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시연 & 수현. (11)
* * *
월요일부터 유희는 개강이다. 그 전에 우리는 약속을 했다.
─오늘부터 스킨십 금지!
며칠간 자제심을 잃은 우리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유희가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뭐… 사실상 따지자면 항상 먼저 시작한 건 유희였지만.
그래도 유희를 위해서라면 나도 유희에게 닿지 않게 생활해야 한다.
“다녀올게.”
“응.”
수강신청도 무사히 마친 유희가 웬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유희 친구들은 어떤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 다음에 물어봐야지.
운동화까지 다 신고 나가려던 유희가 뒤를 돌아봤다.
“아, 아빠.”
“응?”
“아니야. 아무것도.”
“재밌게 놀다 와.”
“응!”
본능적으로 유희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느꼈다. 잘 갔다 오라는 의미의 포옹, 혹은 키스. 그게 없으니 왠지 허전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내 앞에는 유희가 없는 공허함이 닥쳤다.
“후우….”
며칠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수현씨와 늦게까지 발표준비 후, 집에 오면 바로 유희와 섹스… 정신을 차리면 새벽 1시가 넘는 시간었다.
게다가 늦게자고 일찍 일어나니 하루에 커피를 몇 잔씩은 마셔야 했다. 어쩌면 유희가 나를 걱정한 판단은 옳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이번 주엔 헬스를 가지 못했다.
‘결과는 곧 나오니까….’
어제 자행한 이사 발표회 결과는 다음 주중으로 나온다고 한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것을 대비해서 체력을 더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운동이 필수다.
“……좀만 더 자자.”
아무리 운동을 해도 피로하면 말장 꽝이다. 잠이 우선이다. 절대 움직이기 귀찮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어림도 없지 암~!
우우웅.
「부장님. 어제 저 이상한 소리 하지 않았나요?」
「아니 별로. 조금 울긴 했지만.」
어제 지하철에서 마주친 후에, 내 옆에서 정신없이 잠든 수현씨를 겨우 집까지 데려다 줬다. 본인도 해롱해롱대서인지 이번엔 아무탈 없이 옮겨줄 수 있었다.
나도 약간 취해서 그런가, 수현씨의 집에 갔을 때 왼쪽 뺨에 묻은 립스틱을 물티슈로 닦앗다. 아마 본인은 잊은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수현씨가 나에게 톡을 보낸 것이다.
「정말로 아무짓도 안한 거죠?」
「부장님께 민폐될 만한 짓 안한 거죠?」
「정말이라니까.」
「휴…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모티콘을 보냈습니다.」
「주말에 푹 쉬어」
「네.」
토끼가 울면서 90도로 연신 인사하는 이모티콘이다. 뭔가 수현씨의 심정이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이모티콘을 쓰는 거구나.
“끄으으응…!”
소파에 누워 기지개를 쭉 폈다. 굳었던 근육들이 풀어지면서 졸음이 더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기분 좋았다.
—역시 두 분은 교제하고 계셨군요.
갑자기 황 대리가 떠오른다. 어이없는 오해를 한 채로 현장을 벗어났으니까. 만약 이사가 되면 황 대리와 같이 일해야 하니 오해는 풀어둬야 한다.
그리고 아마 황 대리와 같이 했다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기획을 발의한 것이 황 대리니까.
‘주말에 보내도 되는 걸까…?’
수현씨의 경우에는 어차피 일에 대한 것도 아니고, 사과하러 보낸 거니 상관없지만, 받는 것과 보내는 것은 또 다르다. 아무리 사적인 이야기라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기분이 좋았다가도 확 나빠지니까.
‘역시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게 맞겠지.’
주말은 직장인들에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망칠 수 없다.
쳐다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나는 눈을 감았다.
~~~
“유희야!”
“안녕하세요.”
“진짜 오랜만이다~”
이렇게 지금처럼 호들갑 떨며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같은 학년이면서 두 살 많은 이민경 언니다. 2수만에 붙었다고 한다.
갈색의 보브컷에, 남색 배경에 흰색 땡땡이 무늬의 셔츠를 입었고, 검은색 스커트를 입었다. 키는 나보다 좀 작다.
물론 내가 보자고한 게 아니다. 원래라면 거절해야 했지만, 아빠랑 있으면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 거 같아 일부러 나왔다. 벌써부터 아빠가 보고 싶다.
“아, 빨리 와 빨리!”
“…?”
뭐야, 둘이 만나자는 게 아니었나…?
“누나 안녕하세요.”
“하이요~”
두 명의 남자가 이리로 오고, 민경 언니와 인사했다. 아빠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올려다볼 정도로 키가 컸다.
“누구예요…?”
“같은과 진혁이랑 정인이잖아!”
“그랬었어요…?”
하도 관계에 관심이 없다 보니 있는지도 몰랐다. 입학 때 몇 명 찝적거리던 사람이 있었긴 한데… 그 사람들 중에 온 건가…? 자의식 과잉이잖아 이건.
“이 사람들이랑 노는 건가요…?”
“응! 잘하면 건질 수도…?”
“저… 있는데요.”
“…뭐?”
