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시연 & 수현. (7)
* * *
“아빠.”
“응?”
출근을 하기 전, 유희가 뒤에서 껴안아 줬다. 유희도 다음 주부터 개강이라, 방학도 곧 마지막을 방해하기 때문에, 출근 시간부터 나와 함께하려는 것이다.
“우우.”
뒤를 돌자 유희가 입술을 쭉 내민다.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거 말구….”
“하하… 알았어.”
“츄웁…♥”
가볍게 하는 키스가 깊어지고, 손을 뒤로 돌려 유희의 허리를 끌어안자 서로의 혀가 얽히며 끈적이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후아….”
“……크흠.”
아침부터 이러니 약간 남아 있던 잠도 다 날아갔다. 유희는 사실 이러려고 나에게 키스를 부탁한 게 아닐까?
“다녀와 아빠.”
“응. 다녀올게. 아,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아.”
“응 괜찮아.”
다시 한번 유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밖을 나오자, 여름의 끝을 알리는 시원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
“이걸로 그 여자들한테….”
~~~
가져온 속옷들을 상자에 담아 몰래 책상 밑에 넣어두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고는 여유로운 척을 하며 블랙커피를 직접담아 호록, 마셨다.
“좀 춥군….”
아직 여름이긴 하지만 아침부터 사무실의 에어컨은 빵빵하게 가동돼서 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다. 덕분에 사무실에는 가디건을 가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는 재킷이 있으니 그런 것을 따로 챙길 필요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시착을 안 해봤네….’
어제 유희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정작 벗는 바람에 입지를 못 했다. 샤워를 하고 나서는 까맣게 잊은 채로 그대로 잠들어버렸으니까.
요즘 에너지를 막 쏟아부어서 그런가, 새벽 일찍 일어날 수 있었던 체력도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든다. 만약 이사가 된다면 헬스도 줄여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더욱 체력관리가 힘들어진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
“잠이 잘 안와서요….”
“으음….”
안심시키기는 했지만, 아마 이 부서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수현씨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는 뭘 하고 말해봤자 별 도움도 안 되는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침묵으로 공감을 대신했다.
“오늘도 끝나고….”
“아, 응. 거기서 만나자.”
유희에게 입혀봐서 대충 감이 오긴 하지만 나 혼자 독단으로 진행할 순 없기에,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수현씨에게도 시착까지는 아니지만 옷을 분석하는 작업을 부탁하기로 했다.
“끄응….”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고생했어.”
퇴근 시간이 조금이라곤 말할 수 없는 좀 지난 시각. 내가 먼저 가야 다른 직원들이 퇴근 하는데, 발표 자료를 준비하느라 눈치 없이 남아 있어 퇴근을 못 했다.
눈치챈 내가 일어나는 시늉을 보이자 그제서야 지희씨가 먼저 퇴근한 것이다. 나도 참, 미리 가 있어야 했는데.
“저도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래.”
최 과장도 퇴근하고, 다른 부서 사람들도 하나둘씩 퇴근하기 시작했다. 발표 자료를 준비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 층에는 나와 수현씨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와 수현씨가 있는 자리에만 불이 들어와 있고, 다른 곳은 모두 캄캄했다. 저쪽 끝으로 가면 아예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만큼 바깥도 어두워져 있었다.
“어떡할래 수현씨, 밖에서 저녁 먹고 할까?”
“아, 도시락 싸 왔는데, 같이 드셔요.”
“진짜?”
수현씨가 부서 냉장고에 넣어놓은 도시락을 꺼내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도시락에는 조리 없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유부초밥이 윤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데워올게요.”
“응.”
수현씨가 초밥을 데우는 동안 나는 수저를 세팅해 놓고 숨겨두었던 상자를 가져 왔다. 다행히 구겨지지 않고 잘 보관 되어 있었다.
“후우….”
아무래도 에어컨이 꺼지니 조금 더워졌다. 여름이 다 가셨다고 해서 아직 실내 공기까지 완벽하게 가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 낑기기도 하는 재킷을 벗어 의자 뒤에 걸어놓았다.
“부장님 여전히 몸 좋으시네요.”
“그런가?”
유부를 다 데운 수현씨가 도시락을 펼쳐 놓으며 나를 칭찬했다. 몸관리를 하긴 했다지만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칭찬이니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네.”
“정말요?”
“응. 맛있어.”
적당한 재료들과 참기름을 버무린 유부초밥은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꽤 많은 양을 금세 다 먹어버렸다.
‘좀 피곤하네….’
아무래도 배가 불러서 그런지 몸 움직임이 둔해졌다. 시간도 시간이라 하품이 나오며 며칠간 외면했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도저히 움직일 수 없어서 수현씨에게 부탁했다.
“미안 수현씨. 여기서 할까?”
“부장님 피곤하시면 내일 하셔도 되는데….”
“아냐. 미리 해 놓는 게 낫지.”
“……네.”
“일단 이거.”
