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7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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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누리마루 남쪽 숲 대월국 성산번 무사단 야전 군영
대월국 군사들은 숲속 한적한 곳에 터를 잡고 군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몇몇 인원만이 숲 주변에서 경계를 서는 가운데, 대부분의 군사들은 투구와 무기들을 모두 땅 위에 내려놓고 열심히 천막을 설치했다. 그들은 예닐곱 명씩 조를 이루어 땅에 나무로 만든 기둥을 박고 천막 모서리에 난 구멍에 밧줄을 걸어 주변 나무에 감아 묶었다. 타고 온 군마들을 주변 나무에 고삐를 매어 두는 이들도 있었고, 군영 주변에 목책과 장애물, 참호 진지를 만드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들 여러 번 야전 군영을 설치해 봤는지 솜씨들이 제법 능숙해 보였다.
두어 시간도 되지 않아 나무숲 사이로 수십여 개의 천막과 시설들이 들어섰다. 군영의 임시 시설 중에는 간이 목욕탕과 화장실, 쓰레기 소각장까지 있었다.
야전 군영 편성을 모두 끝마친 군사들은 자신들의 짐과 무기들을 정리해 넣고는 천막 앞에 옹기종기 모여 모닥불을 피웠다.
군사들은 숲속에서 비슷한 크기의 큼지막한 돌 네다섯 개를 가져와 불가에 둘러놓고 그 위에 커다란 냄비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말에 싣고 온 말린 곡식과 야채 조금, 낮에 혼혈 유랑민들에게서 약탈해 온 고기를 담고 푹 끓이기 시작했다.
“거지새끼들한테 빼앗아 온 거라 그런지 누린내가 심하네. 향채 좀 더 넣어봐.”
도깨비 군사들은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냄비를 휘휘 저으며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고기 끓이는 냄새가 군영 가득 퍼져 나갔다. 그 냄새는 바람에 실려 혼혈 유랑민 여자들이 붙잡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여자들은 목과 손발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나무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가축우리처럼 생긴 임시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음식 냄새에 조금도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당장의 배고픔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녀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며 도깨비 군사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들의 모습은 빈궁한 유랑민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면직물로 된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대부분 여러 장의 천 조각이나 동물 가죽들을 기워서 만든 위아래 한 벌의 누더기 겉옷만을 입고 있었다. 오랫동안 잘 씻지도 않았는지 피부와 털에는 더러운 땟국물이 흘렀고, 땋은 머리에서 서캐가 돌아다니는 게 보이기도 했다.
그녀들 가운데 진채연이 알몸인 채로 쓰러져 누워 있었다. 전위대에 의해 이곳까지 끌려온 후 혼혈 유랑민 여자들과 같이 갇혀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가끔 괴로운 듯 신음하며 헛소리를 할 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월국 성산번 (?, 봉건제 국가인 대월국 국왕이 봉신에게 하사한 봉토를 이르는 말. 여기서 성산은 지명이다. 번의 지도자는 ‘번주’라 부르지만, 이 칭호보다 작위로 부르는 경우가 더 흔하다.) 무사단 (대월국의 번주는 국왕에게 하사받은 봉토에서 나오는 경제력을 통해 항상 일정 수 이상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대월국에서는 번주 휘하의 군대를 보통 ‘무사단’이라고 부른다. 이 무사단은 평상시 번주의 마음대로 얼마든지 운용할 수 있지만, 국왕이 부른다면 그를 위해 언제든 동원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대월국 군신 간에 맺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계약이다.)의 지휘관 천막은 야전 군영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천막의 크기는 다른 천막 여섯 개를 합쳐 놓은 것보다 크고 넓었고, 천막 외부에는 여러 화려한 그림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천막 앞에는 커다란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짙은 남색 바탕에 노란색 나비가 붉은색 반달을 향해 날아가는 그림이었다. 이는 성산백 (?, 대동 귀족 제도에서 세 번째 작위. 현실 세계 오등작의 ‘백작’과 동일한 위치다.) 심운보 가문의 문장이었다.
성산은 대월국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지방으로 누리마루와 인접해 있었다. 이곳은 대월국의 수도 은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대동 육상 무역의 중심인 초원길과도 다소 거리가 있어, 여러모로 발전이 지지부진한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게다가 북쪽 거록의 야만스러운 두억시니들이 수시로 출몰해 민간인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몇십 년 전, 대동 거의 모든 나라가 ‘수호 동맹’이란 이름으로 힘을 합쳐 율도를 침공했던 ‘계몽 전쟁’에서 대월국 각 번의 무사단은 강운예에 의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무사단이 완전히 전멸당한 번도 있었다. 심지어 대월국 국왕 직속 친위대와 왕자들의 친위대들마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자들이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이나 되었다.
