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내게 집착한다-68화 (68/96)

〈 68화 〉 시연 & 수현. (3)

* * *

“부장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출근을 할 무렵, 황 대리도 건물 앞에 차에서 내려 들어가고 있었다. 새삼느끼는 거지만, 저렇게 명품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도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보통 명품을 착용하면 그 명품만 딱 돋보이는 법이니까.

일단 황 대리가 인사를 건넨 것을 보니 괜히 다가온 것은 아니다. 아마도 어제의 결과를 알고 싶어서 일부러 티를 내는 것이겠지.

“어제 일 말인데, 일단은 입후보 할게요. 계약 연장만 된다면.”

“진짜요? 정말 감사합니다!”

“네… 뭐….”

유희를 위해 당분간 거리를 두기로 약속한 이상 나도 임원이 되는 것으로 보답해야 한다. 이번에 승진하면 유희 옷이나 사줄까….

“면담은 저희 아버─대표님이랑 하시게 될 거예요. 조만간 또 연락 드릴게요.”

“네.”

면담을 가장한 면접이라니. 왠지 더 떨리기 시작했다.

황 대리가 어딘가 들떠보인다. 아마도 부담스러운 영감님들 보다는 그나마 알고 지낸 내가 자기에겐 훨씬 편할 테니까. 나 역시 황 대리가 아니었다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아버지라는 말이 입에 붙었구만.

“부장님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부장님.”

“오셨습니까­”

“어. 그래.”

사무실로 들어오니 부하직원들이 맞아준다. 임원이 되면 이런 생활도 못하게 되니 좀 아쉽다. 가만, 그럼 여기 관리를 최 과장이 하는 건가? 이제 최 부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부장님. 커피드세요.”

“고마워.”

수현씨가 은은한 향이나는 커피를 가져다준다. 표정을 보아하니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수현씨 무슨──”

순간, 물어봐선 안 될 눈치가 보여 말을 말았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하염없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네? 부장님 뭐라고 하셨나요?”

“아냐 아무것도.”

수현씨가 자리로 돌아가자, 멈췄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층 다른 부서에서는 전화벨이 울리고, 고객과 상담하거나 연락을 취하면서 사무실의 공기가 바쁘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하아….”

역시 휴가는 사람들이 괜히 안 쓰는 게 아니다. 쉬는 만큼 일거리가 쌓이는 일거리 증가의 법칙 때문에 손과 입이 쉴 일이 없었다.

“이번엔 또 누구….”

거의 점심시간이 다가와서 안 받을까 했지만, 황 대리라는 이름을 보고 거절할 수 없었다.

“네 대리님.”

“부장님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다름이 아니라… 대표님이 면담 전에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고…”

“면담 전에요?”

“네. 역량 평가랄까요…?”

“아하….”

입사 이래로 본 적 없는 역량 평가라니, 하긴.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승진할 즈음에 대형 프로젝트를 맡긴 했었지 아마.

“그래서 준비하셔야 될 것들 메일로 보내 드렸어요. 대충 설명해 드리면 신제품 프로모션을 진행할 건데, 부장님께서 기획서를 쓰셔서 발표하시면 될 거 같아요. 혼자하셔도 되고, 부하직원을 쓰셔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기획서는 하도 써봐서 이젠 보지 않고도 쓸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내가 쓴 대부분은 거의 부서원들의 관리나 복지 시스템 관리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리고 부하직원을 써도 된다라, 마침 적성에 맞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허락해줬으면 좋겠는데, 생각해보니까 수현씨도 다른 부서 가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었지 참.

뭔가 시키기에 미안하지만, 수현씨만한 인재도 없으니 곤란할 따름이다.

“아, 그… 혹시….”

“네?”

“부장님 혼자 힘드시면….”

“아뇨. 이미 정해놨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금요일까지 준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뭔가 마지막에 황 대리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담겨 있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수현씨 잠깐 할 말이….”

전화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수현씨가 자리에 없었다.

“수현씨 올라갔는데요?”

“그래… 뭐? 올라가?”

“네.”

평소에 옥상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수현씨가 옥상이라니, 의외….

‘잠깐만.’

