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화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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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2027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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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4시, 서울 강서구 00 학교

학교가 끝나자마자 교문 밖으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TV와 인터넷에서는 북한과의 전투 소식이 수시로 보도되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전쟁 중이란 사실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저 학교 끝나고 피시방에 갈까 어디로 놀러 갈까 궁리하며 즐겁게 재잘거릴 뿐이었다.

얼마 전, 서해 최북단에 있는 백령도가 북한의 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이 백령도에 포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북한은 다시 한번 백령도를 공격했다. 이번엔 포를 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상저격여단을 공기부양정에 태워 백령도 상륙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 공기부양정들은 백령도에서 출격한 단 2대의 AH­64 아파치 헬기에 의해 모조리 서해에 가라앉았다. 간신히 백령도 해변에 상륙한 해상저격여단 병력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한국의 해병대에 의해 전멸당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에 즉각적인 대응 차원의 반격 외에는 꿈쩍하지 않던 한국 정부가 갑자기 북한을 선제공격했다.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먼저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전 세계 언론은 휴전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한국군의 모습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매시간 파괴된 북한 공군기지와 전투기들, 한국군에 의해 걸레처럼 찌그러져 불타고 있는 북한의 전차들, 여기저기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조선인민군 병사들의 사진과 영상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전쟁이 너무나 일방적으로 전개되자, 처음에는 전쟁으로 인한 여러 피해를 걱정하던 국민들은 점점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군인들과 예비군으로 동원된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들 여전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인들은 직장에 그대로 출근했고, 학생들은 똑같이 등교했다. 생수, 라면, 쌀, 휴지 같은 생필품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긴 했지만 ‘사재기’ 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전쟁 중에도 국민 대부분은 너무나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이 기회에 그동안 도발만 일삼던 북한 놈들을 모조리 박살 내줘야 돼!”

“기왕 전쟁하는 거면 까짓것 다 밀어버리고 통일까지 해버리자!”

라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모두 그렇게 전쟁은 쉽게 끝날 거라 생각했다.

영록이 집으로 가는 길에 옛날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예비군 아저씨들이 모래주머니로 쌓은 작은 진지에 옛 K­2 소총을 올려놓고 서 있었다. 예비군들은 방탄모 턱끈을 풀은 채 살짝 뒤로 넘겨쓰고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곳 뿐 아니라 동네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강서구청 사거리에는 장갑차도 서 있었고,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멈추고 검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아, 지금 전쟁 중이구나!’하고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리에 군인들이 많이 보이고 하늘에 평소보다 많은 전투기가 날아다니곤 했지만, 전쟁이라고 해서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거나 폭탄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옛날 8, 90년대 희귀 영상에서나 나오던 민방위 훈련 풍경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록이 사는 서울 강서구의 일상은 평상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야, 지영록!”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유민이 있었다.

기유민, 초등학교 때부터 작년까지 거의 대부분 기간을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함께 했던 친구였다. 게다가 집도 같은 아파트 다른 동이어서 등하교 때 수시로 만나 같이 다니곤 했다.

유민은 00살인데도 키가 벌써 164cm나 되었다. 굽이 있는 단화를 신으면 영록이보다 더 커 보일 정도였다. 얼굴도 몸매도 아이돌급으로 예뻐서, 어려서부터 여러 연예 기획사로부터 오디션 보러 오지 않겠냐는 연락이 오곤 했다.

학교 내에서의 인기도 단연 톱이었다. 입학할 때부터 수많은 남학생이 유민에게 대시했었다. 심지어 다른 학교 남학생들도 유민 얼굴 보려고 하교 시간 00 학교 앞에서 진 치고 서성거리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민은 인터넷에서 강서구 얼짱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물론 자신이 지역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을 약간 즐기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이런 걸 이용하거나 티 내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대시하는 남학생들은 지금 연애하고 싶은 생각 없다며 모조리 차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영록과 유민이 맨날 같이 다니는 걸 보고

“니들 사귀지?”

“니들 계속 붙어 다닌다?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 아냐?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하라고.”

하고 놀리거나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녀는 초등학생 때부터 합기도를 했는데, 그 때문인지 키도 크고 날씬한 데다가 거의 모든 운동을 잘했다. 체육 점수도 항상 반에서 톱이었고, 반 대항 체육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여지없이 여학생 대표로 뽑히곤 했다.

반면 영록은 어려서부터 허약하고 운동 신경은 꽝이었다. 반 대항 체육 경기가 있는 날이면 친구들 뒤에서 구경만 할 뿐, 대표로 나서본 적이 없었다. 특히 축구나 농구 같이 공으로 하는 운동은 완전히 젬병이었다. 반 남학생들은 웬만하면 영록이와 같은 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거기에 심하게 내성적인 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주변 못된 녀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유민을 좋아하던 남학생들이 영록이 그녀와 늘 붙어 다니는 걸 보고 이를 시샘해서 그를 괴롭히거나 때리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유민이 나서서 영록이를 구해주곤 했다.

