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34화 (34/217)

〈 34화 〉 2027년 7월 28일

* * *

­ 오후 1시, 경기도 우성시 우성경찰서, 현 국회 특위 임시 조사 본부

계엄군들이 우성경찰서에 붙잡혀 온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간 후, 영록은 열흘 동안 경찰서 정문 위병 근무만 투입되고 있었다.

전에 지하 1층 계단 근무를 설 때에는 2시간 근무, 2시간 휴식 이런 식으로 근무가 돌아갔는데, 이제 근무자가 많이 남는지 1시간 근무, 4시간 휴식으로 여유롭게 근무 로테이션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쉬는 시간이 많아 좋긴 했지만 위병 근무를 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록과 같은 성부 학교 출신 어린 학생들과 이번에 새로 합류한 인원들 중 젊은 층에 속하는 일부 인원들뿐이었다. 근무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은 대부분 경찰서 안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스톱을 치는 등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부 인원들이 주변 상점이나 식당에서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는 등 소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성모가 나서서 가게 주인들에게 사과하고 돈을 변상해주며 일을 무마시키기도 했다.

영록은 자신보다 2살 많은 성부 학교 학생 한 명과 함께 위병 근무에 투입되어 있었다. 그는 위병 근무가 지루했던지 소총을 초소 벽에 기대어 놓고 영록에게 이러쿵저러쿵 여러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영록은 그로부터 애국 청년 십자군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조직폭력배들이고 이들 모두 국회의원 마두원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역시, 모두들 문신을 괜히 하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럼 지금까지 조폭들이 사람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고문해 왔다는 건데......’

그의 이야기에 영록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지금 자신이 있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경고의 말들이 들려왔다.

‘조폭들하고 계속 같이 있을 순 없잖아? 그들 일을 돕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이름은 애국 청년 십자군이라지만 지금 저 사람들 하는 게 어딜 봐서 애국이라는 거지? 지금이라도 그만둔다고 말하고 학교로 돌아갈까?’

간다고 하면 구지 잡거나 못 가게 막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덩치 큰 조폭들이 바글바글한데, 구지 마르고 왜소한 중학생 하나 나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민이한테 어떻게 말하지?’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영록은 다시 망설여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민은 애국 청년 십자군을 떠나려는 자신을 비난할 것 같았다.

지난 번, 기숙사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유민의 매서운 눈빛도 떠올랐다.

‘......그리고 나를 싫어하게 되겠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두 번 다시 친하게 지낼 수는 없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유민이는 성모 형이랑 사귀고 있는 거 같은데...... 나 같은 건 이제 신경도 안 쓰고 있는지도 몰라. 얼굴 못 본지도 벌써 2주 가까이 되어 가고 있잖아?’

유민이는 영록이 잠자고 생활하는 경찰서 인근 애국 청년 십자군들의 숙소가 아닌 시내 방향의 어느 건물에 있다고 했다. 그 곳은 성모의 부친 유광수 목사가 소유했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성모가 그 곳에서 생활하며 각종 업무를 보고 있다고 들었다.

유민이 그 곳에서 지금 성모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영록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졌을 때, 경찰서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뭐라 뭐라 떠들기도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잠시 후, 경찰서 안에서 한 무리의 애국 청년 십자군, 아니 조폭들이 검은색 테러복에 소총으로 무장까지 한 채, 그들이 타고 다니는 검은색 승합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 나왔다.

영록과 함께 근무 서던 녀석이 저들 중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야! 어디 가냐? 무슨 일 났어?”

조폭들과 함께 차를 향해 달려가던 성부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녀석 하나가 그 말에 슬쩍 뒤돌아보며 소리 쳤다.

“우리 다시 빨갱이들 잡으러 갈 거래! 우리 갈구던 계엄사령관이 대통령한테 짤려서, 일 다시 시작해야 한데!”

조폭들은 여러 대의 승합차에 나눠 타고 급히 경찰서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계엄사령관이 대통령한테 짤렸다......

다시 빨갱이들을 잡으러 간다......

영록은 경찰서 안이 다시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로 가득해질 거라 예감할 수 있었다.

­ 오후 2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동

리부일은 일월촌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참모들이 가져다 준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날의 점심 메뉴도 한국군 전투식량이었다. 빨치산들이 일월촌에서 장기 농성하기 위해 식량으로 가지고 들어온 게, 우성 서해안 산업단지 방산 업체 창고에 쌓여 있던 한국군 전투식량이었다.