우리 옥상에는 안전장치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벽을 넘어갈 수 잇을 정도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아침부터 아무렇지도 않은척하지만 왠지 어두운 수현씨의 표정과 목소리톤, 그리고 일하는 내내 푹푹쉬던 한숨. 그리고 한 번도 올라가 본 적 없는 옥상.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5일.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앞으로 5일이다. 대리님한테도 물어 봤고, 과장님한테도 물어 봤지만, 신입부터 여기까지 계속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전부 다른 부서에서 근무를 하고 하거나, 대리님처럼 경력직으로 온 경우다. 내가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하아….”

일의 양도 점점 줄고 있다. 곧 간다는 차원에서 배려해주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일에 쌓여서 이 외로움을 잊고 싶다.

“후우….”

보통 처음 담배피면 쓰다고 하는데, 그동안 내 앞에서 쪽쪽 빨아대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오히려 익숙하다. 담백하면서도 시원한 연기가 내 기도와 폐를 훑고 지나가는 감각이 중독될 것 같다.

‘퇴사할까….’

아니, 퇴사는 안 된다. 이제 사회에서 조용히 살려고 방송도 접었는데, 앞으로 뭘 하며 살라고….

이제는 버틸 수 밖에 없다. 창작계가 아닌 이상 같은 직장은 오래 다니는 게 좋다고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으니까.

‘절대로 부장님을 못 잊어서가 아냐….’

사람 때문에 이러면 인생 어떻게 살까. 세상은 넓고 인연은 많은데. 겨우 한 번 차였다고 감정이….

‘아, 그래서 그런 건가?’

딱히 거절당한 적은 없고, 그렇다고 나한테 대시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차버리는 경우는 많았지만, 차인 경우는 없었다.

‘설마 나는 지금… 부장님한테 차인 게 분해서…?’

공주병도 유분수가 있지, 내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한 주제에. 이러면 전형적인 썅년이랑 다를 게 뭐야. 난 이제….

‘지랄. 맞으면서.’

아무리 죄값을 치러도 빨간줄은 지워지지 않듯이, 내가 지금까지 한 행위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천성도 어디로 가버리지 않는다.

부장님이 날 차버려서 사과를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고 생각하니 자기 혐오가 들기 시작했다.

“후우….”

담배 연기가 새어 나오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이쪽으로 향한다. 덕분에 옷에 냄새가 다 배이게 생겼다.

오늘따라 날씨는 또 왜 흐린 건지, 내 기분을 대변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언제까지 여기서 죽칠 수만도 없다. 그 일도 있고, 한시 빨리 부장님에게 사과드려야──

“수현씨!”

“……부장님?”

“하아… 하아….”

“왜 그렇게 숨을 헐떡이세요?”

“아, 아니…. 그냥….”

갑자기 뛰어올라온 부장님이 엄청 헐떡이며 내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가 말았다.

“부장님 진정하시고 일단….”

“그래… 미안….”

옥상 한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자, 부장님이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하하…. 그렇지 참.”

아무리 우울하다고는 하지만 자살까지는 생각 안했다. 부장님 말씀을 듣고서야 저 난간이 눈에들어왔을 정도다.

아니 이런 감상할 때가 아니지. 부장님이 제 발로 올라와 주셨는데, 그때 여기까지 와서 놓칠 수는 없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 응.”

“그러니까… 그….”

부끄러워서 말이 안 나온다. 이 쓸데없는 자존심 좀 어따가 버리고 싶은데. 망가지는 게 뭐가 두렵다고,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해야 할 걸 지금까지 미룬 것뿐인데. 입 좀 열라고 멍청아!

“혹시 여자친구분 있으세요?”

“응…?”

순간 말해놓고 당황했다.

나 지금 무슨 말을…? 내가 말해야 할 건 이게 아닌데….

“아, 수현씨한텐 말을 안했구나.”

“네…?”

“……있어. 이제 말해서 미안해.”

“아… 네…. 축하드려요.”

순간 아무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음고생을 한 내가 쪽팔렸다. 부장님이 필사적으로 거절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부장님께 했던 짓거리들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었는지도 모른다. 부장님한테 바람을 피게할 뻔했으니까.

“수현씨 더 할 말 있는 거 같은데. 어디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사실 나도 할 말이 있거든.”

“네… 말씀하세요.”

“수현씨가 필요해.”

“……제가요?”

“응. 이번에 신제품 프로모션을 기획중이거든. 수현씨가 도와 줬음 해서──”

“죄송해요!”

“잠깐, 수현씨!”

아아…. 난 왜 또 도망쳐버리는 거야….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