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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춘추 - 리부트-64화 (64/217)

〈 64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8일 (4)

* * *

­ 오전 13시, 누리마루 청림촌 남쪽

예린과 영록은 한참을 앞만 보고 달려갔다. 이제 뒤돌아보아도 정국과 도깨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싸우는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영록은 심하게 지쳐 있었다. 목에서 쇠 냄새가 나는 것은 둘째 치고 이제는 숨 쉴 때마다 토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결국 영록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우욱!”

영록은 땅에 엎드려 구토했다. 예린은 그 모습에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사내가 이렇게 체력이 없어? 너 이래 가지고서 니 여자 친구 구할 수 있겠어?”

예린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영록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리...... 정말 조금만 쉬었다 가자, 응?”

예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난 더럽고 냄새나게 니가 토한 데 옆에서 쉬고 싶지 않거든? 일단 더 내려가. 쉬어도 숨어서 쉴 수 있는 데를 찾아야 해. 그러니 얼른 일어나!”

결국 영록은 예린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조금도 서운하거나 기분 나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작년 여름 빨치산이 쳐들어오던 날, 유민과 함께 폭도들을 피해 우성시내를 뛰어다니던 그 때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때에도 유민이가 나를 재촉하면서 앞에서 내손을 잡고 달렸었지......’

갑자기 예린의 뒷모습이 유민처럼 보였다. 머리를 위로 질끈 묶고 있는 모습마저 너무나 비슷했다.

‘강해지기 위해 강운예 관장님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거잖아? 여기서 또 주저앉으면 언제 유민이를 구할 만큼 강해지겠어? 이제 다시 약한 모습 따위는 보이지 말자! 힘을 내자! 죽을 각오로 힘을 내 보자고!’

영록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좀 더 속도를 내어 예린과 보폭을 맞추며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예린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지헌과 도깨비 번군들은 다시 마루한을 쫓아 추격을 시작했다.

정국은 온몸이 꽁꽁 포박당한 채로 수십여 명의 도깨비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는 도깨비들이 묻는 말에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깨비들은 다른 아이들을 쫓아간 번군들을 기다리며 정국의 배낭에 있는 것들을 뒤져보는 중이었다.

“아니, 어린 녀석이 무슨 수표를 이리도 많이 들고 다녀? 게다가 금액이 일, 십, 백, 천, 만...... 으응???”

도깨비들은 정국의 배낭에서 나온 수표들에 쓰인 액수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녀석, 한자손 어느 귀족 가문의 자식임에 틀림없나 보군. 여행자 수표를 이렇게나 많이 들고 다니는 거 보면 말이야.”

“귀족도 보통 귀족 가문의 도련님이 아닐 거야. 이 녀석, 유성금으로 만든 무기까지 가지고 있었잖아? 혹시 어디 제후국 후계자 같은 거 아니야?”

“그럼 앞으로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겠는데? 마루한을 비밀리에 납치해 가야 하는데 하필 다른 나라 엄청난 가문의 자제가 얽혀 들어간 거라면 비밀 유지는 물 건너가게 되는 거지.”

“왜? 그냥 조용히 죽여서 입막음 해버리면 되는 문제 아니야?”

“멍청아! 니 말대로 만약 저 애가 진짜 어디 제후국 후계자 같은 건데 우리가 죽여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우리 번뿐 아니라 대월국 모두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 거야, 전쟁!”

도깨비들이 한창 정국의 짐들을 뒤져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루한을 쫓아간 무사들이 벌써 돌아오는 건가?”

도깨비들은 불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발굽 소리는 번군들이 아이들을 쫓아 내려간 남쪽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북쪽과 동쪽, 서쪽 세 방향에서 시시각각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대동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에 도깨비들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방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 박살 내라!”

“모두 박살 내라!”

그 소리와 함께 나무숲 사이에서 십수 개의 화살이 도깨비들에게로 날아왔다. 탕! 탕! 총 쏘는 소리도 들렸다.

