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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춘추 - 리부트-57화 (57/217)

〈 57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6일 (5)

* * *

­ 오후 6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두 도깨비들은 진채연의 양쪽에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녀는 시야가 분산되지 않도록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순간, 도깨비의 손이 휙, 움직이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암기 하나가 그녀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이 비겁한!”

진채연이 창 자루로 암기를 쳐내는 순간, 도깨비가 마치 뱀처럼 빠르고 교묘하게 땅을 구르고 기며 그녀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미 도깨비는 월도의 안쪽까지 들어와 그녀의 다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둥실 날아올랐다.

진채연은 월도를 짧게 고쳐 잡고 땅바닥에 엎드린 도깨비에게 반격을 가했다. 하단공격이 막히자 도깨비는 마치 용수철처럼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몇 개의 암기를 더 날렸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암기를 간단하게 쳐내버리고는 무서운 기세로 도깨비를 향해 월도를 휘둘렀다.

붕~!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진채연의 월도가 도깨비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었다. 도깨비가 오른손의 칼과 왼팔의 금속 보호대로 간신히 공격을 막는가 싶더니, 금세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한참을 날아가 떨어졌다.

진채연이 넘어진 도깨비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갑자기 왼쪽 팔에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구천락이 던진 암기가 그녀의 팔에 박힌 것이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며 팔에 박힌 암기를 뽑는 사이, 구천락이 칼을 휘두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진채연은 창 자루 끝으로 구천락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그의 머리를 향해 월도를 반원을 그리며 크게 내리 베었다. 구천락은 마치 고양이가 재주넘기라도 하듯 몸을 뒤로 비틀어 뛰며 간신히 피했다.

진채연이 쉴 새 없이 월도를 휘둘러보았지만 구천락은 약 올리듯이 그녀의 공격을 계속 피해내고 있었다.

“제길!”

아까 암기에 맞은 팔이 점점 심하게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왼쪽 팔뚝 부분 하얀 전포는 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어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마, 도깨비들이 암기에 독을 바른 건가?’

화살이나 암기 등에 독을 바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무사들은 개인용 응급치료 약상자에 해독제나 중독 억제제 등을 함께 휴대하곤 했다.

진채연도 품 안에 중독 억제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꺼내 마실 겨를이 없었다.

진채연이 구천락을 내리치려는 찰나, 뒤에서 무언가가 그녀의 월도를 강하게 낚아챘다.

뒤돌아보니 도깨비가 채찍으로 그녀의 월도를 휘감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잠시 봉쇄되자, 구천락이 다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날리려는 순간, 진채연이 월도 자루를 한 손으로 짧게 고쳐 잡고 몸을 뒤로 비틀었다. 팽팽하게 월도를 잡아당기고 있던 도깨비의 채찍이 느슨하게 풀려버렸다.

도깨비가 놀라 채찍을 다시 잡아당기려 했지만 진채연이 훨씬 더 빨랐다. 그녀는 창 자루 끝 뭉툭한 부분을 도깨비의 가슴을 향해 강하게 찔러 넣었다.

“욱!”

도깨비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에 쥔 채찍을 놓쳐버렸다.

진채연은 그대로 다시 두 손으로 월도를 잡고 도깨비의 몸을 사선으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쫘아악!

도깨비의 몸뚱이는 검붉은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대각선으로 두 동강 나버렸다.

진채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월도에 감겨있던 채찍을 풀어 땅바닥에 팽개치고는 뒤에 서 있는 구천락을 노려보았다.

“이제 혼자 남았네? 과연 네 놈 도깨비들도 진짜 무사답게 일 대 일 단기접전을 할 수 있는지 어디 지켜보지.”

진채연은 구천락의 얼굴을 향해 월도를 겨누었다. 구천락은 입술을 깨물며 자세를 고쳐 잡고 그녀와 대적할 준비를 했다.

정국과 예린은 아까 자신들이 멧돼지를 구워 먹던 개울 가까이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곳에 가까워졌을 때쯤, 정국이 다시 예린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는데?”

예린도 같은 것을 느낀 듯 했다.

“응, 분명 무기 휘두르는 소리였어.”

두 사람은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수풀 사이로 개울가를 훔쳐보니, 과연 그곳에서 두 사람이 무기를 휘두르며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하얀 피부의 도깨비, 한 사람은 한자손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두 사람 다 싸우다 다쳤는지,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헉, 채연 언니?”

