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61화 (61/217)

〈 61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8일 (1)

* * *

­ 오전 1시, 누리마루 남쪽 숲 대월국 성산번 무사단 야전 군영

새벽 야음, 여자들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울음 소리는 진채연이 갇혀 있는 임시 감옥까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밤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도깨비들은 임시 감옥 근처에 있는 천막으로 여자들을 끌고 갔다. 놈들은 그곳에서 여자들을 윤간하고 있었다.

천막 주변에는 보초를 서는 자들과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자들이 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안에서 도깨비 한 녀석이 바지춤을 추스르며 낄낄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아, 역시 짐승 년들이라 그런지 다들 아주 힘들이 좋아. 큭큭큭”

그는 기다리는 사람들 맨 뒤로 가서 다시 줄을 섰다. 주변에 도깨비들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또 하게? 너 그러다 내일 코피 쏟는 거 아니냐?”

“그래도 공짜로 몇 번이든 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내일 쌍코피 터지는 한이 있어도 오늘 밤은 불태우련다. 큭큭큭.”

“네 마누라가 이거 알면 가만있을까? 킬킬킬.”

“쉿! 니 마누라한테도 비밀 지켜 줄 테니까 조용히 입 다물어 주라고. 큭큭큭.”

놈들의 이야기 소리는 진채연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곧 저들에게 욕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발가벗겨진 채로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수치심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저 천막 어디엔가 붙잡혀 있을 반디도 몹시 걱정되었다.

다행히 독 기운은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이제 손가락, 발가락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빨리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깊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 오전 4시, 누리마루 남쪽 숲 대월국 성산번 무사단 야전 군영

깊은 밤중인데도 구천락은 멀쩡히 깨어 있었다. 자신의 천막 안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총에 맞은 왼팔을 붕대로 감싸 고정해 놓고 있었다. 한동안 오른손으로만 살아야 할 판이었다.

그의 곁에는 부하 기태, 곤마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성산번에 남아 있다가 부하들이 모두 사망하고 구천락도 크게 부상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남은 이들을 이끌고 어제저녁 누리마루에 당도했다.

천막 입구가 열리고 부하 여개가 안으로 들어왔다.

“구천락님, 청림촌에 있는 정보원으로부터 전갈이 당도했습니다. 오늘 오후 그곳에 있는 객잔에 세 명의 아이들이 투숙한 걸 확인했답니다.”

그의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구천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곁에 있던 기태, 곤마도 함께 일어섰다.

“지금 우리 애들이 몇이나 와있지?”

“아홉 명입니다.”

“모두 깨워라. 지금 당장 청림촌으로 향할 것이다.”

기태, 곤마가 부하들을 깨우기 위해 옆에 있는 천막으로 건너갔다.

구천락은 한 손으로 불편하게 의복과 장비를 챙기려 했다. 곁에 있던 여개가 다가와 그를 도우며 말했다.

“성산백 각하께 보고하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구천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낮에 보고 드릴 때 보니 나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신 듯 했다. 만일 마루한이 있는 곳을 각하께 보고한다면, 우리가 아니라 직속 무사들을 보내려 하시겠지. 그럼 우리는 그분의 신망을 다시 얻을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그는 길고 예리한 장자검을 허리춤에 걸고 천막을 나섰다.

갑주를 입지 않은 십여 명의 도깨비들이 말을 타고 진채연이 갇혀 있는 임시 감옥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도깨비들의 맨 선두에는 구천락이 있었다. 진채연은 그가 자신과 싸웠던 도깨비란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그녀는 구천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진채연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말을 달려 군영 밖으로 빠져나갔다.

여자들은 늦은 새벽녘에야 임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그녀들의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다.

모두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도깨비들은 여자들의 엉덩이를 손으로 후려치며 감옥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녀들을 밧줄로 묶어두지 않고 있었다.

여자들 가운데에는 반디도 있었다. 그녀의 허리 아래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다리 사이에는 붉은 핏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반디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아직 쓰러져 있는 진채연에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내가 없어서 많이 추웠죠? 미안해요.”