‘처음에는 나쁘디 않았는데, 계속 먹으니 맛이 너무 세서 질리는구나야.’

리부일은 볶음밥에 소스를 비벼 한 숟갈 뜨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일월촌은 완전히 한국군에게 고립되어서 밖에 나가 다른 부식을 가져올 방법도 없었다.

빨치산들은 모두 일월촌 안으로 완전히 철수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빨치산들은 사방에서 조여 오는 한국 계엄군들을 게릴라전으로 괴롭혀왔다. 부비트랩 설치는 말 할 것도 없고, 민간인 옷을 빼앗아 입고 한국인인 척 연기하다가 기습을 가해 피해를 입히는 전략이 크게 주효했다. 기습을 마친 후에는 민간인들을 방패삼아 도망치기도 했다. 정확한 피해는 알 수 없었지만, 우성시의 계엄군들이 큰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했다.

계엄군들은 마치 성곽처럼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일월촌을 포위하고 고립시키고 있었다. 빨치산들로서는 크게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입맛에는 잘 안 맞을지 모르지만 몇 달은 버틸 만큼의 전투식량도 있었고, 탄약도 충분했다. 인질로 끌고 온 우성시 시민들이 총알받이 노릇을 하고 있어서 계엄군이 이 곳을 쉽게 공략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오래 끌어서, 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무사히 3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남조선 정부가 협상하자고 나오도록 만들어야 된다.’

리부일은 금방 꾸덕꾸덕해진 전투식량 볶음밥을 꾸역꾸역 삼키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덕 위로 정찰총국 45호실 공작원 조장이 올라왔다. 그는 리부일에게 경례를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리부일이 입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밥은 먹었네? 안 먹었으면 나랑 같이 한 술 뜨갔어?”

“일 없습네다. 이따 내려가서 조원들이랑 같이 먹갔습네다.”

“그럴래?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길레 식전에 여기까지 올라 왔네?”

조장은 품 안에서 보고서 한 장을 내밀었다.

“남조선 이정만 대통령이, 이곳 우성시 계엄사령관 김요한이를 보직해임 시키고 부사단장에게 계엄사령관 직무 대행을 시켰다고 합네다.”

“보직해임? 사령관 그 아새끼 모가지가 날아갔다, 그 말이야?”

리부일은 볶음밥 위에 플라스틱 수저를 꽂아 바닥에 내려놓고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조장을 바라보았다.

“네, 김요한이가 어제 우성시를 떠난 것이 확인되었고, 정확한 건 아니지만 지방 어느 곳에 연금되었다는 첩보도 있습네다.”

리부일은 조장이 건넨 보고서를 주욱 훑어보았다.

“보직해임 이유가 계엄사령관의 잘못된 작전으로 병력 피해가 극심했고, 작전 상황을 언론에 유출하려고 한 혐의 때문이라고? 비록 적장이지만 일을 못해서 잘린 건 아닌 게 분명한데...... 남조선 대통령까지 나서서 직접 별을 땄다는 건 정치적인 문제 아니갔어? 그렇디?”

“맞습네다. 몇 주 전 우성시에 내려온 자유공화당 파 국회의원들이 민주시민당 파 시장하고 정치계 사람들을 우리 공화국 전사들에게 협력한 죄목으로 잡아들여 고문까지 했는데, 실상은 민주시민당 파 김창수가 우리 공화국과 협력하고 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는 술책이었다고 합네다. 그 때문에 괴뢰군 계엄사령관 김요한이가 군대를 끌고 가서 잡혀간 사람들 모두 구해내고 언론에까지 이 사실을 알리려 하다가, 대통령이 나서서 언론인들 다 막아버리고 계엄사령군을 날려 버린 거라고 합네다.”

“김창수...... 남조선 아새끼들이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우리한테 협력했다 자백시키려고 고문까지 했다고? 김창수면 민주시민당 그쪽 파에서 나온 다음 남조선 대통령 후보지?”

“네, 맞습네다. 남조선 인민들 사이에서는 지금 대통령보다 더 인기가 높아서니,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김창수가 이기고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네다.”

리부일은 허탈하게 웃었다.

“무어가 어드레 돌아가는 그림인지 이제야 감이 오는 구나야. 허허, 참, 별 웃기는 일이..... 이러는 게 남조선이 말하는 민주주의라면, 대체 우리 공화국과 무어가 다르다는 거이지?”

