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6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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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가방 속에 챙겨 온 손톱 손질 도구 세트 가위로 간신히 자루를 뜯고 나온 영록은, 도깨비들과 두두리들이 한데 어울려 정신없이 싸우는 틈을 타 숲속으로 내달렸다.
‘일단 이 숲 밖으로 나가보자. 이 숲만 나가면 율도 무사들이든 다모랑들이든, 누구든 날 보호해 줄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 거야!’
영록은 커다란 나무 사이로 정신없이 뛰었다.
파바바밧!
갑자기 뒤에서 엄청나게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하얀색 피부를 가진 서양인 같이 생긴 사람 둘이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까 두두리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도깨비들이었다.
‘뭐, 뭐야? 뭐가 이렇게 빨라???’
영록은 깜짝 놀라 걸음아 날 살려라, 더 빨리 달려보았다.
그 때, 무언가 붕붕, 소리를 내며 날아오더니 그의 다리를 탁! 하고 강하게 낚아챘다.
“으악!”
영록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그의 다리에는 도깨비의 채찍이 휘감겨 있었다.
도깨비 두 명이 쓰러진 영록에게 달려들어 가방과 보따리를 빼앗고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기 시작했다. 영록이 저항할 틈조차 없었을 만큼 재빠른 솜씨였다.
“마루한이 생각보다 작네. 나이 어린 한자손처럼 생겼는데?”
도깨비들은 영록을 꼼짝 못 하게 묶어 놓고는 마치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그와 비슷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다른 도깨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도깨비들의 대장은 그 자리에 가장 늦게 도착했다. 그는 꽁꽁 묶인 영록을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다행히 멀리 도망가기 전에 붙잡았으니 망정이지...... 자, 지체할 시간 없다. 율도 놈들과 마주치기 전에 마루한 데리고 어서 빨리 여길 뜨자!”
도깨비 두 명이 영록의 양쪽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고는 그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다른 도깨비들은 그의 가방과 보따리를 챙겨 들었다.
도깨비들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걸어가는데도, 끌려가는 영록이 느끼기엔 마치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느껴졌다.
얼마나 갔을까, 영록이 재갈이 물린 입으로 계속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웁~ 웁~ 우우웁~!”
영록을 양쪽에서 들고 가던 도깨비들이 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도깨비들의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재갈을 풀어줘 봐. 마루한이 뭐라고 하나 한번 들어보자.”
도깨비들이 재갈을 풀어주자 영록은 깊은 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밧줄을 너무 세게 묶어서 팔이 저려 못 견디겠어요. 계속 들려서 가다보니까 겨드랑이 살도 허물 벗겨질 거 같이 아프구요. 절 대체 왜 끌고 가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조용히 따라갈 테니까 저 좀 그만 들고 가시고 이 밧줄도 좀 풀어주실 수 없나요?”
그 말에 도깨비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찌할지 망설이는 듯 했다.
“......구천락님, 어찌할까요?”
구천락이라 불린 도깨비들의 대장이 말했다.
“마루한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차마 못 들은 척 할 수가 없군요. 그럼 이후에 절대 경거망동 마시길 당부드립니다. 자, 풀어드려라!”
도깨비들이 영록의 몸에 묶은 밧줄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영록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팔을 휘휘 돌려 보았다.
도깨비들이 영록을 풀어주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사이, 구천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영록의 짐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는 보따리를 풀어보고는 그 안에 든 차와 다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누리마루의 다모랑들이 만든 건가? 차와 다과라니, 산에서 뛰노는 짐승들치고는 우아한 취미로군.”
이번엔 영록의 가방을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건...... 율도군 전투배낭인가? 비슷하게 생겼는데......”
구천락은 가방의 지퍼를 열고 그 안의 것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두툼한 두께의 책 다섯 권이었다.
영록이 가져온 ‘모두를 위한 격투 무예’ 책이었다.
구천락은 처음 보는 반질반질하고 매끈매끈한 재질에 모든 페이지가 컬러 사진으로 된 이 책에 흥미를 느꼈는지, 가방은 땅에 내려놓고 책을 유심히 한 권 한 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모두 무예 동작들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림을 이리도 정교하게 그렸단 말인가?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 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그가 감탄한 듯 말했다.
도깨비들은 사진이란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고 그것들 모두를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길수록, 그의 눈은 점점 놀라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들은...... 혹시 율도군 무사들의 무예가 아닌가?”
구천락은 다시 책을 이리저리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표지 뒷면에 있는 저자 프로필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 얼굴......! 이건 율도 태상국의 초상화다! 어떻게 이처럼 태상국이 바로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 모습을 기가 막히게 그려놓았단 말인가? 대체 어떤 화공의 솜씨이기에? 그리고 ‘저자’라면 이 책을 지은 사람이 바로...... 그럼 이 책들이 모두 태상국의 무예가 담긴 비급인건가?!”
