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6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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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영록은 아옹다옹 다투며 개울을 건너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남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딱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 또래인 듯 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판타지 만화나 무협 영화 속에서나 봤음직한 여행자의 복장에, 칼과 활, 총까지 지니고 있었다.
총은 율도 무사들이 가지고 있던 것보다는 약간 작았고, 방아쇠 위로 리볼버 같은 둥근 약실이 달려 있었다. 등에 걸어 맨 칼과 활도 율도 무사나 두두리들이 쓰던 것보다 확실히 더 비싸고 귀한 물건들이었다. 그들이 입은 옷도 경월당에서 본 것보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감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한눈에 그들이 귀족이거나 부잣집 아이들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영록에게 다가온 남자아이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으, 응, 다친 데는 없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는데, 도와줘서 고마워.”
여자아이가 물었다.
“생긴 거로 보아 한자손 아이인거 같은데, 너 누리마루에서 혼자 뭐 하고 있는 거니?”
경월당 은대명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대동 서부에 사는 한자손들은 영록의 용모와 매우 닮은 사람들이라 했다. 아마 그 때문에 아이들은 영록을 한자손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영록 앞의 아이들은 그 생김새가 약간 달랐다. 영록과 같이 완전한 동양인의 외모라기보다는 좀 더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하고 서양인과 동양인의 외모가 절묘하게 섞여 있는 혼혈아 같은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 모두 TV 속에서나 보던 연예인 아이돌 같은 절세 미남 미녀였다.
영록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총소리를 듣고 도깨비나 두두리들이 쫓아오는 건 아닐까,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좀 설명하기 어려운데, 난 율도 군인들과 함께 율도 대사관으로 가던 도중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나를 납치해 갔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여자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우리 율도’ 무사들이 너를 ‘우리나라’ 대사관 데려가고 있었지? 또 왜 그 이상한 사람들이 널 납치하려고 한 거고?”
영록은 초조한 마음에 말을 버벅거렸다.
“미안, 지금 날 쫓아오는 사람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길게 설명할 순 없어. 그냥...... 여기 사람들이 나를 ‘마루한’이라고 부르더라고, 아마 그것 때문에 그런 거 같아.”
‘마루한’이란 말에 두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영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여자아이가,
“뭐? 니가 마루한이라고? 뻥 치시네~!”
라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영록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비웃는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
“어쨌든 그놈들이 언제 쫓아올지 모르니 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 아까 도와준 거 고마워.”
영록이 불쾌한 표정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여자아이가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야, 마루한~! 아니, 마루한이라고 주장하는 거기 너~! 니 목숨 살려줬으니 이 멧돼지는 우리가 가져도 되지?”
“그래, 다 가져!”
영록은 뒤고 안 돌아보고 소리쳤다. 여자아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한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단도로 멧돼지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고기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고기 해체 작업 같은 건 처음 해보는지, 끙끙거리며 서툰 칼질을 하고 있었다.
곁에서 불을 피워놓고 남자아이를 지켜보던 여자아이가 답답한 듯 말했다.
“빨리 좀 해봐. 그러다 땔감 다 타버리겠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해체하던 남자아이가 불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땔감이 다 떨어지면, 니가 다시 주워오면 되잖아.”
“야, 너 사냥도 많이 해봤으면서 그런 거는 한 번도 안 해 봤어? 우리 오빠였으면 벌써 뼈다구만 남기고 깨끗하게 고기 떠서 가지고 왔겠다.”
남자아이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단도로 멧돼지 고기를 탁! 내리치며 말했다.
“사냥 나가서 고기 뜨는 일은 밑에 사람들이 하면 되지, 그걸 내가 왜 하냐? 그리고, 원래 고기 뜰 때는 푸줏간에서 쓰는 가죽 자르는 칼이나 고기 써는 칼을 써야 하는데, 이런 작은 호신용 단도로 고기를 제대로 뜰 수나 있을 거 같아? 답답하면 예린이 니가 직접 하던가!”
