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시연 & 수현
* * *
“수현씨 2주 남았네.”
“네? 뭐가요?”
“뭐긴. 정사원 되는 날이지.”
“아….”
돌아보니 수습기간은 끝나려하고 있었다.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뭐랄까 야근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보통 수습기간은 괜히 추가 수당을 챙겨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보내준다고는 하지만 우리 회사는 그런 것도 없고 정시쯤이 되면 일이 다 끝나 있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휴가 잘 보내.”
“부장님도요.”
내일부터는 여름휴가다. 평소 방송을 해서 그런가 일로 지치는 건 없었지만, 막상 다녔다가 휴가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아….”
휴가동안 해야 할 일이 많다. 이것저것 정산에, 편집자 월급에, 매니저들 월급에… 또….
‘괜히 마지막이라니까 좀 아쉽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나도 이번에 그 끝을 맞이하려 한다.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이 사람들한테도 기억에 남을 테니까. 위키에 내 항목에 아무 논란도 적히지 않은 지금이 딱 적기다.
「그동안 수고들하셨습니다~」
「프란코님도요 ㅠㅠㅠㅠ」
「사장님 고생하셨습니다」
「ㅠㅅㅠ」
「모두 인연이 되면 또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톡방을 폭파시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밥이라도 한 끼 하지 뭐.
─아마 수현씨가 한 행동들이 언젠가는 발목을 잡을 거예요. 그 전에 바로잡을 수 있으면 바로잡아야 해요.
부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상금을 줬다. 이것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사죄 방법이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떨떠름해 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침 돈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쪽에서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부장님 말 대로 하길 잘했어.’
하지만 완전히 바로잡지는 못했다. 정작 부장님께는 사죄하지 못했다. 내 할말만 멋대로 지껄이고 정작 사과는 하지 않았으니까. 부장님을 볼 때마다 아직도 그 마음이 잊혀지지가 않아서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꼭….’
앞으로 얼마남지 않은 기회. 나는 꼭 부장님에게 사죄를 할 것이다. 휴가가 끝나면 정말 1주일밖에 남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꼭 사과하겠다고 다짐하며, 마지막 방송을 켰다.
~~~
“으윽….”
엄청난 피로감이 나를 덮친다. 일주일간 휴가 때문인가,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공들인 석탑 무너지는 거 한순간이라더니, 정말로 생체리듬이 망가져버렸다.
“아빠 일어나!”
다행히 일찍일어나는 유희가 나를 깨워줬다. 개강까진 아직 멀었을 텐데, 내 딸이지만 참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응… 일어났어.”
“말만 하지 말구….”
“응….”
유희가 계속 꾹꾹 누르며 흔들어서 엄청난 소리로 하품을 하며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직 7시라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이대로 밍기적거리다간 늦을 거 같아서 양 뺨을 세게 쳤다.
딱히 어제 술을 마신 것도, 그렇다고 유희와 사랑을 나눈 것도 아닌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늙을수록 일찍 눈이 떠진다는데, 아직 젊은거라 생각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쏴아….
샤워기로 물을 계속 맞으니 멍한 정신이 확 깬다. 괜히 배가 나오진 않았나 점검해 보고, 다행히 나오지는 않아 만족한 표정으로 욕실을 나왔다.
“벌써 차려 놓은 거야?”
“응. 아빠가 좋아하는 고기.”
안 그래도 여행 갔다 와서 힘들 텐데, 유희가 정말 고생이 많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유희가 나를 안아주며 싱긋 웃었다.
아침도 먹었겠다. 오늘 하루도 힘내볼까.
“다녀와~”
“다녀올게.”
오늘 하루는 왠지 기분 좋을 날이 될 것 같다.
~~~
“부장님 이거 결재해 주실 수 있나요?”
“아, 응.”
더위가 끝나고, 슬슬 적당적당한 기온이 몸에 스며들면서 여름이 끝났다는 것을 암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무실에서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키우는 바람에 재킷을 계속 착용하고 있어야 했다.
언제나처럼 실수하나 없는 문서를 연다. 이제는 템플릿을 굳이 주지 않아도, 수현씨가 알아서 찾아 나에게 준다.
그러고 보니 수현씨 인턴 생활도 곧 끝난다. 이제 정직원으로서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잘했긴 했지만 수현씨를 곧바로 보내지 않은 것은 벌써부터 일을 잔뜩 맡기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이맘때 뼈빠지게 고생했으니, 내 밑으로는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으니까.
“부장님.”
“응?”
“……아니에요. 휴가 잘 보내셨어요?”
“응. 덕분에 몸이 아직 안 풀리네…. 수현씨는?”
“저도 뭐… 잘 지냈어요.”
“그래 보이네. 혈색도 좋아졌고.”
“그런…가요?”