언니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저 남자들이 온 걸 보면 아마 목적은 하나겠지 뭐. 나는 인원수 채우기 용으로──
“미안해 유희야!”
“네…?”
“진짜로 있는지 몰랐어…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돼…!”
“아….”
뭐야. 이 사람 의외로 착하잖아. 설마 이것도 가식인 건가…?
중학교 때 아빠가 다녀간 이후로 주위에 친구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그렇게 나한테 적당히 잘해준 애들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나마 좋았던 건 나를 왕따시키던 애들이 역으로 왕따를 당했다는 거.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내 과거를 알던 애들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렸지만, 그래도 다들 철들어서 그런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렇지만 학교 이외에서 연락하고 지낸 사람은 없었다.
이 언니도 그런 부류일 가능성이 크다. 속으로는 뭔가 숨기고 있으면서, 나한테 접근하는 그런 부류.
‘그래도 돌아갈 순 없어….’
지금 또 돌아갔다간 또 아빠랑 붙어 있고 싶어서 못 참을 거 같다. 아빠한테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해 놓고, 키스도 빼먹고 왔는데, 이제 와서 돌아갈 순 없다.
언제까지나 어린애처럼 아빠한테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어른이니까.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선, 이런 것도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녜요. 언니 혼자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까.”
“고마워!”
정말 무슨 사람인지 모르겠어….
“유희도 있네?”
“하이.”
“…….”
이 사람들은 나를 알고 있었나 보다. 특히 왼쪽에 와이셔츠를 입고서 5대5가르마를 한 남자가 거슬린다.
“그럼 다 모였고… 갈까?”
“네~”
“유희도 안 놓치게 조심해.”
“제가 알아서 갈게요.”
“존대 쓰는구나~ 반말써도 되는데.”
……그냥 돌아갈걸 그랬나.
~~~
강남역에서 조금 들어가면 있는 보드게임 카페. 빨간타일과 흰타일이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의해 정렬되어 있다. 한쪽에는 각종 보드게임들이 정렬되어있고, 입구에서 드링크바를 먼저 주문하고 자리를 잡아 앉는 구조였다.
처음 와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니 나름 재미있어 보인다.
“이쪽에 앉을까요?”
“그래~”
안쪽에 있는 테이블에는 잔을 놓을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아마 흘려서 보드게임에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겠지.
“누나 여기 앉으세요.”
“응~”
“유희는 여기 앉아.”
“아… 네.”
자연스레 민경언니 옆에는 스포츠머리남이 앉고, 내 옆에는 가르마남이 앉았다. 보통 남남 여여로 앉지 않나…? 왜 내 옆에 이 남자가 앉은 거지…?
이쪽을 흘끗 보는 것은 아니다. 의식하지 않고 무심코 라인이 들어나는 옷을 입고 왔지만 전혀 보고 있지 않다.
‘짜증나….’
쓸데없이 친절하다. 매너있다. 그게 가식이 발려 있는 것 같아서 더 짜증난다. 그리고 남성용 향수인가, 쓸데없이 아빠가 뿌리는 거랑 똑같은 냄새가 나서 자리를 옮기고 싶었다.
“아~ 이거 가져 왔어요.”
“아! 그거 재밌어! 유희는 해봤어?”
“아뇨… 안 해봤어요.”
그나마 민경 언니가 대화하기 편한데. 옆에 있는 사람이 뭔짓을 할까 무섭다.
가져온 게임은 신체적 접촉이 전혀없는 게임이다. 주사위를 굴려서, 그만큼 간다음, 거기 적혀 있는데로 돈을 획득하거나 뺏기는….
「옆 사람에게 10만원 주기」
민경 언니가 10만원을 옆 사람에게 줬다. 물론 가상의 돈이라 별 타격 없지만, 그래도 이 게임에서는 은근 우리나라 시세와 비슷해서 10만원은 꽤 큰 돈이다.
“다음 유희.”
주사위를 2개 굴리는 거라 총 12까지 있다. 뭐… 인터넷으로 봤을 때 요즘 대부분이 주사위 2개를 쓴다마는.
“12… 어, 골이다.”
“자. 1등 상금.”
“아, 네….”
100만원이라니. 알바를 뼈빠지게 해서 벌은 돈도 50만원이 안 넘는데. 월수 알바긴 하지만. 매달 몇백만원씩 버는 아빠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고, 2등으로 스포츠남, 3등 민경 언니, 4등 가르마남 순으로 골인을 했다.
“아싸 일등~”
“하긴 너 돈 버는 칸만 갔지? 이등은… 유희네?”
“아… 네.”
“내가 꼴찌야….”
“하하. 누나가 그렇죠 뭐.”
“뭐!?”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가식스럽다. 역시 이 사람들은 못 믿겠다.
“그럼 다른 게임 뭐 할까?”
“그거 할까요? 왕 게임!”
“난 찬성.”
“나도~ 유희는?”
“저요…? 음….”
왕 게임. 벌칙종이에 나와 있는 행동을 무조건 해야 하는 게임. 설령 야한 게 적혀 있더라도 해야 하는 게 큰 문제다.
하기 싫다. 당장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집에는 아빠가 있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할게요.”
아빠가 나만 의지할 수 있게. 내가 잘난 사람이 돼야 하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