그러나 성산번의 무사단은 북쪽 거록의 두억시니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부분 ‘계몽 전쟁’에 출전하지 않아 큰 화를 면하고 전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계몽 전쟁’이 끝난 지 몇십 년이 지났지만, 대월국 각 번의 군사력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초원길 일대 영토 중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들 모두를 율도에 할양한 데다가, 매년 엄청난 금액의 전쟁 보상금을 갚느라 군사력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각 번은 물론 대월국 전체의 군사력은 나날이 약화되고 있었다.
군사력의 약화는 곧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힘을 잃어가는 대월국 왕실을 바라보던 심운모의 마음속에 야심이 꿈틀거렸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렇다면 변방의 번주라 하여 군주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성산백 심운보는 감히 왕좌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 와중 그의 밑에서 간자(첩보원)들을 부리는 일을 하던 구천락이 누리마루에 새로운 마루한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알려왔다.
‘마루한이 있는 곳에 천심이 향하는 것이고, 천심이 있는 곳에 민심이 따르는 법이다. 나 심운보가 마루한을 모실 수만 있다면 그의 지혜와 힘을 빌어 대월국 뿐 아니라 대동 온 천하를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심운보는 구천락과 그가 부리는 간자들을 모두 풀어 새로운 마루한을 성산으로 납치하려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구천락의 실수로 마루한을 납치하는 데 실패하자, 스스로 무사단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누리마루까지 들어온 것이다.
야전 군영이 꾸려지자 심운보의 지휘관 천막으로 그의 무사들이 모두 모였다.
번주 휘하 무사들의 지위는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다. 번주로부터 넓은 영지를 하사받아 조세권 등 자치권을 부여받는 ‘영주’ , 요새와 성곽을 하사받아 번의 방비를 담당하는 ‘성주’, 번주의 일반 가신이라 할 수 있는 ‘맹약 무사’ , 맹약 무사 아래에서 수련을 쌓으며 번주의 가신이 될 기회를 기다리는 ‘견습 무사’ , 그리고 일반 군사들이라 할 수 있는 ‘번군’ 순이었다.
심운보를 따라 누리마루로 원정 온 지휘관들은 대부분 번주 직속의 맹약 무사들과 견습 무사들이었다.
모든 무사들이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섰다. 탁자 위에는 누리마루 남쪽 숲이 그려진 지도가 놓여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의 도깨비 무사가 지도에 붉은 선과 점으로 표시된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심운보에게 보고했다.
“석식 이후 비호대 무사들이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에 대한 야간 수색을 실시할 것입니다. 이때 진호대 무사들 중 30명이 청음초로 추가 투입되어 바로 이곳에서 매복할 예정입니다. 수색 간 마루한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면 명일 일출 시각을 기점으로 예비대인 진호대와 수호대 무사들이 야간 수색 지점에서 남쪽으로 50리 지점에 있는 이곳 청림촌 일대로 이동하여 차단선을 점령하고 그 일대를 오가는 인원들을 검문하며 마루한을 찾을 것입니다.”
심운보가 날카롭게 잘 손질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노년의 무사에게 물었다.
“구천락이 내게 이르기를 율도 대사관에서 나온 무사들이 아직 이 숲 일대에서 마루한을 찾아다니고 있다 하였다. 우리가 그들과 마주칠 염려는 없겠는가?”
노년의 무사가 대답했다.
“전위대의 보고로는 율도 무사들의 수는 대략 30여 명이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30리 북쪽에 있다 하였습니다. 그들이 야간에 수색을 계속한다 해도 그 정도 병력으로는 밤새 10리 이상 수색하기는 힘들 것이니, 서로 조우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심운보는 무사들을 둘러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마루한을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은 물론, 우리가 누리마루에 군을 이끌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율도국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리되었다가는 큰일을 벌이기도 전에 율도와의 전쟁을 피하지 못할 터. 금일 야간 수색 때나 명일 차단선 점령 때 모든 무사들은 대월국의 갑주를 벗고 나가라. 만일 율도 무사들과 조우한다면 절대로 신분을 밝히지 말고 태진의 무사들인 것처럼 행세해야 한다.”
도깨비 무사들이 일제히 예, 하고 짧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때, 약삭빠르게 생긴 무사 하나가 심운보에게 물었다.
“각하, 아까 붙잡아 온 여자들은 어찌하시렵니까?”