남자아이가 화를 내자 예린이라 불린 여자아이가 표정을 싹 바꾸고 여우같이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아니잉~ 난 그냥 날 평생 책임지겠다는 남자가 고기도 못 뜨는 거 아닌가 걱정 되서 그랬지잉~ 나 고기 앞에서는 인내심이고 뭐고 다 사라지는 거 잘 알잖아앙~ 기다리다 조바심 나서 그런 거니까 삐지지 마, 정국아~ 니가 맨날 나 평생 고기 끊이지 않게 먹여줄 거라고 그랬자낭~ 그니까 이런 거로 삐지지 마요~”
예린은 정국 옆에 바싹 붙어 애교를 부렸다. 정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묵묵히 계속 고기를 썰었다.
어느 정도 고기가 해체되자 예린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기를 불 위에 뜨겁게 달군 돌 위로 가져와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숲속 가득 퍼져 나갔다.
예린이 주변 나뭇가지를 주워 칼로 다듬어 만든 나무젓가락으로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정국아, 아~ 해봐, 아~”
예린은 젓가락으로 정국의 입에도 고기 한 점을 먹여주었다. 정국도 고기 맛을 보고 무척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갓 잡아 요리해 먹는 게 최고야. 그냥 입에서 녹는데?”
“그치? 소금이나 후추 말고 다른 양념 하나도 안 필요할 거 같지? 그냥 고기만 먹어도 너무 맛있다앙♡”
정국은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고기 해체 작업을 계속했다. 그 사이 예린은 고기 몇 점을 더 집어 먹으며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기에 딱 메밀 냉면 한 그릇만 있었으면 완전 대박이었을 텐데, 아쉽......”
정국이 고기 해체를 다 하자, 두 사람은 고기를 커다란 찬합 안에 담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두 사람의 배낭에는 여행용 식량들이 담겨진 것으로 보이는 찬합들이 몇 개씩 더 들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 꽤 오랜 여행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예린이 고기를 구우며 말했다.
“아까 걔, 진짜 무슨 배짱으로 지가 마루한이라고 뻥을 치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아마 다른 나라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돌 맞아 죽었을걸? 우리들 아빠가 마루한인데, 딱 우리 나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게 어디서 그런 되도 않는 뻥을 치고 다니는지 참나......”
정국이 돌판 위에 남은 고깃점들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가 그러셨는데, 마루한은 대동으로 넘어올 때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산다고 하셨어. 그래서 황제 폐하 모습도 몇천 년 간 변함없이 그대로 인거라 하고. 뭐, 어려서 대동으로 넘어온 마루한이라면, 그 어린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겠지.”
그 말에 예린이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루한들은 영원히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우리들은 계속 늙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 우리 아빠는 영원히 한결같은 모습인데, 나는 계속 나이 먹어 가면서 결국 아빠보다 더 늙어버리고 먼저 죽어야 한다는 사실 말야. 전에 배다른 오빠라는 다 늙은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한테 와서 ‘아버지~!’하고 무릎 꿇고 절하는데, 나 그거 보고 솔직히 엄청 충격 먹었어.”
“나도 그래, 지금 우리 주나라 주변 나라 제후들이 거의 다 부황 폐하 자제분들이거나 그분들 후손들이시잖아? 근데 항렬 상으로는 내가 그 나이 많은 분들하고 촌수가 같거나 위인 경우가 많아. 그래서 그분들이 나한테 막 존댓말하고 그럴 때면 부담스러워서 못 견디겠더라고. 암튼, 아까 걔가 어린 나이에 대동으로 넘어온 거라면 뭐, 마루한일 수도 있지.”
예린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살아 있는 마루한 중에 우리 또래 정도 얼굴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잖아?”
“음...... 그러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마루한은 없네? 그럼 혹시 최근에 대동으로 온 새로운 마루한인 걸까?”
“우리 아빠 이후 200여년 만에 새로운 마루한이 나타난 거라고? 그것도 완전 어린 마루한이? 에이 설마~ 걔 그냥 대동에 가끔 나타나는 사이비 종교 같은 거 만드는 그런 애 아냐?”
예린은 계속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두 아이는 모두 마루한의 자녀들이었다.
여자아이는 강예린, 율도 태상국 강운예의 딸이었고,
남자아이는 황정국, 주나라 황제 황치우의 아들이었다.
강예린의 공식 칭호는 영애, 황정국은 황자라 불리고 있었다.