예린은 진채연을 알아보고 입을 가리고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아는 사람이야?”

“응, 우리 엄마 호위 무사. 엄마가 나 찾으려고 채연 언니를 여기로 보냈나 봐. 근데 언니가 왜 여기서 도깨비랑 싸우고 있지? 도깨비들이 아까 우리한테 그랬던 것처럼 자기들 봤다고 그냥 막 죽이려 든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응? 예린아, 저기 봐봐!”

정국이 가리킨 곳을 보니 그들이 찾던 어린 마루한, 영록이 말 위에서 진채연과 도깨비가 싸우는 모습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채연 언니가 저 마루한을 먼저 찾아서 보호하고 있었나 봐!”

예린의 말에 정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지? 일단 저 무사를 도와줘야 하나?”

정국은 배낭에 매달린 총을 꺼내어 약실을 확인해보려 했다.

그때 예린이 다급히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아니...... 언니한테 붙들리면 다 끝장이야! 아빠 만나보기도 전에 그 즉시 백화로 끌려가게 될 거라고!”

“예린이 너 아는 사람이라며? 근데도 안 도와줄거야?”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저 언니 실력이면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저런 도깨비쯤은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야. 우리 목표는 저 마루한하고 그 책을 가지고 아빠한테 가는 거잖아? 그러니 저 두 사람이 정신없이 싸우는 틈에 얼른 저 녀석 데리고 여기를 떠야 해!”

정국은 잠시 망설이다가 예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가며 구천락과 진채연이 싸우는 곳을 크게 우회해 영록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넋을 잃고 싸움 구경을 하고 있던 영록은 정국과 예린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말 가까이 다가간 정국은 재빨리 고삐를 붙들고 숲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히히히힝~!

말 울음 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쳤다.

한참을 어울려 싸우던 진채연과 구천락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칼부림을 멈추었다.

둘은 잠시 서로 멀찍이 떨어진 후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정국과 예린이 진채연의 말을 잡아끌고 숲속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말 위에 있던 영록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몰라 크게 당황한 얼굴로 진채연을 향해 뒤돌아보고 있었다.

“아, 예린이 너......? 어.......? 황자님도......?”

진채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망하게 그 둘을 바라보았다.

말 위에는 진채연의 무기와 짐들이 고스란히 있는데, 아이들은 그런 것도 상관 안 하고 모두 다 들고 튀고 있었다.

구천락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정국, 예린과 진채연을 번갈아 쏘아보고는 영록을 데리고 가는 정국과 예린의 뒤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어디 가려고!”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구천락을 쫓으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핑 돌며 온몸이 마비되는 듯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차, 아까 당한 독이 몸에 퍼진 건가?’

진채연은 월도를 지팡이 삼아 기대고 서서 품 안에서 급히 중독 억제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독에 당한 상태에서 너무 많이 몸을 움직인 후였다. 이미 독기는 온몸에 두루 퍼져 있는 듯 했다.

중독 억제제를 마셨지만 몸과 정신은 점점 말을 듣지 않았다. 월도를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의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쓰러졌다.

말을 끌고 가던 정국이 뒤돌아보니, 도깨비 구천락이 무서운 기세로 그들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정국이 급히 배낭에서 총을 꺼내 들며 예린에게 소리쳤다.

“먼저 가고 있어! 저 녀석 처리하고 따라갈게!”

예린이 말고삐를 끌고 도망가는 사이, 정국은 총을 들고 도깨비를 겨누어 섰다. 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본 구천락은 그 자리에 서서 화난 표정으로 정국을 노려보았다.

“꼬마야, 방해하면 죽는다. 어서 비켜라.”

그의 말에 정국은 코웃음을 쳤다.

“너나 죽기 싫으면 그만 쫓아오시지, 도깨비 씨?”

구천락은 정국이 든 총을 노려보며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차피 한 발 밖에 못 쏘는 그놈의 총, 격발되는 거 보고 피하면 그만이야.”

“흥, 그게 말처럼 쉽나? 피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피해 보시던가.”

구천락이 점점 정국에게로 다가왔다.

정국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도깨비의 몸이 마치 귀신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탕!

