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2028년 3월 5일 (3)
* * *
오전 6시, 경기도 우성시 경월천 인근
남자는 인기척도 없이 어느새 그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로 세 명의 남자가 조폭들 있는 데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이제 막 물에서 나온 사람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입은 검은 옷과 신발은 아무리 봐도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입는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한복 같기도 하고, 유럽 르네상스 시대 옷 같기도 하고, 뭐라 딱 단정 짓기 힘들었지만 분명 저 옷 입은 상태 그대로 거리에 나갔다가는 사람들 모두 이상하게 쳐다볼만한 모습이었다.
조폭들은 갑작스런 사람들의 출현에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뭐, 뭐야? 여기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아저씨들 가던 길이나 마저 가쇼. 괜히 끼었다가 뒈지기 싫으면.”
조폭들은 남자를 향해 은근슬쩍 총을 들어 보이며 위협했다.
하지만 남자는 조폭들의 기세에 겁을 먹기는커녕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고 있었다.
얼굴은 분명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입에는 비웃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내 물음에 그 따위로 대답하는 놈은 200여년 만에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보아하니 깡패 건달 새끼들인 거 같은데, 지금 총 들고 어린 학생한테서 삥 뜯는 중인가?”
남자는 조폭들 앞으로 저벅 저벅 걸어왔다. 조폭들은 흠칫 놀라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아 씨발, 아저씨 뭔데? 아, 끼지 말고 그냥 가라고~! 아저씨 진짜 총 맞아 뒈지고 싶어!”
남자는 겁도 없이 조폭이 든 M16A1 소총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폭은 남자의 패기에 질려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아, 씨발, 이 꼰대 새끼가 어디서......”
조폭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 남자의 손이 소총 소염기를 붙잡았다.
“아악!”
조폭이 화들짝 놀라는 순간, 소총손잡이를 잡고 있던 오른손이 심하게 저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총은 남자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남자는 신속하게 노리쇠를 뒤로 한번 잡아당기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총을 들어 어깨에 견착했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총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영록은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곁눈질로 주변을 훔쳐보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조폭들 모두 땅바닥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비릿한 피 냄새와 매캐한 화약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뭐, 뭐지? 지금 저 사람, 조폭들 다 죽인건가!?!?’
영록이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이게 태상국이 여기 계실 때 쓰시던 총입니까? 우리가 쓰는 총이랑 정말 비교도 안될만큼 엄청난 무기인데요?”
“역시, 총이란 자고로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쏘는 맛이 있어야지! 여기 이것들은 내가 쓰던 것들보다 조금 이전 시대 총들이야. 그래도 기본적인 구조나 탄에 들어있는 화약 성분은 크게 다르지 않지. 그런데 건달 같은 놈들이 왜 이런 걸 들고 다니나 모르겠네? 원래 나 있을 때 이런 일은 없었는데...... 승범이랑 용준이는 여기 떨어져 있는 총들 모두 다 챙겨 넣어. 이렇게 나오자마자 1차 목표 달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이 박사, 이제 가져갈 게 석유하고 또 뭐가 남았지?”
“이제 제련된 철기들하고 건축재료 표본들만 찾으면 됩니다.”
“흠, 제련 철기나 건축 재료는 어디 공사장 같은데 들어가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석유는 어디 주유소 같은데 털어야 하나?”
“주유소가 뭔데요?”
“음, 있어, 기름 파는 데야.”
“방앗간 같은 데인가요?”
“아니~! 먹는 기름 말고 자동차에 기름 넣는 그......”
“자동차는 또 뭔데요?”
“아, 그...... 됐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뒤에 있던 남자들이 조폭들이 시체 사이에서 총과 탄을 꺼내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영록이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있던 중,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얘야, 뭣 좀 물어보자. 지금 여기가 몇 년도니?”
영록은 고개를 들고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 ‘모두를 위한 격투 무예’ 저자 강운예가 프로필 사진과 똑같은 표정으로 인자하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무척 키가 큰 사람이었다. 대략 봐도 185cm는 훨씬 넘어보였다. 덩치는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옷 사이로 보이는 근육들은 격투기 선수들처럼 강하고 질겨 보였다.
영록은 쭈뼛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2028년 3월 5일이에요.”
“2028년...... 역시 계산대로 11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셈이군...... 아, 근데 여기 지금 무슨 일 있니? 여기가 무슨 미국도 아니고,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백주대낮에 건달들이 총 들고 설쳐대는 거지? 이 나라 치안 상태가 완전 개판난 건가?”
