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7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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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아침나절 쉼 없이 남쪽을 향해 걷던 아이들은 누군가 나무들을 베어갔는지 그루터기들만 여럿 있는 한적한 곳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그루터기를 의자 삼아 걸터앉아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다행히 겨울치고 바람은 적당하게 차가웠다. 덕분에 걸으며 땀도 별로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화까지 가는 동안 너무 추워지면 어쩌지? 내가 가진 옷은 지금 입은 거랑 기숙사에서 가져온 청바지랑 후드티 같은 거밖에 없는데.’
영록은 앞으로 날씨가 추워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잠시 쉬는 동안 정국은 자신의 총을 열심히 손보고 있었다. 그는 총의 둥그런 약실을 옆으로 돌려 빼고는 그 안에 있던 화약들을 털어내고 새 화약들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약실 구멍 하나하나에 다시 탄환을 넣고 작고 가느다란 막대기로 꾹꾹 눌렀다.
영록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영록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정국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유랑민들이나 도적 떼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거든. 그래서 미리 준비해 놓는 중이야.”
영록이 물었다.
“그런데 원래 들어있던 화약은 왜 버려? 아깝지 않아?”
정국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 해 보이며 대답했다.
“약실에 화약을 오래 재어두고 있다 보면 습기를 먹거나 화약이 굳어버려 결정적인 순간에 불발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서 새로 갈아주는 거야. 그리고 화약이 귀하고 비싼 건 맞지만, 내 기준에서 비싼 게 아니니까 괜찮아.”
정국은 은연중에 ‘내가 황족인 걸 잊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록은 정국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그의 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사관에서 온 무사들도 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것과는 많이 다른 총이었어.”
정국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율도 무사들이 가지고 있던 총들은 아마 뇌홍식 강선소총 (퍼커션캡)이었을거야. 전장식이라 한 발 쏘고 다음 발 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지. 그래도 다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수석식 소총 (플린트락)들에 비하면 장점이 많은 편이야. 사거리도 훨씬 멀리 나가고 명중률도 더 좋고, 화약접시에 점화 화약을 넣고 흔들어 줘야 하는 불편함도 없고, 다른 총들과는 달리 비 오는 날에도 어느 정도 사격이 가능하고.”
그는 둥그런 약실을 총 몸에 결합하고 손으로 한 바퀴를 굴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팔혈소총’에 비할 바는 안 되겠지만. 이 총은 한 발 쏠 때마다 재장전 할 필요 없이 8발을 연달아 발사할 수 있어. 황족이나 귀족, 부호가 아니라면 이걸 가질 꿈도 못 꿀 만큼 비싼 물건이지. 태상국이 개발하신다는 ‘기관총’이란 무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 총을 따를만한 무기는 대동 어디에도 없을 거야.”
정국은 자랑하듯 자신의 팔혈소총을 영록에게 내밀며 보여주었다.
영록은 팔혈소총을 구경하다가 문득 강운예가 조폭들에게 빼앗은 M16A1 소총과 5.56mm 탄들을 자루에 넣어 가져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강운예 관장님은 그때 총을 찾았던 이유가 기관총을 만들기 위해 그러신 건가? 겨우 무기 만드는 일 때문에? 여기서는 기관총을 만들지 못해서 그랬던 걸까? 참, 강운예 관장님은 총과 탄뿐 아니라 석유나 건축재료 표본들도 가지고 가셨지? 기관총 말고도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한참을 구경하던 영록이 정국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무사들을 보니까 총을 가진 사람보다 칼과 창, 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더라? 내가 살던 곳에서는 총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칼과 활 같은 무기들은 점차 사라지다가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어. 그런데 대동에는 이미 이런 총들이 있는데 왜 여전히 칼과 활을 쓰고 있는 거니?”
정국은 자신의 겉옷 주머니에 달린 작은 화약통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흑색화약이라는 거야. 수천 년 전 마루한들이 만들어낸 마법의 가루지. 흑색화약이 만들어진 이후 대동에는 총과 포라는 화약 무기들이 나타났어. 많은 종족들이 화약과 화약 무기의 위력을 보고 너도나도 계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정선교라는 마루한이 세운 두억시니의 나라 천제국이 대동의 패권 국가가 되면서 모든 나라들에게 화약과 화약 무기의 개발, 보유를 금지했어. 만일 천제국 몰래 화약과 화약 무기를 만들거나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으면 당장 침략해 멸망시켜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거지.”
