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56화 (56/217)

〈 56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6일 (4)

* * *

­ 오후 5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정국과 예린은 누리마루가 있는 북쪽을 향해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정국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예린아, 잠깐.”

정국은 예린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멈춰 세웠다. 어디선가 기척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예린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야! 지금 뭐 하는......!”

예린이 놀라 소리칠 겨를도 없이, 정국이 그녀를 품에 안고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다.

정국은 나뭇잎으로 울창한 나뭇가지 속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품에 예린을 껴안고 말이다.

얼떨결에 정국의 품에 안기게 된 예린은 새빨개진 얼굴로 부끄러워 그 자세로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정국이 나무 아래를 보고 있는 도중에도 자기 혼자 분위기에 취했는지, 수줍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있는 나무 근처로 두 명의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마루한의 자취는 찾았는가?”

“찾지 못했습니다. 근처에 비슷한 발자국들이 있긴 했지만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마루한과 달리 무예를 아는 자들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이 주변에서 그 발자국들 모두 사라졌고요.”

“이곳 북쪽에서부터 율도국 무사들이 숲을 뒤지며 내려오고 있는 걸로 보아, 아직 그들도 마루한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살아남은 두두리들 역시 제 살길 찾아 도망가기 바쁠 테니, 마루한을 데려갈 여력은 없었을 겁니다.”

“그럼, 마루한이 생각보다 멀리 달아난 건가? 두두리들 때문에 괜한 낭패를 본 셈이로군. 그냥 돈을 내줄 걸, 괜히 자금 아끼려다가 그만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게 되었군...... 그나저나 악의홍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지?”

“마루한을 찾아 너무 멀리 가서 신호를 못 들은 게 아닐까요?”

“이제 우리 셋밖에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로군. 아무튼 마루한이 율도 태상국이 저 세상에서 지었다는 무예 비급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마루한을 데리고 갈 수 없다면, 그 무예 비급만이라도 탈취해 가져가야 한다. 아무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다가는 우리 목이 떨어질지도 몰라.”

도깨비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깨비들이 사라진 후, 정국이 예린에게 말했다.

“예린아, 들었지? 아까 걔, 확실히 마루한이 맞나봐. 그리고 걔가 너네 아버지가 지은 무예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 말도 들었어?”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는 시간 날 때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거 좋아하시는 분이니까, 여기 대동에 오시기 전에도 책 쓰는 일을 하셨을 수도 있지.”

“그런데 비급이라니, 율도국의 군사 교범이나 무예 교범들은 다른 나라에 공개하지는 않지만, 나 같은 유학생들한테도 다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걸 비밀이라고 할 순 없을 텐데...... 대체 어떤 책이기에 비급이라고까지 말하는 걸까?”

“몰라~ 근데 좀 가만히 있어봐~ 우리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앙~”

예린은 정국의 목을 끌어안고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정국은 등에 배낭까지 짊어지고 마찬가지로 배낭을 메고 있는 예린을 안고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던 터라 점점 다리가 저리려는 중이었다.

“저 도깨비들은 분명 태진, 아니면 대월국 둘 중 한 곳에서 왔을 거야. 도깨비들이라면 우리 주나라와는 대대손손 철천지원수 같은 놈들인데, 마루한이 가지고 있다는 그 비급이 그들 손에 넘어가는 건 반드시 막아야 해.”

“그럼 얼른 우리 아빠한테 가서 이야기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예린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정국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린아, 너...... 우리 지금 가출해서 몇 주 째 경무관 째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잊었어?”

“그거야...... 아빠 찾으러 온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우리 아빠가 태상국이고 너네 아빠는 주나라 황제인데, 설마 경무관에서 우리한테 큰 벌이라도 내리겠어?”

