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시연 & 수현. (5)
* * *
“그 일 제가 맡을 수 없을까요?”
“네…?”
황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뜬다. 갑작스런 수현씨의 말에 나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서로 키가 비슷해서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수현씨…라 하셨죠. 부장님께서 안하셔도 된다는데, 왜 굳이 일을 도맡으시려 하는 걸까요?”
“그건….”
“혹시 부장님께 무슨 일이라도──”
“아니에요.”
“……그럼 딱히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 일은 원래 제가 맡았던 거에요. 제가 할 이유는 있다고 보는데….”
“하지만 수현씨가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
“둘 다 그만.”
공공적인 장소에서 뭐하는 짓인지. 나도 모르게 그만 큰 소리가 나와버렸다.
“죄송해요 부장님!”
“죄송합니다….”
“일단 황 대리. 이 건은 나중에 이야기해요.”
“네에….”
황대리가 꾸벅 인사를 하고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덩그러니 남겨진 수현씨가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현씨. 역시 무슨 일 있지.”
“…….”
수현씨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딘가 지희씨에게서 본 분위기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만 둘것 같은 분위기다.
“일단 끝나고 얘기 해요.”
“……네.”
창문 틈으로 붉은 석양이 보이고, 하나둘 퇴근하는 시각, 나와 수현시는 따로 나와서 길을 걸었다. 아무래도 유희 때문에 오래 얘기하지는 못하니까.
업무 중 내내 입을 열지 않던 수현씨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거절한 거야?”
“말이 헛나왔어요.”
“그런 것 치고는 꽤 급해보였는데.”
“부장님은 너무 눈치가 빠르세요.”
“…….”
이 정도면 아주 늦게 눈치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따질 건 아니니까 됐나….
“그래서…. 진짜 이유는?”
“무서웠어요.”
“무서워?”
“여기 부서를 떠나는 게… 부장님과 떨어지는 게 무서웠어요.”
역시… 내가 예상한 게 맞았나.
이렇게 된 이상, 수현씨에게는 진실을 말해줄 수밖에 없다. 혹시 수현씨가 이 부서로 다시 온다고 해도, 어차피 수현씨와는 떨어지게 되니까.
“수현씨.”
“네.”
“무서워할 필요 없어.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니까.”
“그건 알지만….”
“그리고 혹시라도 수현씨가 이곳에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다른 곳에 있을 거야.”
“다른… 곳이요?”
“낮에 황 대리 봤지? 그 사람이 내 비서가 될 거야.”
“비서요…?”
“응. 이건 비밀인데…….”
내가 이사로 추천받았다는 것을 말해주자, 수현씨가 그제서야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 거렸다.
“제가 엄청 큰 실례를 저질렀네요….”
“뭐… 엄청 크진 않지만.”
“이제 부장님 같은 분은 못 뵈겠네요….”
“무슨 소리야. 수현씨 내 번호 없어? 옛날에 주지 않았나?”
“그건… 제가 부장님한테 잘못한의미로 삭제했어요.”
“잘못이라니?”
“기억 안 나세요? 저 부장님한테… 강제로 사귀자고나 하고, 협박영상도 찍고….”
“아하….”
만약 내가 수현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신고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현씨와의 관계도 손절한 채로 지내다가 아마 수현씨 혼자서 퇴사했겠지.
“그건 이미 지난 일이잖아. 자.”
나는 이미 수현씨의 번호가 있으니, 수현시에게 핸드폰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건넸다.
“받아도 되나요…?”
“그럼. 당연하지.”
“감사합니다….”
“감사할거까지야….”
내 번호를 입력하고 다시 수현씨에게 돌려주니, 수현씨가 고개를 숙였다.
“수현씨?”
“죄송해요.”
“왜?”
“저… 질투해버렸어요.”
“질투라니….”
“부장님이 여자친구분 있으시단거 듣고요.”
“여자친구?”
“왜 저는 안 되면서 그 사람은 되냐고… 그래서 부장님의 부탁을 거절했어요. 순간 화가나서. 정말 죄송해요.”
“아하….”
수현씨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그때는 누구랑도 사귀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정작 유희랑 사귀고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유희와는 그 이상의 관계지만.
하지만 그때는 진심으로 누구와 사귈 생각이 없었다. 아마 유희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솔로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미리 말 못해줘서 미안해.”
“아뇨! 부장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럼 수현씨도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아서 수현씨가 많이 불안해진 거니까.”
“그렇…네요.”
“수현씨 마지막 날은 거하게 쏠 테니까.”
“부장님….”
“맞아.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솔직히 수현씨 형편이면 뭐… 다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 저 방송 그만뒀어요.”
“뭐? 왜.”
“저번에 말씀 드렸잖아요. 사회생활 할 거라고.”
“그랬…었지.”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만두다니, 마지막 방송이라도 봐줬으면 좋았을걸.
괜히 수현씨가 무안해 할까봐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그… 그래서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가지고 싶은 것보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부장님이랑… 마지막으로 일하게 해주세요.”
“…….”
솔직히 황 대리 때문에 고민이 됐지만, 수현씨의 마지막 부탁이기도 하고, 애초에 수현씨에게 부탁하려고 했으니 들어주기로 했다. 황 대리라면 이해해줄 것이다.