영록은 작년에 있었던 2차 한국 전쟁과 애국 청년 십자군 조폭들에 대해,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전쟁에 대해 아는 대로 이야기해주었다. 강운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연달아서 전쟁이 일어날 줄을 몰랐구나. 그리고 두 전쟁 다 한국이 먼저 선공을 칠 줄은......”
강운예는 영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얘기 잘 들었다.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은 많다만, 우리는 지금 시간을 함부로 보내면 안 되는 처지라서 말이야. 그럼 너도 조심히 들어가라. 건달들에게 삥 뜯기지 않게 조심하고.”
강운예는 다른 일행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하려 했다.
영록이 그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강운예 관장님......! 서울 강서 골든라이언 체육관 강운예 관장님 맞으시죠?”
그의 외침에 강운예는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걸 어떻게......? 너 날 아니?”
“관장님 책 읽었어요, 모두를 위한 격투 무예! 다섯 권 모두요!”
강운예는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책 나온 지 10년은 넘었을 텐데 아직도 서점에서 팔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내 책을 읽어주다니 고맙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영록은 다급히 그에게로 다가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관장님! 관장님, 제발......! 관장님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영록은 금방이라고 울 것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강운예는 인자한 표정으로 찬찬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전 7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동
강운예 일행은 영록의 안내를 받아 일월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영록의 뒤로 까만 피부에 덩치가 좋고 힘이 세 보이는 사승범, 강운예와 비슷한 체격에 날래고 민첩해 보이는 최용준, ‘이 박사’라고 불리는 학자풍으로 생긴 이교연 이렇게 세 사람 일행 모두 강운예와 함께 일월촌을 향해 걷고 있었다.
승범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 박사님 말대로라면 우리가 여기서 1시간 머물면 대동은 며칠이나 시간이 지나간다면서요? 쟤 때문에 공연히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교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저 소년 말대로라면 거기 석유도 있고 부서진 집들에서 철근이나 건축 재료들도 쉽게 구할 수도 있고, 게다가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라 표본 조사하고 채취하기도 쉽다 하잖아요? 충분히 가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요, 나는.”
“아까 쟤가 하도 울면서 말해서 도대체 뭐라 하는지 나는 통 이해가 안 되던데, 이 박사님은 좀 알아들으셨어요?”
“뭐, 태상국 말씀대로 우리가 쓰는 말이나 여기서 쓰는 말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듣고 이해하는데 어렵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하나, 저 소년 여자 친구가 나쁜 놈들에게 붙잡혀 있다, 둘, 저 소년은 여자 친구를 구하려다가 그만 그 나쁜 놈들 중 몇 명을 죽이고 아까 우리와 만났던 곳까지 도망쳐 나온 길이었다, 셋, 태상국께서 여기 관청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지만, 이 소년은 그랬다가 자기도 살인범으로 잡혀 들어가고 여자 친구도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다......”
이때 용준이 말을 거들며 나섰다.
“그러고는 태상국께서 무슨 생각을 하신 건지 저 소년을 도와주시기로 결정하셨죠? 원래 태상국께서는 법치(??)를 강조하시는 분이라 지금 결정은 저도 좀 이해가 안 됩니다. 만약 여기가 율도였으면 ‘그럼 너도 법에 따라야지!’하고 호통 치셨을 텐데, 저 소년에게는 그렇게 안하시네요.”
승범이 말했다.
“아까 저 소년이 태상국께서 여기 계실 때 쓰셨다는 책 다 읽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것 때문에 그러신 건가? 자기 책 읽은 독자 만나서 하도 기쁘셔서 그냥 막 도와주고 싶어지셔서......”
용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발로 승범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으이그, 태상국이 그런 작은 일 때문에 그러실 분이시냐? 이 박사님 말대로 여기 대동으로 가져갈 표본들도 있고 하니까 겸사겸사 가시는 거겠지!”
승범과 용준이 아옹다옹하는 것을 보며, 교연이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가장 얻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던 총하고 화약을 너무 쉽게 얻어서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소년을 도와주고 돌아가도 시간이 충분할 거라 판단하셨을 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아까 태상국께서 그 사람들 순식간에 다 해치우시는 거 보고 저 좀 많이 놀랐어요. 말 한마디도 안하시고 어떻게 그렇게...... 태상국이 싸우시는 모습 처음 본 거거든요.”