유민은 영록을 괴롭히는 녀석들을 보면 어느 틈엔가 슥, 하고 다가와 그 녀석들의 팔이나 손목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영록은 유민이 어떻게 해서 못된 아이들을 바닥에 나뒹굴게 하는 건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한참 맞거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못된 녀석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발 놔 달라고 울고 있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면 여지없이 유민이 나타나 그들의 팔을 꺾어 바닥에 짓누르고 있었다.

“니들 깡패야, 아니면 양아치야? 왜 사람을 때려? 응? 앞으로 한 번만 더 영록이 괴롭히면 평생 팔 병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알았어?”

유민은 그렇게 영록을 구해주곤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걸어가며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재잘거렸다.

그러다 전쟁 이야기가 나왔다. 영록이 유민에게 물었다.

“이 전쟁, 우리한테는 별 영향 없겠지?”

“그야 모르지. 근데 뉴스 보면 우리나라 군인들이 생각보다 너무 잘 싸우는 거 같은데? 어쨌든 우리나라에는 별 피해 없었으면 좋겠고, 군인들도 많이 안 죽고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전쟁이 나면 진짜 서울이 불바다 되고 수많은 사람들도 죽고 다치고, 뭐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안 그래서 참 다행이야.”

그의 말에 유민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약 진짜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내 가족이 조금이라도 다친다면, 난 바로 군대에 들어갈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켜야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나 있을까? 여군도 스무 살 넘어야 들어갈 수 있을걸?”

“전쟁이 일어났는데 나이가 상관있을까? 옛날 한국 전쟁 때에는 학생들도 학도병 되서 싸웠다는데.”

유민은 장래 꿈이 여군 부사관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하지만 유민의 주변 친구들은

“너 정도 외모면 모델이나 연예인도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왜 하필 군인을 하려구 해?”

라며 만류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유민은

“예쁘고 섹시한데 카리스마까지 있는 여군, 죽이지 않아? 야, 내가 군복 입으면 진짜 장난 아닐 거 같지 않냐? 나중에 아는 오빠들 중에 군대 다녀온 사람 있으면 군복 빌려 입고 사진 찍어 보고 싶다.”

라고 말하곤 했다.

영록도 유민이 여군을 한다면 무척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운동도 잘하고 친구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있는 유민이라면 분명 멋진 군인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유민이 군에 들어간다면 이대로 유민을 못 보게 되는 거 아니야? 아, 나도 나중에 군대에 가지? 아...... 근데 군대에 간다고 해서 유민이랑 같은 곳에서 근무할 거란 보장도 없을 텐데? 그리고 유민이가 여군 부사관으로 가고 내가 병사로 들어가면 유민이가 나보다 더 계급이 높은 건데......’

영록이가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동시에 유민의 핸드폰 역시 진동이 울렸다.

긴급 재난 안내 문자였다.

[서울 일대에 북한군 미사일 낙하 중. 국민 여러분들은 신속히 가까운 방공호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문자를 본 영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공호? 어디로 가라는 거지? 이 근처에 방공호가 있어? 방공호 없는데 그럼 어디로......”

영록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멍하니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이때 유민이 영록의 손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발산역으로 뛰어! 미사일 떨어진다잖아!”

­ 오후 4시 30분, 서울 강서구 발산역

발산역 안은 이미 수백 명의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입구부터 안쪽까지 사람들로 가득 차버린 탓에 많은 사람이 지하철 타는 곳이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큰 소란은 없었다. 다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다음 안내 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록과 유민도 인파 속에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나란히 서 있었다.

“서울에...... 미사일이 떨어진 건 처음이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탓에 영록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처음이지. 아마 서울에 뭐 떨어진 건 한국 전쟁 이후 처음이지 않을까?”

“미사일이면...... 미사일 맞은 지역은 그냥 막 지도에서 사라지고 그런 거 아냐? 아무 일 없이 그냥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결국......”

“그러게...... 그나저나 인터넷 뉴스에는 뭐라고 떴어? 피해 소식이나 새로 들어온 얘기 같은 건 없어? 나 지금 데이터 없어서 인터넷 안 돼.”

“응, 잠깐만.”

영록은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접속해 보았다. 지하철역 안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인터넷은 전보다 심하게 느려져 있었다.

“북한 미사일 서울 방향으로 낙하 중. 아까 문자 온 거랑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들이야.”

“그렇구나, 좀 더 기다려야 하나 보다. 근데 여기 진짜 사람 엄청나게 많다.”

“근데 유민아, 미사일 떨어질 때 지하철역으로 숨어야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바보야, 방공호 하면 그냥 지하실 같은 거 생각하면 돼. 이 동네에 가장 큰 지하실이 어디겠어? 그럼 지하철역이지.”