마루한의 자식들이긴 했지만 둘 다 어머니는 아리랑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외모는 동양인을 닮은 한자손 보다는 현실세계의 혼혈인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주나라가 율도국과 교류를 시작한 이후 황족과 귀족 양반 자제들이 율도국으로 유학 오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정국 역시 황제 황치우의 명으로 율도의 경무관 (16~19세 청소년들이 다니는 기초 군사 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정국은 경무관에서 만난 강운예의 딸 예린과 1년 넘게 교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부친 강운예가 누리마루에서 무언가 연구한다며 오랫동안 백화를 떠나 있자 예린이 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집을 가출하게 되었는데, 정국이 걱정되어 혼자 못 보내겠다며 그녀를 따라 함께 나서게 된 것이다.
예린이 먹고 남은 고기들을 챙기고 정국은 멧돼지 뼈와 부산물들을 땅에 묻고 있을 때였다.
숲속 저편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린은 고기를 챙기다 말고 곁에 내려둔 활과 전통(화살통)을 가까이 잡아당겼다.
잠시 후,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붉은 머리를 한 도깨비 한 명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도깨비는 차가운 눈빛으로 정국과 예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 좀 묻지. 혹시 딱 너희들만 한 나이의 남자아이가 이 주변을 지나는 것을 보지 못했니?”
도깨비의 말투는 딱딱하고 건조했다. 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벼려진 칼과 같은 섬뜩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정국과 예린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아이를 찾는 사람인거 같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이 읽혀졌다.
정국이 도깨비에게 말했다.
“아니, 우리는 멧돼지 사냥하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그러자 도깨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허리춤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뭐, 못 봤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갑자기 도깨비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나를 본 것 역시 어쩔 수 없지. 너희들 모두 사라져 줘야겠어.”
정국의 얼굴을 향해 무언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암기였다.
정국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왼발을 축으로 몸을 왼쪽으로 휙, 돌렸다. 간발의 차로 도깨비가 던진 암기가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짓이야!”
뒤에 있던 예린이 활시위에 화살을 재어 도깨비를 겨누며 소리쳤다. 정국도 등에 멘 장검을 빼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정국의 장검은 길고 검신이 가는 가벼운 양손 검이었다. 칼자루 끝에는 주나라를 상징하는 빨강, 노랑, 파랑의 삼색의 태극무늬가 조각된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도깨비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삼각형의 칼을 꺼내 들고 정국과 예린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그러다 남자아이보다는 여자아이 쪽을 상대하는 것이 더 쉬울 거라 생각했는지, 갑자기 예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예린이 도깨비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도깨비는 발걸음만으로 가볍게 화살을 피해버리고는 예린의 목을 향해 칼을 찔러 들어갔다. 예린은 다급히 뒷걸음질로 그의 칼날을 피하려는 찰나였다.
휙!
어느새 정국이 뛰어와 칼을 든 도깨비의 팔을 장검으로 내리쳤다. 도깨비가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팔이 떨어져 나갈 뻔한 순간이었다.
“어린 녀석이 제법이구나......”
도깨비는 정국을 노려보며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더러운 도깨비답게 나이 어린 애들 상대로 암수나 던지고 기습이나 하고...... 니들은 이러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정국도 장검을 오른쪽 무릎 아래로 내리며 도깨비를 노려보았다. 도깨비가 공격해 들어오면 바로 손목을 올려 베거나 장검의 길이를 이용해 그대로 찔러 버리려는 모습이었다.
도깨비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좋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이 어떻든 아무 상관 없는 법이지. 아무튼, 너희들이 누리마루에서 나를 본 이상 살려 보낼 수 없다.”
“니가 뭔데 감히 누구 마음대로 우리를 살려 보낸다, 만다 함부로 얘기하는 거지? 지금 네가 누구한테 칼을 겨누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 따위로 말하지 마라!”
정국은 언제든 칼을 휘두르려는 자세로 도깨비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 있던 예린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 당기려 했다.
그걸 본 도깨비가 정국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정국에게 달라붙어서 예린이 화살을 쏘기 어렵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도깨비는 민첩하게 정국의 등 뒤로 돌아 뛰며 빈틈을 노렸다. 정국은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며 자세를 유지하고 도깨비를 계속 노려보았다.