반디의 말에 진채연은 목이 멨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밧줄에서 풀려난 진채연은 간신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반디의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무어라 말해야 할지,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알지 못했다.

대동에서는 여전히 힘없는 자가 유린당하고 병탄 당하는 것을 흔하디흔한 세상사 중 하나로 여겼다. 전쟁 중에 일어나는 살인, 약탈, 납치, 강간 등의 범죄조차,

‘전쟁 나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라며 당연시하기도 했다.

2천여 년 전 ‘대동 사회주의 사상’ 부르짖었던 마루한 박환성부터 최근 ‘대동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율도를 개국한 태상국 강운예까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동에서 사람 개개인의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 왕정에 수직적 신분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국가들이 대부분인 대동에서, ‘인권’이란 여전히 생소한 단어일 뿐이었다.

그들 밑에서 농사나 짓고 가축이나 기르며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인권’이란 그저 먹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권리일 뿐이며, 그 외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그저 주제넘은 불손한 소리로 여겨졌다.

수천 년간 신분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억압당하며 살아오던 대동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운예가 역설한 ‘대동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민중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사람은 종족과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똑같이 대우받을 수 있다고?’

‘왕과 영주의 말이 먼저가 아니라, 법이 가장 우선 되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고?’

‘나라가, 마루한이나 왕의 것이 아니라 백성 모두의 것이라고? 그리고 백성들 모두 나라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 말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율도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동 각 나라에서도 강운예의 ‘대동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자신이 사는 국가의 제도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시위는 폭동이 되고, 반란과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왕들은 강운예의 ‘대동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무지한 백성들을 현혹하려는 마귀의 꼬임’

이라 주장하며 백성들을 억압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율도에서 ‘대동 자유민주주의 사상’ 과 선거에 의해 선출된 통령과 국회의원들에 의해 나라가 통치되는 ‘민주정’ , 신분제 철폐와 전 국민에 대한 의무 교육을 법으로 명시한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왕정으로 회귀하고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놀랍게도, 반란 세력을 이끄는 주역은 태상국 강운예의 아들이었다.

율도 반란 세력은 다른 나라들에 지원을 요청했고, 강운예와 율도 때문에 골치를 썩이며 기회만 엿보고 있던 각국의 왕들은 ‘수호 동맹’이란 이름으로 연합하여 대군을 이끌고 율도를 침공했다.

그것은 율도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었고,

동시에 자유와 평등, 박애와 같은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벼랑 끝 싸움이었다.

십 년에 걸친 전쟁 동안 ‘수호 동맹’ , 반란 세력들과 비교해 1/10 수준으로 병력의 열세를 보였던 강운예의 율도군은 수차례의 대전투에서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율도 반란 세력들을 제거하고 다른 나라의 군대들을 모두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외세의 핍박과 마루한 박환성의 전사와 함께 대동에서 소멸하였던 ‘대동 사회주의 사상’과는 달리, 강운예의 ‘대동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계속 살아남아 대동 전역으로 뻗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인권의 가치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하여도, 여전히 전쟁 지역에서의 ‘인권’은 조금도 존중되지 않았다.

도깨비들은 물론 혼혈 유랑민 여자들 역시 지금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일이 ‘전쟁 범죄’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세상사 만나는 여러 풍파 중에 더럽게 재수 없는 경험이라 여길 뿐이었다.

대동의 역사가 1만 년에 가깝다고 하지만, 여전히 문명적으로 진화되었다고 말하기 힘든 점이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이었다.

군인으로만, 무사로만 살아온 진채연에게도

‘물론 옳은 일은 아니지만 전쟁 중에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강해지거나 아니면 그냥 참고 견뎌야 해.’

이 정도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말은 실제로 아픔을 겪은 여인들을 향한 위로라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말이었다.