정국은 화약통을 다시 겉옷에 매달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천제국은 대동 전역에 있는 유황 굴들을 모조리 채굴해버리거나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게 부셔서 없애 버렸어. 유황은 염초, 목탄과 함께 흑색화약을 만드는 주원료 중 하나였거든. 염초와 목탄은 어떻게든 생산할 수 있지만, 유황만은 자연에서 구하는 방법밖에 없어. 그런데 대부분의 유황 굴들이 사라져 버렸으니 흑색화약 만드는 데 큰 문제가 생겨버린 거야. 그래서 지금은 바다 건너에서 유황을 수입해 가지고 오는 수밖에 없게 돼서, 화약을 많이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됐지. 워낙 비싸서 말이야. 그래서 여전히 전쟁터에서 칼과 활이 쓰이고 있는 거야.”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운예 관장님이 총은 물론 탄까지 챙겨서 가져가려고 하신 이유가 어쩌면 이 이야기와도 관련 있을지 모르겠구나. 대동에서는 흑색화약이 워낙 비싸니까 무연화약과 이를 이용한 기관총 같은 무기를 만드시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 그래도 무연화약은 흑색화약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힘든 일일 텐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영록에게 정국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살던 세상에도 내가 가진 팔혈소총 같은 총이 있니?”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리볼버라고, 이거랑 비슷하게 생겨서 6발을 연속으로 쏠 수 있는 총이 있어.”
정국은 무언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쪽 세상에도 이런 무기가 있었구나....... 그럼 영록이 너도 총을 쏴 본 적이 있어?”
조폭들의 은신처에서 조폭들을 쏘아 죽였던 날의 모습이 그의 눈앞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영록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응, 으응...... 쏴 본 적 있어.”
“오. 정말? 네가 쓰던 총은 어떤 총이었어? 사냥하면서 쏴 본 거야, 아니면 전쟁에 나가서 쏴 본 거야?”
한참을 생각하던 영록이 입을 열었다.
“난 한 번도 사냥을 해 본 적은 없어. 전쟁을 겪어보긴 했지만 전쟁터에서 총을 쏴 본 거는 아니고...... 자세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여기 대동에 오기 직전에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인 적이 있어.”
그의 말에 정국의 표정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정국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에 네가 말한, 네 여자친구를 구하려는 일과 관련 해서 사람을 쏘아 죽였던 거니?”
그의 물음에 영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인 거나 다름없는 거야. 그것도 분명 너의 전쟁이었을 테니까.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죄가 아니야.”
영록이 정국에게 물었다.
“정국아, 너도 사람 쏴 보거나 죽여본 적 있니?”
“있지, 어제도 도깨비 둘을 죽였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심히 내뱉은 정국의 말에 영록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국은 영록을 안심시키려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며 해명했다.
“아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건 아니야. 하나는 우리를 갑자기 기습해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죽인 거고, 하나는 우리를 죽일 듯이 쫓아와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거고. 그들이 먼저 우리를 위협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아, 맞다. 그놈들 다 어제 널 납치하려던 그 도깨비들이야.”
생각해 보니 어제 정국이 자신을 데리고 가던 중 뒤쫓아오던 도깨비에게 총을 쏘던 것이 떠올랐다.
영록이 물었다.
“그럼 그전에도 사람을 죽여 본 적 있어? 처음 사람 죽였을 때 넌 어땠어? 난...... 내가 사람을 죽여 놓고도 마치 내가 죽는 것처럼 무섭고 두려웠는데...... 심지어 남의 인생 끝내놓고도 내 인생 끝난 것처럼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안 들더라고.......”
정국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랬어. 나도 그때 너무 무서웠고, 내가 지금 잘못을 저질렀으니 나중에 무슨 큰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고 불안하고...... 한동안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
그는 하늘을 향해 크게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투같이 누군가가 내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라면, 아니면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려는 상황이라면 내가 살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이기기 위해 반드시 적을 쓰러뜨리고자 내가 가진 모든 인정과 자비를 버려야 할 때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존을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건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라는 거지.”
영록이 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네가 만일 소중한 사람이나 누군가를 지키거나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넌 어떻게 할 거니?”
“내게 소중한 사람?”