첫 번째 탄을 눈 깜짝할 사이 피해버린 구천락이 칼을 들고 정국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정국이 가진 총이 여느 다른 총들처럼 장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전장식 소총 같은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국의 총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엄지로 총 위에 있는 장전 망치를 뒤로 당겼다. 그러자 총 몸통의 둥그런 약실이 회전하며 다음 장전된 탄이 준비되었다.

정국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도깨비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노려보며 총을 조준했다.

구천락은 그걸 보고 완전 경악했다.

탕!

탄이 왼쪽 어깨를 꿰뚫고, 구천락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졌다.

정국은 도깨비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다가가 칼로 확인 사살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예린과 마루한이 이미 시야에서 안 보일 정도로 멀리 가버린 것을 눈치채고는 다급히 발걸음을 돌려 그 뒤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국과 예린은 영록을 데리고 한참을 달려갔다. 마냥 서쪽을 향해 달리던 이들은 어느 때인가부터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누리마루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정국과 예린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가던 영록이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야, 니들 뭐 하는 거야? 아까 그 누나 너희들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거라던데, 너희 갑자기 나 데리고 어디 가려는 거야?”

예린이 말고삐를 쥐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너? 우리 아빠한테 데려가려는 거야!”

“근데 저 누나는? 저 누나는 왜 놔두고 가는 건데?”

“저 언니한테 걸리면 널 우리 아빠한테 데려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붙들려 갈지도 모르거든? 일단 우리는 저 언니하고 같이 있으면 안 돼. 그럼 나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다 큰일 날 수도 있어.”

영록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오늘따라 나 데려가겠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너희 아빠는 또 누군데? 너희 아빠가 누구길레 나를 데려간다는 거야?”

“우리 아빠? 율도 태상국 겸 전군 대원수 강운예! 이제 됐지? 됐으면 그만 좀 물어봐. 뛰면서 말하느라 숨차 죽겠어!”

영록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강운예 관장님이 니 아빠라고? 그럼 니가 그분 딸이야?”

“관장님은 또 뭐야? 우리 아빠 경칭은 태상국 아니면 대원수인데! 아무튼 그분이 우리 아빠 맞아!”

“그런데 지금 너희들이 날 그분한테 데리고 가려는 거라고?”

“그렇다니까!”

영록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강운예 관장님한테 데려간다면서 왜 지금 날 누리마루 쪽으로 데려가려는 거야? 이미 관장님은 백화로 돌아가셨다는데?”

“뭐......??????”

그 말에 정국과 예린은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당황한 눈으로 영록을 올려다보았다. 영록은 ‘얘들 뭐지?’ 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오후 7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한동안 땅바닥에서 끙끙거리던 구천락이 간신히 몸을 가누며 일어섰다. 옷을 뜯어 지혈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왼쪽 어깨에서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국이 쏜 탄이 구슬 모양의 원형탄이 아니라 끝이 뾰족한 원추형탄이라서, 탄에 맞은 부분의 근육과 뼈가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몸을 관통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심하게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는 손가락을 입어 넣고 크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지필묵을 꺼내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한참을 적고 있을 때, 하늘에서 작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앞에 내려앉았다. ‘영매’라 불리는 전서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새였다. 대동의 영매는 지능이 매우 높고 사람이 훈련시키기 편해서 군과 정보기관 등은 물론 민간에서 통신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구천락은 영매의 목에 걸린 작은 통에 쪽지를 넣고 다시 하늘로 돌려보냈다. 영매는 그 즉시 하늘 위로 날아올라 동쪽 하늘을 향해 날갯짓을 했다.

영매가 잘 날아가는 것까지 확인한 구천락은 개울가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 자신과 싸우던 상대, 여무사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죽은 부하 도깨비들을 땅에 묻어주기 위함이었다.

아까 싸우던 곳에 도착하니 진채연은 월도를 떨어뜨린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구천락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먼저 부하 도깨비들의 시신을 수습해 땅에 묻기 시작했다.

매장이 끝나자 그는 그녀의 소지품 중 챙길 것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에게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채연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닫자, 구천락의 눈동자는 복수심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 오후 8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노을이 지고 하늘이 점점 어두워가고 있었다.

이제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내려가던 정국과 예린, 영록은 날이 지고 밤이 되자 쉴 만한 곳을 찾아 하룻밤 쉬어 가기로 했다. 아이들은 말을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에 매어 놓고 평평한 땅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았다.

