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8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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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4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구천락과 수하 도깨비들은 예린과 영록이 숨어 있는 나무 앞을 막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나무들과 전혀 다른 나뭇잎의 가지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 그곳에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예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영록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 총 안에 탄 몇 발 남았어?”
영록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영록에게 말했다.
“내가 쏘라고 하면 밖을 향해 두 발 다 쏴버려. 그리고 나 따라서 밖으로 뛰어나가는 거야, 알았지?”
영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은 배낭을 짊어지고 왼손에 활과 화살 세 대를 함께 움켜쥐었다. 잠시 나뭇가지 사이로 밖의 상황을 엿보던 예린이 뒤로 물러서서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영록을 향해 외쳤다.
“쏴!”
영록이 팔혈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그와 동시에 예린이 앞을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들을 발로 밀어 차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주변을 겨누었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놀란 도깨비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예린은 활로 도깨비들을 위협하며 소리쳤다.
“따라오면 죽여 버릴 거야!”
영록도 예린을 따라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주변에 있는 도깨비들을 보고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예린의 뒤를 쫓아 부리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엎드려 있던 구천락과 도깨비들이 다시 일어나 아이들을 쫓으려 했다.
“엌!”
구천락 옆에 있던 도깨비의 이마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예린의 분홍빛 깃의 화살이었다.
“따라오면 죽여 버린다고 했어! 그대로 계속 엎드려 있어, 이 빌어먹을 도깨비들아!”
예린이 다시 화살 하나를 활시위에 매기며 도깨비들을 향해 소리쳤다. 도깨비들은 감히 곧장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예린과 영록은 다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곳으로부터 1리 (대략 500m)쯤 뛰어갔을 때, 갑자기 그들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 뚝 떨어졌다.
“잡았다, 이놈들!”
긴 창을 든 기태와 낫을 든 여개가 나무 위에 숨어 있다가 아이들의 머리 위로 뛰어내린 것이다.
“피해!”
순간, 예린이 영록을 옆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활과 화살을 집어 던지고 칼을 뽑아 들었다. 칼 손잡이 끝에 황금사자 문양이 조각된 얇고 가는 검이었다.
기태가 허공에서 창으로 예린의 어깨를 내리쳤다. 예린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오른쪽으로 발을 사뿐히 옮겼다. 기태의 창은 예린의 검에 비켜 맞으며 그대로 땅바닥을 강하게 찍어버렸다.
창을 피한 예린이 몸을 휙 돌리며 기태를 향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 베었다.
“윽!”
기태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튀었다. 예린의 칼끝에 얕게 베어버린 것이다.
“이 년이!?”
예린의 옆으로 떨어진 여개가 마치 뱀처럼 땅바닥을 기며 그녀의 다리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뭐, 이년? 아, 이것들이 자꾸?!”
예린은 가볍게 다리를 뒤로 빼어 낫을 피해버리고는, 땅바닥에 있는 여개를 향해 마구 검을 찔렀다. 여개는 마치 공처럼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예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
예린이 도깨비들과 어울려 싸우는 동안, 영록은 정국에게 받은 화약과 탄을 팔혈소총에 다시 재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구식 총의 장전 과정은 너무나 복잡했다. 그는 종이로 된 화약 포장지를 이빨로 찢고 둥근 약실에 하나씩 털어 넣었다. 긴장감에 손이 떨리다 보니 약실 구멍 밖으로 화약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다.
화약을 넣고 탄을 하나씩 구멍에 박은 후 작고 가는 막대로 탄을 꾹꾹 밀어 눌렀다. 마음만 급하다 보니 탄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장전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약실 뒷부분에 납작한 뇌홍(발화장치)을 박아 넣었다.
준비를 모두 마친 영록은 약실을 다시 총몸에 결합하고 예린이 있는 곳을 뛰어갔다.
그 사이, 예린은 도깨비들을 나무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곳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기태는 자신의 긴 창을 마음껏 휘두를 수 없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창 자루가 사방에 있는 나무들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기태가 어쩔 수 없이 창을 짧게 잡아들자, 예린이 그 틈을 노리고 치고 들어갔다.
