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58화 (58/217)

〈 58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7일 (1)

* * *

­ 오전 9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밤새 영록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발가벗겨진 유민이 조폭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영록에게 소리쳤다.

‘야, 지영록! 지영록! 나 좀 도와줘! 야 지영록! 지영록!’

꿈속의 영록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영록이 아무리 소리치고 발버둥 쳐봐도 아무 소용없었다.

조폭들에게 둘러싸인 유민이 어디론가 멀리 끌려가기 시작했다. 조폭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유민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킬킬거렸다. 유민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영록을 향해 뒤돌아보며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야, 지영록!’

하지만 영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유민은 조폭들에게 끌려 어둡고 캄캄한 어둠 너머 어느 작은 방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칠게 문이 닫혔다.

“안 돼!”

영록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잠에서 깨어 짐들을 정리하고 있던 정국과 예린은 영록의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얘 왜 이래?”

“악몽이라도 꾸었니? 표정이 안 좋은데?”

영록의 새하얘진 얼굴에는 식은땀이 뻘뻘 흐르고 있었다.

“어...... 안 좋은 꿈을 꾸었어.”

영록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그런 영록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과 예린, 영록 세 사람은 남은 멧돼지 고기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영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모랑의 차를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예린이 아는 체를 했다.

“이거 상박하차네? 다모랑들도 상박하차를 마시고 있었구나.”

“어, 이 차를 알아? 누리마루 말고도 이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 또 있어?”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박하차는 서남쪽 대륙에서 수입되는 식물로 만든 귀한 음료라 일반인들이 먹기는 힘들지만, 너나 우리는 백화에 가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 무예 수련한 후에 목마르고 갈증 날 때나 공부하느라 머리 아플 때 먹으면 딱 좋아서 나도 자주 마시고 있지.”

세 사람은 차를 다 마신 뒤 배낭과 짐들을 말안장에 싣고 남쪽을 향해 출발 준비를 했다. 예린은 들고 다니기 귀찮았는지 자신의 칼과 활, 전통까지 모두 말 위에 실어 버렸지만, 정국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총과 장검만은 그대로 등에 메고 가기로 했다.

정국이 말고삐를 붙들고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밤새 멀리서 횃불들이 보이던데, 율도 대사관 무사들일까?”

예린이 대답했다.

“무사들이 지금도 영록이 찾는 중이겠지. 마루한 같이 최고 귀빈을 잃어버렸는데, 책임을 아는 무사라면 당연히 잠 안 자고 밥 안 먹으면서 찾아다녀야 하는 거 아니겠어?”

자신 때문에 많은 무사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에, 영록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그 무사들과 만나 같이 가면 안 될까? 나 때문에 공연히 그 사람들이 무슨 처벌이라도 받으면 안 되잖아.”

하지만 예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 사람들 사정이고, 우리한테도 우리만의 사정이 있거든? 영록이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따라서 우리 아빠한테 가면 돼.”

그러고는 예린은 정국 옆에 딱 붙어서 지들끼리 재잘거리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록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을 따라 걸었다.

­ 오전 10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다모랑들은 두억시니 만큼 자손이 무척 귀했다. 평균 1, 2명에서 많게는 십여 명까지 자식들을 낳는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다모랑은 평생 1명의 자식을 갖기도 힘들었다.

다모랑은 다른 종족들에 비해 늘 수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태초부터 살아오던 누리마루 일대에서 더 뻗어 나가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만 계속 모여 살고 있었다. 물론 야망을 품고 율도국이나 주변 나라로 홀로 떠나는 다모랑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타국에서 자수성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현재 누리마루는 특별한 국가 체제를 이루지 않고 ‘대장로’라 불리는 나이 많은 이를 지도자로 추대해 나라의 대소사들을 주관하게 했다. 평상시 군대도 아주 최소한 수만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국경 일대를 지키는 군대도 딱히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모랑들의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 특히 누리마루 남쪽 숲 인근은 대동을 떠도는 수많은 유랑민이 몰래 들어와 살고 있었다.

