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대동력 9,993년 13월 36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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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누리마루 경월당
영록의 요청에 따라 경월당의 은대명은 율도 대사관에 누리마루에 새로운 마루한이 도착했으며 그가 율도 태상국 강운예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언을 보냈다.
율도 대사관에서 하루 만에 답신이 도착했다. 명일 오전 새로운 마루한을 율도 대사관으로 모셔가기 위해 무관과 병력들을 보내겠는 내용이었다.
이날 아침, 약속대로 수십 명의 율도국 무사들이 네 마리 말이 끄는 호화롭고 아름다운 마차를 끌고 경월당에 도착했다.
그들이 가져온 마차만큼 율도군 무사들의 무장도 눈길을 끌었다. 그들 중 몇 명은 은대명과 같은 다모랑이었지만 대부분은 영록처럼 생긴 사람들이었다.
율도군 무사들은 모두 말을 탄 기병들이었다. 말은 영록이 알고 있던 현실 세계의 말보다 훨씬 크고 강인해 보였다.
말 위의 무사들은 모두 광이 나지 않는 검은색 철갑주에 넓은 챙이 달린 검은색 투구를 쓰고 있었고, 5m는 넘어 보일 법한 장창과 휘어진 칼과 굽은 활, 도리깨처럼 생긴 몽둥이, 오각형의 방패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는 말에도 철갑이 입혀져 있었다.
또, 몇 명은 총도 가지고 있었다. 영록은 그들이 들고 있는 총이 옛날 사극에서나 보던 나무로 된 화승총이 아닌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치이익, 불꽃이 타들어 가는 심지, 화승은 보이지 않았다.
총의 윗부분에는 방아쇠를 당기면 떨어지는 망치 같은 부분이 달려 있었고, 망치가 떨어지는 부분에는 작은 화약 같은 것을 꽂아 넣을 수 있는 돌기 같은 것이 있었다.
영록은 문득 예전에 태하가 가지고 있던 밀리터리 상식 책에서 보았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조총 같은 화승총이나 플린트락은 아닌 거 같고, 퍼커션 캡 방식의 총인가? 퍼커션 캡 방식이면 나폴레옹 시대 즈음에 나온 거 아닌가? 설마 안에 강선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저 정도 수준의 총이 있는데 칼하고 창은 왜......? 여기는 총하고 칼 다 쓰는 시대인건가?’
은대명과 경월당에서 일하는 모든 다모랑들과 함께 자신의 짐을 챙겨 정원 앞에 나와 있는 영록을 본 율도국의 무사들이 모두 말에서 내렸다.
그중 맨 앞에 선 무사가 영록에게 오른손을 투구에 대며 마치 현실 세계의 거수경례와 같은 군례를 올렸다.
“율도 대사관 주재무관 최기라고 하옵니다. 새로운 마루한을 모실 수 있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옵니다. 지금부터 저희가 마루한을 대사관까지 모시겠사옵니다.”
영록은 곁에 선 은대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섭섭한 표정으로 영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떠나실 시간이로군요. 그래도 이 누리마루로 내려오신 마루한을 직접 모실 수 있었던 이 며칠은 제 평생 최고의 영광된 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은대명은 손에 쥐고 있던 두툼한 비단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간단히 드실 것들을 좀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즐겨 드셨던 차와 떡 같은 주전부리들이니, 가시는 길에 챙겨 드소서.”
은대명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영록은 고마움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당접사님. 나중에 꼭 여기 다시 찾아올게요. 꼭이요.”
은대명은 영록의 손을 보고 감격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리에 꿇어앉아 영록의 손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영록은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들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영록은 최기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 탔다.
마차 안은 폭신한 가죽시트와 화사하게 예쁜 방석과 쿠션같이 생긴 것들이 가득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비단으로 된 커튼 같은 것도 드리워져 있었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영록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은대명과 경월당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던 많은 다모랑들도 그를 향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전 13시, 누리마루 일대
마차는 생각 보다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길이 포장도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평하게 잘 닦여 있는 덕분이었다.
