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8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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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시, 누리마루 청림촌 남쪽
숲을 따라 율도 대사관으로 향하던 아이들은 결국 곳곳에 차단선을 깔고 매복해 있던 대월국 성산번 도깨비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마루한이 저기 있다!”
“잡아라! 마루한을 놓치지 마라!”
수십 명의 도깨비들이 매복 진지에서 뛰쳐나와 무서운 기세로 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뭐야~! 어디서 또 이렇게나 많이 나타난 거야~!?”
예린은 짜증 폭발하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제일 앞서 달려나갔다. 정국과 영록도 그 뒤를 쫓아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도깨비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아이들을 쫓아갔다. 이 소리를 들은 도깨비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다른 곳에서 차단선을 치고 매복해 있던 이들이었다. 어느덧 아이들의 뒤를 쫓아오는 도깨비들의 수는 백여 명 넘게 불어나 있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작은 화살들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도깨비들이 쇠뇌를 쏘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그들이 사용하는 화살은 끝에 둥그렇고 뭉툭한 나무심이 박힌 것들이었다. 마루한을 다치게 하지 않고 산 채로 잡으려는 것이었다.
“에잇, 그만 좀 쫓아 와!”
영록이 몸을 뒤로 돌려 팔혈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요란한 총소리에 깜짝 놀란 도깨비들이 그 자리에 잽싸게 배를 깔고 엎드렸다. 영록이 다시 한 방 더 총을 쏘았다. 제대로 조준하지도 않고 달려가며 대충 뒤돌아 쏜 탓인지 총에 맞은 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앞서 달려가던 예린이 뒤돌아 무릎 꿇고 앉고는, 전통에서 분홍빛 깃의 화살을 빼어 활시위에 걸었다. 그녀는 어느 틈에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검지를 보호하는 장갑처럼 생긴 가죽 깍지와, 자수정 빛의 예쁜 돌로 만든 엄지용 숫깍지를 오른손에 끼고 있었다.
“바보야, 정확히 보고 신중히 겨냥해서 쏴야지!”
예린은 영록에게 타박하듯 소리치고는 화살을 메긴 활시위를 어깨까지 팽팽히 잡아당겼다.
슉!
그녀의 손을 떠난 분홍색 깃의 화살이 앞서 달려오던 도깨비 번군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커헉!”
예린이 쏜 화살은 도깨비의 목 뒤까지 뚫고 나와 있었다.
어느샌가 예린의 활에는 또 다른 화살이 메겨져 있었다. 그녀가 쏜 화살은 어김없이 또 한 명의 도깨비를 쓰러뜨렸다.
예린의 활 솜씨에 당황한 도깨비들이 여기저기에서 소리쳤다.
“저 계집애 조심해! 활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방패 든 번군들이 앞장서서 따라가!”
또 한 번 ‘계집애’란 말을 들은 예린은 완전히 열 받은 표정으로 다음 화살을 꺼내 들었다.
“이 천한 도깨비 새끼들이,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자꾸 계집애래!!!”
예린이 다시 활시위를 당기자 앞서 달려오던 도깨비들이 얼른 방패 뒤에 몸을 숨겼다.
그중 한 도깨비가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보려고 방패 위로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
푸슉!
순간, 그의 눈에 정확히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그 모습을 본 도깨비들은 모두 기겁해서 감히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깨비들의 추적이 잠시 주춤한 사이, 아이들은 오직 남쪽만을 보고 달음박질 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영록이 점점 뒤로 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나절부터 계속 뛰어다닌 탓에 그의 체력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영록아, 조금만 더 힘내!”
“이러다가 우리 모두 붙잡힐지도 모른다고! 어서 뛰어!”
아무래도 영록이 어려서부터 꾸준히 무예를 수련해 온 정국이나 예린과 똑같은 속도로 뛰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정국과 예린은 양쪽에서 기진맥진해 하는 영록을 부축하며 길을 재촉했다.
아이들의 걸음이 느려진 사이, 도깨비들과의 거리는 다시 좁혀지고 있었다.
이때 정국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장검을 뽑아 들며 예린에게 소리쳤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붙잡히겠어!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볼 테니까, 영록이 데리고 먼저 달아나!”
예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렇게 많은 도깨비들을 혼자서 어떻게 다 막겠다는 거야? 너무 위험해!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도망가자, 응?”
정국은 고개를 저으며 예린의 등을 떠밀었다.