“야, 너, 솔직히 그냥 경무관 나가기는 싫고 세상 유람도 해보고 싶고 해서 너네 아빠 찾는다는 핑계로 가출한 거잖아! 경무관에서 우리한테 어떻게 못해도, 태상국이 가만히 계실 거 같아? 게다가 너 따라온 나도 태상국한테 무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으이그, 설마 우리 아빠가 널 어떻게 하시겠어?”

”지난번에 너희 가족하고 다 함께 식사했을 때 태상국이 나 보시면서 하던 말씀 기억 안 나? ‘두 사람, 예쁘게 사귀어라. 만약 두 사람 내 허락 없이 선 넘으면, 황자는 무사히 주나라로 돌아가지는 못할 거야.’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나 그때 완전 살기에 질려서 온몸에 소름 돋고 그랬거든? 태상국이 내가 너랑 단둘이 몇 주 동안 같이 여기까지 온 거 아시면 진짜......”

정국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예린은 배시시 웃으며 그런 정국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우리가 뭐 여기까지 오면서 심하게 선 넘은 적도 없었잖앙~ 근데 뭐가 걱정이양~”

“......심하게 선 넘었다는 거에 기준이 뭐야?”

“흐흐흥, 몰라잉~”

예린은 발그레해진 얼굴을 정국의 가슴에 파묻었다. 그럴수록 정국은 난감함에 식은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다. 예린은 정국의 품에 안겨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아빠가 미래의 주나라 제후국 왕이 될지도 모르는 첫째 사윗감을 죽이시기야 하겠어? 혹시 아빠가 화내시면 내가 막으면 되지잉~ 우리 아빠 나나 예은이 말이라면 다 들어주시는 거 몰라? 가끔 예나 그 계집애도 너무 잘 챙겨주셔서 짜증 나기는 하지만, 암튼 우리 아빠가 딸들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자기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요옹~”

“예나라면 우리랑 동갑이라는 니 이복 자매?”

“응, 지금 경학관 다니는 애. 아, 걔 생각만 해도 진짜 재수 없어...... 아무튼 아빠는 내가 설득하면 되니까, 정국이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면 돼!”

하지만 정국의 굳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주나라 황자로서 도깨비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 걸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순 없어! 마루한도, 또 걔가 가지고 있다는 비급도 도깨비들 손에 넘어가도록 좌시할 수도 없고.”

정국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이대로 그냥 태상국 앞에 찾아갔다가는...... 그건 절대 안 될 거 같아. 우리, 일단 아까 그 마루한을 찾아보자. 걔랑 걔가 가지고 있다는 비급이라도 가지고 가야 태상국 뵐 면목이 생기지, 안 그럼 난......”

그의 표정에서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과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정국의 진지한 말투에 예린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자, 그럼 우리 이제 내려갈까?”

“응~!”

하지만 예린은 정국의 목을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정국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냥 안고 뛰어 올라왔지만, 내려갈 땐 너 혼자 내려가야지.”

예린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보고 혼자 내려가라고? 나 나무 못 타는데?”

“야, 너 나무 탈 줄 알잖아? 경무관에서 장애물 훈련할 때 완전 날라 다녔으면서?”

“어 그게...... 헤헤헤, 갑자기 나무 타는 법을 까먹은 거 같애. 몸도 예전보다 굳어져서 안 움직이고. 그러니 그냥 나 안은 채로 이대로 내려가줘잉~”

정국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나 지금까지 너 안고 여기 걸터앉아 있느라고 다리 저려 죽을 거 같거든??? 그리고 올라가는 거 보다 내려가는 게 더 힘들고 위험한 거 몰라???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 몰라앙~ 나 다치면 우리 자기가 나 평생 책임지면 되지잉~”

“아니, 너 다치는 거 말고, 나 다치면 어쩌냐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나무 위에서 또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 오후 6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몇 시간 동안 숲을 헤치고 나온 영록의 눈앞에 드디어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이 나타났다. 영록은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길가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도 집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길옆으로 높게 자란 나무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굽이굽이 휘어진 숲속 길도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나오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일단 길을 따라 내려가 보자. 근데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남쪽이지?’