교연의 말에 승범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아~ 태상국 원래 그러세요. 전쟁 중에 사람 죽이면서 말 많이 하는 거 변태 같아 보이신다고, 평상시에는 농담도 잘하시고 재미있는 말씀도 많이 하시지만 전쟁터 나가서 진짜 진지해지시는 순간부터는 작전 지시 외에는 일절 말씀 한마디 안하시는 분이에요. 아, 그리고 아까 그 사람들 몸에 문신 엄청 많았잖아요? 일전에 태상국께서 약주 드시면서 말씀하신 적 있는데, 대동 오시기전 어렸을 때 여기서 몸에 문신 잔뜩 한 나쁜 놈들한테 가족들이 화를 입은 적이 있어서, 그 때부터 문신한 사람들 보면 엄청 싫어하시게 되었데요. 그래서 지금도 율도군 무관 선발할 때 몸에 문신 많은 애들은 일단 다 임관 보류시키라고까지 하시잖아요? 아마 그래서 아까 그 사람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발일사(一?一死, one shot one kill)로 보내버리신 모양이에요.”
어느덧 일행은 조폭들의 은신처인 판잣집 가까이 다다랐다.
강운예가 용준을 불러 말했다.
“니가 가서 안에 상황 보고 와 봐.”
용준은 마치 자객처럼 은밀하고 민첩하게 건물 벽에 붙어 창문을 통해 안쪽을 엿보았다. 그는 마치 아주 은밀하고 신속하게 내부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일단 거실에 남자 1명만 보입니다.”
강운예가 영록을 보고 물었다.
“원래 여기 니 여자 친구랑 중년의 아줌마 하나, 남자 13명이 있었다고 했지?”
영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13명 중 2명은 네 손에 죽었고, 7명은 밖에서 처리했으니 이제 니 여자 친구랑 아줌마, 남자 4명이 더 있어야 하는데...... 혹시 저 건물 안에 밖에서 안 보이는 방 같은 게 있니?”
“화장실 옆에 무슨 작은 방이 있는데, 발전기랑 석유 보관하는 곳이에요. 그곳 말고 밖에서 안 보이는 곳은 없을 거예요.”
강운예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럼...... 내가 정문으로 들어갈 테니, 승범이 좌측 창문으로, 용준 너는 우측 창문으로 들어가서 내부에 누가 더 없는지 확인해 봐.”
그리고 그는 이렇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지금 거실에 있다는 그 놈만 사로잡을 거니까, 얘 여자 친구랑 아줌마 빼고 나머지 눈에 보이는 놈들은 모두 모가지 따버려도 좋아.”
승범과 용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판잣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 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영록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교연과 함께 밖에서 기다렸다.
교연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영록을 안심시켰다.
“자네, 너무 걱정 말게나. 태상국은 말 할 것도 없고, 함께 온 저들 모두 율도 최고의 무사들이라네. 우리가 이리로 건너오면서 무기를 하나도 챙겨 오지 못했지만, 모두 다 태상국의 무예를 배운 사람들이라 상대가 누구든 맨손으로도 충분할거네.”
영록은 교연에게 조심히 물었다.
“저...... 태상국이라는게 강운예 관장님을 말하는 거지요? 태상국이 무슨 뜻인가요?”
“흠...... 우리도 이걸 설명하기 좀 힘든데...... 율도를 다스리는 통령과 정부기구, 의회를 감독하고, 율도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는 최고 권위자? 뭐 이정도로 개념 지을 수 있을 거 같네.”
“아까부터 율도라고 말씀하셨는데, 율도가 어디에 있는 나라에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 나라라서......”
교연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이네...... 직접 보기 전까지는 자네가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렵구만 그래...... 그냥, 여기 사람들은 와보기 힘든 아주 먼~ 곳에 있는 나라라고 이해하면 충분할 거 같네.”
잠시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용준이 문밖을 향해 들어와도 좋다고 손짓을 했다. 교연은 영록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록이 판잣집에 들어와 보니, 흠씬 두들겨 맞은 듯 피투성이가 된 조폭 하나가 반송장처럼 거실 벽에 기대어 있었다.