리부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성시를 돌아보았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우성시의 모습은 여느 일반 도시들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리부일은 우성시의 모습이 전쟁 전 개성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리부일은 한 때 남조선을 동경 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매일 굶주리던 때에 동네 사람들이 쉬쉬하며 조심스레 나누던 남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나라’ 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남조선에 가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며,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을 통해 남조선으로 귀순하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 국경에서 붙들려 아오지 등 수용소로 끌려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리부일도 가족들과 함께 남조선행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 가족은 붙잡혀서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 노동하다가 죽었네, 누구는 강 넘어가다가 총 맞아 죽었네, 누구는 중국 인신매매범들한테 붙잡혀 남조선에 가지도 못하고 노예처럼 살고 있네, 이런 이야기들만 귀에 딱지가 붙을 만큼 듣다 보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에서 사는 게 낫다며 북한을 벗어나지 못했다.

군 시절 초기에도 남조선으로 귀순하는 이들을 무수히 볼 수 있었다. 특히 전방에서 근무하는 인민군들이 남조선으로 귀순하는 일은 1년에 몇 번씩이나 되었다.

리부일이 전방에서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에는 남북장관급 회담이 진행되기 이전인지라, 휴전선 일대에서 남북 상호간이 확성기를 통해 24시간동안 방송을 틀어 놓던 시절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찬양하고 남조선을 비판하는 방송이 쉬지 않고 나오고 있었다.

반면, 남조선은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이 일반 인민들이 듣는 라디오 방송을 틀어 놓고 있었다.

‘정오의 희망곡’부터 ‘별이 빛나는 밤에’까지, 리부일은 그 때 들은 남조선 라디오 방송의 타이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방송 타이틀 뿐 아니라 남조선의 대중가요들의 멜로디도 여전히 생각났다.

북한인민군들 중에는 이런 남조선의 대중가요들을 녹음해서 가지고 있다가 몰래 듣거나, 녹음테이프를 돈 받고 파는 이들도 많았다.

단순한 사랑 노래들이었지만, 이 별것도 아닌 노래들이 젊은 인민군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남조선의 대중가요를 듣던 인민군들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지뢰지대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조선 GP로 귀순하러 내려갔다. 하천지대에 있던 인민군들 중에는 통나무 하나 붙들고 물길에 몸을 던져 남쪽으로 내려간 자들도 있었다.

그 때에 리부일은 남조선으로 귀순한 자들에 대해 ‘더러운 자본주의 노래에 취해 공화국을 배신한 변절자들’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리부일은 우연히 남조선의 대중가요를 다시 듣게 되었다.

남북 교류가 시작되고 남조선의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 때 남조선의 가수들이 평양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리부일도 참석하게 된 것이다.

남조선 대중가수들의 무대를 직접 보고 들은 리부일은, 그제서야 북한을 버리고 귀순한 이들이 남조선 대중가요에서 느낀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남조선은 분명 북한과 달랐다.

그들처럼 되고 싶지만 절대 그들과 같아지면 안 되는,

계속 가까이 하고 싶지만 가까이 하기는커녕, 언젠가 반드시 부셔버려야만 하는,

남조선은 너무나 역설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존재는, 지금 또 한 번의 역설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국민이 우선이 되는 나라라던 남조선, 대한민국.

하지만 이 전쟁 중에 리부일이 본 것은 아무도 모르게 홀로 선망해오던 이미지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북한과 다를 바 없는 독재와 권모술수의 모습들이었다.

“이 전쟁, 애초에 남조선 대통령 그 간나새끼의 욕심으로 일어난 거이 아이야? 결국 그 간나새끼가 남조선 대통령 자리를 계속 차고 앉아 있으려고 우리 공화국이 혼란한 틈을 타 북침까지 해놓고, 이제는 자기 자리 넘볼만한 숙적들도 모조리 숙청하고 있구만기래. 독재 공화국을 만들겠다, 이 말 아니갔어? 이런 사실을 하루 빨리 남조선 인민들 모두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구만.”

“이미 외국 언론에서는 남조선 대통령의 문제에 대해 보도하고 있지만, 전쟁 중이란 이유로 모든 언론을 통제하고 있어서 남조선 인민들 중 이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일부 밖에 없습네다.”

“이래서 자본주의 민주주의도 완벽한 사상은 아닌기야. 최고지도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 국가도 언제든지 독재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남조선이 아주 좋은 선례를 남겨주는 거 아이갔어? 그리고, 우리도 그 남조선 대통령, 이 권력욕에 미친 작자를 믿었던 것이 폐착이지. 류광택 차수도 권력에만 눈이 멀어서 그만...... 아무튼 적장이 자리를 비웠으니 남조선 괴뢰군이 당장 이 곳을 공략할 여력은 없겠구만. 그 동안에 우리는 이곳 방어선을 더 굳힐 여유가 생긴거이야. 뭐, 일 없구만기래.”