상자를 열어 어제 가져온 속옷들을 보여줬다. 혹시 몰라서 다 빨아놨다. 아무래도 유희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았으니까.
“생각보다 잘 나왔네요?”
“응. 사진보다 의외로 잘 나왔어. 질감 같은 건 어때? 만져봐.”
“나쁘지 않아요. 이렇게 늘어나는 거 보면 프리사이즈라고 말할 만 하네요.”
수현씨가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둘러보고서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일단 제품이 잘 나왔으니 남은 것은 홍보 뿐이다.
“부장님은 어떤 거 같으세요?”
“응? 뭐가?”
“남성용 속옷이요.”
“아….”
지금에서야 만져 보는 속옷은 질감은 괜찮지만, 디자인을 제외한 다른 속옷과 차별화된 점을 찾지 못했다. 아마 디자인만 내세운 건가 싶기도 하다.
“괜찮긴 한데… 그냥 디자인만 이쁜 정도네.”
“그렇군요.”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어? 판매 전략이라던가.”
“음… 일단 저희는 핀트를 잘못 잡은 것 같아요.”
“핀트?”
“네. 속옷의 기능성이에요. 사실상 최소한의 기능만 갖춰지면 되는데, 저희는 프리사이즈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했어요.”
“아하.”
하긴. 기능성이래봐야 넣을 기능은 별로 없으니까. 생각해 보니 대부분의 팬티는 최소 사이즈가 있을 뿐이지, 거의 프리사이즈다.
브래지어가 프리사이즈래봐야 유희정도의 가슴이 큰 사람은 조금 낀다고 하는데, 프리사이즈라고 광고했다가는 항의가 빗발칠 것이 뻔하다.
“일단 디자인 위주로 내세우고, 아마 모델이 가장 중요할 거 같아요. 혹시 섭외도 저희가 하는 건가요?”
“아니, 우리는 기획만 발표하면 돼.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할 거야.”
“아하.”
“수현씨 말대로면 일단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구만. 내일만 해도 하루 남았는데 큰일이네.”
“걱정 마세요 부장님. 저도 준비했어요.”
“정말?”
“이거 보시면….”
아마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듯, 수현씨가 준비한 자료들과 PPT를 보니 딱 알기 쉽게 만들어져 있었다.
“오… 역시 수현씨야.”
“감사합니다.”
“수고했어 수현씨. 내일 마무리하자고.”
“……네.”
마무리, 라는 말에 수현씨가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그 행위에 대해 나는 모른 척 지나가기로 했다.
~~~
“부장….”
“쿠우울….”
밤 11시가 훨씬 넘었다. 부장님이 차를 안 타고 출퇴근하는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부장님은 피곤하셨는지 빈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어버렸다.
곧 있으면 내려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장님이 살짝 기대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 거린다.
“…….”
솔직히 부장님과 붙어 있는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여자친구분도 계신데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죄송해요 부장님….’
마지막으로… 같이 있고 싶어요….
~~~
“으음….”
어깨맡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팔꿈치에는 무언가 살집있으면서 말랑한 것이 닿았고, 허벅지 위에는 얇고 부드러운 손이 얹어져 있었다.
“헉!”
눈을 떠보니 을지로입구역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신도림선이었으면 그쪽에서 얼마 걸리지 않았을 텐데, 하필 성수행이라 정반대쪽으로 와버렸다.
‘수현씨는…?’
옆을 보니 수현씨 역시 피곤했는지 나에게 기대서 잠들어 있었다. 괜히 오해를 일으킬 거 같아 어깨를 잡아 거리를 벌렸다.
“수현씨. 일어나 봐.”
“으음….”
부스스 눈을 뜬 수현씨가 기지개를 켰다. 스트레칭이 끝나고 나서야 수현씨도 깜짝 놀랐다.
“부장님 여긴…!”
“우리 둘 다 깜빡 잠든 거 같아.”
“그렇군요….”
“일단 다음 역에서 내리자.”
“아, 네.”
예상대로 열차에서 내리자, 막차라는 음성과 함께 역내 전등이 하나씩 꺼져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 했다.
“그러고 보니 수현씨 집은 여기네.”
“아… 네.”
저번에 두 번 정도 간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위치는 확실히 기억한다. 우연찮게 내린 곳이 자기 집이라니, 수현씨가 처음으로 부러운 순간이었다.
“그럼 택시 잡고─”
“너무 비싸지 않나요…?”
“솔직히 비싸지만 딱히 잘 곳도 없으니까.”
“그럼 저희 집에서 주무고 가셔요.”
“아냐 뭘….”
“부장님.”
“…….”
수현씨가 택시를 부르려던 스마트폰 화면을 가렸다. 딱 봐도 손이 떨리고 있었고, 고개를 숙인 수현씨의 표정이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수현씨…….”
수현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유희가 있고, 더 이상 이런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
내가 손을 치우려고 하자 수현씨가 다시 한번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할게요… 정말로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