강운예가 영록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집 안에는 이놈 한 명 밖에 없었단다. 이놈한테 물으니까 다른 놈들은 이미 네 여자 친구와 아줌마를 데리고 여기서 도망갔다고 그러고, 이놈은 너 쫓아나간 놈들 돌아오면 다 같이 움직이려고 여기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는구나.”
영록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놈들이 유민이를 데리고 어딜 갔는지 말했나요?”
“이놈은 그거까지 모르는 모양이더구나. 미안하다......”
영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야산에서 죽은 녀석들과 건물에 남아 있던 녀석을 제외하면, 유민을 데리고 도망간 놈들은 다음과 같았다.
마선욱과 고문 전담 조폭들의 우두머리이자 그녀를 고문했다는 전도한, 그리고 이들 조폭들을 이끌던 박광......
영록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뿌드득 뿌드득 이가 갈렸다.
교연과 용준, 승범이 창고에 있던 석유 말통 하나를 챙겨 놓고 건물 근처를 돌아다니며 철 조각들과 콘크리트, 시멘트 조각들, 벽돌 조각들을 채취하는 동안, 영록은 은신처 이곳저곳을 더 뒤져 보았다. 혹시라도 조폭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없는지, 행여나 유민의 부끄러운 동영상 같은 건 남겨두고 떠나지 않았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영록은 맥빠진 표정으로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강운예는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와 싱크대에 들어있는 음식들과 식료품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거 아직도 팔고 있었네? 이건, 포장이 변했나 보구만,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강운예는 향수에 젖은 얼굴로 물건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찬장 안에 커피 믹스를 발견하고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 커피를 한 잔 탔다. 커피 믹스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넣었다. 그는 천천히 커피를 음미하며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맛, 200여년 만이구만......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역시 나에게는 이 커피가 최고지.”
강운예는 찬장에 남아 있는 커피 믹스들을 모조리 챙겨 총을 넣은 자루에 함께 집어넣었다. 그리고 후추나 양념들도 몇 개 같이 챙겨 넣었다.
“이건 예린이, 예은이가 좋아할 거 같군. 이거도 가져가야지.”
그는 냉장고에 있던 곰 모양 젤리도 함께 챙겼다.
강운예가 신나게 주방에 있는 물건들을 털고 있을 때, 영록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관장님.”
“응?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니?”
“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강운예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저, 유민이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경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유민이가 어디 있는지 찾는다하더라도 지금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영록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저, 지금보다 강해지고 싶어요. 관장님만큼은 아니더라도 혼자서 유민이를 구할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강해지고 싶어요! 사실 지금까지 관장님 책 보면서 몇 달 동안 혼자서 연습해왔어요. 혼자서 연습했는데도 어른인 조폭들과도 싸울 수 있을 만큼 전보다는 확실히 강해진 게 느껴졌어요! 그러니...... 이 책을 쓰신 관장님께 직접 배운다면 분명 더 강해지고 혼자서도 유민이를 구할 수도 있게 될 거 같아요! 전 어차피 전쟁고아라 갈 데도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제가 유민이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때까지 저를 좀 가르쳐 주세요, 제발......”
강운예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네가 오기 조금 곤란한 부분이 많단다. 구지 내가 아니어도 네가 강해질 수 있게 운동할 만한 체육관들이 이곳에도 많이 있을 거야. 잘 찾아보면 나보다 더 나은 지도자들도 많이 있을 거고. 그리고 혼자서 누구를 구하러 가거나 그것 때문에 복수하려는 거...... 나도 예전에 너랑 비슷한 아픔을 겪은 적이 있었지. 그래서 너를 도와주려고 여기 까지 오게 된 거고. 그런데 혼자서 하는 건 절대 쉽지 않더구나. 더군다나 그 일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더 힘들게 되지.”
강운예는 영록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여자 친구 일은 유감이다. 만약 우리에게 시간이 좀 더 허용되었다면 너를 도와주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우리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그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거든.”
오전 8시, 경기도 상아시 태화산 인근
강운예 일행 4명은 택시를 잡아타고 태화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까 일월촌 은신처에서 조폭이 가지고 있던 돈을 빼앗아 택시비를 마련한 것이다.
택시 뒷좌석에 탄 교연, 승범, 용준은 무슨 놀이기구라도 탄 사람처럼 완전 들뜬 표정이었다.
“와~ 어떻게 말도 없이 혼자서 이렇게 빨리 달리지? 와, 진짜 신기하다!”