심운보는 얼굴을 찡그리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그런 더러운 것들 생각 없으니 제장들이 알아서 하라.”
그 말에 도깨비들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히죽거리며 웃었다.
진채연은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추운 겨울 저녁 헐벗은 채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진채연 곁에 있던 젊은 혼혈 여인이 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그녀의 몸 위에 포개었다. 체온을 나누어 주려는 것이었다.
그녀의 정성 덕분인지, 진채연의 떨리던 몸이 진정되고 정신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진채연이 눈을 떴을 때, 도깨비와 한자손의 피가 조금씩 섞여 있는 듯한 자기 또래의 혼혈 여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니, 정신이 들어요?”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진채연은 입술을 움찔거려 보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독 기운에 의한 마비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 이 여자들은 또 누구고?’
진채연은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군용 천막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무장한 도깨비들 수십 명이 갑주를 벗고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갑주를 입지 않은 도깨비들 곁으로, 갑주로 완전무장한 도깨비 몇 명이 낄낄거리며 지나갔다.
“야간 수색 때 고생해라. 그동안 저년들 처녀는 우리가 다 따먹을 테니까.”
“엄동설한에 나무뿌리나 캐 먹다 굶어 뒤질 새끼들, 너희 같은 새끼가 먼저 따먹은 것들은 더러워서 안 먹을란다. 저년들하고 씹질 하다가 병이나 걸려 버려라, 퉤~!”
도깨비들은 서로에게 야유를 보냈다.
갑주를 입은 도깨비들은 임시 감옥에 갇힌 여자들을 음흉하게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여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진채연은 지금 자신이 도깨비들의 군영에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도깨비 구천락과 싸우다가 독이 발라진 암기에 맞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 월도는 어디 있지? 내 갑옷과 전포는? 내 말과 짐은......? 아, 말과 짐은 예린이하고 황자님이 가지고 도망갔...... 그런데...... 그것들은 왜 그때 갑자기 나타나서 내 말하고 짐까지 다 가지고 도망간 거야!!!’
진채연의 몸이 갑자기 움찔하고 움직였다. 곁에 있던 혼혈 여인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후 8시, 누리마루 청림촌
“누가 어디서 내 얘기하나? 왜 갑자기 귀가 간지럽지?”
예린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긁적였다.
식사 후 세 사람은 정국의 방 거실에 모였다.
여행 중 긴 머리를 간단하게 뒤로 질끈 묶고 있던 예린은 객잔 점원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길게 푼 머리를 곱게 땋아 멋을 내고 나와 있었다. 옷도 여행용 복장이 아닌 흰색과 분홍색이 섞인 아름다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마치 개량 한복 같으면서도 서양의 드레스 같기도 한 화려한 디자인의 옷이었다.
반면 정국과 영록은 객잔에 준비된 가운처럼 생긴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둘 다 목욕을 한 후 편한 옷차림으로 있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정국이 물었다.
“영록아, 이곳 식사는 어땠니? 변방의 허름한 객잔이라 음식이 네 입에 맞았을지 걱정이구나.”
영록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냐. 너무 맛있었어. 진짜 레알 존맛탱이었어.”
영록의 말에 정국과 예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레알 존맛탱......? 그건 또 무슨 말이니? 좋은 맛의 탱자 같다, 뭐 그런 말이니......?”
영록은 또 말실수했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아차! 이런 말을 얘들이 알 턱이 없지.’
영록은 손사래를 치며 설명을 했다.
“아니, 그게...... 내가 살던 곳에서 어린 애들이 주로 쓰던 말인데, 진짜루, 정말루 엄청나게 맛있다, 라는 말이야.”
예린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
“레알 존맛탱...... 뭔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말이네. 네가 살던 곳에서 쓰는 비속어 같은 거니?”
영록이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맞아, 그거야. 비속어! 어린 애들이 주로 쓰는 비속어 중 하나야!”
정국은 탁자에 놓인 상박하차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난 어려서 주나라 황궁에서만 자라느라 단 한 번도 비속어 같은 걸 쓰거나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런데, 율도 경무관으로 유학 와서 예린이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 이상하게 비속어를 많이 듣고 배우게 되었지......”
예린은 깜짝 놀라 주먹으로 정국의 팔을 쿵, 때리며 나무라듯 말했다.
“어머, 얘가 뭐래니? 영록이가 들으면 내가 무슨 입만 열면 비속어만 쏟아내는 천박한 여자인 줄 알겠다. 내가 대체 무슨 비속어를 그렇게 많이 썼길래?”