확실히 휴가 전보다 인상이 밝아진 느낌이 든다. 뭔가 일이 잘 해결된 것일까, 딱 대형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의 느낌이다.
“뭐 좋은 일 있었어?”
“그건 아닌데… 그냥 좀 쉬니까 그런 거 같아요.”
“아하.”
이러나저러나 잘 지내주니 다행이다. 예전에 좀 그런 일이 있긴 있었지만, 그건 내가 제대로 거절하지 못해서 일어난 거였고, 또 잘 해결 됐으니 상관없다.
우우웅.
“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수현씨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좀이따 물어보지 뭐.
「부장님. 황시연이에요.」
“아, 네.”
사장의 딸이지만 입사만 낙하산으로 했을 뿐, 평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까지 승진한 능력있는 사람─황시연 대리가 웬일로 개인전화로 연락을 했다. 업무 내용이라면 메시지로 해도 될 텐데, 뭔가 중대한 사항이라도 있는 것 같다.
「부장님 근무하신지 몇 년 되셨죠?」
“음… 10년 좀 넘은 거 같은데요.”
「다행이다…」
“뭐가요?”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구요. 점심시간에 한 번 봬요!」
“아… 네.”
혹시 월급이라도 오르는 건가? 내심기대가 된다. 아마 경력을 물어 봤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솔직히 이정도 열심히 일했는데 오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정신 차려야지.’
그렇다고 해서 티내거나 들뜨면 안 된다. 황 대리가 개인적으로 연락한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 짐작일 뿐이라 벌써부터 김치국을 마시면 안 된다.
점심시간이 되자 지희씨가 크게 기지게를 켜며 내게 물었다.
“부장님. 점심 어떻게 하실래요?”
“아, 난 따로 먹을게.”
휴가가 끝나고, 다행히 지희씨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침에 오자마자 연신 사과를 하며 내 품에 있던 사직서를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말했다.
뭐, 지희씨는 사랑을 찾고, 나로서는 좋은 인재를 잃지 않았으니 잘됐지만.
“지희씨. 가자.”
“네. 잠, 어딜 만져요!”
“손이 미끄러졌어.”
“진짜….”
그래도 대놓고 염장질은 안해 줬으면 좋겠다….
~~~
1층으로 내려가자, 보브컷을 한 황 대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 푸른 보석이 박힌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 그라데이션 색의 썬글라스 렌즈 뒤로 웃는 눈이 보인다.
“부장님! 휴가 잘 보내셨어요?”
“아, 네. 대리님도 잘 지내셨어요.”
“네!”
목소리 톤도 밝은 게, 사람 상관없이 갑질하지 않는 점이 황 대리가 지금까지 평판이 좋은 이유이다.
“제가 예약해 둔곳 있으니 거기서 먹어요.”
“감사합니다.”
서로 예의를 갖추는 게 기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사장딸이라 그런지 말투가 저절로 공손하게 바뀌는 건 내가 계급 사회에 물들었다는 어쩔 수 없는 증거다.
‘부담스러워….’
그래도 금수저 어디 안간다고, 비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와서 대접해주 다니, 언젠가 유희와 와 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갑작스러운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여기 엄청 맛있어요!”
“그래 보이네요.”
대충 무슨 얘기를 할 건지는 알 것 같다. 아마도 임원에 관한 거겠지. 굳이 인사부 부장이 아니라 황 대리가 나에게 연락한 것은 사장딸이라서 그렇고.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드세요….”
에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는 재료가 신선해서 그런가 식감이 좋으면서도 새콤달콤한 맛이 입맛을 돋군다. 넘어가기는 잘 넘어갔지만 상대가 상대라 그런가 아직도 거북했다.
에피타이저를 다 먹고, 메인으로 양고기 스테이크가 나오니 황 대리가 헛기침을 하며 본론을 꺼냈다.
“부장님.”
“예.”
오물오물하는 모습이 왠지 철없는 아가씨 같아 조금은 긴장이 풀린다. 나이가 지희씨랑 비슷했던가.
그래도 괜히 긴장을 풀었다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을 받을까봐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부장님 입사 하신지 10년 넘었다고 하셨죠?”
“네… 거의 13년 다 되어가네요.”
“잘됐다~”
“뭐가 말인가요?”
“아버─대표님이 이번에 임원 한 분을 추천해 달라고 하셔서요~ 부장님이 딱 어울리겠다 싶어서.”
“네…?”
임원? 내가 아는 이사회의 그 임원?
“부장님은 경력도 오래되셨고, 딱히 사고 치신 것도 없으시고, 그리고 제 타──아니 실적이 좋으시니까요!”
“…….”
“부장님? 듣고 계세요?”
“아니 그게….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부장님을 임원으로 추천하겠다고요.”
“…….”
아침에 느꼈던 오늘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은 내 예감은, 완전히 틀려버렸다.
* * *