정국은 옆에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있는 예린을 살짝 돌아보았다. 그녀는 뭐가 신났는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산새들을 구경하며 귀여운 목소리로 혼자서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밝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만약 예린이를 지켜야 하거나 구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상관 안하고 누구든 두 동강으로 베어버리겠어.”
예린이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대동에서도 살인은 큰 죄야. 내가 아무리 황족이지만 내 나라 주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율도국에서 내가 만일 살인을 저지른다면 처벌을 면키 어려울 거야. 하지만 예린이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나중 어떤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난 아무 고민도 없이 예린이를 구하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겠어.”
정국의 힘 있는 말에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과거, 이런 결심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정국은 혹시 가는 도중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며, 영록에게 자신의 팔혈소총을 주고 총 쏘는 법과 장전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자신은 장검이 있으니 총은 네가 맡으라면서 말이다.
영록은 몇 개월 만에 다시 어깨에 총을 메게 되었다.
그 느낌은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오전 13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구천락이 머물고 있던 개울가로 스무 필의 군마와 대월국 도깨비 군사들이 당도했다. 그들은 본진에 앞서 나온 전위대였다.
전위대를 이끄는 무사가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피로 흠뻑 적셔진 구천락을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마루한도 놓치고 부하들도 다 잃고 네 놈도 아주 만신창이가 다 되었구나. 출발하기 자신에게 맡기면 능치 못한 일이 없을 거라 그리 자신하더니만, 지금 이 꼴은 대체 무어란 말이냐?”
전위대 무사의 말에 주변에 있던 도깨비 군사들도 구천락을 내려다보며 비웃어 댔다.
“아주 꼴좋구나, 구천락.”
“귀족도 아닌 놈이 매번 잘난 척하더니만, 왜, 인제 와서 무슨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건가?”
구천락의 하얀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언제쯤 당도하실 예정이오?”
“각하는 오늘 저녁이면 본진을 이끌고 이 근방에 도착하실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마루한을 추적할 것이니 넌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라.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테니 돌아가 몸에 붕대나 감고 놀고 있으라고.”
도깨비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렸다.
그때 전위대 무사가 무언가 발견했다.
“저거는 또 무언가?”
그가 가리킨 곳에 발가벗겨진 여자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진채연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독 기운에 시달리는지 괴로운 표정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임무에는 실패해도 계집질은 열심이구만? 잡으라는 마루한은 안 잡고 노리개 삼을 계집이나 잡아 온 건가?”
구천락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비웃는 도깨비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계집은 마루한과 같이 있던 율도군 무사요! 이 계집이 중독에서 깨어나면 마루한에 대해 아는 것을 심문하기 위해 잡아둔 것뿐이요! 옷을 벗긴 건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지,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오! 이런 식으로 날 모욕하지 마시오!”
하지만 도깨비들의 조롱은 멈추지 않았다.
“뭐, 겸사겸사 둘 다 하려고 벗겨놓았던 거 아냐? 킬킬킬.”
“발가벗고 정신 못 차리는 계집 옆에 두고 밤새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이거 정말 자네 건강에 큰 이상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구천락?”
구천락은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옆구리의 칼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상대는 스무 명이 넘는 데다가 모두 갑주로 무장까지 한 상태였고, 자신은 큰 부상을 당해 서 있을 기력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빨만 뿌드득 갈았다.
“저 한자손 계집은 우리가 데리고 갈 것이다. 이를 거절하면 정말 네 놈이 재미 보기 위해 부하들 다 죽여 놓고 제 임무마저 망각하고 계집이나 잡아 온 꼴일 테니.”
전위대 무사가 지시를 내리자 도깨비 군사들이 킬킬거리며 다가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진채연을 들어 말 뒤에 짐짝처럼 올렸다.
“어이구 이년 궁둥이 실한 것 좀 봐라.”
도깨비 군사들은 말 뒤에 얹힌 그녀의 엉덩이를 추잡스럽게 쓰다듬으며 더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구천락은 힘없이 전위대가 끌고 온 주인 없는 말에 다가갔다. 그 말을 타고 전위대와 함께 이동하려는 것이었다.
전위대 무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임무에 실패한 놈은 말을 탈 자격도 없다. 본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라.”
도깨비들은 말머리를 돌려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구천락은 끌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아내며 그들 뒤를 절뚝거리며 따라갔다.