누리마루 남쪽은 ‘초원길’이라 해서 대동 동서남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역로가 지나고 있었다. 엄청난 경제적 이권이 달린 초원길의 지배권을 두고 예로부터 수많은 국가들이 다투어 왔다. 율도가 초원길의 패자가 되어 이곳을 장악한 지는 불과 수십 년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초원길을 장악한 율도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군역, 세금 납부 등 정당한 의무를 다하며 율도의 국민이 되던지, 아니면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율도에 귀의했다. 하지만 대대로 초원길에서 도적질을 해오던 자들이나 지난 전쟁에서 태진, 대월국, 천제국 등 도깨비와 두억시니들과 연합했던 자들, 강운예의 정치 철학에 반대하거나 그와 대립해 오던 자들은 율도의 제의를 거절하고 그곳을 떠났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이들 대부분이 정착한 곳이 바로 초원길의 북쪽,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였다.

유랑민들의 대부분은 혼혈인들이었다. 두억시니와 다모랑, 미호랑의 혼혈인 두두리들처럼 종족이 확실히 구별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사람이 도깨비나 두억시니와 어느 종족의 혼혈인지, 아니면 한자손이나 아리랑과 어느 종족의 혼혈인지, 그것도 아니면 혼혈과 혼혈 사이에서 태어난 또 다른 혼혈인지 확연히 종족을 구별하기 힘든 이들이 더 많았다.

수백 년 전부터 대동에 있는 모든 이들을 종족의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다 같이 ‘사람’이라고 칭하자는 의견이 크게 대두되고 있었지만, 이곳 혼혈 유랑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나는 어느 종족, 어떤 부족 누구누구다!’

라고 자신의 소속을 강조하고 서로의 소속을 따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신의 생김새만큼이나 존재 자체가 뚜렷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있어, 어느 종족, 혹은 어떤 부족 안에 들어가 있다는 소속감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이들은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 단위로 모여 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숲의 빈터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사는 예도 있었지만, 대부분 거대한 숲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과거 초원길에서 했던 것처럼 여행객이나 작은 상단을 상대로 강도질을 벌이며 연명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최근 들어 이런 유랑 생활에 지친 많은 이들이 율도로 들어오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율도는 종족에 따른 차별 대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진이나 대월국의 도깨비들은 다른 종족들, 특히 두두리와 혼혈인들을 무시하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천제국, 거록의 두억시니들은 이들을 노예나 전쟁터의 고기 방패, 그도 아니면 먹잇감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주나라 등 대동 서부의 한자손의 나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동 동부의 주신, 비류, 사비, 아랑 등 아리랑의 나라들도 혼혈인들을 대놓고 박대하지는 않았지만 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두두리들이나 혼혈 유랑민들은 그저 대동을 떠도는 골칫덩어리 정도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하지만 혼혈 유랑민들이 대동을 떠돌며 어렵게 살아갈 수밖에 없던 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혼혈 유랑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때는 두억시니와 도깨비들이 초원길을 장악하고 있던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대동 여기저기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초원길을 통해 자기 나라로 끌고 오거나 다른 나라로 판매했다.

그 와중 두억시니, 도깨비들에게 붙잡혀 온 여러 부족의 노예들에게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혼혈인들이 태어났다.

노예나 군사로 쓸 수 없는 혼혈인들을 초원에 버려졌다. 인육을 탐하는 두억시니들은 그들을 식량으로 삼아 잡아먹기도 했다.

그렇게 초원길에 남게 된 이들이 혼혈 유랑민의 시초가 되었고, 이후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여러 사연을 가진 이들이 초원길로 모여들며 엄청난 수를 이루게 되었다.

여러 종족들이 초원길에서 한데 뒤엉켜 오랜 기간 살아가다 보니, 세대를 거듭할수록 혼혈 유랑민들의 모습은 정확히 어느 종족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혼혈 유랑민들은 자신의 선조는 어떤 종족이었으며, 자신 또한 그 종족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만일 어느 유랑민이

“나는 한자손 출신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에이, 그렇게 생겨가지고 무슨 한자손이야? 한자손은 너처럼 생기지 않았어!”

라고 반박한다면, 유랑민들은 자신의 출신을 부정당했다며 상대방에게 죽일 각오로 달려들곤 했다.

