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유희. (E)
* * *
“돌아가면, 결혼하자.”
“뭐…?”
유희의 당황스러운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가 결혼 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 부분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실제로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이라도 전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아빠….”
유희가 원하는 것은 호적상의 등록이나,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내 마음.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희와 평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그 마음을.
“우리 평생 함께하자.”
“응….”
그만큼 나는 유희를 사랑하니까.
~~~
탁탁탁탁.
긴 휴일이 끝나고, 내 일상은 다시 돌아왔다. 컨디션도 모두 회복 됐다. 사실 유희와 화해하고 나고서부터 회복되긴 했지만, 어쨌든 일하느라 쌓인 피로도 모두 날아갔다.
이제 피로수치는 제로. 다시 쌓이는 일만 남았다… 라고 생각하니 조금 암울해진다.
“정말 잘 쉬고 오셨나보네요?”
“어. 덕분에.”
“뭘요. 저는 권유만 드렸을 뿐인걸요.”
시연씨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업무에 시선을 돌린다. 특히나 오늘따라 키보드의 경쾌한 타건음이 귓가를 달갑게 했다.
“맞아. 시연씨는 뭐 했어?”
“저요? 저야 주말에만 쉬었죠. 평일에는 프로젝트 스케쥴 조정이랑 또….”
“고생했어.”
“당연한 일인데요 뭐. 저도 상무님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나한테?”
“사실상 억지로 권유드린 건데 흔쾌히 해주셨잖아요? 상무님이 아니었으면 이상한 배나온 사람한테 성추행이나 당했을 거라구요.”
“하하….”
그 당시는 시연씨가 불쌍해 보였다고나 할까, 사실상 유희의 허락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에 평생 근로권을 사장 딸한테 보장 받아 메리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이상 승진은 하고 싶지 않다…. 아니, 연장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요.”
“뭐야 부끄럽겠시리.”
뭐, 이건 때가 되면 말하도록 하자. 아이가 크고, 계약기간이 끝나가면, 그때.
“맞다 시연씨.”
“네?”
“혹시 반지 잘 아는 곳 있어?”
~~~
시연씨가 내 의도를 단번에 눈치채고, 좋은 반지집을 찾아주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백화점 안에 있는 명품관을 추천했다.
““어서 오십시오.””
깔끔한 검은 정장에, 왼쪽 가슴팍에는 은색으로 된 명찰을 달고 있다. 느낌이 신 팀장의 양복을 맞출 때 갔던 곳과 비슷한 분위기다. 가운데에는 소파도 있어 뭔가 한 번 잡히면 못 돌아갈 것 같은 구조였다.
자세가 각 잡힌 탓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잡고 말았다.
“결혼… 반지 보러 왔는데요.”
“아, 이쪽으로 오시죠.”
종류는 싼 액세서리 가게에 진열되어 있을 정도로 많진 않지만, 하나하나 제대로 된 유리케이스에 넣어져 관리되고 있었다. 얼핏 본 작은 철판에 새겨진 가격은 기본 6자리가 넘어갔다.
‘비싸….’
사랑에 못 아까운 건 없다고 하지만 이건 아깝다기보단 뭐랄까, 스케일이 너무 크다. ‘이 가격이 기본이라고!?’ 같은 느낌. 변명이긴 하지만 유희도 너무 비싼 걸 받아버렸다간 오히려 부담을 느껴버릴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적당한 선에서 고르기로 했다.
“요즘은 어떤 게 인기가 많나요?”
“요즘은 가벼워 보이는 반지보단 조금 무게감 있는 것을 선호하시는 분들 이 많습니다. 이 반지가 그중 하나 입니다.”
“그렇군요.”
은은한 광이 나는 연분홍색의 반지. 밴드가 물려있는 가운데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큐빅이 박혀 있었다. 확실히 흔한 금반지보단 이쪽이 더 나은 거 같다.
“이 가운데는 뭘로 되어있나요?”