정국은 살짝 예린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 예를 들어 ‘포임모’ 라든지, ‘부지부지자’ 라든지, 또......”
갑자기 예린이 정국의 입을 다급히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야!!!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다고 그래!!! 거짓말하지 마!!!”
“야, 나 주나라 황자야! 내가 없는 말 지어내겠어?”
“아니, 그래도 얘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그런 것까지 다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고!!!”
두 사람이 신나게 옥신각신하고 있었지만, 정작 영록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정국의 폭로(?)에 삐친 예린이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정국과 영록은 차를 마시며 더 담소를 나누었다.
그들은 내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객잔에서 준비한 세마 (빌린 말)를 타고 백화까지 가기로 했다.
영록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말을 빌리면, 그 말을 타고 죽 백화까지 가게 되는 거야? 그럼 나중에 그 말 어떻게 돌려줘?”
정국이 대답했다.
“백화까지 가는 길에 일정한 거리마다 마방들이 계속 있어. 그럼 우리는 처음 세마를 한 곳과 같은 상회의 마방을 찾아가 원래 타던 말은 반납하고 새 말로 갈아타면서 가게 되는 거지. 그렇게 계속 말을 바꿔 타면서 가게 되면 몇 주면 백화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근데 아까 여기 대동의 비속어라는 말, ‘포임모’ 하고, ‘부지부지자’는 무슨 뜻이야?”
정국은 말하기가 조심스러운지 약간 망설였다.
“응, 그거 굉장히 심한 욕인데...... ‘너네 엄마 적군한테 끌려가서 임신해서 돌아 왔다며?’ 랑, ‘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새끼’란 뜻이야.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는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정말 치욕적인 말이지.”
영록은 갑자기 운용과 운용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를 다 마신 뒤, 두 사람은 정국의 방으로 강운예의 ‘모두를 위한 격투 무예’ 책을 가져와 함께 보며 책에 나오는 기술들을 함께 연습해 보기 시작했다.
이날 두 사람이 함께 연습한 기술은 ‘입식 격투’였다.
이미 상당한 실력의 무예를 갖춘 정국은 책을 한번 슥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그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 쓰여 있는 ‘잽’ 이란 건 ‘앞 손 정권 가볍게 지르기’인 것 같은데? 그리고 ‘원투 스트레이트’ 는 ‘연속 정권 지르기’이고...... ‘로우킥’은 ‘하단 차기’ , ‘미들킥’은 ‘중단 차기’ ...... 쓰인 말만 다를 뿐 율도국의 격술과 거의 비슷한 거 같아.”
정국은 책에 나와 있는 ‘원투 훅 오른발 로우킥’ 컴비네이션 그림(사진)을 한 번 보고는 그 동작을 물 흐르듯 유려하게 따라했다.
“이 책에서도 왼손 돌려치기(왼손 훅)를 한 후 왼발을 바깥쪽으로 틀고 대각선으로 내디디면서 오른발 정강이로 상대 허벅지를 가격하라고 나와 있네? 경무관에서 발차기를 가르칠 때 상당히 강조하는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는구나. 실제로 발차기를 할 때 디딤발 발목을 바깥쪽으로 틀어주지 않으면 무릎과 허리 회전이 안 돼서 차는 발에 힘도 실리지 않고 상당히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말거든? 이 책은 태상국이 대동에 오시기 전에 이미 네가 살던 곳에 나와 있었다고 했지? 그분의 무예는 대동에 오시기 전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나 보구나.”
정국은 마치 프로 격투기 선수가 섀도우 파이팅을 하는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허공에 입식 타격 기술들을 연습했다. 영록은 그의 모습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정국은 영록과 함께 기술들을 연습해 보았다. 정국이 자세를 시범 보이면 영록이 따라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정국은 자신의 손바닥으로 영록의 기술을 받아 주며 함께 연습하기 시작했다. 영록이 가볍게 주먹과 발차기를 날리면 정국이 마치 미트 (복싱이나 무에타이 훈련을 할 때 트레이너가 팔에 착용하고 수련자의 타격을 받아주는 훈련 도구)를 잡아주듯 손바닥으로 그의 기술을 받아 주는 것이었다.