혹시 진채연이나 도깨비들이 그들이 있는 위치를 찾을까 봐 불은 피우지 못했다. 두 사람은 영록에게 모포 한 장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아까 잡은 멧돼지 고기를 나눠 먹으며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고기를 먹던 영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를 데리고 대사관으로 가던 군인들이 아직 이 주변에 있을지 몰라. 그 사람들 찾아 함께 가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아까처럼 이상한 사람들이 또 공격해 올 수도 있는데.”

예린은 고기를 입에 한가득 물은 채로 고개를 격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안된다고~! 너는 우리가 직접 아빠한테 데리고 가야 한다고~!”

“그럼 그 누나는? 그대로 두고 와도 괜찮아? 혼자서 싸우게 놔둔 거 너무 위험하지 않았을까?”

예린은 고기를 뜯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그 언니 싸움 엄청 잘하니까. 웬만한 도깨비 한둘은 그 언니한테 상대도 안 될걸?”

예린의 대답에도 영록은 여전히 걱정되는 듯 했다.

정국이 영록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영록 마루한, 아니, 지영록 마루한......?”

정국이 영록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모르는 듯 쭈뼛거렸다. 처음부터 영록에게 편하게 말을 놓고 있는 예린과 달린, 한 나라의 황자이면서도 마루한이라는 존재를 대면하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영록이 부끄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 모두 같은 또래잖아. 그냥 영록이라고 불러도 돼.”

“그, 그래도 될까, 마루...... 아니, 영록아?”

“응, 정말 괜찮아.”

영록이 씽긋 웃어 보였다. 그제야 정국도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럼, 니가 가지고 있다는 무예 비급, 나도 좀 봐도 될까?”

무예 비급이라는 말에 영록이 약간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보여주기 그러면 굳이 안 보여줘도 돼. 난 그냥 태상국이 저 세상에 계셨을 때 지었다는 책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정국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의 순수한 표정에 악의가 없음을 깨달은 영록은 가방에서 ‘모두를 위한 격투 무예’ 다섯 권을 모두 꺼내 정국과 예린에게 내밀었다.

책을 받아 든 정국과 예린은 한 장 한 장 책을 넘길 때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와, 무슨 그림이 이렇게......!”

책들을 훑어보던 정국이 말했다.

“우리가 경무관에서 배우는 무예들도 있고, 나중에 더 배우게 될 내용들도 들어있긴 한데, 좀 더 생소한 내용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전쟁에서 쓸 수 있는 무기술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 맨몸으로 하는 무예들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더 많고.”

정국이 책의 내용을 세밀히 보고 있는 사이, 예린은 표지 뒷면에 있는 강운예의 사진을 보고는 좋아라 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와, 이건 아빠 초상화네? 진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잘 그려 놨다...... 와! 머리 모양만 조금 다르고 아빠 지금 모습이랑 완전 똑같으시잖아?”

예린은 한동안 아빠의 초상화(사진)를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영록을 바라보았다.

“아빠도 지금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사시고, 영록이 너도 지금 그대로 영원히 살겠네...... 완전 부럽다...... 나도 지금 모습으로 영원히 살 수 있었으면......”

그녀는 거의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영록은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만일 여기서 산다면 니 말대로 지금 모습으로 영원히 살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여기서 영원히 살지 않을 거야. 난 반드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그 말에 정국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돌아간다고? 어떻게? 마루한이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

영록이 대답했다.

“얼마 전 강운예 관장님이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으셨대. 그 길을 찾으려고 그동안 누리마루에 머무셨던 거고. 결국 그 길을 찾게 돼서 자신이 살던 곳에 다녀오시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그분과 만났던 거야. 그분 덕분에 나도 이곳 대동으로 오는 길을 알게 되었지.”

정국이 물었다.

“그럼 영록이 넌 왜 대동으로 온 거니? 그리고 왜 또 다시 돌아가려는 거고?”