경월당이 있는 누리마루 중턱 아래에는 겨울의 정취가 한껏 느껴지는 숲 사이사이로 생각보다 많은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중간중간에는 계단식 논과 밭으로 보이는 경작지들도 있었고, 초원 위에 말과 소, 양으로 보이는 가축 무리가 뛰어다니는 것도 보였다.
그 일대가 모두 다모랑들의 거주지였던 것이다.
경월당에 온 새로운 마루한이 오늘 이 앞을 지나간다는 소문은 이미 동네방네 다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수천 명의 다모랑들이 길가에 서서 율도국 무사들의 호위를 받는 마차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반갑게 손을 흔들기도 했고, 처음 들어보는 곡조로 노래를 불러주는 이도 있었다. 영록이 탄 마차 앞에 꽃이나 꽃잎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영록이 마차 창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사람들이 마치 연예인을 본 사람들 마냥 환호성을 질렀다. 모든 이들의 얼굴에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나는 저들을 모르는데, 저들은 왜 날 이리도 반가워하며 웃어주는 걸까? 내가 대체 뭐라고, 마루한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환대해 주는 걸까?’
영록은 쑥스러움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 다모랑들은 마치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산 중턱의 경월당에서부터 누리마루 아래까지 내려오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누리마루 아래에도 다모랑들의 터전이 있었다. 그곳에는 산 중턱에 있는 것보다 더 넓은 경작지들이 펼쳐져 있었고, 가축들을 키우는 초원들도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듯 보이는 경작지에는 흰 서리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은대명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대동은 1월부터 5월까지의 봄, 6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 10월부터 12월까지의 가을, 그리고 13월부터 15월까지의 겨울, 이렇게 대동에도 4계절이 있고, 지금은 13월 겨울 중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길가에 구경나온 다모랑들의 옷은 현실 세계의 겨울옷 마냥 두툼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팔이나 어깨가 드러나는 민소매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역시 다모랑들은 몸에 털이 많아서 추위를 덜 타는 건가? 그럼 여름에 더위 때문에 고생할지도 모르겠는데?’
영록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마차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느덧 율도국 무사들의 행렬은 다모랑들의 거주지를 지나 깊고 울창한 숲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행렬을 구경하러 모인 인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영록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이래서 연예인들도 힘든 직업이라고 하는 거구나. 이렇게 잠깐 모르는 사람들한테 웃으며 손 흔들어 주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닌데 이런 짓을 매일 하려면...... 어휴~’
영록은 아까 은대명이 건네준 보따리에서 차가 든 도자기 병을 꺼내어 마셨다. 차는 아직도 차갑고 시원했다. 마시자마자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 차, 무엇으로 만든 걸까? 무슨 특별한 허브 같은 걸로 만든 걸까? 경월당 떠나기 전에 한 번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아쉽네......’
숲길로 접어든 이후 마차는 아까와 달리 조금 덜컹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길과는 달리 평평하게 잘 닦여져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록은 아까운 차를 흘릴까봐 뚜껑을 닫고 다시 보따리 안에 집어넣었다.
숲속의 나무들은 머리 위의 태양마저 가릴 만큼 울창하게 자라있었다. 검은 나무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진 숲길은 어둡고 음산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영록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길 위에 도끼에 베어진 커다란 나무 서너 그루가 길을 막고 누워 있었다.
율도 무사들이 그걸 보고 행렬을 멈춘 것이었다.
주변에 있는 무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올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무언가 이상해, 모두 주변 경계해!”
무사들은 말 안장에 걸어 놓은 활과 총을 꺼내 들고 주변을 향해 겨누었다. 두 명의 무사들은 말을 몰아 나무가 쓰러진 곳까지 달려가 그 주위를 살펴보기도 했다.
영록을 향해 무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다가와 말했다.
“위험하니 잠시 마차 안에 계십시오.”
영록은 다시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때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현실 세계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총소리였다.
탕! 탕! 탕! 탕!
영록은 총소리에 놀라 머리를 감싸고 마차 아래로 몸을 숙였다. 주변에서 율도국 무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좌측이다! 좌측에 복병이다!”