“최상급 1부 큐빅 지르코니아입니다. 원하신다면 다이아몬드로 변경 가능합니다.”
“다이아몬드요?”
“네. 잠시 기다려주시면 옵션 표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선망하는 보석 다이아몬드. 공업품으로도, 또 장식품으로서도 많이쓰이고, 결혼할 때는 무조건 다이아반지라는 관념이 아직까지도 유행하는 추세다.
그래도 이왕 평생에 한 번 사는 거, 다이아몬드가 낫겠지.
소파에 앉아 있자니 다른 직원이 주스를 가져다줘서 한 잔 마셨다.
“여기 있습니다.”
“네.”
옵션에는 밴드 색깔까지 정할 수 있었고, 가운데 큐빅을 변경하는 옵션도 있었다. 밴드 자체를 18k골드가 아닌 백금으로 바꾸는 옵션도 있었다.
다이아몬드 옵션에는 등급별로 VS2, VS1, VVS2, VVS1이 있었고, 전부 0.1캐럿이었다. VVS1이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게 가장 좋은 등급인 것 같았다.
어디 보자… 대충 이대로 하면….
「\ 1,560,000」
…….
다이아는 비싸고,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그래도 비싸다는 것은 변함 없었다. 2개를 사면 312만원. 솔직히 내 건 안 사고 싶지만 그래서야 결혼 반지라는 의미가 없기에 살 수밖에 없다.
조금 부담되지만, 역시 최고의 퀄리티를 고집하기로 했다.
“이렇게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이즈는 어떻게 되십니까?”
“음….”
받은 종이를 보니 사이즈도 나와 있어서 재 보자, 나는 14호가 나왔다. 유희는 나보다 얇으니까….
“12호랑 14호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기 싸인 하시고….”
불안함 속에 카드가 긁혔다는 문자가 왔다. 조금 떨리긴 했지만 유희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니 곧 가라앉았다.
“반지는 세공 과정까지 거쳐 3일 정도 소요되는데 괜찮으신가요?”
“아, 네 괜찮아요. 이제 가면 되나요?”
“가셔도 됩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 네….”
직원이 인자한 웃음으로 입구까지 배웅해주고, 가게를 나왔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이상한 한숨이 나왔다.
‘아, 사이즈 안 맞으면 어쩌지….’
갑자기 또 긴장되기 시작했다.
~~~
“아빠 다 챙겼어?”
“응.”
깜짝 놀래켜 주기 위해 배송지를 사무실로 정해서 반지를 받고, 상태가 이상 없나 확인한 다음 오늘까지 계속 숨겨 왔다. 다행히 유희는 눈치 못 챈 것 같다.
유희가 안 보이게 반지를 잘 챙기고, 차를 타고 출발했다.
“아빠.”
“응?”
뭔가 쓸쓸해 보이는 눈빛이 향한 곳은 하늘이었다. 썬팅된 창문으로 밝은 햇빛의 원형이 보인다. 유희는 뭔가 사색에 잠겼는지 불러놓고 대꾸하지 않았다.
나도 이 순간의 정적을 즐겼다.
정신을 차린 유희가 싱긋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응.”
아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나도 유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하지만 말로 하지 않아야 전해지는 마음이 있고, 감정도 있다. 진작에 그랬어야 할 것을, 우리는 이제서야 느끼게 된 것이다.
“오늘 잘 찍혔으면 좋겠다.”
“응.”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웨딩 촬영장. 혼인신고도 못하고, 결혼식도 못 올리는 내가 유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살 빼느라 죽는 줄 알았어.”
“굳이 안 빼도 예쁜데 왜 빼. 몸 안 좋아지게. 아이한테도 그렇고.”
“여자의 마음이란 그런 거야.”
“그래…?”
“아빤 눈치 못 챘지?”
“그러고 보니까 좀 빠진 것 같기도하고….”
“이미 늦었어. 흥.”