혼혈 유랑민들에게 선조의 출신은 그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다.

누리마루 남쪽 숲 깊숙한 곳, 작은 숲길이 지나는 곳에 혼혈 유랑민들의 마을이 있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그들이 사는 둥그런 이동식 천막 십수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천막 주변에는 고기들과 동물 가죽들을 장대 위에 펼쳐 매달아 놓은 것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그들이 키우는 것으로 보이는 큼지막한 누렇고 시커먼 개들이 주인이 먹고 버린 고기 뼈다귀를 입에 물고 천막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다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천막 안에서 쉬고 있는지,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을 쪽으로 수백 명의 대월국 군사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철컥철컥 무기 부딪히는 소리와 저벅저벅 군사들이 걷는 소리,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자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대월국의 도깨비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혼혈 유랑민들을 경멸에 찬 눈초리로 쏘아보며 지나갔다. 혼혈 유랑민들은 혹여 그들이 자신들에게 괜한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는지, 도깨비들을 쳐다보는 것을 그만두고 천막 안으로 쏙 들어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군사들 행렬에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자가 있었다. 누가 봐도 그가 도깨비들의 지휘관이란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법한 휘황찬란한 모습이었다.

그의 갑주는 다른 도깨비들과 마찬가지로 은색이었지만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고, 갑옷과 투구, 다리의 각반에까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여럿 붙어 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가 탄 말에도 황금색 실로 전쟁터 무사들의 모습을 수놓은 붉은색 비단이 감싸여 있었다.

도깨비들의 지휘관은 천막 앞에 걸려 있는 고기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혼혈 유랑민들이 겨우내 먹기 위해 건조하는 중인 듯 했다.

그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행군하던 군사들이 모두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사들로 보이는 도깨비들 몇 명이 지휘관에게 다가왔다. 지휘관이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가지고 온 식량이 총 며칠 분이지?”

“3일분입니다, 각하.”

‘각하’라 불린 도깨비 지휘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혼혈 유랑민들의 천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작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판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식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군사들 풀어서 모조리 가지고 와. 저항하는 짐승 놈들은 죽여 버리고. 아, 끌고 갈만한 것들이 있으면 끌고 와도 좋아.”

지휘관의 말에 도깨비 무사들이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도깨비들이 무기를 들고 천막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 모두 킬킬거리고 있었다. 한두 번 약탈해 본 게 아닌 듯, 도깨비들 모두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혼혈 유랑민들은 도깨비들 발아래 무릎 꿇고 싹싹 빌며 애걸했다.

“나으리, 이건 저희 가족 겨우내 먹이려고 숲에서 며칠간 고생고생하면서 간신히 잡아 온 겁니다. 이걸 가져가시면 저희 가족 다 굶어 죽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것만은 봐주십시오, 나으리.”

도깨비들의 얼굴엔 일말의 인정도 보이지 않았다.

“네깟 놈들이 굶어 죽든 말든 우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리고 이 숲에 널린 게 산짐승인데, 또 사냥해 오면 될 거 아니냐?”

도깨비들은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하는 혼혈 유랑민들을 발로 걷어차고 창 자루로 후려치며 음식들을 빼앗아 갔다.

혼혈 유랑민 중 유독 피부가 하얀 남자 하나가 나서서 음식을 빼앗아 가는 도깨비들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나으리! 저도 나으리들과 같은 도깨비입니다! 제 선조 모두 도깨비셨고 제 부친은 도깨비들과 함께 율도와의 전쟁에 참전하시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항상 도깨비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왔구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도깨비입니다. 도깨비가 같은 도깨비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저희 먹을 것들을 돌려주십시오, 제발!”

그 말에, 뒤에 있던 말 탄 도깨비 무사 하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뭐, 네가 도깨비라고?”

도깨비 무사가 장자검 (길고 얇은 찌르기용 칼, 도깨비들의 전통적인 칼로 위로 갈수록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워지는 삼각형 모양이다. 서양의 에스터크와 매우 유사하다.)을 빼어 남자의 턱에 가볍게 갖다 대었다. 날카로운 칼날 끝에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 전해졌다.