오후 6시, 누리마루 청림촌
“좋았어! 이제 마을 도착이다!”
예린은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기분 좋게 소리 질렀다.
아이들은 남쪽 숲 안의 커다란 마을 ‘청림촌’에 도착했다.
청림촌은 이 부근에서 5일 정기 장터가 열리는 유일한 마을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오늘이 장날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모랑 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종족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자, 이게 숙소부터 먼저 잡자. 며칠 못 씻었더니 슬슬 힘들어지네. 여자는 따뜻한 물로 자주 자주 씻어줘야 한다구. 그러니 무조건 목욕 가능한 곳으로! 될 수 있으면 여기서 가장 고급진 곳으로! 알았지, 정국아?”
예린의 말에 영록이 물었다.
“숙소면, 주막을 말하는 거니?”
그 말에 예린과 정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주막......? 그게 뭐야?”
“왜, 잠도 자고, 식사로 국밥도 주고, 주모도 있고, 그런 데를 주막이라고 하지 않아? ......아닌가?”
“주막은 또 뭐고 주모는 또 뭐래? 국밥은 또 무슨...... 네가 살던 곳에서는 여행자들 쉬어 가는 곳을 주막이라고 불러?”
영록은 옛날 사극에서 보던 시대와 지금 이 대동이 완전 다른 곳이라는 걸 잠시 잊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잠깐 착각했나 봐. 그러면 여기서는 여행자들 숙소를 뭐라고 부르니?”
예린이 대답했다.
“일반적인 숙소는 여관, 시설이 좋고 비싼 곳은 보통 객잔, 객관이라고 불러.”
“여관, 객잔...... 내가 살던 곳이랑 비슷하게 부르는 것 같네.”
“정말? 그럼 네가 살던 곳에서도 시설 좋은 멋진 객잔들이 많이 있니? 침대랑 안락의자들은 물론이고 방에 기본적으로 화장실하고 목욕실 다 딸려 있고, 당연히 방까지 목욕물이랑 식사랑 차랑 다과까지 시키는 데로 다 올려주고 외출할 때 세마나 가마 바로 바로 준비해주는 그런 데가 있어?”
영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있지. 난 아직 어려서 가보지는 못했지만, 호텔이란 곳들이 보통 그런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고 들었어.”
“호텔......? 서비스.......? 그건 다 무슨 말이라니.......?”
예린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영록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가장 크고 으리으리해 보이는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마치 중국 사극에서 보던 대궐같이 생긴 5층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현실 세계의 동양과 서양식 건축술이 적절히 조화된 객잔의 내부는 아름다운 조각과 그림으로 꾸며진 벽, 세련된 모양의 기둥과 계단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영록은 중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1층에 식당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음식을 먹고 있는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 세계의 호텔 로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창가의 탁자에는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조용히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다모랑들도 있었고, 영록을 닮은 한자손들도 있었고, 예린을 닮은 아리랑들도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하얀색 피부의 도깨비도 보였다.
여행자 옷차림의 어린아이들이 객잔으로 들어오자 점원으로 보이는 다모랑이 다가와 친절하게 그들의 짐을 들어주며 안쪽으로 안내해주었다.
‘뭐야, 진짜 호텔에서 하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
영록은 이 모든 광경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정국은 수표같이 생긴 종이 한 장을 점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하루 묵을 거고, 가장 크고 좋은 방으로 세 개 준비해주게. 목욕물은 짐 푸는 데로 바로 올려주고, 식사는 목욕 후에 각자 방으로 푸짐하게 가져다주게. 내일 아침 식사도 방으로 부탁하고...... 그리고 율도국 백화까지 세마를 두 마리 낼 테니 내일 점심 전까지 준비해 줄 수 있도록 하고 또...... 아, 이만하면 된 거 같군. 남은 금액은 자네가 갖게나. 대신 차하고 다과 좀 넉넉히 넣어주고. 차는 상박하차가 좋겠군. 시원하게 해서 말이야.”
수표를 받아본 다모랑 점원은 크게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지고 두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그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정국에게 굽실거렸다.
“분부하신 대로 모두 준비하겠습니다요. 아무쪼록 저희 객잔에서 편히 쉬다 가소서.”