도깨비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구천락은 황망한 표정으로 영록에게 다가가 책을 들이밀며 물었다.
“마루한, 이 책, 율도 태상국이 직접 쓴 무예 교범이 맞습니까?”
영록은 아직도 팔이 저린 듯, 한쪽 눈을 찡그리고 한 손으로 반대쪽 팔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네, 그거 강운예 관장님이 쓴 책 맞아요.”
구천락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럼, 마루한께서는 이 책을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한 권은 친구한테 선물 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제가 서점에서 산 건데요?”
“네? 이, 이걸 직접 사신거라구요???”
얼음처럼 차갑게만 보이는 도깨비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서점이면 서림이나 서관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원래 마루한이 사시던 곳에서는 돈만 있으면 태상국이 직접 저술한 이 책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쵸? 이게 권 당 3만 6천원씩 하는 거라 한꺼번에 다섯 권 다 사려면 좀 비싸긴 한데,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살 수 있을걸요?”
구천락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영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200년 넘는 세월 동안 대동을 제패하고 있는 태상국의 무예가 담긴 비급을 누구나 다 사서 보고 배울 수 있다고?’
문득 그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숱한 전쟁터에서, 도깨비들은 강운예의 율도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지만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승리를 거둬본 적이 없었다.
도깨비들의 수뇌부는 강운예의 율도군을 상대로 패배를 거듭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었다.
●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율도군의 군사 제도
● 야포, 비화포, 뇌홍식 강선 소총 등 선진화된 무기와 강력한 기병 전력
● 압도적인 경제력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병참과 보급
이 세 가지 모두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장에서 율도의 군사들과 직접 몸으로 격돌해본 도깨비들은 그것들이 패배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몸으로 느낀 진정한 패배의 원인은,
‘이미 개인의 전투력에서부터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율도 무사 1명을 상대하기 위해선, 최소 4명의 도깨비들이 있어야만 했다.’
라는 것이다.
대동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총과 포를 운용하고 있었지만, 화약이 워낙 비싼 데다가 대량 생산마저 곤란한 점이 많아, 전장에서는 아직도 창과 칼, 활과 쇠뇌 등의 냉병기가 전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야전의 양상은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 양측 척후대에 의한 정찰 및 탐색전
● 야포 등 원거리 화기에 의한 적 진형 타격
● 전진하는 적에 대한 쇠뇌/활 공격, 피해 강요
● 경기병들의 선회전술
● 중기병들의 적 진형 돌파, 총병/창병의 기병 저지
● 양 측 보병 진영의 전진과 선형 전투
● 경기병들의 측면 우회/포위
● 패주하는 적에 대한 기병들의 추격/섬멸
이때 보병의 싸움이든 기병의 싸움이든,
조직적인 싸움이든 무사 개개인의 1:1 싸움이든,
모든 상황 속에서 도깨비들은 율도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는 도깨비들이 약해서가 아니었고, 율도 군사들이 특별히 강인한 종족들이어서도 아니었다.
‘얼마나 잘 훈련 받았고, 얼마나 많은 경험을 쌓았는가.’의 차이였다.
율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학당 (8살 ~11살 어린이들이 다니는 기초 교육 기관)에 들어가면서부터 남녀 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활을 쏘는 법을 익히게 했고, 경당 (12살 ~ 15살 청소년들이 다니는 중등 교육 가관)에 들어가면 다양한 체력 단련과 함께 현실 세계의 레슬링, 유도, 주짓수와 비슷한 ‘유술’을 익히게 하고, 말 타는 법도 익히며, 목봉과 목검을 다루는 법도 배우게 했다.
그 후 경무관 (경당을 졸업한 16살 ~ 19살 청소년들이 다니는 기초 군사 학교, 이곳을 졸업하는 이는 현실 세계의 부사관에 해당하는 ‘사관’으로 임관할 수 있으며, 본인 희망에 따라 장교가 되기 위해 국무관으로 진학할 수 있다.)과 국무관 (경무관을 졸업한 20살 ~ 23살 청년들이 다니는 고등 군사 학교. 이곳을 졸업한 자만이 율도국의 장교로 임관할 수 있다.)으로 진학한 이들이 보다 세분화된 군사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문관 / 경학관 (16살 ~ 19살 청소년들이 다니는 중등 교육기관)은 물론 그 위에 최종 전문 교육기관인 국문관 / 국학관 (20살 ~ 23살 청년들이 들어가는 현실 세계의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기관)에 들어가도 활쏘기, 말타기, 목검 대련 등 기초적인 군사 훈련은 필수적으로 수련해야 했다.