“이게 아까 태상국께서 말씀하신 자동차라잖아. 스스로 자, 움직일 동, 스스로 움직이는 차라고 해서 자동차!”
“와~ 이 박사님, 우리도 이런 거 만들 수 있죠?”
“글쎄요, 돌아가서 열심히 연구해 봐야죠. 그런데 정말 이런 거 있으면 정말 편할 거 같네요.”
뒷좌석에서 요상한 말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택시 기사는 ‘좀 이상한 손님들이 탄 건가?’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운예는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계면쩍은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뒤에 탄 사람들이 고립된 곳에 오래 살다 나와서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이해해주세요......”
“아, 아, 네, 괜찮습니다. 뭐, 전쟁 때문에 어디 숨어 사시다가 나오신 거예요?”
“아, 네,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차 뭐죠? ‘체르니3’ 인가요?
“......이 차 이번에 새로 뽑은 최신형 ‘체르니8’ 인데요? 게다가 하이브리드인데...... ‘체르니3’라니, 십년 전 차 이름을......”
“아, 아하, 그쵸? ‘체르니3’ 는 쫌 오래 되었죠? 아하하......”
강운예 일행을 탄 택시는 태화산 고룡동굴을 향해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탄 택시 뒤로, 한 대의 택시가 더 따라오고 있었다.
영록이 택시를 잡아타고 그들 뒤를 따라 오고 있었던 것이다.
강운예 일행은 택시 트렁크에서 짐이 가득 든 자루들을 꺼내 어깨에 짊어지고 고룡 동굴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도중, 맨 뒤에 있던 용준이 강운예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아까 그 아이가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
강운예는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의지가 있는 아이인가 보네. 뭐, 그냥 따라오게 놔둬. 설마 우리 따라 물속까지 뛰어들지는 못하겠지.”
강운예는 영록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계속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동굴 깊숙한 곳에는 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물살은 매우 빠른 급류였고, 심히 위험해 보였다. 자칫 급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동굴 속 바위들에 부딪혀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다.
급류가 흐르는 곳 옆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가던 강운예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 길 끝에 마치 바위가 무너져 내린 듯 깨져나간 곳이 있었다.
“자, 여기야. 다들 돌아갈 준비 되었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교연은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자, 그럼 집으로 돌아가자구.”
강운예는 씽긋 웃으며 급류로 몸을 날렸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두 눈을 질끈 감고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그 광경을, 영록이 먼발치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오전 10시, 경기도 상아시 태화산 인근
영록은 급히 택시를 타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뒤로 짊어지는 가방에 옷과 짐들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학교 식당으로 뛰어가 비닐 랩과 지퍼백들을 잔뜩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옷과 짐들을 비닐로 감싸고 지퍼백 안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모두를 위한 격투 무예’ 책 다섯 권도 모두 비닐과 지퍼백으로 감싸 가방 안에 넣었다.
영록은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태화산 고룡 동굴로 향했다. 택시기사는 어린 학생이 가방 하나 들고 동굴을 간다고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물어 보았지만 영록은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영록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동굴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아까 강운예 일행이 마지막으로 서 있었던 바위가 깨져 나간 곳이 나왔다.
영록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급류는 요란한 소리를 뿜어내며 마치 똬리를 틀며 힘차게 움직이는 한 마리 용처럼 거칠게 흘러가고 있었다.
영록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으로 코를 누르고, 급류 아래로 뛰어내렸다.
거친 물살에 휩쓸린 그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정신없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영록은 이러다 어딘가에 부딪혀 죽을 것 같다는 공포심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물속에서 점점 숨이 막혀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유민아......’
영록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대동력 9,993년 13월 33일, 누리마루 경월당
마치 오랜 잠을 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위에 따스한 온기가 흐르고, 햇살이 그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영록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슴 위에는 넓고 푹신한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고, 주변에서는 신비롭고 향긋한 과일 향이 느껴졌다.
영록은 너무 놀라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원래 입고 있던 옷은 어디론가 가고, 하얀색 잠옷 같은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가구들이 가득한 둥그렇고 넓은 방에 자신이 홀로 누워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긴 어디지? 나 지금 죽어서 천국에 온 건가? 여기가 하늘나라인가?’
그가 놀라 침대 위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어나셨군요. 대동에 오신 새로운 마루한이시여. 어디 몸에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영록은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의 앞에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짐승처럼 털이 달린 거대한 생명체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우리말을 하며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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