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시연 & 수현. (10)
* * *
“알려주세요!”
황 대리에게 유희에 관한 것을 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입어 봤다고도 할 수 없다. 수현씨가 입었다고 할 수도 없고…. 어쩌지?
“그러니까….”
“제가 입어 봤어요.”
“…….”
거짓이다. 수현씨는 어제도 샘플을 입지 않았다. 지금 나를 감싸주는 건가…?
“혹시 수현씨 사이즈가….”
“75D요.”
“역시….”
황 대리가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혹시 과장 효과가 붙어서 그런 걸까. 듣기로는 제품 기획한 사람이 황 대리라고 알고 있는데, 본인이 내세운 슬로건과 많이 달라서 실망할 만도 하다.
“두 분은 교제하고 계신거군요.”
““……네?””
순간 우리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뭔가 오해해도 엄청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한 것 같은데….
“대리님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저 대신 수현씨를 쓰고, 게다가 시착까지 같이 하시다니… 이게 교제하는 게 아니면 뭔가요!”
수현씨쪽을 보자, 수현씨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맞춰야 하는데, 괜히 수현씨가 일을 키운 거 같다며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괜히 기대했어….”
“대리님!”
황 대리가 우물쭈물하다가 뛰어간다. 둘만 남은 공허한 현장에 수현씨와 한숨이 겹쳤다.
“어쩌죠 부장님….”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우리도 가자.”
“아… 네.”
황 대리도 황 대리지만, 오늘은 수현씨의 축하회가 있는 날이다. 아무리 퇴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수현씨가 이 부서에 근무하는 마지막 날이니까.
「부장님 어디세요?」
“어, 이제 출발해.”
「네~」
황 대리가 나에게 대접해준 그 가게. 돈이 많이 깨지긴 하지만 우리 부서는 여태 회식이라고 해봤자 무한리필 고기집이 전부였기에, 나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대접하기로 했다.
“오셨어요.”
“응.”
“부장님 여긴….”
“들어가자.”
“아… 네.”
수현씨가 식당 입구에서부터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긴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 놀랐으니까. 애초에 이런 곳이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아마 진심으로 신난 사람은 내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저 둘일지도 모른다.
“예약은 해놨으니까 아마 에피타이저처럼 코스로 나올 거야.”
“맛있겠다~”
“그러게.”
“부장님 저는….”
“이건 송별회가 아니야 수현씨. 축하회라고.”
수현씨가 퇴사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뻐해주고 축하해주는 자리다. 내가 수현씨였으면 아마 입을 가리고 웃음을 감췄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슬퍼할 필요 없어.”
“네….”
조금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서야 수현씨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감돌았다. 수현씨 정도면 아마 다른 부서에 가서도 잘하겠지. 성희롱을 당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만, 그녀 나름대로 무기가 있으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맛있게 드세요.”
4인석을 예약하니 아예 방을 하나 내줬다. 최 과장, 지희씨, 수현씨, 나 순으로 앉게 되었다. 팔각형의 창문으로 약간 전통적인 느낌이 들면서, 화이트와 블랙의 심플한 톤이 모던하게 어우러진 방이다.
테이블에는 기본적인 식기와 나이프, 와인잔이 있고 특별히 레드와인을 시켜서 테이블 가운데에 놨다.
“와인 마셔도 되는 거예요?”
“어. 마셔.”
“감사합니다~”
모두가 와인을 조금씩 마시고 기다리자, 카트를 가져온 직원이 애피타이저에 대한 설명을 하고 방을 나갔다.
“잘 먹겠습니다 부장님~”
“어.”
가벼우면서도 입에 잘 감긴다. 안에 닭고기가 들어갔다고 하는데 특유의 식감과 맛이 느껴지면서도 퍽퍽한 느낌은 전혀 나지 않는다. 샐러드의 상큼한 맛도 더해지며 저녁의 식욕을 돋궜다.
“음~ 맛있어!”
“부장님 덕분에 이런 호강도 해보네요.”
“아하하….”
“맛있…네요.”
“그치?”
수현씨도 약간 낮은 텐션의 목소리로 맛있다는 의견을 표했다. 잘 먹어서 다행이다.
모두 다 먹자 어떻게 알았는지, 직원이 문을 열고 우리 접시를 거둬가고, 다음 요리가 나왔다.
“와~!”
수현씨를 위한 자리인데 둘이 더 신났다. 통통한 새우가 두 마리에, 3대 진미인 트러플 오일이 뿌려졌다고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입에서 침이 고여서 어찌할 줄 몰랐다.
“우움~!”
지상파 방송을 보면 맛이 없어도 저런 리액션이 많이 나오는데, 저 리액션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맛있었다. 맛도 좋고 식감도 좋은 새우가 트러플 오일을 만나니 풍미가 장난 아니었다.
“부장님.”
“응?”
옆에 두명이 수다를 떨고 있는 가운데, 수현씨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응.”
평소라면 “고맙긴 뭘….”이라고 말하겠지만, 자그마치 3자리가 빠져나갔으니 이번만큼은 그 감사를 받기로 했다.
