시니들과 수시로 싸워온 경험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날카로운 삼각형 꼴의 장자검을 빼어 머리 위로 높이 들며 다 함께 전투 구호를 부르짖었다.

“우리는 두억시니를 무릎 꿇리는 자들이다! 우리를 이길 자 대동에 없다! 우리가 최강이다!”

“우리가 최강이다!”

은색 갑주의 도깨비 기병들이 검은색 갑주의 율도 무사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수십여 명의 기병들은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 오전 8시, 누리마루 / 대월국 성산번 국경 인근

국경을 넘어간 심운보와 그의 군사들은 더 이상 시야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최기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 위에서 대월국의 국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산번 기병들의 분전으로 율도 무사들은 그들과 오랜 시간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기병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심운보는 영록과 예린을 데리고 안전하게 대월국의 국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 살아남아 있는 율도 무사들의 수는 불과 16명에 불과했다. 며칠간 쉬지 않고 말을 달리고 싸워온 상태에서 적의 최고 전력과 맞붙은 터라 생각보다 전사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성산번 기병들의 피해도 엄청났다. 그들은 삼십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살아 도망간 이들 중에서도 성한 몸으로 돌아간 이는 드물었다.

율도 무사들은 말에서 내려 아직 살아 있는 도깨비들을 찾아 모조리 마지막 숨을 끊어 놓고 있었다. 끝내 마루한과 영애를 되찾지 못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들판에는 수백 구의 도깨비들의 시신들로 가득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온 까마귀들이 나무숲 위를 날아다니며 율도 무사들이 자리를 비켜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국경을 넘어 쫓아가면 안 되겠소?”

정국이 애절한 목소리로 최기에게 말했다. 정국의 여행복은 온통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최기는 안타까움에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당장에라도 다시 저들을 쫓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고작 16명의 지친 군사만으로 한 나라와 전쟁을 벌일 순 없는 노릇입니다.”

최기의 입술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진채연도 아쉬움에 크게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숲속에 있던 반디가 무수히 죽어 넘어져 있는 시체들 때문에 무서워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나무 뒤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채연은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숲속으로 걸어갔다.

그때, 하늘 위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저건?”

진채연이 놀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영매였다.

영매의 가슴에는 노란색의 사자 얼굴이 그려진 검은색 가방이 달려 있었다. 율도국의 영매였던 것이다.

영매는 왼쪽 팔뚝에 가죽 보호대를 끼고 있는 율도군 전령을 알아보고 그의 팔에 내려와 앉았다. 전령이 영매 가슴의 상자에 담긴 쪽지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최기에게 쪽지를 넘겼다.

쪽지를 읽은 최기도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전령에게 다급히 명을 내렸다.

“현재 위치 적어서 바로 알려드려라!”

전령이 급히 갑주 안의 지필묵을 꺼내 무엇인가를 적어 영매 가슴의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영매를 다시 하늘로 날려 보냈다.

영매는 남쪽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진채연이 숲에서 반디를 데리고 율도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반디는 주변의 시체들이 무서운지 진채연의 뒤에 숨어 그녀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진채연이 최기에게 물었다.

“중요한 연락이라도 온 것입니까?”

최기는 투구 끈을 다시 고쳐 매고 갑주의 외관을 정비하며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이...... 백화에서 친히 군단을 이끌고 이곳으로 진군해 오고 계시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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