영록이 뒤돌아보니 저 멀리 구름에 감싸여 있는 누리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누리마루가 저기 있으면 저쪽이 북쪽이겠구나. 일단 남쪽으로 걸어가 보자.’

영록은 누리마루의 반대쪽으로 길을 잡고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갔을까, 이제 다리도 아프고 몸도 지쳐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었다.

영록은 길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영록은 다모랑이 챙겨준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아까 그 난리를 겪으며 이리저리 부딪혔는지 떡들이 조금 뭉개져 있었다. 그래도 차가 든 도자기 병은 다행히도 멀쩡했다.

영록은 떡들을 몇 개 집어 우물우물 씹고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어라도 좀 먹으니 그제야 몸에 기력이 되돌아오는 거 같았다.

‘그런데 대체 나를 납치하려던 사람들은 뭘까? 아까 몸에 털 많이 난 두두리들이 그 사람들더러 도깨비라고 그랬는데...... 근데 도깨비들이 왜 머리에 뿔이 없어? 여기 도깨비들은 원래 머리에 뿔이 없는 걸까? 어쨌든 그 도깨비들은 내가 마루한이란걸 알고 날 납치하려고 한 거야. 진짜, 마루한이 뭐가 어떻게 중요하길레 다들 이러는 거야? 날 데리고 가서 뭘 어쩌려고? 난 아무 힘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그냥 아무 쓸데도 없는 학생일 뿐인데......’

문득 도깨비들이 자신의 가방에서 강운예의 무예책을 뒤적이던 게 생각났다. 영록은 후다닥 가방을 벗어 책들이 잘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책 다섯 권은 모두 가방 안에 잘 들어 있었다.

‘아까 도깨비들이 이 책을 보고 비급이라고 그랬지?’

영록은 책들을 죽 훑어보았다.

‘비급...... 비급이라니...... 서점에 가면 다 살 수 있는 책이 비급이면 세상에 비급이 아닌 책이 어디 있겠어? 아...... 그러고 보니 여기는 이런 책이 있을 리 없지?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 자세하게 글과 사진으로 무예에 대해 나와 있는 책도 없을지 모르고. 그러니 이 책을 보고 도깨비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거겠지. 이 책, 그들에게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아마 대동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이 책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책이 중요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이 책을 가져가지 못하게,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어.’

영록은 책들을 가방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일단 마을이나 사람들이 나타나면 가장 빨리 율도 대사관으로 갈 수 있는 길부터 알아보자. 율도 대사관만 찾으면 그 도깨비들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겠지. 그리고 강운예 관장님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고......’

갑자기 목이 메는 기분이 들었다.

떡을 많이 먹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유민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빨리 강운예 관장님한테 무예 배우고 강해져서 다시 유민이 찾으러 돌아가야 하는데, 강운예 관장님 찾기도 전에 지금 이게 무슨 고생이람? 지금 이 순간에도 유민이는 어디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모를 일인데 난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이곳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시간 낭비할 겨를이 없는데 대체......’

이런저런 생각에 한동안 정신이 팔렸을 때, 저 멀리서 다각다각, 소리가 들렸다.

‘혹시 나를 찾는 율도국 무사들인가?’

영록이 고개를 돌려 보니, 말을 탄 무사 한 명이 영록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율도국의 검은 갑주를 입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말을 탄 무사가 영록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야 영록은 말을 탄 무사가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 무사는 파란색 무늬가 수놓아진 하얀색 전포에 상체에만 가볍고 얇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여자 운동선수처럼 건강한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도 제법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여느 율도국 무사들처럼 말 안장에 활과 전통, 칼을 걸어 놓고 있었고, 특이하게 긴 창 자루 끝에 예리하게 휘어진 칼날이 붙어 있는 월도 같은 무기도 가지고 있었다.