율도 무사들이 도착한 것이다.

첫 번째 공격에 도깨비 번군의 절반이 총과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율도군이다! 율도 놈들이 왔다!”

도깨비들은 기겁하고 우왕좌왕거렸다.

나무숲 사이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 갑주를 입은 율도 무사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도깨비들을 향해 매섭게 말을 달려 들어왔다.

몇몇 도깨비들이 손에 들고 있는 쇠뇌를 쏘고 창을 던지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의 무기는 모두 율도 무사들의 갑주와 방패에 부딪혀 튕겨 나가버렸다. 도깨비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마치 검은 파도가 바다 위의 조각배를 덮치듯, 검은 갑주의 율도 무사들이 도깨비 번군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긴 창을 든 율도 무사들이 말을 달려 적에게 부딪힐 때마다 도깨비들은 꼬치처럼 꿰어졌다. 편곤을 든 무사들은 그들의 머리를 으깨 버렸고, 칼을 든 무사들은 마치 콩나물 머리 따듯 상대의 수급을 몸에서 베어내 버렸다. 맞서 싸우려는 자들은 율도 무사들에게 단 1합도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땅에 꿇어 앉혀져 있던 정국도 놀란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태상국의 군대인가? 모두가 다 하나같이 엄청난 실력의 고수들이다......’

지금까지 그가 겪어본 율도 무사들은 모두 군에서 전역한 나이 많은 무관 출신 경무관 교관들이었다. 매번 왕년에 젊었을 적 군대 이야기들, 특히 몇십 년 전 계몽 전쟁 당시 자신이 어떤 전투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으며 어떻게 태상국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게 되었는지 자신의 무용담이나 늘어놓는 그들을 보며, 정국은 그저 허풍만 센 고루한 어르신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했다.

‘교관들도 젊었을 때는 모두 저들 이상으로 대단한 무사들이었을까? 그러니 전쟁에서 무공훈장도 받고 전역한 후에 경무관 교관도 하고있는 거겠지? 경무관에 돌아가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교관들을 우습게 보지 말아야겠어.’

정국은 경탄어린 얼굴로 율도 무사들의 무용을 바라보았다.

율도 무사들이 도망치는 도깨비들을 끝까지 쫓아가 모두 사살하는 사이, 갑주를 입지 않은 여 무사가 등 뒤에 혼혈 여인을 태우고 그에게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 예린이 자기 어머니 호위 무사라고 말해 준 바로 그 사람, 진채연이었다.

진채연은 포박 당한 정국을 보고는 말에서 뛰어 내려 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급히 그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주었다.

“당신은 그 때...... 태상국 영부인의 호위 무사?”

정국의 물음에 진채연은 화를 참고 있는 듯한 표정에 다소 무뚝뚝한 말투로 대꾸했다.

“저를 아시네요?”

“그렇소, 예린이 가르쳐 주었소만.”

“네, 대원수부 백영단 진채연 대위입니다. 지난번에 개울가에서 제 말이랑 짐 훔쳐 가실 때 처음 뵈었었죠?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군요. 주나라 황정국 황자님?”

정국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말이랑 짐 훔쳐 달아난 건 정말 미안하오. 근데 그거 아까 객잔에서 다 잃어버렸는데...... 미안하오, 돌아가면 내가 다 보상해 주리다.”

“보상해 주실 거면, 제가 그때 도깨비들한테 붙잡혀서 옷이랑 무기도 다 잃어버렸는데요, 그것도 같이 보상해 주시겠어요?”

“아, 알았소...... 꼭 모두 보상해 드리리다. 정말 미안하오......”

순식간에 주변의 도깨비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이 와중 율도국 무사들의 피해는 단 한 명도 입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율도 무사들을 이끄는 최기가 말에서 내려 정국에게 다가왔다. 정국은 이제 진채연의 도움으로 포박에서 풀려나 일어서 있는 중이었다.