진채연은 말없이 반디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함께 손을 붙잡고 울먹이던 반디는 그녀를 껴안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 오전 8시, 누리마루 청림촌

구천락 일당은 아이들이 묶고 있는 청림촌의 객잔에 도착했다. 구천락은 기태, 곤마 등 5명에게 객잔을 사방에서 감시하게 지시하고, 자신은 여개와 나머지 부하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세 명의 아이가 여기 투숙했지? 지금 묵고 있는 방이 어딘지 말하라. 그럼 다치지 않는다.”

구천락은 점원을 위협해 아이들의 방 위치를 캐물었다. 그리고 점원이 가르쳐준 데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구천락 일당이 객잔에 온 것도 모르고, 아침 식사를 마친 영록은 자기 방에서 여유롭게 짐을 꾸리는 중이었다. 그의 짐 중에는 어제 정국이 준 팔혈소총도 있었다.

영록은 팔혈소총을 들고 가늠자와 가늠쇠를 일치시키고 방안의 도자기를 향해 조준을 해보았다.

‘전에 쓰던 M­16A1 보다는 확실히 묵직하고 무거운 거 같아. 총몸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랑 나무로 만든 거랑 확실히 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봐. 그래도 잡았을 때 손에 착 감기고 어깨 견착도 불편하지 않고...... 괜히 황족이 쓰는 총이 아닌가보다.’

영록은 둥근 약실을 빼 한 바퀴 빙글 돌려 보았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영록은 정국이나 객잔 점원이라 생각하고는 총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밖에는 키가 영록 정도 되는 검은 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도깨비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장자검이 들려 있었다. 뾰족한 칼끝이 영록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마시오.”

도깨비는 칼로 영록을 위협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곁눈질로 방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영록은 칼을 보고 너무 놀라 두 손을 번쩍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뭐야? 엊그제 날 쫓아오던 도깨비들인 건가?’

심장이 위아래로 쿵쾅쿵쾅 요동치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도 후들후들 떨려왔다.

‘침착하자,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 이런 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잖아! 침착하자, 침착하자,......!’

그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도깨비를 노려보았다.

다행히 기죽을 정도로 덩치가 큰 상대는 아니었다.

영록은 어제 정국과 수련하며 나누던 이야기 중 하나가 떠올랐다.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가장 먼저 상대의 빈 곳을 찾아야 해. 무작정 공격했다가 상대가 쉽게 방어해 버리면 내 공격이 실패하는 거고 반격까지 당할 수 있잖아? 지금 공격했을 때 상대가 가장 방어하기 힘든 곳이 어디인가 파악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능력이라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대 사람의 단기접전 뿐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에서도 쓰이는 중요한 전략이야.’

영록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도깨비의 빈 곳이 어디인지 찾았다.

‘지금 저 도깨비가 오른손에 칼을 들고 나를 겨누고 있지? 그럼 저 자의 오른쪽 몸통은 완전히 비어 있는 상태야. 오른쪽 몸통 갈비뼈 부근에는 간이 들어있다고 했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간을 갑자기 강하게 맞으면 큰 충격을 받아 전투 불능이 된다고 강운예 관장님의 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여자아이가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예린의 목소리였다.

“넌 뭐야, 이 도깨비 자식아!!!”

쾅!

예린의 고함과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영록을 위협하던 도깨비도 깜짝 놀랐는지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야!’

영록은 이를 악물고 도깨비를 향해 덤벼들었다.

영록은 오른발을 앞으로 크게 내밀며 오른손바닥으로 도깨비의 칼을 쥔 손목을 강하게 밀어쳤다. 도깨비는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순간, 오른쪽 발목을 바깥쪽으로 돌리며 허리를 크게 회전시켰다.

어젯밤 정국과 함께 열심히 연습했던 왼발 미들킥을 날리는 자세였다.

영록의 왼발 정강이가 도깨비의 갈비뼈를 제대로 강타했다. 정강이 부위가 짜릿하게 아려오는 게 느껴졌다.

“우욱!”

영록에게 기습을 당한 도깨비는 손으로 옆구리를 감싸고 두어 발 뒷걸음질 치다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져 버렸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내 기술이 또 제대로 들어갔어!’

