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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내게 집착한다-78화 (78/96)

〈 78화 〉 시연 & 수현. (13)

* * *

머리를 급하게 감고, 옷도 좀 정장까지는 아니지만 차려입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려입고 갔다.

‘누가 나를…?’

정황상 유희의 친구일 가능성이 높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희가 내 자랑이라도 한 건가…?

‘뭐라고 소개하지…?’

지희씨 커플과 놀러갔을 때는 유희를 30살이라고 속였지만, 지금은 그 반대 입장이다. 유희가 20살인 입장에서, 내 나이를 낮춰 불러야할 것이다.

18살 차이는 좀 그렇고… 아무리 낮춰도 20대 후반일텐데, 믿어 주려나…. 동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는데….

뭐… 유희가 알아서 할 테니 내가 할 역할은 거기에 입을 맞추는 것 뿐이다. 막상 소개받으니 정말 긴장된다.

강남역에 나오니, 유희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유희보다 키가 작고, 조금 맹해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유희야.”

“아…으빠 왔어?”

“응….”

뭔가 말 실수를 할까봐 무서워 최대한 과묵한 이미지를 유지하려 했다.

“이분이야? 안녕하세요~ 이민경이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음… 그게….”

열차에서 계속 생각했지만 결구 정하지 못했다. 유희에겐 미안하지만 조금 극적인 연상의 취향이라고──

“스물 일곱이에요.”

“오~ 내 예상이 맞았네? 저는 스물 둘이에요.”

“아… 그렇군요.”

믿는 건가…? 내가 그렇게 젊어보였나? 뭔가 찝찝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저를 보고 싶다고….”

“아 네. 유희가 좋은 남자의 교본이라고 해서요!”

“아하….”

유희를 보니 쑥스럽게 웃는다. 유희도 참, 나를 너무 띄워준다니까. 오히려 유희를 고생만 시켰는데, 유희야말로 좋은 여자의 교본인데.

“근데 의외네요~ 전~혀 연애에 흥미 없을 줄 알았거든요.”

“읏….”

“뭐… 사람은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니까요.”

“그건 그러네요.”

그럴 만한 사연이 있긴하지만, 굳이 민경씨에게 알릴 필요는 없겠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더운데, 안에 들어가요.”

“그래!”

“어디로?”

“음….”

“아…으빠. 점심 먹었어?”

“아니, 안 먹었는데.”

유희의 연락을 받고 바로 나온터라 점심은 먹지 않았다. 낮잠을 자서 그런지 더 배가 고팠다.

“그럼 점심먹자! 나도 엄청 배고팠구.”

“…그래요.”

솔직히 저번에 과학관에 갔을 때는 유희가 혹시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민경씨를 대하는 모습을 보니 평범한 대학생이나 다름없어 안심했다.

‘유희도 이제 애가 아니니까….’

이제 대학 이후의 일을 걱정해도 될 정도로 유희는 많이 컸다.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레벨을 벗어난 것이다. 그 때문에 유희도 스킨쉽 금지라 했고.

생각하니까 안아주고 싶네….

“언니 뭐 좋아하세요?”

“난 아무거나 다 먹어.”

“그럼 카레집으로 가요.”

“오키~”

11번출구로 나오고 쭉 가다가 영화관쪽 골목을 들어가면 먹거리가 잔뜩 있다. 아마 한 번도 안 와본 걸로 아는데,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미리 조사라도 해 놓은 건가…?

“어서오세요~”

직원들이 맞아주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유희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자세히 보니 메뉴판 대신 태블릿을 이용하여 주문하는 구조였다.

“언니 어떤 거 드실래요?”

“음… 나 비프 카레에 돈가스 나오는 거.”

“맵기랑 토핑은요?”

“1단계랑… 마늘, 파 둘 다! 아, 콜라도!”

“아오빠는?”

“나는… 치킨 카레에다가 0단계에… 파만. 음료는 됐어.”

“매운 거 못 드세요?”

“아… 네. 옛날엔 잘 먹었는데 지금은 좀….”