“와...... 역시 여군 부사관 준비하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구나.”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발산역 안에 있던 사람들의 핸드폰이 일제히 울렸다. 역시 긴급 재난 안내 문자였다. 영록과 유민이도 핸드폰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서울 중구, 영등포구 일대에 5발의 북한군 미사일 낙하. 대민 피해는 없으나 인근의 국민 여러분들은 외출을 삼가시고 안전한 곳에 머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문자를 본 사람들은 하나둘씩 지하철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강서구는 중구와 영등포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모두 안심하고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영록과 유민도 인파에 끼여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문자에서는 별 피해가 없다고 했지만, 밖으로 나온 유민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엄마 아빠 직장이 중구에 있는데...... 별일 없으시겠지?”

“우리 엄마 아빠도 영등포에 계시는데, 문자에서 대민 피해가 없다고 했으니 괜찮으실 거 같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엄마한테 전화 한번 해봐야겠다.”

유민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바로 통화가 되었다.

“엄마? 거기 중구에 미사일 떨어졌다며? 괜찮아? 거기는 안 위험해? 응 그럼 다행이고. 그럼 아빠랑 조심히 돌아오세요. 이따 봐요. 사랑해요.”

유민이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영록에게도 어머니의 SNS 문자가 와 있었다.

[아들, 별일 없어?]

[응 미사일 떨어진다고 해서 유민이랑 발산역에 숨어 있다가 지금 집으로 가는 중. 엄마 있는 데는 괜찮아요?]

[응 근처에 뭐가 떨어졌다고는 하는데, 아무런 피해도 없어. 괜찮아.]

[그럼 이따 뵈요]

[응 우리 아들]

유민과 영록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미사일이 떨어져도 별거 아닌가 보네.”

“그러게, 걱정 많았는데 다행이다.”

미사일과 북한에 관한 이야기로 한참을 떠들며 걷다 보니 벌써 아파트에 도착해 있었다. 유민은 영록이의 어깨를 툭 치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너도 잘 들어가!”

“응, 그래 잘 가.”

영록이는 유민이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는 유민이의 뒷모습은 너무나 예뻤다. 긴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포니테일에, 뛸 때마다 가볍게 살랑거리는 치맛자락, 그리고 그 아래로 가늘고 길게 뻗은 하얀 다리......

‘게다가 또래들 중에서 가슴도 제일 크고...... 어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조금 전까지 북한과 전쟁 이야기에 벌벌 떨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말...... 유민이랑 사귈 수 있으면 좋겠다......’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늘 유민이가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할까? 내가 사귀어 달라고 하면 사귀어 줄까? 그러다 차이면? 친구로도 남지 못하는 거 아닐까? 이런 두려움에 말도 못 하고 있는 처지였다.

제일 큰 고민은 이거였다. 예쁘고 운동도 잘하는 유민이가 나처럼 마르고 약해 빠진 사람을 좋아할까?

‘솔직히 내가 여자라도 아니라고 할 듯.’

영록은 공연히 아파트 화단에 침엽수 잎들을 획, 손으로 후려쳤다.

­ 오후 8시, 서울 강서구 ES 아파트

영록은 집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학원 갈 준비를 했다.

마침 핸드폰 배터리도 없는 데다가 보조배터리도 남아 있지 않아서 핸드폰과 보조배터리 모두 집에 충전해 놓고 집을 나섰다.

학원 끝나고 잠깐 독서실에 들렀다 오니 벌써 8시였다. 이쯤 되면 부모님도 집에 들어오셨을 시간이었다. 영록은 독서실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상가마다 TV를 틀어놓고 삼삼오오 모여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정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게 무척 심각해 보였다.

‘아까 미사일 떨어진 거 때문에 그런가?’

영록은 개의치 않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벨을 눌렀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집 안은 불이 꺼져 있는 채 그대로였다. 역시 부모님들은 아직 집에 오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아까 그 미사일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시나? 어디 길이라도 막힌 걸까?’

영록은 조금씩 불안해졌다.

방으로 들어가 충전이 완료된 핸드폰을 들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대기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들어갑니다......]

음성녹음으로 넘어가는 메시지가 나왔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두 번, 세 번 전화 해도 마찬가지였다.

영록은 이어서 다급히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전화는 아예 꺼져 있었다.

그제야 아까 거리 상점에서 심각한 모습으로 TV를 보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영록은 리모컨을 들고 뉴스 채널을 켰다.

TV 화면에는 군인들이 방독면과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도로를 통제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발탄으로 여겨졌던 북한의 미사일 안에는 VX 신경작용제 화학탄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군은 수도권의 모든 화생방 제독 병력과 장비를 동원해 북한 미사일에 피격된 오염 지역을 제독하고 있습니다. 오염 지역 제독을 담당하고 있는 군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 바람의 방향에 따라 VX 신경작용제의 피해가 계속 확산 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피해지역과 가까운 곳에 계신 분들은 신속히 이 지역을 이탈하시어 되도록 멀리 떨어진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하는 것이......]

영록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TV 화면에서 방독면을 쓴 군인들이 ‘통제구역’이라고 쓰인 노란색 차단선으로 도로와 인도 모두를 막고 있었는데, 그들 너머로 영록이 아버지가 근무하던 직장 건물이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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