기뻐하는 것도 잠시, 영록은 황급히 침대 위의 가방을 둘러매고 팔혈소총을 손에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복도로 나가니 예린의 방 앞에 도깨비 한 명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주변에는 예린의 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탁자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설마, 예린이가 저걸로 도깨비를 내려친 거야???’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바로 옆방이던 정국의 방에서 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도깨비들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칼 부딪히지 마! 저 녀석, 유성금으로 만든 칼을 가지고 있어!”

영록은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국은 3명의 도깨비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이미 도깨비 한 명은 정국에 의해 베어졌는지 땅바닥에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정국아!”

도깨비들이 영록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영록은 이미 팔혈소총을 어깨에 견착하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 중이었다.

탕!

총에 맞은 도깨비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영록은 엄지로 신속하게 장전 망치를 뒤로 재꼈다.

탕!

또 한 명의 도깨비가 쓰러졌다.

도깨비들이 총을 가진 영록의 출현에 당황해하는 사이, 정국이 장검을 휘두르며 살아 있는 마지막 도깨비에게 달려들었다. 도깨비는 놀라 장자검을 들어 그의 칼을 막으려 했다.

쨍그렁!

도깨비의 장자검은 정국의 장검에 깨끗하게 반으로 부러졌다. 그리고 도깨비의 몸도 반으로 갈라지며 붉은 피를 뿜었다.

“정국아, 황정국!”

정국의 방으로 예린이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이미 배낭에 활과 화살, 칼까지 다 챙기고 출발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정국은 창문을 열고 객잔 아래를 살펴보았다.

“......역시 밖에도 도깨비들이 있어! 영록이를 쫓던 녀석들과 한패인 거 같은데?”

정국도 자신의 배낭을 짊어지며 빠져나갈 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복도에서 뚜벅뚜벅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영록이 반사적으로 총을 들어 문 쪽을 향해 겨누었다. 예린도 활에 화살을 메겨 시위를 잡아당겼다.

문 안으로 구천락과 여개가 들어왔다. 영록은 구천락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당신은 그때 그......?!”

구천락은 방바닥에 쓰러져있는 부하들의 시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이들을 한 명씩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유성금으로 만든 칼에 주신의 장인이 만든 활, 그리고 그때는 경황이 없어 몰라 봤지만 말 서른 필 값어치는 넘는다는 총까지...... 보아하니 보통 가문 자제들은 아닐 것 같은데.”

그의 손가락이 영록을 가리켰다.

“우리는 저 소년에게 볼 일이 있어 왔다. 그대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그냥 보내줄 터이니, 공연히 끼어들어 화를 당하지 말고 어서 사라져라.”

그 말에 정국이 장검으로 구천락을 겨누며 소리쳤다.

“총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더니 용케도 살아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안 죽고 살아났으면 고마운 줄 알고 조용히 있었어야지, 뭐가 어째? 헛소리하지 마라, 이 도깨비야! 우리가 마루한을 네놈들에게 순순히 넘겨줄 듯싶으냐?”

구천락의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분이 마루한인 걸 그대들도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그대들 모두 그냥 보낼 수는 없다.”

그가 허리춤에서 장자검을 꺼내 들었다. 뒤에 있던 여개도 자루가 긴 두 자루의 낫을 양손에 들고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3 대 2, 게다가 우리는 총 하고 활도 있어! 너희 도깨비들은 우리한테 상대도 안 될걸? 그러니 죽기 싫으면 어서 문에서 비켜!”

예린이 도깨비들의 기세에 전혀 눌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활시위를 당긴 채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영록도 구천락의 얼굴을 향해 총을 겨냥하며 예린을 따라 앞으로 나섰다.

도깨비들도 총과 화살을 피하거나 막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이들은 도깨비들을 위협하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구천락과 여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1층까지 거의 내려왔을 때였다.

콰자장!

갑자기 장지문이 부서지며 도깨비들이 객잔 안으로 들이닥쳤다. 창을 들고 있는 기태와 긴 쇠사슬이 달린 유성추를 들고 있는 곤마,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깨비들이었다.

곤마의 유성추가 계단 위의 예린에게 날아들었다.