“맞아. 그런 사람들 있더라구요. 옛날엔 매운 거 잘 먹었는데 나이들면서 못 먹는 사람.”

“그럼 시킬게요.”

“윽….”

유희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변했다. 싸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조금 무서웠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만, 그렇다고 말을 무시하기엔 곤란하다.

헛기침을 하고, 유희에게 물어봤다.

“둘은 오늘 어쩐 일로 만났어?”

“그─”

“아~ 제가 놀고 싶은데 유희만한 사람이없어서… 죄송해요 방해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유희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거 같아 보고 싶지 않았다.

“비프 카레 어느 분 드릴까요?”

“아! 이쪽 주세요!”

다행히 밥이 나와서 어찌저찌 넘길 수 있었다. 유희가 일부러 화난 것처럼 숟가락을 세게 퍼서 입에 넣었다.

잠깐, 엄청 뜨거울 텐데….

“흐으읍…!”

역시….

“괜찮아?”

“으, 우움….”

“유희야 안 데였어?”

“네에….”

다행이다 안 데여서….

어지간히 뜨거웠는지, 같이 나온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갑자기 탄산이 들어가서 그런가 입을 틀어막았다.

“…막아봐.”

“응?”

“귀… 막아봐….”

“아… 응.”

귀를 막는 시늉을 하자, 유희가 작게 트림하는 소리가 들린다. 괜히 귀여워서 흐뭇 웃음이 나왔다.

“들었어…?”

“아니?”

“우….”

부끄러운지 말없이 카레를 뜨기 시작했다. 나도 카레를 비벼서 입에 넣었다.

0단계라 그런지 매운맛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단맛쪽이 더 잘 느껴진다. 치킨은 역시 배신을 안 하는지 치킨맛도 좋았다.

유희는 1단계를 시켜 약간 땀을 흘렸지만, 그래도 그렇게 맵지는 않은지 깨끗하게 먹었다.

“제가 살게요.”

“아, 제건 제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조금 쌀쌀해졌는데도 실내에서 에어컨을 계속 틀어서 그런가, 바깥이 따뜻한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 좋았다.

슬슬 헤어지려 역쪽으로 가니 민경씨가 말했다.

“두 사람 역시 잘 어울리네요~ 왜 유희가 교본이라고 한 지 알겠어요.”

“하하….”

“플라토닉한 교제하시나봐요?”

“플라토닉이요?”

“네. 보통 커플들을 보면 껴안거나 대놓고 키스하거든요.”

플라토닉. 스킨쉽이 거의 없는 정신적인 교감을 의미한다. 아마 민경씨 눈에는 우리가 손도 안 잡으니 플라토닉 교제라고 생각한 것 같다.

“서로 절제하기로 약속해서요.”

“아하~ 유희가 너무 덮쳐오나요?”

“읏….”

“아하하….”

그런 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유희가 말해 준 건가…?

“여보세요? 응. 아… 음….”

조금 걸으니 역 출입구에 거의 도착하자, 민경씨에게 전화가 왔다. 표정이 조금 진정된 것을 보니 그렇게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아… 응. 뭔가 유희 말을 들으니까 그게 맞는 거 같아서… 응. 미안. …죄송해요! 먼저 가셨어도 됐는데.”

“아뇨… 뭐 중요한 일이신가요?”

“아… 방금 헤어졌어요.”

“누구랑요?”

“아~ 실은… 오늘 부른 거. 남친 부탁으로 부른 거거든. 승호. 그 스포츠머리 한 애. 승호 친구가 여자 소개시켜달라해서… 어쩔 수 없이… 미안해.”

“아… 네.”

“근데 유희 니가 그런 남친이랑 사귀면 이용당할 거라고 했잖아? 계속 생각했는데, 역시 남자친구는 유희 남자친구분 같은 사람을 만나야 될 거 같아서.”

잠깐, 민경씨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랑도 만난 건가…?

“고마워. 덕분에 어떤 사람을 사귀어야 하는지 알 거 같아.”

“다행…이네요.”

“그럼 개강때 봐! 아, 잘 먹었습니다!”

“네….”