도깨비가 활을 쏘기 힘들게 정국의 뒤로 돌아 뛰자 예린은 도깨비를 쫓아 달려 나오며 활시위를 당겨 조준하려 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도깨비의 빠른 발걸음 때문에 겨냥이 힘들었다.
도깨비의 암기가 다시 한번 정국에게 날아들었다.
정국이 칼로 가볍게 암기를 쳐내자, 그 빈틈으로 도깨비의 칼날이 찔러 들어왔다.
정국은 그의 공격을 몸을 돌려 흘려내며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슉!
소름 끼치는 파공성이 공기를 찢으며 도깨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 한 움큼이 칼바람에 흩날려 푸른 풀밭 위에 떨어졌다.
“이 자식이!”
도깨비가 정국의 칼을 피하느라 잠시 멈춰 선 순간, 예린이 어느새 도깨비의 등 뒤에까지 쫓아와 있었다.
쉭!
그녀가 쏜 화살이 도깨비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도깨비는 고통에 찬 표정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예린을 노려보았다.
다리에 화살을 맞은 도깨비는 더 이상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정국이 장검을 휘두르며 도깨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정국의 장검이 도깨비의 왼쪽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도깨비는 다급히 왼팔에 낀 금속 보호대로 칼날을 들어 막으려 했다.
칼이 부딪치는 순간, 도깨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국의 장검이 도깨비의 금속 보호대를 낀 왼팔과 칼까지 한꺼번에 깨끗이 잘라버린 것이다.
도깨비의 왼팔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끄아악!”
도깨비는 잘린 팔뚝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너, 너 뭐야? 그, 그 칼, 유성금으로 만든 거였나? 네, 네놈 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어린놈이 유성금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지?”
정국은 칼끝으로 도깨비를 겨누며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너는 뭐 하나 제대로 설명이나 해주고 칼 휘둘렀나? 그러면서 내가 너한테 무슨 설명을 해주길 바라는 거지?”
정국이 다시 한번 도깨비의 왼쪽 목을 향해 장검을 휘둘렀다. 도깨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왼쪽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려 했다.
순간, 정국이 번개같이 손목을 비틀었다.
그의 손에 쥔 장검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급격히 방향을 바꾸었다.
슈캉!
정국의 칼끝이 도깨비의 오른쪽 목을 베고 지나갔다.
도깨비는 남아 있는 손으로 목을 붙들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베어진 목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정국은 쓰러진 도깨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지 잠시 노려보고는, 칼을 머리 위에서 크게 휘둘러 혈진 (칼집에 칼을 넣기 전 칼에 뭍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는 행동)을 하고 우아한 자세로 납검 (검을 칼집에 넣는 행동)을 했다.
“정국아,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예린이 정국에게로 달려와 안기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정국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응,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까 화살, 정말 잘 쐈어. 고마워.”
예린은 정국을 두 팔로 끌어안고 불안한 눈으로 도깨비의 시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국이 말했다.
“저 도깨비, 아까 걔를 납치하려는 놈들인 거 같지? 아무래도 그 아이, 진짜 마루한이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예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뭐, 걔가 진짜 마루한이라더라도 어차피 우리 여행의 목표는 걔가 아니라 우리 아빠 만나러 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어서 빨리 딴 데로 가자.”
“그래, 여기 다른 도깨비들이 더 오면 곤란해지니까, 짐 챙겨서 어서 가자.”
정국은 바닥 위에 내려놓은 짐들을 모두 배낭 속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린은 구워 놓은 고기들부터 먼저 정신없이 찬합에 담고 있었다.
큰 멧돼지 한 마리를 다 구운지라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대충하고 얼른 가자. 어차피 그거 가져가도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우리, 도깨비들 오기 전에 얼른 가야 해. 얼른!”
정국이 배낭을 짊어지며 재촉했지만 그래도 예린은 남은 고기를 꿋꿋이 찬합에 담고 있었다.
“다른 건 다 버려도 고기를 버리고 갈 순 없잖아? 이 아까운 걸 어떻게 버리고 가?”
정국은 예린이 고기를 다 주워 담을 때까지 초조한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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