“내가 저런 도깨비들한테 잡힐 것 같아?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
예린은 마지못해 정국을 남겨두고 영록을 부축한 채 남쪽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는 정국이 걱정되는지 수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국은 장검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도깨비들은 어린 소년이 겁도 없이 홀로 자신들을 향해 도전해 오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녀석 죽이지 마! 죽지 않을 만큼만 족쳐서 붙잡아!”
정국은 두 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하게 붙잡고 허리 아래로 가볍게 장검을 내렸다.
“너희들이 날 붙잡을 수나 있을까? 다들 각오 단단히 하고 덤벼봐!”
도깨비 번군 하나가 창을 번쩍 들고 정국에게 달려들었다. 정국은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는 도깨비의 창을 장검으로 올려쳤다.
창 자루는 깨끗하게 두 동강 났다. 도깨비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던 것도 잠시, 정국의 칼이 번쩍, 섬광을 일으켰다.
단 일격에 도깨비의 몸은 사선으로 절단되었다. 도깨비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모두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서서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이놈들, 뭘 꾸물거리고 서 있는 거냐? 당장 앞으로 나서지 못해!”
뒤에 있던 무사들이 번군들을 다그쳤다. 주변의 채근에 방패와 창을 든 도깨비들이 쭈뼛거리며 정국에게 다가갔다.
겁에 질린 도깨비들이 미적거리자 정국도 먼저 움직이지 않고 적이 들어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더 예린과 영록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한참을 노려보고만 있던 도깨비들이 마침내 정국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야앗!”
정국도 고함을 지르며 맞섰다.
정국의 장검이 앞서 달려오던 도깨비의 방패를 단숨에 꿰뚫어버렸다. 넉자(약 120cm) 길이의 장검은 방패 뒤의 도깨비 가슴까지 깊숙이 박혔다. 장검을 뽑아내자 도깨비의 방패는 마치 사과가 두 쪽 나듯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정국은 무서운 기세로 장검을 휘둘렀다. 그의 칼이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방패는 마치 종잇짝처럼 찢어졌고, 도깨비들의 검붉은 피는 푸른 초목 위에 흩뿌려졌다.
순식간에 십 수 명의 도깨비들이 시체로 변해버렸다.
“유성금이다! 유성금으로 만든 칼을 들고 있어!”
방패는 물론 칼과 창까지, 철로 된 모든 무기들을 마치 두부 썰듯 베어버리는 정국의 장검을 보고, 도깨비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이제 번군들은 무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제 니들이 좀 나서 보지? 하는 눈빛이었다.
“비켜라!”
도깨비들 사이로 제법 덩치가 큰 무사 하나가 다른 이들보다 크고 두꺼운 장자검을 손에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갑주를 걸치지 않고 있었다. 심운보의 지시로 무사들도 모두 갑주를 벗고 전포만 입고 있었던 것이다. 갑주 없이도 그의 온몸에서는 엄청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깨비 무사가 정국을 향해 칼을 겨누며 소리쳤다.
“나는 성산백 각하의 맹약 무사 추지헌이다. 네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무사의 말에 정국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성산백이라면 대월국 번주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대월국에서 마루한을 납치하려고 누리마루까지 보낸 군사들이 국왕의 직속부대도 아니고 변방 번주의 군사들이였다고......?’
그 사이, 무사가 자신의 소속을 밝힌 것 때문에 도깨비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각하께서 절대 자기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그러셨는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추지헌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는 도깨비들을 향해 뒤돌아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끄럽다! 내가 저놈을 잡으면 그만이다!”
무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정국을 향해 소리 질렀다.
“네 놈도 무사라면 어서 빨리 네가 누구인지 밝혀라!”
정국은 그의 투기에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긴장되어 굳어지는 것도 느껴졌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일부러 여유 있는 척 허세를 부려보았다.
“거절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나를 한 번 잡아 보아라.”
추지헌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이 무례한 한자손 새끼!”
추지헌이 장자검을 두 손으로 붙들고 정국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칼이 거센 바람 소리를 내며 정국의 왼쪽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냥 보기에도 칼끝에 모든 체중을 다 실어 날린 일격이었다.
‘그래, 그 무식한 힘으로 있는 대로 힘껏 휘둘러보아라. 어차피 내 칼과 부딪히자마자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정국이 칼을 들어 방어했다.
두 사람의 칼이 맞닿는 순간, 마치 솜뭉치에 부딪힌 듯 정국의 손에는 아무런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추지헌의 칼도 부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뭐야? 이 짧은 순간에 힘을 멈췄다고?!’
놀랄 틈도 없이, 추지헌은 칼이 맞닿아있는 상태에서 왼발을 옆으로 옮기며 재빨리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칼이 정국의 오른쪽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다.