“1중대 돌격! 2중대는 마루한의 마차를 지켜라!”
율도국 무사들이 숲속을 향해 총과 화살을 퍼부었다.
그 순간, 숲속에서 거구의 괴한들이 괴성을 지르며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악!”
모두 얼굴을 두건으로 가리고 있는 자들이었다. 몸에 털도 있고 체구도 다모랑과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괴한들이 커다란 월도를 휘두르며 율도국 무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율도국 무사들은 손에 든 총과 활을 집어 던지고 모두 칼을 꺼내 들었다.
“모두 박살 내라!”
“모두 박살 내라!”
율도국 무사들은 다 같이 고함을 지르며 괴한들과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괴한들은 율도국 무사들의 칼날을 피해 그들이 탄 말을 먼저 찌르고 베었다. 말들이 고통에 길길이 날뛰자 무사들은 말 아래로 몸을 날렸다.
율도국 무사들은 괴한들이 갑주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완만하게 휘어진 군도를 번개같이 휘두르며 그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무사들의 첫 번째 표적은 무기를 들고 있는 괴한들의 팔이었다. 무사들은 괴한들의 공격을 칼로 가볍게 흘려내며 옆으로 돌아서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팔을 내리쳐 절단해버렸다.
“끄아악!”
괴한들이 떨어져 나간 팔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무사들의 칼이 또다시 번쩍, 하고 섬광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괴한들의 몸은 여지없이 두 동강으로 잘려져 나갔다.
율도국 무사들의 무예 솜씨는 눈부셨다. 네 배는 더 많아 보이는 괴한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공격하고 있었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쓰러뜨려 나가고 있었다.
율도국 무사들을 이끄는 최기도 말을 달리며 도리깨처럼 생긴 편곤을 휘둘러 괴한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투구도 쓰지 않은 채로 머리를 얻어맞은 괴한들은 빠각! 하는 뼈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모두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말을 탄 무사들이 기다란 장창으로 괴한들의 몸을 꿰뚫었다. 조금 뒤편에 있던 무사들은 활을 쏘고 총을 쏘며 아군을 엄호했다.
마차 주변으로 괴한들의 시체들이 쌓여가고, 무사들의 검은 갑주와 전포(갑주 안에 입는 전투복)는 적의 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괴한들은 모두 등을 돌려 숲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쫓지 마라! 모두 마차를 지켜라!”
최기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편곤을 들어 보이며 무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무사들은 대오를 정비하고 다시 마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갑주로 중무장한 상태인지라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자는 없어 보였다.
무사들은 땅에 쓰러진 괴한들의 두건을 벗겨보았다. 두건을 벗기자 털이 잔뜩 나고 고약하게 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모두 두두리들입니다.”
최기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느 나라 소행인지는 숨기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한 모양이구나. 일단 이 자들의 무기나 의복, 소지품들 중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챙겨가라.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우리 율도국을 공격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줘야 하니까.”
최기는 피 묻은 무구들을 내려놓고 말에서 내려 마차로 다가갔다.
“갑작스런 변고에 많이 놀라셨을 줄로 압니다. 이 모든 게 제 불찰이오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모든 상황이 끝나고 적도들은 모두 도주했습니다. 이제 심려 놓으소서.”
그는 공손한 목소리로 마차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최기는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마차 문을 열어 보았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록은 물론, 영록의 짐까지 모조리 사라진 후였다. 최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마루한께서 납치되셨다! 1중대! 모두 무기 들고 나 따라와!”
최기는 다급히 말 위에 뛰어올라 괴한들이 도망간 숲을 향해 달려갔다. 10여 기의 기병들이 그의 뒤를 쫓아 말을 달렸다.
오전 14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수십여 명의 두두리들이 어딘가를 향해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 중 무언가를 담은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커다란 자루는 계속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그 자루 안에 영록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루 안의 영록에게, 주변에 있는 녀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좀 쉬었다 가자구! 폐가 찢어져 죽을 거 같아!”