또, 중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하지 않은 16세 이상 모든 남자는 곧바로 4년의 의무 복무 기간을 거치게 되어 있었고,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난 후에는 계속 군에 남기를 희망하는 자들 가운데 능력이 있는 자들은 사관으로 임관할 자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즉, 율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활 쏘고 창, 칼 다루는 것쯤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4년 이상의 군 경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 생활 이전이든 군 생활 중이든, 율도의 모든 백성은 태상국 강운예가 직접 입안했다는 교육 계획에 따라 체계적으로 무예를 배워나가게 된다.
아직도 무예란 아버지의 경험이 아들에게 전해지는 것이고 스승이 터득한 비결이 단 한 명의 제자에게 은밀히 전수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대동에서,
또, 군인이란 귀족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무사 계급이거나 돈과 출세욕에 눈이 먼 용병이거나 약탈과 간음, 온갖 못된 짓에만 혈안이 된 불한당이거나, 농사짓다가 억지로 끌려온 힘없는 백성이거나, 분명 이 네 가지 중 하나일 거라 보는 시각이 만연했던 대동에서,
강운예의 율도라는 나라는 제도를 통해 온 백성 모두가 다 무예를 배울 수 있게 했고,
16세 이상 남자들에게 국가를 지키는 병역의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평상시에는 수십만, 전시에는 수백만의 병력을 언제나 활용할 수 있었으며,
다른 직업에 비해 고정적이고 제법 두둑한 급여는 물론 세금 면제, 거주지 (군 관사 및 숙소) 무료 제공, 본인뿐 아니라 군인 가족들 모두 병영 식당 및 시설 무료 제공 등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줌으로써, 능력 있는 자들을 군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워오고 의무 복무로 4년간 군 경험까지 쌓으며,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군대에 있는 것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동기 부여까지 되는 이들이 가득한 율도의 군대는 이미 대동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다른 나라의 군대들이 감히 상대하기조차 버거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모든 것이 표면적으로는 민주 공화정을 표방하고 있지만 지금도 뒤에서 강력한 영향력으로 정부와 군대를 통제하고 있는 태상국 강운예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력한 왕권 통치를 고수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도 율도에 자극받아 자국의 군사 제도를 대폭 개선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거의 모두 흉내 내는 수준에서 그칠 뿐, 율도와 똑같거나 그와 비견될만한 제도를 마련하는 국가는 드물었다.
일단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항상 일정한 수의 상비군과 예비군들을 유지하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군인들을 입힐 군복과 먹일 식량, 잠자고 생활할 여러 시설들, 군인들의 무기들과 장비들, 거기에 그들을 훈련 시키는 데 쓰이는 장비들과 거기에 드는 물자들까지, 돈이 들어가지 않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경제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군대라는 것은 이렇다 할 수익 등 생산적인 측면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데도 매일 매일 끊임없이 지출만 이어지는 ‘손해 보는 장사’였다.
그러니, 제정이 탄탄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군대를 유지하고 훈련 시키는 일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천제국, 태진, 거록, 주신 등 강대국이거나 전쟁으로 인해 당장 군대가 필요한 국가들도 국가가 관리하는 중앙군보다 귀족이나 호족의 사병이 더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상비군을 유지하기보다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백성들을 징집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라들이 더 많았다.
근대적인 군사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으니 무예, 군사 훈련 등을 체계적으로 실시하기는 힘들었다.
현직 군인들 중에서도 군사들을 훈련 시킬 통일된 교육안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군사 훈련이란 창을 앞으로 찌를 줄만 알면 되고, 활시위에 활을 걸고 당길 수만 있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무예와 군사 훈련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수뇌부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상태였다.
각국의 뜻있는 군인들은 직접 율도를 방문해 자신의 눈으로 직접 군사 교육 실황을 보고 오거나 그에 대한 교안, 교범 등을 얻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율도 사람들은 이에 대해 ‘군사 기밀’이라 말하며 교안, 교범 등을 그들에게 내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율도 태상국의 무예에 대해 기가 막힌 그림(사진)들과 함께 너무나 상세하게 설명된 ‘비급’이 구천락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만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율도와 같이 강한 군사들을 키워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율도국 무예의 허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거, 뜻밖의 대성과가 아닌가?’
구천락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정신없이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영록이 휴식을 마치자 도깨비들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구천락은 태상국의 무예 책이 든 영록의 가방을 직접 손에 쥐고 걷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을 때, 한 도깨비가 수상함 낌새를 눈치챘다.
“......누군가 우리를 쫓고 있습니다. 모두 지근거리입니다.”
도깨비들이 칼을 꺼내 들고 긴장한 얼굴로 인기척이 나는 숲 쪽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덩치 큰 검은 그림자 십여 명이 나타났다.
두두리들이었다.
“야, 이 더러운 도깨비들아. 목숨 걸고 율도국 놈들하고 싸워가며 간신히 마차에 타고 있던 놈 납치해서 데려다 줬드만, 약속한 돈 안주려고 우리 동료들을 그냥 죽여? 그러면 우리가 모를 줄 알았냐, 이 쓰레기 같은 도깨비 새끼들아?”