정국은 한 손을 놓으며 몸을 뒤로 급히 젖혔다. 얼음처럼 차가운 칼날이 그의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이 빗나가자 추지헌은 즉각 베기를 멈추고 정국의 목을 향해 직선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정국은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급격히 돌리며 이번 공격도 간신히 피해냈다.
두려움의 감정이 서늘한 한기처럼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보통 실력이 아니야!’
몇 걸음 뒤로 물러선 정국은 자세를 고쳐 잡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추지헌은 칼을 왼쪽 허리 아래로 내리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나더러 공격해 보라는 건가? 내 칼은 유성금으로 만든 거니까, 어차피 세게 부딪히기만 하면 저 칼은 여지없이 부러질 거야. 그래, 이번엔 내가 먼저 강하게 나가보자.’
정국은 심호흡을 두세 번 하고는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추지헌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앗!”
정국은 칼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추지헌의 왼쪽 목덜미를 향해 전력으로 장검을 내려쳤다. 몸을 베지 못해도 상대의 칼이라도 부셔버리겠다는 의도였다.
예상대로 추지헌이 칼 손잡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방어에 나섰다. 정국은 이대로 무기가 부딪치기만을 바랐다.
“아니?”
정국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장검은 추지헌의 장자검을 부수기는커녕, 마치 얼음판에 미끄러지듯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추지헌은 정국이 자신의 칼을 부수려 한다는 것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정국의 칼을 정면으로 막는 척하다가 손목을 틀어 그대로 상대 공격을 비스듬히 흘려버렸다.
정국의 공격을 흘린 추자헌이 오른발을 크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장자검이 머리에서 크게 원을 그리더니 정국의 왼쪽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다.
“아악!”
추자헌의 칼끝이 정국의 몸을 사선으로 베고 지나갔다. 그의 옷 앞부분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정국이 급히 몸을 뒤로 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국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겨우 이 정도였나? 유성금으로 만든 칼만 믿고 설쳐대더니...... 애송아, 너 오늘 제대로 임자 만난 줄 알아라.”
추지헌은 아까하고 똑같이 왼쪽 허리 아래로 칼을 내렸다. 정국은 그의 자세의 빈틈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내 검이 아무 소용없을 정도로 정말 강한 상대다. 하지만......’
정국은 그가 가진 장자검을 바라보았다.
‘저자의 칼보다 내 장검이 훨씬 더 길어. 동시에 찌르더라도 내 칼이 먼저 닿을 수 있을 거야!’
정국은 오른쪽 어깨 쪽으로 칼을 가져갔다. 상대가 찌르기가 아닌 베기를 예상하게끔 속이려는 동작이었다.
두 사람은 머릿속으로 다음에 이어질 여러 가지 수 싸움들을 수없이 복기하며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정국이 먼저 움직였다.
정국은 오른발을 내디디며 베기를 하는 적하다가, 팔꿈치와 손목을 쭉 뻗으며 추지헌의 가슴을 향해 장검을 내질렀다.
추지헌도 허리 아래로 떨어뜨렸던 장자검을 위로 쳐올렸다.
챙!
정국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그의 장검은 추지헌의 오른쪽으로 비켜나가고 있었다. 추지헌이 장자검의 칼날이 아닌 칼의 옆면으로 정국의 장검 옆면을 때려 쳐낸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윽!’
정국이 놀랄 겨를도 없이 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어느 틈엔가 추지헌의 왼손이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의 발목을 쓸어 차 넘어뜨린 것이다.
추지헌은 칼 손잡이로 넘어진 정국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손목을 발로 짓밟고 칼을 빼앗았다. 정국의 잘생긴 얼굴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와아! 추지헌님이 한자손 무사 놈을 붙잡았다!”
“역시 추지헌님이십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주변에 있던 도깨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추지헌의 견습 무사로 보이는 어린 도깨비들이 달려와 정국의 무기를 빼앗고 그를 포박했다.
추지헌은 정국이 가지고 있던 장검을 집어 들었다.
“내 인생 최고의 전리품을 차지하게 되었군.”
그는 유성금으로 만든 칼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성금으로 만든 무기는 대동의 모든 무사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매우 적을 뿐 아니라 가격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었다. 이렇게 전투에서 상대가 가진 유성금 무기를 빼앗는 것도 일생일대의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정국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일으켜 세워졌다. 몇몇 도깨비들이 그에게 창을 겨누며 위협했다.
정국은 코와 입술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예린아......’
정국은 남쪽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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