리부일은 내려놓은 한국군 전투식량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볶음밥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오후 7시, 경기도 우성시 우성경찰서, 현 국회 특위 임시 조사 본부

우성경찰서 유치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영록은 다시 지하 1층 조사실 앞에서 근무를 서게 되었다.

저녁시간 이후부터, 조사실로 한 사람, 한 사람씩 끌려 들어왔다.

그리고, 조사실의 방화문 너머로 또다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록은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사람들의 비명은 전보다 더 처절하게 들려왔다.

첫 번째로 조사실로 들어간 남자가 40분도 지나지 않아 방화문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완전히 옷이 벗겨진 상태였고 온 몸은 물에 젖어있었다. 그가 끌려나오며 바닥 여기저기에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영록이 깜짝 놀라 물에 젖은 남자를 쳐다보고 있을 때, 배나오고 나이 든 조폭 한 명이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오며 남자를 끌고 가는 조폭들에게 물었다.

“뭐 이렇게 빨리 끝나는겨? 벌써 다 불은겨?”

“예, 형님. 시장하고 먼저 잡혀왔던 중요 인물들은 전 계엄사령관이 죄다 우성시 밖으로 빼돌렸다고 다 불었습니다.”

“그럼 끝인겨? 다른 건 없는겨?”

“이 새끼한테 확인할 건 다 끝났구요, 형님. 이제 다른 놈 끌고 와서 족치면 됩니다, 형님.”

계단 위의 남자는 알았다는 듯 턱짓을 한 번하고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조폭들은 물에 젖은 남자를 거칠게 유치장으로 끌고 내려갔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조폭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다음 새끼는 누구야?”

“민주시민당 우성시 간사장.”

“간사장은 또 뭐야? 간짜장은 알아도.”

“간사장이던 간짜장이던 빨리 빨리 돌려. 오늘 일찍 끝나고 나가서 술이나 빨게.”

“니가 나가서 빨고 싶은 게 술 밖에 없겠냐? 딸내미 젖꼭지도 빨고 싶은 거겠지.”

계단 아래에서 조폭들이 키득거리며 유치장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 오후 10시, 경기도 우성시 시내 일대

갑자기 근무가 편성되면서 영록은 저녁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근무가 끝나고 경찰서 직원 식당에 갔을 때에는 이미 배식이 모두 끝나고 정리가 끝난 후였다.

관리자 급으로 보이는 조폭에게로 가서 밥을 못 먹었다고 말하니,

“나라 일을 하는데 밥도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되나? 이거 줄 테니 나가서 뭐라도 사먹고 와. 그리고 오늘은 야간에도 근무 있으니까, 12시 전까지 다시 근무 서러 와야 해.”

라며, 영록에게 법인 카드 하나를 건네주었다.

영록은 기분이 좋아져서 카드를 들고 경찰서 밖으로 나와 식당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그런지 밤늦게 까지 문을 연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찾은 식당도

“전쟁 중이라, 우리 지금 카드 안 받아요.”

라며 현금만 받는다고 했다.

‘그냥 편의점 가서 간단하게 사먹고 때울까? 아니야, 그래도 카드까지 받았는데 맛있는 거 사먹는 게 낫지!’

결국 영록은 시내 방향으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래도 시내 쪽에는 밤에도 문을 여는 카드 받는 식당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

몇 십분 동안 거리를 배회했을 때, 반대쪽 인도에서 한 커플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영록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커플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유민과 성모가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영록의 심장이 가슴 밖으로 터져 나올 듯 쿵쾅거렸다. 아무 이유 없이 호흡 소리가 가빠졌다.

영록은 부리나케 거리에 설치된 헌옷 분리수거함에 몸을 숨기고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두 사람은 테러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유민은 언제 기숙사에 다녀왔는지, 짧은 청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머리를 길게 풀고 있었다.

성모는 어느 건물 입구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유민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성모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

유민의 두 팔이 성모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다.

영록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 장면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키스를 마친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성모의 오른손이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잠시 후, 건물 7층의 어느 방의 불이 켜졌다.

그곳 창문에는 커튼이 쳐 있어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방의 불이 꺼졌다.

영록은 한참동안을 헌옷 분리수거함 뒤에 숨어 불 꺼진 방을 올려다보았다.

영록의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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