“미안….”
“장난이야~”
다이어트… 모든 비만인들의 주 적이다. 유희는 그렇게 살찐 편도 아닌 거 같은데, 남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나 보다. 사실 뱃살 통통한 것도 난 좋은데 말이지.
수도권에서 벗어나 넓은 웨딩 촬영장을 찾아갔다. 토지 일대를 빌려 배경이 아주 끝내주게 나온다고 한다.
“어서오세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직원이 우리를 맞아줬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했지만, 유희가 바로 눈치를 주자 안내해줬다.
“의상은 대여하시는 거 맞으시죠~ 남편분은 이쪽, 부인분은 이쪽으로 와 주시면 도와드릴게요~”
“좀 이따 봐. 아……오빠.”
“응….”
미리 예약해 놓은 정장을 가지고 탈의실에 들어왔다. 유희가 어떻게든 백정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백정장을 대여했다.
정장이라곤 검은색이나 남색, 기껏 해봐야 회색 밖에 입은 적이 없는데, 백정장을 입으니 새로운 기분이 든다.
입으면서 정장 한쪽 주머니에 몰래 챙겨 온 반지 케이스를 넣어두었다.
‘안 이상한가…?’
거울의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완전한 흰색이 아닌 약간 회색빛이 도는 재킷에, 은색 넥타이. 그리고 재킷보다 밝은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다 입고 나왔지만, 유희는 아직 드레스를 입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아, 이쪽으로 오세요~”
“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간 곳은 메이크업실이었다. 연예인들이 메이크업을 받는 것처럼, 뭔가 전문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머리는 어떤 스타일이 좋으세요?”
“음… 이걸로요.”
평소처럼 비대칭으로할까 하다가, 이참에 넘김머리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하기로 했다. 기왕 하는 거 해 본 적 없는 스타일로 찍고 싶었다.
머리를 다 다듬고 메이크업도 했다.
“눈 감아주시고~”
브러쉬를 쓰는지 얼굴이 간질간질하다. 가루 때문에 재채기가 나올 뻔했지만 어떻게든 참아내었다.
다 됐다는 신호와 함께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자, 예쁜 드레스를 입은 유희가 서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슬림한 드레스에, 머리에는 꽃 장식이 있는 베일을 썼다. 가슴 쪽에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큐빅들이 유희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줘서 입이 떡 벌어졌다.
“아…….”
“잘… 어울려?”
“세상에서 제일 예뻐.”
“읏….”
“엄청 예쁘시다~”
직원들의 환호성 속에, 이제 촬영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넓은 정원에 꽃이 펼쳐져 있고,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못이 있어 영화에나 나오는 장소 같았다. 거기다가 오늘 날씨가 구름한점 없이 맑아 보는 것만으로 넋을 잃을 것 같았다.
“아, 유희야.”
“응?”
“……이거.”
“꺄~~~”
손이 떨렸지만 품속에 있는 반지 케이스를 꺼내 한 손으로 여는데에 성공했다. 아까 연습해 두길 잘했다.
“…….”
“몰래 준비했어. 놀랐어?”
“너무 놀라서 눈물 나올 거 같아….”
“아하하… 기쁜 날에 울지마.”
“응….”
문제는 지금부터다. 반지 사이즈가 맞아야 오늘의 이벤트가 비로소 완성된다.
다행히 반지는 유희의 오른손 약지에 쏙 들어갔다.
“휴….”
“왜?”
“손가락 사이즈 안 맞을까 봐 불안 했거든.”
“다행이네~ 자.”
유희도 내 오른손을 잡더니, 약지에 반지를 껴 주었다. 아마 반지 뺄일이 얼마나 될까. 아마 평생 끼고 살아서 손가락이 얇아질 거 같다.
서로 반지를 끼고, 서로 웃으며 드디어 촬영에 들어갔다.
“자세 좋구요~ 그럼 찍겠습니다~ 하나, 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