“시끄러! 여기서 쉬다가는 곧바로 율도 놈들에게 따라잡혀 모두 죽고 말 거야! 아까 그놈들 칼 쓰는 거 못 봤어? 그런 놈들한테 걸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계속 뛰라고!”
“헉, 헉...... 그럼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뛰어야 하는 건데?”
“좀만 더 가면 그 도깨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제 이 자루 속에 든 놈만 넘겨주고 돈만 받으면 끝이니까 좀만 더 참으라고! 이제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데,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
영록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자신을 납치한 녀석들이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자신을 넘겨주려 한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루 속에서 손을 더듬거려 보았다. 다행히 자신이 가지고 온 가방과 보따리들이 모두 자루 속에 함께 담겨져 있었다. 그는 몸이 둥글게 말아진 상태에서 끙끙거리며 발밑에 있던 가방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오후 15시, 누리마루 남쪽 숲 일대
얼마 못 가 말을 탄 율도군 무사들이 두두리들의 뒤를 바싹 쫓아 왔다. 그걸 보고 놀란 두두리들은 일제히 흩어져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율도군 무사들은 바람같이 말을 달리며 마치 사냥하듯 활로 두두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쓰러뜨려 나갔다.
그렇게 수십의 두두리들이 율도군 무사들에 의해 쓰러졌다. 하지만 영록을 데리고 있던 두두리들은 추격을 뿌리치고 숲속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 도착한 두두리들은 불과 여섯 명에 불과했다.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간 그들은 마치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두두리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뚝, 하고 떨어졌다. 두두리들은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출현에 기겁했다. 몇 명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나자빠지기도 했다.
그들 앞에 하얀 얼굴에 노란 머리, 혹은 갈색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웃으며 서 있었다. 모두 8명이었다. 그들도 모두 두두리처럼 검은색 잠행복 같은 걸 입고 있었지만, 그 옷감은 두두리들이 입은 것들에 비교하면 훨씬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들이었다.
두두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이 그 도깨비들이야?”
곁에 있는 두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얼른 돈 받고 여기를 뜨자고.”
두두리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자루를 땅에 내려놓으며 도깨비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당신네들이 말한 그 마차에 타고 있는 놈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데리고 왔수다. 어서 빨리 약속한 돈이나 내놓으쇼. 아까 율도 놈들이 바로 우리 뒤에 바싹 붙어서 쫓아오고 있던 터라 시간 낭비할 새가 없수다.”
대장으로 보이는 도깨비가 마치 비웃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율도 놈들까지 달고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약속이 틀려지는데?”
그러자 두두리는 화가 난 듯 마구 소리를 질렀다.
“뭐가 약속이 틀려진단 말이오? 마차 안에 그놈만 데리고 오면 된 거지, 뭐가 또 어쨌단 말이오?”
도깨비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두두리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의 표정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우리가 마차 안에 있던 놈만 데리고 오라고 했지, 언제 마차 주변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까지 데리고 오라고 했나? 그럼 우리도 함께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 몰라? 그런데도 제 돈 다 받아가겠다고? 역시 좀도둑 두두리들 답네.”
“뭐, 뭐라고, 좀도둑?!”
도깨비들의 빈정거림에 두두리들이 분노하며 칼을 뽑아 들려 했다.
순간, 도깨비들의 몸이 바람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삼각형 모양의 얇고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8명의 도깨비가 두두리들을 몰아붙이며 무자비하게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 차례 전투를 치른 데다가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모든 체력이 고갈되어 있던 두두리들은 도깨비들의 빠른 칼부림에 하나씩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두두리의 목을 벤 도깨비 대장이 칼에 묻은 피를 두두리의 옷에 닦으며 말했다.
“자루 챙겨라, 율도국 놈들이 온다고 했으니 우리도 빨리 피하자.”
그때, 도깨비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루가, 자루가 비어 있습니다!”
도깨비 대장이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자루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자루의 아래쪽은 길게 찢어져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어느 틈에 마루한이...... 모두 흩어져서 찾아! 율도국 놈들이 먼저 찾으면 안 된다!”
도깨비들이 숲속을 향해 달려갔다. 도깨비들의 대장은 찢어진 자루를 분한 듯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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