도깨비 무사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어딜 봐서 우리와 같은 도깨비란 말이냐? 너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네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나 있느냐? 개울물에 한 번이라도 네 모습을 비춰 보았으면 알 것 아니냐? 네 몸에 난 더러운 털과 추하게 낮은 코하며 작은 눈까지, 네가 어딜 봐서 도깨비란 말이냐?”

그 말에 남자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나으리, 저는 도깨비가 맞습니다. 제 부모님으로부터 제가 도깨비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늘 귀가 닳도록 들으며 커 왔습지요. 부디 같은 도깨비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저와 저희 마을 사람들에게 제발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도깨비 무사는 헛웃음 소리를 내며 실컷 웃고는 주변의 군사들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군사들이 창 자루와 칼집으로 남자를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으리!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같은 도깨비들끼리 이러지 마십시오!”

남자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도깨비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를 구타했다.

“이 자식이 끝까지 자기 보고 도깨비라네? 에이~ 퉤! 우리 도깨비들은 너같이 더럽게 생기지 않았어! 감히 우리들을 능멸하려는 거냐?”

이때 천막 쪽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도깨비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 반반하게 생긴 젊은 여자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들이 울며불며 막아서자 도깨비들은 무기들을 휘두르며 그들을 위협했다.

“죽기 싫으면 방해하지 마라! 이년은 여기처럼 더러운 네놈들 천막에서 사는 것보다 우리가 데리고 다니는 게 더 호강일 테니, 좋은데 시집보냈다고 생각하라고. 큭큭큭.”

여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무기를 든 도깨비 앞에서 감히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 순간, 도깨비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던 남자가 한 도깨비 군사의 발목을 잡아 넘어뜨렸다. 도깨비는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놓치고 말았다. 남자는 재빨리 땅에 떨어진 창을 잡아들고 소리쳤다.

“나도 너희들과 같은 도깨비라고! 그런데도 먹을 걸 빼앗아 가는 것도 모자라 사람들까지 끌고 가려고 해? 야 이 들개에 뜯어 먹혀 죽을 놈들아!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남자는 창끝을 길게 잡고 주변에 있는 도깨비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붕붕 휘둘렀다. 그가 창 다루는 법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안 도깨비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남자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어, 그래, 어디 너 죽고 나 죽자며? 그럼 어디 죽기로 한 번 덤벼봐!”

“그래가지고 어디 우리한테 생채기 하나라도 낼 수 있겠어? 더 힘껏 휘둘러보라고, 병신아!”

군사들의 조롱에 화가 난 남자가 창 자루를 높이 들고 도깨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악! 다 죽어 버려!”

남자가 자신의 앞에 있는 도깨비 군사의 머리를 정면으로 내려쳤다.

하지만 남자의 창은 도깨비 머리가 아닌 맨땅에 내리꽂히고 말았다. 도깨비 군사가 단 한 발짝 오른쪽으로 옮긴 것만으로 너무나 쉽게 창을 피해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입에서 붉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어느새 도깨비의 칼이 그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나, 나도 도, 도깨비라고, 그런데 어떻게......!”

남자는 억울한 눈으로 자신을 찌른 도깨비 병사를 노려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도깨비 지휘관이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 낭비하지 마라! 음식과 데려갈 짐승들만 빨리 챙기고 목적지로 이동해야 한다. 저항하는 놈들은 그냥 다 죽여!”

도깨비들은 ‘예!’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찌르고 베기 시작했다. 이내 천막 일대는 혼혈 유랑민들이 흘린 피로 붉게 적셔졌다.

도깨비들은 혼혈 유랑민들에게 빼앗은 음식들을 말 안장 옆에 실었다. 그리고 붙잡아 온 십여 명의 여자들의 손과 목을 밧줄로 묶어 한데 엮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녀들의 가족들은 입을 막고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다 끝났으면 출발한다!”

도깨비들은 다시 대오를 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행렬의 중간에 끼어 끌려가고 있었다. 도깨비 군사들은 여자들을 보면서 자신의 아랫도리를 슥슥 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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