“야앗!”
예린의 검이 기태의 가슴을 향해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왔다. 기태가 황급히 짧게 잡은 창날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예린의 검이 종이 한 장 차이의 간합을 뚫고 들어와 그의 어깨를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으윽!”
기태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예린을 향해 창을 길게 찔러 넣었다.
“이걸 기다렸지!”
예린은 검으로 창날을 자신의 오른쪽으로 가볍게 흘려냈다. 순간, 그녀의 몸이 기태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그녀는 왼손바닥으로 창을 쥔 기태의 오른팔을 쳐내고는 검을 들어 그의 목에 꽂아 넣었다.
푹!
예린의 칼은 기태의 목을 그대로 관통했다. 기태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예린은 죽은 기태의 창을 들어 뒤쫓아오던 여개를 향해 집어 던졌다.
푸슉!
창은 여개의 바로 옆 나무에 깊숙이 꽂혔다.
“네 놈도 이 꼴이 되고 싶으면 어디 덤벼보시던가.”
예린은 검을 크게 휘둘러 혈진 (칼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는 행동)을 하고는 여개를 향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여개는 기태의 시신을 보며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린년이 대체....... 누구에게 배웠기에 그리 고강한 무예를 펼칠 수 있는 것이냐? 네 스승의 이름이 무어냐?”
여개의 물음에 예린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 놔, 이 부지부지자 같은 도깨비 새끼들이 진짜...... 말끝마다 계집애라 하지 않나, 이년 저년 거리지 않나....... 야! 내가 지금 사정이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밝힐 수는 없거든? 그래도 네놈들이 감히 이년 저년 하고 부를 수 없는 사람이란 것만 똑바로 알아둬! 그리고 내 스승이 누구냐고? 우리 율도에서 학당, 경당, 경무관 다니면서 하도 많은 분들한테 무예를 배워서 나도 그분들 성함 다 기억 안 나. 됐냐?”
예린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특별한 스승 한 분이 계시긴 하지! 바로 우리 아빠! 네 놈이 우리 아빠가 누구인지는 알면 놀라 기절할걸?”
여개는 낫을 움켜잡고 서서히 예린에게로 다가서려 했다.
탕!
여개의 머리 옆에 있는 나무가 총에 맞아 나무 파편들이 튀었다. 놀라 옆을 돌아보니 언제 쫓아 왔는지 영록이 나무 사이에서 팔혈소총을 들어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탕!
또 한 번의 총소리가 숲에 메아리쳤다. 여개의 머리 옆으로 탄환이 스치고 지나갔다. 급히 몸을 피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머리에 탄환이 박힐 뻔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런 제길......!”
여개는 그대로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줄행랑쳤다.
“예린아, 괜찮아?”
영록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예린은 죽어 있는 기태의 옷에 검에 묻은 피를 슥슥 문질러 닦고는, 칼집에 집어넣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두억시니도 아니고 도깨비들 쯤이야 뭐~ 어쨌든 빨리 여기를 뜨자. 총소리를 듣고 도깨비들이 또 몰려올 거야.”
예린은 아까 땅바닥에 내려놓은 활과 화살을 챙겨 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두 사람은 울창한 수풀로 인해 한낮인데도 어둡다고 느껴질 정도로 깊은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 다다랐다.
그때 무사의 촉에 무언가 느껴졌는지, 예린이 다시 활과 화살을 꺼내 들었다.
“여기 무언가 느낌이 이상해......”
예린은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영록이 보기에 별 특이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냥 조금 어두운 숲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얘가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아까 나무 위에서 기습당한 것 때문에 민감하게 구는 건가?’
그는 예린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쉬익!
갑자기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무언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숲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에 매달린 묵직한 구체가 예린에게로 날아왔다. 오전에 객잔에서 본 유성추였다. 예린이 몸을 수그리며 가까스로 피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유성추에 머리가 날아갈 뻔했다.