여 무사는 파란색 머리띠로 긴 머리카락을 뒤로 올려 묶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영록은 포니테일 머리를 하고 다니던 유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 무사가 영록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말 위에서 영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자손 아이니? 누리마루로 가는 중인 거니?”

상대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영록은 일단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혹시 너 이 근처에서 네 또래 정도 되는 남자, 여자아이들을 본 적 없니?”

그녀의 물음에 영록은 아까 멧돼지에게서 자신을 구해준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과 일행인 건가? 그럼 위험한 사람은 아니겠구나.’

영록은 안심하며 자신이 걸어온 숲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숲 쪽으로 쭉 들어가면 개울이 흐르는 곳이 있는데요, 아까 거기서 두 사람을 보았어요.”

여 무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이니? 그 아이들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니?”

“제가 거기서 멧돼지한테 공격당해 다칠 뻔했는데, 마침 그 아이들이 나타나 도와줬어요. 자기들한테 잡은 멧돼지를 달라고 하길레 그러라고 했거든요? 아마 지금도 거기 있을 거 같은데요?”

여 무사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은 정보 고맙다. 근데 넌 어디로 가는 길이니? 이 길은 너 같은 어린아이 혼자 다니기엔 아직 위험한 곳인데.”

영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처럼 자신을 마루한이라고 말했다가는 또 비웃음만 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율도 대사관을 찾아가고 있는 길이에요. 거기 볼 일이 있어서요.”

‘율도’ 이라는 말에 여 무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우리나라’ 대사관까지 걸어서 가려고? 걸어가려면 다음 날은 되야 겨우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대사관이 여기서 그렇게 멀어요? 여기서 어떻게 가면 되죠?”

“이 길 따라 쭉 내려가면서 큰 마을 두 개를 지나면 작은 성벽이 있는 마을이 나올 거야. 대사관은 그 안에 있어.”

여 무사가 가리킨 방향에는 마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영록은 오래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부터 나왔다.

여 무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그럼, 대사관 가는 게 급한 일 아니면 날 좀 도와줄래? 그 아이들을 보았다는 곳으로 날 안내해주고 그 아이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면, 내가 이따가 말이나 마차를 얻어 대사관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영록은 비록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지만, 계속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 여 무사와 함께 있는 게 보다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 무사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잡아 줄 테니까 내 뒤에 타.”

영록은 여 무사의 손을 잡고 힘겹게 말 위로 올랐다.

‘사극에서는 쉽게 쉽게 말에 타던데, 이건, 말에 오르는 것도 장난 아니게 힘드네.’

영록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간신히 말 위에 올라가 그녀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 안장은 생각보다 매우 딱딱하고 불편했다. 앉을 수 있는 자리도 완만하게 경사진 안장 뒤쪽 끝뿐이라, 어쩔 수 없이 영록의 허벅지와 사타구니가 자꾸 여 무사의 엉덩이 쪽으로 붙게 되었다.

어디 마땅히 잡을 데도 없어 불안하게 앉아 있는 영록을 보고, 여 무사는 영록의 손을 잡아 그녀의 허리를 붙들게 했다.

“말 처음 타 보니? 그럼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영록의 몸이 여 무사의 몸에 완전히 밀착되었다. 영록은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 무사는 영록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어디 사는지, 왜 한자손 아이가 누리마루에 있는지 등에 대해서였다.

여전히 영록은 자신을 마루한이라고 말하기 꺼려졌다. 그래서 그냥 경월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대사관에 볼일이 있어 가려는 거라고 얼무버렸다.

여 무사의 이름은 ‘진채연’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율도군의 무사라고 소개했다.

‘율도 무사면, 내가 누구인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 날 데리고 가던 대사관 무사들 말고는 내가 진짜 마루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괜히 그렇게 말했다가 또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자.’

영록은 그렇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대신, 진채연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찾으신다는 그 아이들이요, 왜 찾고 계시는 건가요?”