“꺄악!”

예린이 활시위를 놓고 몸을 뒤로 젖혀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냈다. 하마터면 활이 부서지거나 활을 든 손이 부러질 뻔한 위기였다.

그것을 신호로 구천락과 여개가 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

“영록아, 아래 있는 놈들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정국이 장검을 들고 구천락과 여개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정국은 혼자서 구천락과 여개를 계단 위로 몰아붙였다.

장자검을 한 손으로 들고 싸우던 구천락은 두 손으로 장검을 붙들고 세차게 휘두르는 어린 정국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진채연과의 싸움에서 여기저기 부상까지 당하고 정국에게 총까지 맞은 터라 몸이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정국이 장검을 크게 올려 베다 갑자기 오른손을 놓고 왼손으로만 칼자루 끝을 쥔 채 구천락의 가슴을 향해 칼을 곧게 찔러 들어갔다. 구천락은 이 공격을 피하다가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여개가 급히 왼손의 낫으로 정국의 장검을 걸어 당기려 했다. 하지만 유성금으로 만든 정국의 장검은 도리어 그의 낫을 두 동강 내어 버렸다. 낫 하나를 잃어버린 여개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탕!

영록은 유성추를 던진 곤마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곤마는 재빨리 유성추를 회수하고는 1층의 탁자 사이로 뱀처럼 몸을 구르며 총알을 피해내 버렸다. 영록이 다시 곤마를 겨냥해 또 한 발을 쏘아 봤지만 이번에도 빗나가 버렸다.

그 사이 기태가 예린을 향해 뛰어 올라왔다. 예린도 칼을 뽑아 들었다.

“계집은 저리 비켜라!”

기태는 계단 아래에서 예린의 다리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예린은 난간 위로 뛰어올라 가볍게 그의 창을 피해냈다.

“감히 누구보고 계집이래?”

예린은 난간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오며 기태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찔렀다. 기태는 가까스로 몸을 옆으로 돌리며 창 자루로 칼을 옆으로 쳐냈다. 기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1층에 있던 3명의 도깨비들이 예린이 도망치지 못하게 에워쌌다. 기태도 창을 꼬나 들고 그녀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팍!

“억!”

갑자기 예린의 앞을 가로막고 위협하던 도깨비의 머리 위로 60근 (대략 40kg)은 되어 보이는 큼직한 쌀부대 하나가 뚝 떨어졌다. 쌀부대에 깔린 도깨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쌀부대는 도깨비들을 향해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쌀부대 뿐 아니라 냄비며 주걱, 각종 주방 도구들도 날아왔다.

2층 난간 위에서 다모랑 점원들이 주방에서 각종 물건들을 들고 나와 도깨비들을 향해 집어 던지고 있었다.

“야, 이 나쁜 놈들아~! 우리 손님들 건들지 마라아~!”

어제 정국이 남는 돈 다 가지라고 했던, 바로 그 다모랑 점원이 가장 치열하게 도깨비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다모랑들이 힘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연신 60근이 넘는 쌀부대를 번쩍번쩍 들어 마치 투석기가 돌을 날리듯 도깨비들을 향해 집어 던지고 있었다.

“얘들아, 밖으로 뛰어!”

정국의 외침에 아이들은 객잔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깨비들은 분한 얼굴로 다모랑 점원들을 노려보았다.

“뭘 꼬라봐, 이 얼굴만 허여멀건 해가지고 말라 빠진 도깨비 새끼들아! 오늘 우리 객잔 문 부신거랑 장사 망친 거나 물어주고 나가, 이 쌍놈의 새끼들아!”

다모랑들도 지지 않고 욕설을 퍼부으며 도깨비들에게 계속 물건을 집어 던졌다. 결국 도깨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따라 객잔 밖으로 도망치듯 쫓겨나갔다.

도깨비들이 객잔 밖으로 나갔을 때, 마침 오늘이 장날인지라 거리에는 수많은 장사꾼과 구경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시장의 인파 속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도깨비들도 황급히 아이들을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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