유성추가 달린 쇠사슬들은 어둠 속 여기저기에서 마치 거미줄 뻗어 나오듯 날아왔다.
예린은 민첩하게 옆으로 몸을 날려 유성추를 피하며 어둠 속을 향해 화살 두 대를 날렸다. 하지만 노리고 쏘지 않은 화살이 맞을 리 없었다.
한참 동안 보이지 않는 적이 날리는 유성추를 피하려 애를 쓰던 예린도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꺄악!”
어디선가 날아온 유성추 하나가 예린의 배를 강타했다. 그녀는 활을 놓치며 그 자리에 배를 잡고 쓰러졌다.
“예린아!”
영록이 놀라 총을 들어 유성추가 날아온 방향을 겨누었다.
그때, 영록의 얼굴 앞으로도 유성추의 쇠사슬이 날아왔다.
휘리릭, 철컥!
유성추는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영록의 팔혈소총에 휘감겨 들어왔다.
“앗!”
숲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이 잡아 당겨졌다. 영록의 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영록 앞에 한 사나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구천락의 수하 곤마였다.
오후 15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곤마는 휘파람 신호로 동료들에게 마루한을 잡았음을 알렸다.
잠시 후 구천락과 여개 등 도깨비들이 곤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 사이, 곤마는 예린과 영록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두었다. 예린은 아직도 배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결국 잡았군!”
구천락은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영록을 내려다보았다. 영록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당장 성산백 각하께 알려야겠다. 영매를 불러라.”
구천락의 말에 곤마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사이 구천락은 품에서 지필묵을 꺼내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영매가 어김없이 도깨비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구천락은 영매의 가슴에 있는 작은 통에 방금 적은 쪽지를 넣고 다시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이것으로 성산백 각하 앞에서 다시 체면을 세울 수 있겠군.”
구천락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구천락님, 기태가 저년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개가 손가락으로 예린을 가리키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어차피 우리는 마루한만 데리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저년에게 우리 동료를 죽인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합니다. 성산백 각하께서 오시기 전에 저년의 사지를 자르고 윤간하다 산 채로 나무에 매달아 죽여 버립시다.”
그 말에 도깨비들이 일제히 예린을 바라보았다.
“아까 나무 있는 곳에서도 그렇고, 객잔에서도 그렇고, 이 년놈들 때문에 우리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었지...... 그럼 그 피해는 이년 몸으로 보상받아도 되겠지?”
가까이서 보니 예린의 얼굴은 보기 드문 미인임에 틀림없었다. 백옥으로 만든 것 같은 하얀 피부에 조각 같은 눈코입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뛸 정도였다.
구천락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예린에게 다가갔다.
그때, 쇠사슬에 묶여 있던 영록이 뒤뚱거리며 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예린이에게 손대지 마!”
영록이 도깨비들을 사납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들 지금 내가 당신네 나라로 같이 가서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뭐든 다 해주기 원해서 이러는 거 아니었어? 만약 당신들이 예린이 손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죽어도 당신들 말 안 들을 테니 그리 알아!”
영록은 마치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영록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도깨비들도 적이 놀란 눈치였다. 예린도 영록의 모습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천락이 영록에게 말했다.
“마루한,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우리는 저년을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는 것, 그것이 도깨비들의 관습이고 대월국의 법으로도 허용되는 일입니다. 마루한께서도 우리를 막지 못합니다.”
구천락은 차가운 얼굴로 다시 예린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자 영록이 다시 몸으로 구천락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들 얘가 누구인지나 알고 손대려는 거에요? 얘는 율도 태상국 강운예의 딸이에요! 그분 친딸이라구요! 당신들, 강운예 관장님의 친딸을 해치고도 앞으로 무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말에 주위 모든 도깨비들의 얼굴이 굳게 경직되었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은 마치 죽은 자들처럼 사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율도 태상국의 딸이라고......?”
구천락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영록과 예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잊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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