진채연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애들이 하라는 공부랑 수련은 안 하고 가출했거든. 그래서 그 아이들 부모님이,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아이 어머니가 걔네들 다시 잡아 오라고 나를 보낸 거야.”

“가출이요? 전 아까 걔네들 보고 가출한 애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냥 등에 배낭 메고 주변에 등산이나 사냥하러 나온 거로 생각했어요.”

“가출하는 애들이 준비까지 완벽하게 해서 나갔다고 하더구나. 뭐, 보통 대단한 가문의 아이들이 아니니, 가출하면서 챙겨나간 것도 보통 수준은 아니었을 거다만.”

“그런데 그 아이들은 왜 가출을 했데요? 말씀대로 대단한 가문의 아이들이 뭐가 부족해서요?”

“여자아이가 아빠가 보고 싶어 찾으러 간다고 편지를 쓰고 나갔데. 때 되면 다 돌아오실 분을 뭐 하러 찾으러 간다는 건지 원...... 원래 니들 나이쯤 되면 다들 공부하러 가기도 싫고 집에서 뛰쳐나가고도 싶고 그렇잖니? 아마 그 아이들도 그냥 아빠 핑계 대고 둘이 나가 놀려고 그랬던 거 같아.”

어느덧 두 사람은 아까 영록이 두 아이를 보았던 개울가에 도착했다.

진채연은 개울가 쪽을 힐끔 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넌 잠시 말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월도를 들고 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개울가 근처에는 불을 피운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고기를 구워 먹은 흔적과 작은 뼛조각들도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 주변에 팔이 잘리고 목이 베인 붉은 머리의 도깨비가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진채연은 죽은 도깨비의 시신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주 깨끗하게 베었구나. 그냥 무기가 아니라 유성금으로 된 무기를 쓴 거 같은데...... 음, 이건?’

진채연은 도깨비의 다리에 박혀 있는 화살을 발견했다. 화살에는 분홍색 깃이 붙어 있었다.

‘예린이가 가지고 있는 화살인데...... 그 아이들이 이 도깨비와 싸운 건가?’

그 주변으로 싸움의 흔적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은 북쪽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싸움을 끝내자마자 누리마루로 향해 떠난 건가? 그런데 왜 아이들이 도깨비와 싸운 거지?’

그때, 수풀에서 기적이 느껴졌다. 진채연은 월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들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하얀 얼굴의 도깨비 둘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 중 한 명은 도깨비들의 대장, 구천락이었다.

구천락은 진채연 앞에 쓰러져 있는 도깨비의 시신을 보고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년이...... 죽인 것이냐?”

구천락의 물음에 진채연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니, 너희 같은 도깨비들은 아주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아. 나도 방금 이 시신을 발견한 거니까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때, 구천락 곁에 서 있던 도깨비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손가락으로 개울가 저편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쪽에 말 위에 올라탄 영록이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천락이 놀라 소리쳤다.

“아니, 너 어떻게 저 마......”

구천락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진채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가 뭐? 너희들 저 아이를 알아? 저 아이가 뭘 어쨌다고?”

구천락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구천락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공연한 일에 목숨 내놓기 싫다면 저 아이를 우리에게 넘기고 당장 이 자리를 떠나라!”

도깨비들의 말에 진채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 내가 왜 너희들한테 저 아이를 넘겨줘야 한다는 거지? 저 아이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진채연이 월도를 들어 도깨비를 겨누며 소리쳤다.

“난 율도의 무사다. 도깨비 따위들의 어설픈 협박에 넘어갈 내가 아니야! 실력으로 저 아이를 데려갈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보시지!”

진채연의 몸에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도깨비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을 꺼내어 들었다.

두 도깨비는 빠르게 그녀의 양옆으로 흩어졌다. 진채연은 월도의 양 끝으로 도깨비를 겨누고 서서 두 도깨비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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