영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책, 강운예 관장님의 책을 읽은 아이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 내 눈으로 보았거든. 또, 나도 그 책에 있는 데로 몇 달 연습하니까 정말 전보다 강해지는 걸 느꼈고 말이야. 그래서...... 그 책을 쓴 강운예 관장님께 직접 배운다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반드시 그분께 무예를 배우고 강해지고 싶어서 그분을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예린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조금 심하게 잘 싸우긴 하시지. 별명이 ‘전쟁의 신’일 정도니 말 다 한 거 아니겠니? 우리 아빠는 전쟁이고 일 대 일 단기접전이고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분이야. 최고로 강한 사람을 찾은 거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우리 아빠보다 더 나은 스승은 없지! 근데 어쩌니? 우리 아빠는 너 한 사람 가르칠 만큼 한가하신 분이 아닌데. 맨날 바빠서 딸인 나도 아빠를 보는 날보다 못 보는 날이 더 많은 지경이라구.”

그녀의 말에 영록의 표정은 금방 침울하게 바뀌었다. 예린은 ‘내가 지금 괜한 말을 했나?’하고 잠시 놀랐다. 그녀는 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너 아까부터 왜 우리 아빠를 관장님이라고 불러? 우리 아빠 경칭은 태상국, 아니면 대원수라고 불리시는데? 사실 대원수라는 경칭도 전쟁 났을 때 빼고 거의 그렇게 안 불러. 일반적으로 태상국이라고만 부르는 경우가 많아.”

영록이 대답했다.

“거기 책 표지에 보면 저자 프로필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그분에 대해 ‘서울 강서 골든라이언 체육관 관장’이라고 소개되어 있어. 그분이 저 세상에 계실 때 서울 강서구라는 곳에 있는 체육관에서 무예 가르치는 일을 하셨거든. 내 친구의 아버지도 강운예 관장님의 체육관에서 배우셨고, 나도 책을 통해 그분에게 무예를 배우다 보니 그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관장님, 하고 부르게 되었어.”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우리 아빠, 대동 오시기 전에 그곳에서 군인도 하셨고 무예 가르치는 일도 하셨었다고. 그쪽 세상에서는 무예 가르치는 사람보고 관장이라고 부르는구나? 여기서 관장이란 말은 보통 작은 관청의 책임 관직을 부르는 말인데. 난 또, 아까부터 계속 우리 아빠한테 관장이라고 해서, 니가 우리 아빠 낮춰 부르는 줄 알고 잠깐 오해하기도 했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국이 물었다.

“그런데 ‘골든라이언’이 무슨 뜻이야? 그쪽 세상에서 쓰이는 말이야?”

영록이 대답했다.

“응, ‘황금사자’라는 뜻의 영어야. 아, 영어는 다른 나라 말 중 하나야.”

그의 말에 예린이 자신의 칼자루 끝의 조각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칼자루에는 빛나는 보석으로 된 황금빛 사자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 가문 문장이 황금사자야! 깃발도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황금사자! 우리 아빠가 대동에서 처음 세운 단체 이름도 황금사자단이고, 대동 사람들이 우리 아빠 군대를 부르는 이름도 황금사자군단이야! 우리 아빠가 저 때부터 황금사자를 사용해 오셨구나! 와, 신기하다!”

예린이 까르르 웃으며 좋아하는 사이, 정국이 진지한 표정으로 영록에게 물었다.

“아까 태상국에게 무예를 배워서 강해지고, 다시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 그럼 꼭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강해져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 말이야. 너가 계속 여기 대동에 있다면 어느 나라에서든 마루한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영원히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을 텐데, 왜 꼭 다시 돌아가려는 거야?”

영록의 표정이 굳어졌다.

“......돌아가서 꼭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

정국과 예린은 그의 눈빛이 슬픔에 젖어 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반드시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지금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난 그곳에서는 주변에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야...... 결국 내 힘만으로 그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지금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약해 빠졌어. 그래서, 어떻게든 강해지고 싶어. 내가 생각한 정말 강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오직 강운예 관장님 그분께 직접 무예를 배우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예린은 측은한 눈빛으로 영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네가 반드시 구하고 싶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돼?”

한참을 망설이던 영록이 대답했다.

“......내 여자친구.”

­ 오후 13시, 누리마루 국경지대

누리마루 동쪽 국경 일대로 한 무리의 군마들이 다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은색의 갑주로 무장한 수백여 명의 도깨비 군사들이었다.

그들의 판금 갑옷 가슴 부위에는 커다란 반달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반달무늬는 양대 도깨비 국가 중 하나인 대월국의 문장이었다.

도깨비 군사들은 누리마루 남쪽 숲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국과 예린, 영록이 있는 방향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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