“누리마루 율도 대사관 주재무관 최기라고 하옵니다. 주나라 황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최기는 정국에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정국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황자님께서 마루한과 함께 계셨다 들었습니다. 지금 마루한은 어디에 계신지요?”

정국은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록이는 예린이와 함께 율도 대사관이 있는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소. 내가 도깨비들을 막고 있는 동안 먼저 도망치라고 해서 말이오.”

“그 뒤를 쫓아간 도깨비들의 수는 대략 몇이나 되던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림잡아도 백여 명은 넘어 보였소. 그리고 그중에 무예가 특출 난 놈이 있소. 그놈에게 패해 내가 가지고 있던 유성금 장검도 빼앗겨 버렸지. 제법 덩치가 큰 도깨비였는데, 그를 보면 아무쪼록 주의해야 할 것이오.”

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남쪽으로 이동하시지요.”

최기가 다시 말 위로 뛰어 올랐다. 진채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전투를 마쳤는데, 힘드시지도 않습니까? 밤에도 쉬지 않고 말을 달리셨다면서요?”

그녀의 말에 최기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마루한 호송에 실패하고 납치당하게 만든 우리 모두에게 지칠 자격 따위는 없네. 지쳐 죽더라도 내 맡은 임무는 다하고 눈을 감겠네.”

최기는 말 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주위의 모든 율도국 무사들도 결연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 오전 14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예린은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커다란 나무뿌리 아래 사람 둘이 충분히 들어가 앉을 만한 공간이 있는 곳을 발견했다. 예린은 영록을 그 안에 들어가 쉬게 하고는 주변에서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주워와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쌓아 올렸다.

“잠깐만 쉬었다 가더라도 안전하게 쉬어야지.”

예린은 나무뿌리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왔다. 그리고 배낭을 내려놓고 베개처럼 베고 누웠다.

“아침부터 계속 달리기만 하다 보니 힘들어 죽겠네...... 오늘 살 제대로 많이 빠졌을 거 같아.”

예린이 영록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 지금 토하고 싶지는 않지?”

영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여기서 토하면 큰일 나지. 어렵게 찾은 쉼터인데 이런 데서 토하면 진짜...... 윽.”

예린은 아까 영록이 토하는 게 생각났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을 찡그려도 예린의 얼굴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정국이는 어찌 되었을까? 설마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예린의 말에 영록이 대답했다.

“정국이 실력 잘 알잖아. 도깨비들한테 붙잡히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 적당히 시간 끌다가 우리처럼 도망치고 있겠지.”

예린은 정국이 몹시 걱정되는 듯 했다.

“이러다 서로 길 엇갈리게 되는 거 아닌가 몰라. 나중에 서로 다른 길로 도망치다가 못 만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우리 모두 율도 대사관으로 갈 거니까, 중간에 만나지 못해도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거 같아.”

“내가 그때 정국이를 더 말려야 했는데. 이렇게 걱정되는데 나더러 어떻게 그냥 가라고 해? 끝까지 같이 갔어야 하는 건데......”

예린의 얼굴엔 불안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눈에도 눈물이 핑 도는 듯 했다. 그녀는 짐짓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자, 잠시 여기서 쉬는 동안 주변에 우릴 쫓는 놈들이 지나갈지도 모르니까, 이제부터 절대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면 안 돼. 할 얘기 있으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해야 하고, 알았지?”

예린의 말에 영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무뿌리 아래 숨어 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예린은 귀에 손을 대고 밖에서 나는 소리를 유심히 들어보았다.

사람의 말소리,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미세하게 무언가 움직이고 있는 소리는 맞는 것 같았다. 나뭇잎 밟는 소리,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영록은 숨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숨소리 대신 두근두근 심장 요동치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 까지 들렸다. 목덜미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나뭇잎 사이로 도깨비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한동안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예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어 활에 재려 했다.

그때, 밖에서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어서 밖으로 나와라!”

구천락의 목소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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