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시연 & 수현. (15)
* * *
“소파에 앉으셔요.”
“아, 응.”
어둑어둑하길래 관리를 잘 안 하는줄 알았더니, 의외로 관리를 잘한 건지 소파에 뜯어진 흔적은 없었다.
소파에 앉으니 가죽이 쓸리는 뿌득뿌득 소리가 들리면서 가라앉는다. 특유의 딱딱한 느낌이 없고 푹신하다는 게 확실히 좋은 스펀지를 썼다는 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신경 썼네….’
뭔가 평생 이럴 일은 없을 줄 알아서 내심 임원들을 질투했었는데, 막상 누리고 나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순이 된다는 사실이 찔려서 부끄러웠다.
“상무님도 그런 생각을 하시네요.”
“아… 들렸어?”
“네.”
“……못 들은 걸로 해 줘.”
“당연하죠~”
마음의 소리를 말로 하는 건 다 허구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경험하니까 뭔가 쪽팔린다.
“이제 일어날까.”
“네.”
이대로 더 있으면 잠들 거 같아 자리에 일어났다. 역시 사람은 일하는 중간에 쉬면 금방 나른해져서 안 된다.
“꺅!”
“시연씨, 괜찮아?”
“아… 네… 감사합니다.”
시연씨가 넘어지려던 것을 내가 받쳐서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여기저기 튀어나온 곳이 쏠려서 불편하다.
“시연씨?”
“아, 죄송합니다….”
시연씨가 내 몸에서 떨어지고 현장을 나왔다. 갑자기 빛이 들어오니 괜히 눈이부셨다.
그리고,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하아….”
첫날이라 일이 빨리 끝날 줄 알았더니, 다른 부서에서 다 미팅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늦게 끝났다. 시연씨가 각 부서장들에게 메일을 보내긴 했다지만 이렇게 일정을 빨리 잡힐지는 몰랐다.
“고생하셨어요.”
“어, 수고했어.”
다행히 퇴근 시간대가 좀 지난 9시라 지하철에서는 앉아서 갈 수 있다.
“아, 상무님, 데려다 드릴까요?”
“데려다…? 아, 괜찮아.”
내가 영화나 드라마로 본 비서들로는 분명 차를 운전하는 업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굳이 시연씨에게 수고를 덜 필요는 없었다.
“그럼 직접 운전하고 가시게요?”
“응?”
집에 차가 있긴 하지만, 전철보다 더 오래 걸려서 차를타고 다니진 않는다. 분명 회사에서 몰 차가 없을 텐데, 직접 운전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아, 말씀을 안드렸네요~ 상무님께선 비등기 임원이시긴 한데, 일단 차는 지급 되거든요~”
“그래…?”
“네. 세 번째 서랍 여시면 아마 차키가 들어 있을 거예요.”
“응….”
시연씨의 말대로 사물함을 여니, 정말 차키가 들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차가 들어오다니… 임원 대접 제대로 받는구만.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누리기로 했다.
“……운전은 내가 하고 갈게.”
“정말요…?”
“응. 첫날이고, 시연씨 피곤하잖아.”
“상무님이랑 있으면 괜찮은데….”
“응?”
“아,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엄청 피곤하다. 집에 가서도 유희의 얼굴만 보고 바로 잠이 들어버릴 것 같다. 졸음운전을 하게 되기 전에 빨리 가야 한다.
시연씨와는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시연씨는 1층에서 내렸고, 나는 지하 3층까지 갔다. 이미 차는 내 차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니 번쩍 빛이 났다. 새로 뽑은 건지 안쪽도 시트 냄새가 아직 빠지지 않은 것 같았다.
“아… 잠깐만….”
피로와 냄새가 겹쳐서 조금 어지럽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눈을 붙이고 가도 그렇고, 이대로 운전을 하면 위험할 것은 확실하다.
“……여보세요.”
결국 시연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
“괜찮으세요 상무님?”
“아, 응… 조금 괜찮아졌어.”
다행히 시연씨는 지하철 출입구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전화를 받자마자 금방 이리로 왔다.
안에 있는 네비게이션에는 우리 집 주소를 찍어 놨고, 나는 조수석에서 바깥을 멍하고 보고 있었다.
“미안 시연씨….”
“아뇨! 괜찮아요!”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단순히 앉기만 한다고 전부가 아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졸지 않게 계속 말동무를 해 줘야 한다.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피곤해서 전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니 우리 집이었으니까.
“어… 여기인가요?”
“아, 응. 이 건물. 주차는 내가 할게.”
“아뇨, 이왕 온 김에 제가 할게요.”
“응….”
괜히 자동차가 두 개가 된 거 같아서 기분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회사 차량이라 출퇴근에만 써야 한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유희도 태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시연씨는 운전도 능숙한지, 주차가 끝난 지도 몰랐다.
“고마워 시연씨….”