다모랑 점원은 수표를 받아 들고 아주 신이 난 표정이었다. 도대체 객잔 비용이랑 세마 비용 다 빼고 그가 갖게 될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록이 보기엔 로또 복권 당첨된 사람 표정이 저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예린이 배낭에서 찬합들을 꺼내어 다모랑에게 건넸다. 멧돼지 고기 등 여행용 식량이 들어있는 찬합이었다.
“이거 우리가 여행하면서 먹을 건데, 상하지 않게 서늘한 곳에 보관했다가 저희 내일 떠날 때 주시겠어요?”
다모랑 점원은 기쁘게 찬합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예예, 물론입죠. 내일 잊지 않고 챙겨 드리겠습니다요. 그럼 일단 저희 객잔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요. 저를 따라 오소서.”
아이들은 다모랑 점원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올라갔다.
가장 크고 좋은 방이란 말에 영록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너무 돈 많이 들어가는 거 아냐? 여기 그냥 보기에도 무지 비싸 보이는데......?”
그 말에 정국은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영록아,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이 정도 돈 쓰는 건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의 귀에 바싹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마루한들은 이보다 더 귀하게 대접을 받아도 돼. 이 정도에 절대 부담 갖지 마.”
정국은 영록을 보며 씩 웃어주었다.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영록은 정국의 옆방을 받았다.
방으로 들어온 영록은 그 호화로움에 깜짝 놀랐다.
‘와! 5성급 호텔 스위트룸이 이 정도일까? 그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의 방은 경월당에서 묵었던 방만큼 넓고 고급스러웠다. 방은 침실과 거실이 분리되어 있었고, 화장실과 목욕실까지 딸려 있었다. 침대도 경월당에서 자신이 썼던 것 만큼이나 크고 푹신했다.
영록은 신기한 듯 자신의 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잠시 후 뜨거운 목욕물이 들어왔다. 다모랑 점원들은 넓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그 옆에 있는 커다란 물통 3개에도 물을 채워 주었다. 물통 1곳은 뜨거운 물, 그 옆에는 미지근한 물, 마지막은 찬물을 담아 주었다.
대동에 온 이후 영록은 샤워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곳 목욕 방식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중이었다. 대동에서는 목욕할 때 아직도 바가지를 사용해 몸에 물을 뿌리며 씻고 있었다.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아마 이렇게 씻으셨겠지? 이 정도 쯤이야 뭐.’
신기한 것은 대동에도 비누가 있다는 점이었다. 부르는 이름 역시 비누 똑같았다. 다만 비누의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 파는 것처럼 일정한 모양이 아닌, 무슨 재활용비누처럼 모양과 크기, 색이 모두 가지각색이었다.
게다가 ‘물머리비누’라고 샴푸 비슷한 것도 있었다.
‘물머리비누라니, 이 이름 지은 사람 혹시 북한 사람 아닐까?’
영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목욕을 했다.
씻고 목욕하는 건 괜찮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화장실이었다.
경월당이나 이 객잔처럼 큰 건물은 하수처리 시설이 되어 있는 듯 모두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수세식 변기는 영록이 사용하던 좌식 양변기가 아닌, 쭈그려 앉아 볼일을 봐야 하는 동양식 대변기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앞에 매달린 동아줄 같은 걸 잡아당기면 물이 내려가는 것도 상당히 비슷했다.
현실 세계의 그것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대동의 변기가 약간 더 깊고 양변기처럼 물이 더 많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쭈그려 앉아 볼일을 봐야 하는 동양식 대변기를 거의 이용해 본 적이 없는 영록은 매번 화장실 갈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뒤지’라고 불리는 이곳의 휴지는 현실 세계에서 쓰던 것보다 훨씬 꺼끌꺼끌하고 잘 안 닦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중에 정국이한테 이게 대동 화장실 기술의 한계인지 물어봐야겠다. 대동의 황족들이나 부호들은 현실 세계의 비데랑 비슷한 걸 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니까.’
목욕을 하고 나오니 객잔 점원이 방문을 두드렸다. 이제 식사를 가져다 드려도 되는지 묻기 위함이었다.
식사는 바로 들어왔다. 객잔의 음식은 경월당처럼 코스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제법 풍성하고 맛도 좋았다. 비벼 먹는 국수 같은 요리도 있었고, 불고기 같은 구이부터 닭다리를 매콤하게 조린 요리까지 상당히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영록이 식사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쯤, 하늘의 해는 점점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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