정국은 영록에게 ‘원투 오른발 미들킥’ , ‘원투 왼발 미들킥’ 동작을 반복적으로 연습시켰다. 처음에는 어설프고 엉성하기만 했던 영록의 모습은 점차 그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땀으로 온몸을 흠뻑 적실 때까지 함께 수련을 했다. 영록은 정국에게서 태하 이상의 특별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함께 수련을 마친 두 사람은 객잔 점원을 불러 시원한 상박하차를 더 가져오게 했다. 힘든 운동 후 마시는 상박하차는 머리는 물론 몸속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영록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런데 대동에서는 아직 칼이나 활을 많이 쓴다고 했잖아? 그럼 무예를 배울 때 아무래도 이런 맨손 싸움 기술보다는 칼이나 창, 활 같은 무기술을 더 많이 배우겠네?”
정국도 목이 많이 말랐는지 시원하게 차를 들이키고는 대답했다.
“아무래도 무예에서 무기술의 비중이 더 높기는 하지. 그렇다고 해서 격술이나 유술, 체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아니야. 두꺼운 갑주를 입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보면 칼이나 창이 통하지 않아서 서로 뒤엉켜 힘겨루기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거든. 진정한 무사라면 무기술과 맨손 격투 기술 모두 언제든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지.”
두 사람은 무예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모양이었다.
그때 예린이 방문을 빠끔히 열고 고개를 쑥 들이밀며 질투 어린 목소리로 성질을 부렸다.
“야! 니네 남자 둘이 사귀냐? 밤새 둘이 떨어지지를 않네, 그냥! 니네 둘 다 빨리 안 자? 내일 아침 먹자마자 출발할 거라며!”
그러고는 뾰로퉁한 얼굴로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정국과 영록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오후 12시, 누리마루 남쪽 숲 대월국 성산번 무사단 야전 군영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진채연은 간신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혀가 굳어 발음이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진채연의 곁을 지켜주던 혼혈 여인은 계속 자신의 몸을 그녀의 몸에 포개며 체온으로 그녀를 덥혀 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반디’라고 소개했다.
“우리 엄마가 날 낳을 때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는데, 그때 천막 밖에 반딧불들이 잔뜩 몰려와 환하게 비춰주어서, 산파 할머니가 나를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데요. 그래서 우리 엄마가 내 이름을 반디라고 지었다 했어요.”
반디는 여전히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로 진채연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비며 혼잣말을 하듯 계속 이야기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조상 할머니 중에 언니 같은 한자손이 계셨데요. 한자손 피가 조금 섞인 분이 아니라 진짜 한자손이요. 그래서 내가 언니를 보자마자 이렇게 돕고 싶어졌나 봐요. 내 안에도 한자손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우리 같이 조금만 더 힘내요, 언니. 우리 이렇게라도 붙어 있으면 얼어 죽지는 않을 거예요.”
사실 진채연도 이전까지 혼혈 유랑민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혼혈 유랑민들은 그저 도둑들이거나 불한당, 사기꾼, 뜨내기, 더럽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힘든 상황 속에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반디를 보며, 어쩌면 자신이 그동안 그들에 대해 틀에 박힌 편견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 고마워요.”
진채연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반디는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십여 명의 도깨비들이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들 모두 그녀들을 노려보며 음탕하게 웃고 있었다.
“자, 어느 년이 가장 먹음직스럽게 생겼을까나?”
도깨비들이 임시 감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감옥 구석으로 도망치듯 몰려갔다.
도깨비 한 놈이 바닥에 누워 있는 진채연에게 다가갔다. 그는 진채연의 몸 위에 있던 반디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던져 버렸다.
“꺄악!”
반디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반디를 집어 던진 도깨비는 더러운 웃음을 지으며 진채연을 내려다보았다.
“더러운 혼혈 잡종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 제대로 된 한자손 년이 하나 있었네그려. 이게 웬 떡이야. 크크크.”
도깨비가 진채연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년 건들지 않는 게 좋아. 아까 전위대가 구천락에게서 뺏어온 년인데, 그년 몸 보면 여기저기 상처가 있잖아? 그게 구천락이 던진 독을 바른 암기에 맞은 거라 하더군. 아직 독기가 다 안 빠진 터라 괜히 반반한 년 보지 따먹겠다고 잘못 좆 박았다가는 정말 좆 되는 수가 있어.”
그 말에 도깨비의 손길이 딱 멈추었다.
“이런, 하마터면 재수 옴 붙을 뻔 했네. 퉤!”
도깨비는 진채연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다른 여자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도깨비들은 여자들을 하나씩 데리고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반디도 어느 중년 도깨비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반디는 애절한 눈빛으로 진채연을 향해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자, 자, 잠깐, 자, 잠깐......!”
진채연은 굳어있는 혀로 소리를 지르며 움찔거렸지만 몸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끌려가는 반디를 바라보며, 진채연은 도깨비들을 향한 분노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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