수현씨가 포크로 새우를 입에 가져가 오물오물 씹는다. 어지간히 맛있는지, 얼굴에 손을 올리려다 말았다.
“맞아 수현씨! 어디로 간대?”
“아마 인사부로….”
“와~ 대박! 이제 대리님이라 불러야겠네~”
“대리요…?”
우리 회사는 인사부를 대리급부터 갈 수 있다. 즉, 아무리 막내여도 대리부터 시작한다.
그 사실을 들은 수현씨가 조금 놀랐다. 아마 정사원을 뛰어넘어 대리를 바로 달아서 그렇겠지. 황 대리 자리가 공석이 된 것도 있고, 아마 황 대리도 입김을 불었을 것이다. 아무리 사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본인 맘이니까.
“제가 그런 걸….”
“수현씨가 능력이 좋아서 그래~ 그럼 더 자주 볼 수 있겠다. 인사부한테 보낼 거 많거든~”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긴, 지희씨는 경리일을 하고 있으니까, 인사부와 접점이 많다. 아마 수현씨와도 자연스레 접촉하게 되겠지.
“다행이네 수현씨.”
“네.”
“이제 강 대리인가?”
“오~”
“아, 아직 아니니까요…!”
“하하하.”
웃고 떠드는 사이에 다음 메뉴가 나왔다. 한우 스테이크. 오늘의 메인 메뉴다. 최 과장은 레어를, 나머지는 미디움 레어를 시켰다.
“와 육즙봐….”
쓱싹 한 조각을 썰은 지희씨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자르니 안쪽에서 엄청난 육즙이 나왔다. 핏물을 확실히 뺐는지 여타 싸구려 스테이크 집에서 나오는 스테이크와는 확실히 달랐다.
한 입을 넣자마자 감탄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소스의 맞과 함께,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고기가 포텐셜을 터트린다.
감상평을 남길 새도 없이 손과 입만이 움직인다. 가끔씩 맥힌 목을 물로 세척해서 음식이 넘어가기 쉽게 만들었다. 그만큼 맛있었다.
“우와….”
더 이상 리액션을 숨길 수 없는 수현씨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 표정이 확 밝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원래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법이다.
“수현씨 웃었다.”
“그게… 맛있어서….”
“훨씬 낫네.”
“맞아!”
“그런가요…?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무렵, 짜장면과 짬뽕이 조금씩 나왔다. 남자들은 짬뽕을, 여자들은 짜장을 먹었다.
“음….”
솔직히 짬뽕은 잘 모르겠다. 여타 중화 요리집이랑 딱히 차별화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력이 아니니까 당연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런지 그렇게 감탄이 나오진 않았다.
“과장님, 제 거 조금 드실래요?”
“응.”
“아~”
최 과장이 지희씨의 짜장면을 한젓가락 먹었다. 나와 감상은 같았는지, 맛은 있지만 뭔가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맛있었으니까 됐지 뭐.
“부, 부장님….”
“응?”
“부장님도… 제 거 드실래요?”
“아… 응.”
개인적으로 짜장면 맛도 궁금했는데 잘 됐다. 저쪽이 먹여 준 것과는 다르게 내가 덜어서 갔다. 짜장면은 고기가 좋아서 그런가 의외로 맛의 차이가 났다.
“슬슬 배가 부르네요.”
“그러게.”
“솔직히 스테이크 한 번 더먹고 싶어요.”
“아, 저도요.”
“그건 따로 먹어.”
슬슬 마지막 디저트가 나온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티라미수, 그리고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부어 넣은 아포가또도 나왔다. 설명으로만 들었을 때는 아보카도인 줄 알았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모두….”
적당히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있는 가운데, 수현씨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모두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옆에서 본 수현씨에게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수현씨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더 감사할 건데 뭘.”
“맞아…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볼 건데 뭐. 가끔 저희끼리 모여서 놀러 가요!”
“그럴까.”
“수현씨 우는 거야?”
“안, 울어요….”
수현씨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핸드백 안에 있는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는다. 그러면서도 웃겼는지 큭큭 거리며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과장님 그거 성희롱이거든요.”
“윽….”
“하하하.”
그렇게 모두 잘 먹었습니다를 외친 후, 둘은 돌아갔다. 뭔가 분위기가 무흣한 것을 보아하니… 아니, 이런 생각은 말자.
“정말 고마워 수현씨. 덕분에 잘 끝났어. 아까 속옷 입었다고 한 것도 그렇고.”
“아니에요… 저야말로 잘 먹었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수현씨가 입을 열었다.
“부장님. 정말 앞으로도 연락하실 거죠?”
“당연하지.”
와인을 마셔서 그런지 수현씨가 조금 텐션이 올라간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
수현씨가 내 어깨를 잡고 내린다. 빨간 립스틱이 발린 입술이 내 왼쪽 뺨에 닿았다. 당황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수현씨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역쪽으로 뛰어갔다. 아마도 수현씨에게 있어 마지막이라는 것은 나를 향한 연심이겠지. 만약 내가 이사가 된다면 바빠져서 자주 만날 순 없겠지만, 연락은 할 수 있겠지.
“아…….”
“부장님…?”
일부러 천천히 내려갔건만, 결국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수현씨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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