“알았어.”
“정말요…?”
“마지막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황 대리한테는 잘 설명할 테니까. 대신 이 건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리지마.”
“네!”
수현씨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회복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 좋다.
이제 남은 건… 금요일을 위해서 준비를 할 뿐이다.
~~~
“네… 그렇게 됐어요.”
「그렇군요… 저도 저번에 실례했다고 전해주세요. 죄송하다고.」
“알겠어요.”
「그리구… 저한테도 반말하셔도 돼요….」
“아… 음… 익숙해지면 그럴게요.”
「네!」
다행히 황 대리와는 무사히 끝났다. 하긴 황대리도 어린 나이는 아니라, 이정도는 아마 사회인으로서 넘어갈 수 있는 거겠지. 애초에 아빠가 사장인데, 이보다 더 심한 꼴을 어디선가는 봤을 테니까.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일단 비밀리에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먼저 퇴근하는 척 다른 곳으로 샜다. 이 주변이면 누구와 만날 가능성도 있어서, 수현씨의 집 근처에 있는 룸카페로 들어왔다.
“예약하셨나요?”
“네.”
주위는 흰색 벽으로 되어있고, 큰 모니터와 함께 테이블도 깔려있다. 딱 사무실 같은 공간이다.
거기에 노트북도 대여가 되서 여러가지로 비즈니스적인 일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요즘은 다 패드로 해서 굳이 노트북 대여를 하진 않았지만.
“부장님. 저 왔어요.”
“어.”
시간차로 나왔기 때문에 미리 대기 하고 있자 이어서 수현씨가 왔다. 황 대리에게서 받은 자료를 가지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선전할 제품은 속옷이다. 회사가 한 곳에 집중하지 않고 여러가지 사업을 벌리는 판이라, 다음 사업으로 속옷이 결정된 것이다. 어디에 예능에 나왔던 100년을 먹여살릴 사업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에 나오는 컬러는 다섯 가지. 레드, 블루, 블랙, 그레이, 화이트야. 각각 비슷한 계열의 색깔의 줄무늬가 있고, 블랙과 화이트만 서로 상반되는 색깔의 줄무늬가 있어. 사진을 보면 이해가 될 거야.”
“네.”
남성용과 여성용 둘 다있다. 남성용은 브리프나 복서 팬티가 있고, 대신 색깔은 블랙, 그레이, 화이트 밖에 없다.
여성용은 천이 아니라 나일론과 비슷한 재질이라 스포츠 브라 정도의 신축성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장미 무늬 자수와 레이스가 달려 있어 나름대로의 어필 포인트를 준다. 게다가 재질도 재질이라 프리사이즈라고 한다. 일단 사진과 설명문에 의하면 그렇다.
문제는 실착용감인데, 제품은 내일 도착한다고 하니 남성용은 내가 어떻게든 입어볼 순 있지만, 여성용은 판단하기 그렇다. 그렇다고 수현씨에게도 부탁할 수 없는 노릇이고.
“제품은 내일 오나요?”
“응. 아마 직접 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수현씨는 내일 리뷰하고 여성용에 대해 어필할 포인트가 있으면 정리해서 주면 돼.”
“네.”
“끄으응… 수고했어. 나머지는 내일 해.”
“네 고생하셨어요… 아, 안마해드릴까요?”
“됐어 무슨──”
내가 어깨를 잡고 돌리자, 수현씨의 얇은 손이 닿는게 느껴졌다. 엄지 관절과 손가락을 이용해 조물조물 주물러주는 것이 아주 시원했다.
“어떠세요 부장님?”
“응… 시원하네.”
“다행이네요.”
조금 더 안마를 받다가 이제 됐다는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현씨가 뒤로 물러났다. 속옷 퀄리티가 과대광고라고 욕먹지 않을만큼만 좋았으면 좋겠다만. 내일 보면 알겠지.
“어라.”
수현씨가 헤어지고 집에 오자, 집 앞에 상자가 놓여있었다. 내 계산 착오인 건지 아니면 의외로 빨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들어와 내용물을 보니 정말 우리 회사에서 내려고 하는 속옷이었다.
“별일이 다 있네.”
보통은 하루 늦게 오는 것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만… 우리 회사는 이런 추진력 하나는 좋다니까.
“아빠 왔어? 그건 뭐야?”
“아… 이번에 신제품.”
“속옷이네?”
“응.”
집에 들어오자 날 맞아주러 나온 유희와 자연스레 포옹을 하고, 유희가 상자를 집어 안에 들어있던 속옷을 꺼냈다.
“이거 입어봐야 되지 않아?”
“글쎄… 굳이 입어봐야하나 싶기도 하고….”
“입어 봐야 사람들이 알지.”
“남성용은 그렇다 치고, 여성용은 아빠가 못 입잖아.”
“내가 입으면 되지!”
“유희가?”
유희가 자기자신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엄청 입어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마침 상대도 없고, 유희도 여자니까… 입혀 봐도 되려나….
“……입어볼래?”
“응!”
그렇게 유희의 속옷 패션쇼가 시작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