두두리들은 마치 짐승같이 노란빛을 띤 커다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미 그들은 커다란 월도를 꺼내 들고 도깨비들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이들은 율도 무사들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뒤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도깨비들은 없고 동료 두두리들의 시신들만 있는 것을 보고는, 도깨비들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동료들을 죽인 것을 눈치채고 그들의 흔적을 쫓아 뒤따라 온 것이다.
구천락은 손에 쥔 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비웃는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냥 돌아갔으면 목숨이나마 부지했을 텐데, 죽고 싶어서 여기까지 따라왔나 보구나? 용케도 우리를 바로 따라온 거 보니, 역시 냄새 잘 맡는 개 같은 두두리들답네. 아주 개 같은 두두리들......”
순간, 구천락과 도깨비들이 두두리들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두리 셋이 목이 베어져 그 자리에 쓰려졌다.
“죽여라! 도깨비들을 모두 죽여라!”
두두리들은 월도를 격렬하게 휘두르며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도깨비들의 공격은 날래고 민첩했지만, 두두리들의 공격은 묵직하고 파괴적이었다. 도깨비들은 두두리들의 칼을 잽싸게 피하며 빈틈을 노려 급소를 찔러 반격하려 했지만, 두두리들의 분노에 찬 맹공은 방어하기 쉽지 않았다.
세 명의 도깨비들이 두두리들의 칼에 난자당해 쓰러졌다. 주변의 푸른 숲은 온통 검붉은 핏물 범벅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싸움이 한창인 가운데, 먼발치에서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영록은 침을 꼴깍 삼키며 땅에 떨어진 자신의 가방과 보따리들을 챙겨 들었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싸워라. 내가 멀리 도망갈 수 있게......!’
영록은 도깨비들과 두두리들이 싸움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숲속으로 조심조심 엉금엉금 기어갔다.
오후 3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영록은 도깨비들과 두두리들의 싸움터에서 빠져나와 한참을 정처 없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더는 뛸 수 없을 만큼 다리가 아파 왔다.
마침, 그의 앞에 수풀 사이 작은 개울 하나가 흐르고 있었다. 그 물빛은 현실 세계에서 본 적 없을 만큼 유리처럼 맑고 깨끗해 보였다.
영록은 허겁지겁 개울에 고개를 들이박고 입으로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시원한 물이었다.
물을 마신 영록은 손으로 물을 떠 세수까지 했다. 차가운 물의 한기에 온몸의 땀이 다 식는 듯했다.
갑자기 곁에서 무언가 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설마 도깨비나 두두리들 벌써 여기까지 쫓아온 건 아니겠지?’
영록이 놀라 세수를 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웬 네발 달린 짐승이 있었다. 거친 털을 가진 돼지처럼 생긴 동물이었는데, 아직 어린놈인지 그 크기가 강아지만 했다.
‘뭐지? 여기에 사는 돼지 같은 건가? 꽤 귀엽게 생겼네?’
영록은 호기심에 웃으며 돼지 새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꾸웨에에엑~!
갑자기 어린 돼지가 소리를 지르며 숲으로 달아났다.
‘쳇, 바로 도망가 버리네? 난 그냥 귀여워서 가까이 보려고 한 것 뿐인데.’
영록은 당황해서 어린 돼지가 사라진 수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커억! 커억! 쿠웨에에엑~!
갑자기 어디선가 크고 거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돼지가 사라진 쪽의 수풀들이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영록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뭐야?!”
영록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수풀 밖으로 엄청나게 큰 돼지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몸은 어두운 갈색의 거친 털로 뒤덮여 있었고, 주둥이 밖으로는 거대한 송곳니가 험악하게 돋아나 있었다.
돼지는 몹시 흥분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영록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그를 들이받으려는 듯, 무섭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악~! 저 돼지 왜 저래!”
영록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돼지가 영록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탕!
커다란 돼지의 몸뚱이는 그대로 개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돼지의 출현에 이어 총소리까지, 영록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선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활로 쏜다니까 왜 먼저 총을 쏴? 활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잖아?”
이어서 남자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멍청아, 급한데 총으로 쏘든 활로 쏘든 그게 뭐가 중요해?”
“뭐, 멍청이? 총으로 쏘면 탄 맞은 주변은 다 도려내야 해서 그만큼 못 먹고 버려야 할 거 아냐?”
“야, 우리가 지금 멧돼지 잡아먹으려고 한 거냐?”
“그건 아니어도, 잡았으면 당연히 비상식량으로 챙겨가야 할 거 아냐? 그냥 식량도 아니고 고기인데! 고기를 아깝게 그냥 버려?”
영록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개울가 뒤편에서 고급스러운 여행용 복장을 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둘이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며 자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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