“아뇨! 괜찮아요!”
“그럼 내일… 응?”
문을 열려하자 시연씨가 다시 문을 잠가버린다. 뭔가 해서 뒤를 돌아보자, 시연씨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상무님.”
“시연 ㅆ──”
뭔가가 얼굴을 덮었다.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게 묘하게 흥분된다. 진한 향수 냄새가 코로 들어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뒤통수에도 따뜻한 손바닥이 닿아 있었다.
“…시연씨!?”
몸을 겨우 떼어 내자 상기된 얼굴의 시연씨가 보인다. 당황한 나와 달리 시연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일 봬요 상무님.”
“…….”
수현씨는 그대로 차에서 내렸고, 나는 그 충격에 한동안 차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
‘뭐지….’
시연씨에 안긴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덕분에 잠이 깨긴 했지만, 어쨌든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시연씨에겐 내일 확실히 말해야겠다.
현재 시각을 보니 자정이 넘었다.
“나 왔어….”
“…….”
“아, 개강이었지….”
웬일로 유희가 맞으러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맞아줬는데, 그 상황이 꿈만 같다. 뭐… 서로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절제한다고 했으니까. 나도 참아야 한다.
“끄응… 응?”
내 방에 들어가기 전, 소파 위에 누가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무방비한 차림새의 유희였다. 길고 늘씬한 허벅지가 다 드러나 있었고, 반팔이 약간 올라가 예쁜 배꼽이 보이는 것도 모르는 채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쿠울….”
유희의 상태를 보아 아마 나를 기다리다 잠들어버린 것 같다. 이제 쌀쌀해져서 감기 걸릴 텐데… 깨우기엔 또 미안하다.
“…읏샤.”
이렇게 공주님 안기 해 본 기억은 나영이랑 사귈 때 잠깐 억지로 든 것 말고는 처음이다. 유희의 몸은 자랐지만 들기엔 여전히 가벼웠다.
그건 그렇고 어디에 눕히지?”
─방은 안 돼!
나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 유희가 유일하게 허락하지 않은 장소이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긴 했지만 유희가 알아버렸다가는 상처받을 것이 뻔하니, 일단은 내 방에 눕히기로 했다.
“으응….”
내 침대에 눕히자, 유희가 작게 신음을 한다. 아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유희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씻으러 나왔다.
꼬르륵.
생각해보니 밥도 먹지 않았다. 먹긴했지만 삼각김밥과 초코우유가 전부였다. 그만큼 미팅에 이리치이고 저리 치였으니까. 게다가 PM이라는 직책에 어깨가 왠지 모르게 무거워진다.
“후루루루룩.”
컵라면에 물을 넣고 세안을 하고 나오니 딱 맞춰서 익었다. 매콤하면서도 맛있는 냄새가 거실에 퍼졌다.
배부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허기를 채울 정도는 됐다. 밤에 먹고 자지 말라곤 하지만 공복이 아니라 아얘 주린 상태로 자는 것보단 이게 백배 천배 낫다.
유희가 해주는 밥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인스턴트도 나쁘지 않았다.
“하아….”
내친김에 국물까지 원샷했다. 스프가 목에 걸리는 바람에 사레가 들렸지만, 그만큼 맛있었다. 역시 컵라면은 우리나라가 제일인 것 같다.
“…….”
내 방으로 다시 들어가니 의외로 잠버릇이 나쁜지, 유희가 이불을 걷어차고 엎드려 있었다. 이번에는 돌핀 팬츠의 바지 사이로 흰색 팬티가 살짝 삐져나온 것이 보여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아암….”
엎드려 자면 근육통이 올 수 있기에, 유희를 굴려서 다시 제대로 눕히자, 무방비 상태의 정면, 게다가 옷 아래로 작은 돌기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노브라인가….’
속옷을 차고 자면 불편한 것도 있고, 별로 안 좋다라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것도 있어서 유희에게는 당연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막상 큰 가슴이 옆으로 눌린 것을 보니 심장에 혈액이 확쏠리듯 내 흥분세포가 각성했다.
‘이러면 안 돼….’
잠시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나를 매도했다. 유희와 그런 약속까지 했는데 자는 사이 만져버리면 유희를 배신하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손은 이미 유희의 가슴에 살포시 얹어져 있었다.
‘큭.’
얹어진 손이 전기적인 신호로 인해 순간 움찔거리며 오므려진다. 살짝만 움켜쥐었는데도 탄력이 느껴지는 바람에, 이미 아래쪽은 딱딱해진지 오래였다.
“허억….”
정신을 차리고 손을 뗐다. 다행히 유희는 여전히 편안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성욕에 미친 새끼도 아니고 나는….’
유희의 옆 빈 공간에, 나도 누웠다. 유희를 보게 되면 계속 가라앉지 않을까봐 일부러 등졌다. 괜히 유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미안…흐….”
~~~
“……아빠 바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