서로 반대 방향이라 게이트에서 헤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희가 민경씨에게 도움을 준 것 같다.

플랫폼으로 내려오니 유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아빠….”

“응? 뭐가?”

“갑자기 불렀는데 나와줘서….”

“유희 부탁인데 나와줘야지.”

“그래도 뭔가 짜증 났어.”

“왜?”

“자꾸 언니랑 얘기하니까….”

“혹시 질투한 거야?”

“아, 아니야!”

“유희도 남자들이랑 논 거 아니야?

“그건 억지로….”

“알고 있어.”

“우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민경씨의 말이 생각났다.

─보통 커플들은 껴안거나 대놓고 키스하거든요.

껴안거나 키스라… 그럼 그 외에는 괜찮은 건가…?

유희가 벽에 기대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아마도 최대한 스킨쉽을 피하려고 일부러 보는 거겠지.

“아빠…!?”

유희의 비어 있는 손을 살포시 잡으니 순간 움찔했다. 덕분에 나도 괜히 부끄러워졌지만 계속 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응….”

그 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

“이렇게 같이 나오는 거 처음이다.”

“그러게.”

유희는 개강, 나는 출근을 이유로 처음으로 같이 나왔다. 어디 놀러갈 때 빼고 나온 것은 처음이다.

슬슬 쌀쌀해져서 그런가 유희도 반팔 위에 가디건을 걸치기 시작했다.

“이거 아빠꺼다?”

“그래…?”

예전에 빌려 준 가디건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갖고있었나보다.

지하철은 반대 방향이라, 어쩔 수 없이 플랫폼에서 헤어져야 했다.

“오늘도 힘내.”

“응. 유희도 잘 다녀와.”

“응!”

저렇게 밝은 모습을 보니 없던 힘도 생길 거 같다.

열차를 타니 황대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러고 보니 풀어야 할 오해가 있었지 참.

「지금 어디세요?」

“지금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네.”

뭐지? 설마 결과가 벌써 나온 건가…? 주말에 출근해서 임원회의라도 한 건가?

불안한 마음속에, 사무실에 도착하니 다들 어수선한 분위기다. 평소 관심을 갖지 않던 다른 부서사람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모니터를 보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최 과장이 나를 맞아줬다.

“오셨어요.”

“좋은 아침.”

“왜 미리 말씀안하셨어요.”

“응? 뭐가.”

“뭐긴요~”

뒤에서 지희씨가 내 등을 콕콕 찌르면서 말했다. 그 표정이 어딘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어서 괜히 잘못한 거 같다.

“축하드려요~ 부자… 아니 상무님!”

“…?”

설마… 진짜로 내가 됐다고…?

당황해하는 사이, 황 대리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대리님 이게 무슨….”

“오늘부터 김찬희 상무이사님을 모시게 된 황시연 비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상무이사가 되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정말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상무님. 짐정리하시고 10층으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아… 네.”

그 말을 남기고, 황 대리가 떠났다. 남은 것은 어수선한 현장과 축하해주는 우리 부서원들 뿐이었다.

“이제 부장…상무님 없어서 어떡해요. 이상한 부장 오면 큰일이겠네.”

“그러게요~”

“…최 과장이 부장 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승진이 그렇게 쉽게 되면 벌써 부장 달았을 걸요?”

“그런가….”

“상무님 화이팅!”

“응… 고마워.”

몇 개의 꽃다발을 상자 안에 넣고 위로 올라갔다. 오늘 아침에 안 사실이라 선물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기에,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10층에 올라오니 불투명한 유리 공간의 사무실이 많다. 내 이름이 적혀진 곳으로 들어가니 황 대리가 나를 맞아주었다.

“오셨어요 상무님.”

“아… 네.”

처음 오는 공간인 개인사무실. 전면이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내가 앉을 수 있는 책상과 편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다.

“그리고….”

“…!?”

황 대리가 살짝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나한테 안겼다.

“상무 승진 축하드려요~!”

“아… 네.”

……아무래도 황 대리는 내가 승진을 한 게 그렇게 좋은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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